이 땅 하동은 지리산과 백운산이 우뚝 솟은 사이로 섬진강이 흘러 이룩된 충적 평야지로 명당의 정기를 받아 수 많은 학자, 충신, 효자, 열녀는 물론 정의롭게 사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것은 민족사의 뿌리이기도 하며 이땅의 역사를 빛낸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이며 내 고장을 빛낸 성좌이기도 하다. 그들은 몸을 바쳐 조국을 누란의 위기에게 구출했으며 인생의 참 뜻을 밝혀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전제하고 용기를 심어준 등불이기도 한 것이다.
역사를 이끈 이들의 행적은 한민족 역사의 찬란한 길잡이요 영원이 남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몽고의 거센 말발굽 아래 우리의 강토가 유린 당할 때 임진, 정유의 미증유의 국난에서, 나라를 빼앗긴 경술 국치 속에서 긍지를 심고 민족정기를 밝힌 뜻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학문에 전념하던 선비는 분연히 칼을 잡고 일어섰고, 순박과 정직속에 살던 지아비와 아낙, 그리고 지게를 지던 그 아들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킴으로써 반만년 역사를 이어 왔던 것이다. 또한 유학의 맥이 이 땅에서 개화되고 불교가 들어와 이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등 이를 받아 들여 더 한층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전통속에 흡수시켰으니 우리 고장은 고유한 전통 문화와 외래문화를 조화시켜 새로운 향토문화를 창조했으며 그 모두가 민족 문화의 기틀이 된 것이다. 또한 우리 하동은 효(孝)가 그 어느 고장보다 뛰어 난 곳이다. 어버이를 뫼셔 받은 사랑과 받드는 사랑을 기질로 자기 몸의 살을 베어 부모의 병을 완쾌시킨 얘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추운 겨울에 잉어를 낚아 부모를 봉양한 많은 얘기들, 그것이 이어 충(忠)의 도(道)로 된 것이다. 열녀의 얘기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나라에 바친 남편, 그를 위해 한국 여인의 자랑인 절조를 지켜 만인의 귀감이 되게 한 것은 한 성실한 인간의 도리였음을 우리는 안다. 이처럼 숭고한 뜻이 또 어느 곳에 있단 말인가 그것은 곧 성실이요, 효요, 충이며 한국의 참 마음이며 하동의 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촌의 한 식구로서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밀려 오는 외래문화와 넘치는 새로운 지식속에 방황하고 있다. 스스로의 좌표를 잃어 가는 안타까움 속에서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세찬 이 회오리속에 우리는 다시 나를 되찾아야 하겠고 미래 지향적인 목표의 설정은 물론, 오랜 역사곡에 이룩된 민족문화의 계승 창달하여야 하며 슬기로운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 오늘을 갈고 내일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역사적 인물
의(의)로 애국하신 정지상(정지상)
정지상은 고려 공민왕(高麗恭愍王)때의 사람으로 하동 정씨(河東鄭氏)이다. 벼슬이 감찰지평(監察持平)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 호부시랑 어서중승(戶府侍郞御書中丞)에까지 이르렀다. 공민왕을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다녀온 일도 있었다. 정지상은 매사에 대범하였으며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시는 강직한 성품으로 나라 사랑의 참뜻을 실천하신 분이다.
원나라의 압제와 수모 속에 고려는 피폐와 신음의 도탄에 빠져 있었으며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같은 동족을 괴롭히는 기철(奇轍) 일당의 횡포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여동생이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끌려갔으니 그의 가슴엔 원나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이 가득차 있었다.
정지상이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전주에 있을 때 고려 공민왕 4년 원나라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 思不花)가 전주에 오게 되었다. 야사불화( 思不花)는 본시 고려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빙자하여 그의 형인 서신계는 육재가 되고 아우 음례는 상호군이 되어 권력을 휘둘렀으며 고려의 속사정을 원나라에 알려 고려 탄압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온 나라가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 思不花)를 두려워하였고 그가 가는 곳마다 방자와 횡포가 극심하였다. 이러한 어향사 야사불화가 전주(全州)에 오게 됨에 따라 전라 안렴사 정지상도 이를 맞이하기를 공근히 하였으나 야사불화는 매우 거만하였고 그의 접반사 홍원철이 정지상에게 극진한 대접과 뇌물을 요구하므로 이를 거절하자 홍원철이 야사불화를 격동시켜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天使二帝의 使臣)를 가벼이 여긴다」하여 야사불화가 지상을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다 전주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분개하였으나 원나라의 세력과 어향사 야사불화의 권력 때문에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옥에 갇혀 있던 정지상도 분하여 크게 부르짖어 읍리(邑史)들을 속여 말하기를 나라에서는 이미 기씨 일당을 주멸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으며 김경직을 원수(元帥)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사자를 잡을 수있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않는가」하니 읍리들이 이 뜻을 받아 정지상의 포박을 풀어 주었다. 지상은 뜻이 맞는 사람들을 이끌고 어향사 야사불화와 홍원철 일당을 잡아 가두고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아 서울(開城)로 달려갔다. 도중 공주(公州)에서 야사불화의 동생 음려를 잡아 철퇴로 죽이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깜짝 놀라 지상을 순군옥에 가두고 곧 행성원(行省院) 외랑 정휘(鄭暉)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와 읍리들을 체포하고 차로원을 보내어 야사불화의 금패를 돌려 주었다.
원나라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던 일당을 치고 조국의 치욕을 씻고자 한 정지상의 뜻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뜻 있는 중앙정부의 관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으며 조정의 밀직 경천흥(慶千興) 한석기 판사 신청음 등이 왕과 뜻을 모아 기철 일당을 곡연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 죽이고 근위 사위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원나라를 믿고 날뛰던 매국노들을 처단하고 이땅에 민족 정기와 자주의 깃발을 세웠으며 지상은 석방되어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궁을 지켰으니 그의 애국 충정은 우리들에게 긍지와 나라 사랑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10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처는 전라도 담양에서 왜구에게 살해되었고 나라가 남쪽은 왜구에게 시달리고 북쪽은 원에 시달림을 받던 불행한 시기였기에 그의 아들 휘(휘)는 경상도원수 박위가 대마도(對馬島)원정 길에 오를 때 자원 참여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인 100여명을 구출하는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는 곧 조국 사랑의 뿌리요 우리의 귀감으로 내일을 사는 바탕이라 할 수 있기에 그 행적과 뜻을 적어 우리 고장의 맥락을 찾고자 한다.
일대(一代)의 학자 정초(鄭招)
공은 하동에서 출생(?∼1434)하여 조선조 태종 5년(1405) 문과를 거쳐 정해년(丁亥年) 중시에 합격 세종 때 예조참의(禮曹參議) 예문관 대제학(藝文官大提學)을 지내신 대 정치가요 학자이시며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세종을 도와 찬란한 민족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시고 꽃피우게 한 한떨기의 꽃송이며 오직 학문으로 나라 사랑으로 길을 걸으신 외골 선비이시다. 어릴 때 총명이 뛰어나 어떤 책이던 한번 보면 다 외웠으므로 모두 탄복하였다 하며 일화로 스님이 읽는 불경을 한번 보시고 전부 외우겠다고 하니 스님이 만약 이 경을 그대가 모두 외우면 내가 진수성찬으로 그대를 대접 할 것이요 못 외우면 그대가 진수성찬으로 대접할 것을 약속하고 공이 눈을 감고 경을 외우고 한참 듣고 있던 스님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구나 육경을 눈에 지나치고는 강석에서 그 오묘한 뜻을 모두 설명하여 응답이 자재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공은 박학다기의 학예를 갖추신 선비로 그의 일생은 오직 학문으로 나라에 헌신하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세종 17년 전국의 풍토가 다르지 않아 심은 곡식의 수확이 지역에 따라 같지 않으므로 관찰사에게 명하여 노농(老農)에게 실제로 경험한 바를 골고루 알아 올리게 하여 공으로 하여금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저술케 하니 농업에 있어서 혁신적인 기틀이 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악률(樂律)의 정리, 역법(曆法)의 개정 간이대(簡儀台)의 제작에 적극 참여하고 무지한 백성의 교화를 위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공께서는 일편단심 그의 모든 것을 바쳐 진실하고 참되게 나라 사랑의 길을 살았으니 이 땅에 풍우를 같이 하는 후생에게 길이 사표가 될 것이다.
한글 창제의 원공 정인지(鄭麟趾)
조선조 초기(1396∼1478)의 문신으로 학자요, 정치가이시다. 자는 백수(伯 ) 호는 학역재(學易齋) 하동(河東)사람이다. 16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후 태종(太宗) 14년에 문과(文科)에 장원하였다. 태종의 지우를 받았고 다시 세종(世宗) 때에 고명으로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부제학 등 학문에 관한 벼슬을 지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 도 권제(權 ) 안지(安止)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진하였다. 그후 각조의 판서를 거쳐 단종(端宗)에 이르러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켰을 때에 수양대군의 참모로 활동하여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다시 공신이 되어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의 봉군을 받았다. 세조(世祖) 때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국가에 충성을 다하였으며 한때 세조의 숭불(崇佛)을 반대하다가 부여(扶餘)로 쫓겨 난 일도 있었다. 성종(成宗) 원년(1470년) 원상으로 서정을 총괄하기도 했으며 다시 순성명량경제좌익(純誠明亮經濟左翼) 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83세로 고종하시니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시다.
그는 천성이 호매하고 활달했으며 석학으로서 나라에 기여한 높은 뜻은 백성을 사랑하고 주체적이며 실용적인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용비어천가, 고려사(高麗史), 치평요량 대통력(大統歷)의 개정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정치적 변혁이요 문화적 도약의 시기에 그가 남긴 공적은 찬연한 것이다. 다만 세종 고명의 신(臣)이 세조의 정란에 참여한 문제에 대하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인가 한다.
명경수행(明經修行)의 석학 정여창(鄭汝昌)
조선조 성종(成宗) (1450∼1504) 때의 학자로 자는 백욱(伯 ) 호는 일두(一 ) 시호(諡號)는 문헌공(文獻公)이시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가난한 속에서도 학문에 전념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다시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5경(五經)을 밝히고 성리(性理)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여 명경 수행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성종 21년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되고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에 옮겨 동궁(東宮)을 보도했으나 질시되어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체임되자 향리 자제를 훈도하여 사사하는 수가 적지 않았다. 연산군(燕山君) 4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鐘城)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중종(中宗) 때에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종사하였다. 저서로<용학주소(庸學註疏)>가 있었으나 무오사화때 불타고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하고 있다.
임진란(壬辰亂)의 맹호 정기룡(鄭起龍)
조선조 선조(宣祖) (1562∼1622) 때의 무신으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河東郡 金南面 仲坪里)에서 좌찬성(左贊成) 호(浩)의 아들로 출생 하셨으며 초명은 무수(茂壽)였으나 선조 19년 무과에 급제하고 왕의 사명(賜名)으로 기룡(起龍)이라 개명하였다.
무과 급제 후 관례에 따라 북변 수자리를 3년간 마치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신립(申立)의 막하에 들었다가 선조 24년 전력부위(展力副尉)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가 되었다. 선조 25년 4월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날 때 전봉별장(前鋒別將)으로 우방어사(右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출전하여 거창(居昌)에서 왜병(倭兵)을 물리치고 금산(金山) 싸움에서 적진을 깨뜨리고 잡혀간 방어사 조경을 구출하였다. 전란중 노모의 생사를 알길 없어 애태우던 중 7월에 노모를 지리산(智異山)에서 뵙고 익일에 곤양(昆陽)으로 가니 군수 이강악(李光岳)의 요청으로 수성장(守城將)이 되고 유격별장으로 공을 세워 상주가판관(尙州假判官)이 되었으며 상주성에 웅거한 왜장 "모리데로모드"(毛利輝元)를 섬멸하니 상주의 경내가 이로부터 평안을 되찾았다. 12월에 당교(唐橋)의 적을 무찌르고 생민을 규휼하고 둔전을 개척하여 솔선 권농하였다. 선조 26년 중훈대부군자감부정(中訓大夫軍資監副正)이 되었으며 8월에 상주가목사(尙州假牧使)가 되었으며 10월에 영호토적(嶺湖土賊)이 작당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이를 토벌하고 11월에 목사겸 감사군(감사군) 대장이 되니 이는 공이 매양 백성을 규휼하였으므로 그 중 장정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죽기를 다한 백사람들을 당하기로 일컫게 된 것이다. 나라에서 공의 대첩의 공을 치하하여 선조 27년 8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겸 토포사(討捕使)를 삼았다.
선조 31년 6월에 왜적의 재침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적은 14만 대군으로 부산(釜山)에 상륙하자 체찰사 이원익(體察使李元翼)이 장재를 권율(權慄), 곽재우(郭再祐) 등에게 물으니 정기룡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므로 8월에 토왜대장(討倭大將)을 삼아 고령(高靈)에서 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았다. 계속하여 성주(星州) 고령(高靈) 합천(陜川) 초계(草溪) 의령(宜寧) 등 제읍을 수복하여 9월에 절충장군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1월에 경주성(慶州城)을 탈환하고 12월에는 왜의 맹장 가도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막하로 들어갔으나 도산(島山)이 함락하자 경리양호(經理楊鎬)가 먼저 도망치고 명군(明軍)이 무너지자 왜병이 공을 사중으로 포위 하였으나 이를 뚫고 금산(金山), 상주(尙州)의 적을 무찌르고 다시 명군과 함께 사근적(沙斤賊)을 협격하다가 명나라 부총병(副총兵) 이절(李 )이 전사하자 명나라 황제가 공에게 총병관(摠兵管)을 제수하니 대저 황제가 백장(百將)의 우두머리로 삼은 일은 고금을 통하여 처음 있는 일이다. 선조 31년 성주(星州) 본진으로 회군하여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의 적을 종횡으로 소탕하고 12월에 삼대추봉(三代追封)을 받고 용양위부호군(龍 衛副護軍)이 되었으며 선조 34년 1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 밀양도호부사(密陽都護府使)를 지내고 선조 38년(1605) 4월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 제5위(一等第五位)에 기록되고 9월에는 오위도총부(五位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고 선조 40년 9월 의흥위상호군(義興衛上護軍)겸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9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겸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를 배하였고 광해군 10월 11월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다시 삼대를 추봉받았으며 광해군 13년 2월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특진되었으니 마침 광해군 14년 2월 28일 통영(統營) 본영에서 졸하니 향년 61세이시다. 유명을 쫓아 상주의 사벌에 장하였다.
선조가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기룡(起龍)이 아니면 영남(嶺南)이 없고 영남이 없으면 오늘의 종사(宗社)가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믿어 안심하였는데 공의 위대한 공적을 듣지 못하게 한 것이 150년 그간 다행히 송우암(宋尤庵) 이갈암(李葛庵) 양현의 찬양함을 얻어 영조(英祖) 계사(癸巳)에 비로소 충의(忠毅)의 시호(諡號)를 받고 상주에 충열사(忠列祠)를 세워 제사지냈으나 뒤에 혜철(毁撤) 당하였다가 광복후 정부가 다시 고지(故地)에 충의사(忠毅祠)를 세웠으며 한편 출생지 하동에서는 남방사람들이 1932년 임신(壬申)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웠다.
직간(直諫)하는 신하(臣下) 조지서(趙之瑞)
조선조 연산군(1454∼1504) 때의 문관으로 자는 백부(伯符)요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하동군 옥종면(河東郡玉宗面)에서 감찰 찬(瓚)의 아들로 단종(端宗) 2년 갑술(甲戌)에 출생하였다. 자용이 옥설같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일컬었다. 성종(成宗) 5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2등으로 합격하고 후에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하였다.
어유소(魚有沼)가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 26세로서 막좌(幕佐)로 뽑혔으며 일찍 연산군(燕山君)이 세자일 때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으로 연산군이 태만을직간하고 권학에 힘쓰다가 미움을 받았다. 연산군이 사위(嗣位) 하자 외직을 희망하여 창원(昌原)에 나아가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제와 같이 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독서를 즐기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몰려 들어 정성근(鄭誠謹)과 더불어 패만멸상(悖慢滅上)의 죄목으로 참형(慘刑)을 당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 )되어 도승지(都承旨)로 추증(追贈)하고 신당서원(新塘書院) 하였으며 아들 정( )에게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 정씨(鄭氏)는 포은(圃隱)의 증손 생원 윤관(允寬)의 딸로서 부군이 옥으로 갈 때에 신주를 잘 봉안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초야로 돌아다니며 나무열매를 주워모아 3년을 받들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에 목사 이우(李 )의 주청에 의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효를 표창하였다.
의기(義氣)의 선비 김중원(金重元)
하동읍(河東邑)에서 남으로 30리 길목 한려수도(閑麗水道)를 내려다 보는 고전면 신월리(古田面新月里) 갈록 언덕에는 고색이 창연한 공적비가 서있다. 이 비는 의기(義氣)의 선비 김중원공이 조선조 영조(英祖) 4년 모반의 역적 이인좌(李麟佐) 일당을 물리친 공적비이다. 김공은 용궁군(龍宮君) 존중(存中)의 후(後)요 숙좌옹(宿坐翁) 상침(尙琛)의 아들이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老論)이 영조(英祖)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자 앞서 노론 네 대신을 무고한바 있는 소론(小論派)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이 죽음을 당하자 그 여당(與黨)들은 불평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차 영조 3년 노론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 김영해(金寧海-金人鏡의 아들), 정희량(鄭希亮)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密豊君) 단(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李麟佐)가 대원수(大元帥)가 되고 정희량(鄭希亮)을 원수(元帥)로 삼아 남방에서 기병하고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 하려 하였다. 이에 영조(英祖)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이때 하동군 북천면(河東郡北川面)에서 도학(道學)을 공부하던 선비 김중원(金重元)은 이인좌일당의 불의를 보고 백의한사로 의병을 모집 반군토벌의 대열에 자진 참가하여 정희량과 이인좌의 동생 이능보를 사로 잡아 반군을 소탕하는데 앞장섰다. 영조는 이 백의의 선비 김중원에게 일등공신(一等功臣)을 가자(加資)하였다.
김중원은 다시 향리에 돌아와 한가로운 선비로서 살았으니 그의 의기와 선비 정신은 가히 후학의 사표가 될만 하다.
왕명으로 효자비 세운 정창시(鄭昌時)의 효행
효(孝)가 인륜(人倫)의 근본일진대 누구가 효를 생각하고 행하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까 마는 정창시(鄭昌時)는 조선 정조(朝鮮正祖)때 사람으로 그의 효행은 지극하여 왕에게 들리게 되었다.
정창시는 진양인(晉陽人)으로 판관(判官) 광윤(光胤)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어질고 진실하여 사람을 응대함이 항시 겸손하고 성실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의 도리를 다하였다.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야만 나라는 참된 인재를 알고 가정에서는 참된 효자를 안다는 것이다. 창시는 부모가 득병하여 위독(危篤)할 때 단지(斷指)하여 관혈(灌血)로써 두 번이나 병환을 회소(回甦)케 하였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감지(甘旨)를 구하고자 했으나 겨울이라 구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니 산꿩이 이를 구해 주었다 하니 한갓 미물도 가히 효심(孝心)에 감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묘(侍墓) 6년! 오랜 그의 효심에 천지신명도 감동하였는지 깊은 산골 메마른 땅에서 샘(泉)이 솟아났고, 밤이면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지켜 주었다 한다. 이러한 창시의 효행을 안 하동골 원님은 효자수미(孝子需米)를 보낸 바 있었다. 보리와 산채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창시에게는 참으로 가슴 뿌듯한 것이였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날밤 도적이 나타나 고을 원님이 보내주신 쌀과 옷가지 등을 탈취해 갔다. 아무도 없는 외딴 산골에서 생명만이라도 구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한량이 없었다.
아! 이게 웬일인가! 쌀과 옷가지를 탈취해간 도적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가 「이제는 꼼짝없이 죽고 마는구나」 생각했을 때 도적은 쌀과 옷가지를 내려 놓으며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요」하고 사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쌀과 옷가지를 가지고 산을 넘다 호랑이를 만났는데 길을 가로막았어요, 이리 저리 피하여도 소용없고 자꾸만 으르렁 거려 겁이나서 오던 길로 되돌아서니 호랑이는 아무소리 없이 뒤따라 왔어요, 창시는 눈을 들어 도적의 뒤쪽을 보았다. 아직도 호랑이가 버티어 서 있지 않는가 창시는 모든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시묘를 도와 준 호랑이인 것을 - 도적이 떠나자 호랑이는 길을 비켜섰다. 이후로 호랑이는 밤마다 시묘소에 찾아와 그를 지켜 주었다. 시묘가 끝나는 날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뒤돌아 보며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라에서는 왕명으로 하동군 양보면 구문고개(河東郡良甫面龜舞谷) 창시 부친의 묘소 밑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웠다.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신 최기필(崔琦弼)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조선 명종(明宗) 17년(1562)에 나서 선조(宣祖) 26년(1593)에 진주성에서 싸우시다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신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의사(義士)이시며 호(號)는 모산(茅山) 자(字)는 규중(圭中)이시다.
그는 어려서부터 숙성하며 품행이 단정하시고 7,8세에 경사(經史)를 다 보시고 학문이 일취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특천으로 참봉(參奉)을 내리시고 이어 사옹봉사(司雍奉事)를 거쳐 진주목판관(晉州牧判官)을 지내셨다. 벼슬을 즐기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백운동(白雲洞)에 초당을 짓고 시서(詩書)를 강마하셨다. 선조 26년(1593)에 진주성이 왜적(倭敵)에게 겹겹이 포위되자 그는 개연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진주성은 천보(天寶)의 수양(수陽)=당나라의 장군이 수양성에서 안록산을 막아 이긴 고사인데 만일 진주성을 잃으면 삼남(三南)을 지탱하지 못할 것인즉 내가 이 나라 백성으로 은혜를 입고 받았은 즉 어찌 산속에 가만히 앉아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겠는가」하고 가솔을 비롯하여 60여명의 장정을 불러모아 칼날과 화살이 비오듯하는 적의 포위를 뚫고 싸우니 비록 적의 형세가 강했으나 우리나라에 충의의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찬탄하였다. 혈전은 거듭 되었으나 아군의 군량은 떨어지고 비마저 수일간 내려 성의 서북쪽 삼판(三版)이 한꺼번에 무너지니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울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살아서 나라에 은공을 보답하지 못하고 죽어서 장차 어디를 떠도는 고혼이 되겠는가」하고 드디어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셨다.
나라에서는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통훈대부 병조참의(通訓大夫兵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의관(衣冠)으로서 산대동(山袋洞)에 안장하고 창열사(彰烈祠)에 모시게 하였다. 또한 사림(士林)들이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河東郡北川面)에 서원을 창건하여 춘추로 봉행한다.
호왕(호왕) 문초에 불굴하신 최탁(최탁)
본관은 전주로 자는 극수(克修) 호는 죽당(竹塘)이시며 조선 선조(宣祖) 31년(1598)에 출생하셨다.
천자(天資)가 전수하고 문행(文行)이 숙성하였으나 인조(仁祖) 8년 경오(庚午)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겸 비국랑(備局郞) 등의 벼슬을 거쳐 인조 14년 병자(丙子)년에 광양현감(光陽懸監)으로 계셨는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공경함을 받았다. 그해 겨울 호란(胡亂)이 일어났을 때 상소하여 화의(和議)를 배척하였다. 인조 21년(1643) 계미(癸未)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심양(審陽)에 계실 때 익찬(翊贊)이란 직(職)으로 세자와 대군을 모시고 계셨는데 그 모심이 지극하였다. 굴욕과 실의의 세자와 대군에게 공은 진언하기를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오왕부차(吳王夫差)를 죽이고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던 것은 구천의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노력에 있었지만은 어찌 범려와 같은 지략이 뛰어난 충신의 보좌가 없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하니 세자와 대군께서 곧 알아들으시고 「인재는 의대에 빌려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닐지니 우리 수천리 동토(東土-朝鮮)어찌 한 사람의 범려가 없을 수 있겠소」 하시기를 공은 곧 화사(畵師) 맹영광(孟永光)으로 하여금 회계산도(會稽山圖)를 그려 바치게 하였다. 훗날 정조(正祖)께서는 이것을 글제로 하여 걸고 선비들을 모아 과거(科擧)를 보인바 있다고 한다. 또한 나라의 기밀(機密)한 일을 가지고 연(燕)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호왕(胡王)의 문초에 당당하여 조금도 굴함이 없었으며 돌아오시다가 병을 얻어 그곳 옥하관(玉河 )에서 졸(卒) 하셨다.
나라에서는 왕명으로 반장(返葬)케 하여 하동 호사촌(虎砂村)에 장사 지내고 좌승지를 내리시고 사림들이 인계서원(仁溪書院)을 창건하여 입향하셨다.
도학군자(道學君子) 겸재(兼齋) 하홍도(河弘度)
겸재선생의 휘는 홍도(弘度) 자는 중원(重遠)이며 진주(晉州)인으로 세종조(世宗朝)의 명현(名賢)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의 동생인 대사간(大司諫) 결(潔)의 후예이며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 원정공(元正公) 하집(河楫)의 원손(遠孫)으로 어려서부터 비범(非凡)하여 조남명(曺南冥) 경의(敬義)의 학문을 이어받아 평생을 은거하여 벼슬에 뜻이 없었으며 인조(仁祖) 효종(孝宗)조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학도를 가르쳐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모한재(慕寒齋)를 지어 제자를 수용하였다. 날마다 벗으로 더불어 시를 읊었으니 영귀대( 歸臺)가 지금도 전하여 있어 당일의 풍류(風流)를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명현인 허미수(許眉 ) 목(穆), 남약천(南藥泉), 구만(九萬) 등이 찾아와 도의(道義)의 사귐을 맺었으며 모한재, 영귀대의 현판과 묘갈명은 유명한 미수친필로 쓰여져 오늘까지 보물로 남아 있다. 어느날 진주목사(晋州牧使) 성이성(成以性)이 예방하여 목민(牧民)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진(秦)은 가혹하였기에 백성 또한 포악하였고 한(漢)은 너그러운 정치를 하였기에 백성 또한 너그러웠으니 어찌 백성에게 매여 있으리오 치자(治者)에게 매여 있다고 하였다. 사후(死後)에 남방 유림이 종천서원(宗川書院)을 창건하여 문효공(文孝公) 하태계(河台溪) 진( )과 함께 모셨으나, 고종(高宗) 때에 훼철 당하고, 뒤에 모한재에서 채례(菜禮)를 드리고 있다. 자손들이 지금도 모한재가 있는 옥종면 안계리(玉宗面 安溪里)에 살고 있다.
유학(儒學)의 대가(大家)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선생의 휘는 성가(性家) 자는 직교(直敎)며 청암면 회신(靑岩面檜信)에서 순조(純祖) 24년에 태어났다가 뒤에 옥종면 월횡(玉宗面月橫)에 옮겨 살았다. 생육신(生六臣) 조여(趙旅)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독서에 침식을 잃었다. 특히 아버지 광식(匡植)의 학성(學誠)이 대단하여, 지금까지 향로에서 일컫고 있다. 하루는 월고가 서당에서 점심 먹으러 집에 오니, 마침 담배(煙草)를 많이 건조하고 있었는데 소나기가 오므로 그것을 집안으로 운반하여 비가 안맞도록 조치하고 서당에 가서 오후 공부를 마치고 저녁에 돌아가니 아버님께서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공부하는 사람이 살림을 돌본다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하고 그 담배를 다 불에 태웠다고 한다. 이같은 아버님의 학성에 힘입어 드디어 학문은 일취월장(日就月將) 하였다. 나이 28세때에는 일국에서 이름 높았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하에 가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를 두루 터득하고 주리학(主理學)을 이어받아 남방에서 이름을 떨쳤다. 고종(高宗) 20년에 조정에서 그 학덕(學德)을 가상이 여겨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을 제수(除授) 하였으나 벼슬이 마음이 없어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도학에 진력하였다. 광무(光武) 6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배하고 광무 8년 81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그 덕을 추모하여 장성(장성)에 있는 노사서원(蘆沙書院)에 수배향(首配享) 하고 매년 향례(享禮)를 모시고 있다. 월고집 19권이 간행(刊行)되어 세상에서 많이 읽는 서적으로 손꼽힌다.
독학(獨學)의 선비 최숙민(崔淑民)
공의 호는 계남(溪南) 자는 원칙(元則)이며 전주 최씨이다. 임진왜란에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신 진주판관 기필(琦弼)의 7세손으로 순조(純祖) 25년(1825)에 나셨다. 용모가 비범하시고 재주가 뛰어나 상학(上學)에 독려를 받지 않았다 한다. 겨우 성동(成童)에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읽으시고 통달하였으나 과업(科業)을 마다하시고 성현의 경전에만 전념하시어 뜻이 오로지 고인지학(古人之學)에만 있어 군서를 모두 통독하셨다.
20세에 서울로 가서 학문을 더욱 익히고자 하였으나 사림(士林)의 품속과 행실을 살피건대 옛과 달라 크게 실망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산간벽지에 은거하여 독서와 서문에 뜻을 두었다. 독서한 여러 해만에 훌륭한 선생을 모시고 더욱학문을 닦고자 하던 바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 선생께서 국내에 명성이 높음을 듣고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도학(道學)의 실을 구하였다.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이 더욱 성취하여 고족(高足)이 되셨으며 김평묵(金平默) 유기일(柳基一) 등과 풍악, 태백을 주유하시고 조월고(趙月皐) 최면암(崔勉庵) 제현으로 더불어 도의의 교분을 지으시고 학문의 강마와 토론으로 학자의 사표가 되셨다. 향리의 유생(儒生)이 하동군 북천면에 자옥산정(紫玉山亭)을 세우고 공을 모시고 배우니 유풍이 크게 일어났다.
공의 병환이 심중하였음에도 오직 참으시고 가르침을 쉬지 않으셨다. 을사(乙巳)년에 69세로 고종하시니 유월장(踰月葬)으로 장례하였다. 뒷날 유생들이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河東郡 玉宗面 斗陽里)에 계남정(溪南亭)을 세웠다.
내 몸은 조국에 바친다 김용순(金容珣) 장군
지리산(智異山)의 줄기가 뻗어 섬진강(蟾津江)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도를 그린 명당(明堂)의 땅, 하동군 악양면(河東郡岳陽面), 옛부터 산수의 정기가 어린 곳이라 삼국정립(三國鼎立) 시대의 고성(古城)인 고소성지(姑蘇城址)가 있고 한국적 이상향(韓國的理想鄕) 이라는 청학동(靑鶴洞)의 전설이 깃들어 있고 중국의 소상팔경(簫湘八景)을 그대로 옮겨 놓은 유서 깊은 곳이다. 지령(地靈)이 이러하니 어찌 인물인들 아니날까.
김용순 장군은 가락(駕洛) 후예로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며 선대는 가난한 선비의 집안이었으나 아버지때는 영락하여 농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군은 가난과 실의를 딛고 깜빡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책과 씨름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키우고 미래의 꿈을 가꾸며 그의 뜻을 파란 하늘에 수놓기도 했다.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제3기생으로 입학했고 이 땅의 불침번으로 조국의 간성이 될 것을 굳게 다짐했다. 육군 보병 소위로 그의 파란 많은 군인 생활은 시작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 민족 비극의 사변에 멸공의 선봉이 되어 북괴침략을 물리치는 최전선에 섰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그의 불굴의 의지와 애국 충정은 어떠한 적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누진하여 군의 요직을 맡아 왔고 마침내 4.19 이후의 혼란을 좌시할 수 없었던 애국 군인들의 구국봉기인 5.16혁명에 주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부정과 부패를 뿌리 뽑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며 누란의 위기에 선 국가를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 것이다.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의 문공사회분과위원회(文公社會分科委員會)의 위원장 등 두루 요직을 맡아서 그의 정열과 지혜와 신념을 다하여 실천했으며 혁명이 의도한 구국이념을 이 땅에 심었던 것이다. 1963년 민정이양과 더불어 20년간의 군인생활을 청산하고 육군중장(陸軍中將)으로 예편 민정(民政)에 참여 제6대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에 공화당(共和黨)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했다. 그가 살아온 성실한 생활과 애국 충정의 노고에 대한 향토민의 보답이요 국민의 뜨거운 박수이기도 했다.
6대 국회(國會)에서는 운영위원장(運營委員長)의 요직을 맡아 원활한 국회운영에 탁월한 그의 솜씨와 능력을 십분 발휘했고 7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정운영에 주역을 맡은 일원으로 온갖 힘을 다했으며 5.16 민족상 이사장(5.16民族賞 理事長)등 많은 요직을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활동은 급기야 건강을 해쳤으며 1975년 10월 9일 그의 파란 많은 생애를 마쳤으니, 그의 애국애족의 행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아끼고 그를 그리는 우리들 향토인은 뜻을 모아 그를 추모하는 조그마한 유허비(遺虛碑)를 세워 그의 뜻을 되새겨 후일을 기약하고 그를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첫댓글 하동의 역사는 하동명문가 하동정씨의 역사입니다.훈련원(횡천면 남산리 원곡)을 준비하시고 향병을 단련 하시어 정령치(전북 남원소재)에서 후백제군을 섬멸 하신 도 자 정자 할아버님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지금도 횡천 남산리에 도정 산성이 존재합니다.
정인지의 자가 백수가 아니라 백저 입니다. 수정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