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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부터 구전(문자로 남겨져 있는것을 본 적이 없다..ㅡㅡ;)으로 전해져 오던 것들을
줏어 들으며 기억해 온 우리 마을의 토박이말들이다.
언제부터 불리워 졌으며 어떤 유래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정겨움이 뭉떵 뭉떵 묻어나는 우리 마을 토박이말임은 분명하다.
다만, 그 유래나 뜻을 정확히 몰라 내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그 표현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기 때문에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고,
다소 어감이 어색할 수도 있고 우리마을 향우들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나 표현하고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보는 향우님들이 있다면..
내용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을 해주시고
또 이 외에 향우님들이 알고 있는 추억이나 기억..
그리고 마을 유래나 역사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내용을 불문하고 망설이지 마시고
댓글을 달아 주시면 우리 마을의 역사를 지켜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아마 나보다 어린 후배들은 전혀 기억에도 없는 그런 지명들이 많을 것이다.
본 게시판의 정보 공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우리 마을의 잊혀져 가는 토박이말들..
우리가 찾아내고 우리가 지킵시다!!!!!!!!!!!!!!!!!!!!!!!!!!!!!!!!!!!!!!!!!!!!!!!!!!!!!!!!!
● 독산(돌산) - 마을 앞에 우뚝 솟아 있던(지금은 채석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 흙산(흘산屹山) 과 함께 MBC라디오'전설따라삼천
리'에 등장했던 우리 마을의 영산靈山.
농경국가였던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연 현상의 지배를 받아가며
농사를 지어야 했지요. 모 심을때가 되었는데도 비가 안오면
거북등 처럼 갈라져 가는 논바닥의 모습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의 찢어진 가슴의 형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쯤 되면 기우제를 지내게 되는데 동네 사물농악단을 앞세워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마을의 영산인 독산에 올랐었습니다.
밤이 늦도록 돼지머리에 칼 꽂아 놓고 풍물을 두들기며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빌다 보면 신통하게도 마른 하늘이 젖어 들며 한바탕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졌던 기억이 새롭네요.
이때 풍물농악단의 신명나는 장구잡이가 우리 아버지였었는데
아버지 가신지 30년 가까이..ㅜ.ㅜ
그 때처럼 신명나는 풍물놀이를 지금껏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그 때 당시의 아버지 나이가 된 저의 가슴에 큰 아쉬움이 남는건
단지 저만의 생각일른지요?
또 하나...
민속 명절인 추석때가 되면 년례 행사처럼 추석 다음날 꼭 이
독산에 올랐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봄 가을 소풍지로도 유명했던 이 독산에 추석
다음 날이나 소풍 때면 올라 그 때 그 시절 최고의 음료였던 삼각
형 '단물 봉지' 하나 사서 달짝찌근한 맛에 황홀해 했던 어렴풋한
추억..
이 독산은 온통 돌로 덮여 있는데 각각 기기묘묘한 형상의 조각
공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장군(장수)바위 처녀바위 할미바위 칼바위 연애바위 거북바위
동자(애기)바위 보지바위 얼굴바위......................
음침한 연애굴도 빼놓을 수 없는 독산의 명물였지요
이 아름다운 자연 공원이 지금은 석분 풀풀 날리는 채석장으로
바뀌어 있다는게 서글플 뿐입니다..ㅡㅡ;;
도마리 김희성님(익산시청 근무)께서 제공해 주신 사진입니다.
중앙에 멀리 보이는 산이 독산입니다.
● 흑산(흘산屹山) - 독산과 함께 마주하며 우리 동네를 포근히
감싸 안고 있는 병풍 같은 산.
옛날 아주 아주 오랜 옛날 호랭이 댐배피던 시절에 이 흑산은
원래 독산였드랜다.
마주보고 있는 현재의 독산은 흑산였고.. 헌데 독산과 흑산에
살던 독산장수와 흑산장수 형제가 싸움이 붙어 서로 독을 들어
던지고 하나는 흙을 들어 던지며 피 터지게 싸우는 바람에 그만..
서로 던진 독과 흙으로 인해 흑산은 지금의 독산으로.. 독산은
지금의 흙산으로 뒤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어렸을적 앞동산에서 올챙이배지나 홍어배지 망가이생 그려놓고
놀이하며 하루를 보내다가 노루 꼬리만큼 해가 남을 때 쯤 집에
들어가 혼날 것을 대비해서 허리에 약 2~3M 정도 되는 새끼줄
하나씩 동여메고 가느다란 앞시당 논둑길에 일단의 일자 행렬이
늘어선다.
바로 흑산에 청솔가지 나무하러 가는 악동들의 무리다.
도마리 김희성님(익산시청 근무)께서 제공해 주신 사진입니다.
갱이쪽에서 바라본 흑산..
갈라진 배속에서 허옇게 드러난 창자를 쏟아 놓고 죽어 가는 생명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ㅜ.ㅜ
● 갈미재 - 지금은 아스팔트로 된 새길이 나 있어 돌공장 차외에는
거의 다니지 않지만 초딩 중딩 고딩 10년을 꼬박 걸어서 넘어
다니던 고개다.
공장이 들어서며 일부 깎아내려 낮아지긴 했지만..
어렸을 그 당시는 이 고개가 왜 그리 높고 길게만 느껴졌는지..
용왕산 자락 쪽 고개길 넘어 올 때는 과동 삼거리옆 공동묘지가
있어서 그랬기도 했지만.. 아카시아 숲이 울창하여 밤길엔 으슬
으슬 등골이 시린 길이었었다.
● 여수굴 - 갈미재를 막 넘어 오면 오른쪽 편이 여수굴였다. 고운
황토밭이 많아서 여기서 나는 밤고구마 맛은 일품였다.
우리밭이 있었고 재삼이네밭, 동근네밭, 본근네밭, 미국 간
(故)구본오네밭, 윤기네밭도 있었던거 같고...
● 뽈판 - 여수굴 지날 때 길옆 동근네 밭 머리에 있던 우리 동네
공식 배구장.하교길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 여기서 새끼줄
네트 삼아 한판 붙곤 했었다.
지금은 물론 흔적 조차 없지만.................ㅡㅡ;;
● 황새밭 - 갈미재 넘어 오는 구길을 경계로 점빵 근처 오른쪽 지
점이 황새밭이다.내 친구 진선이가 황새밭 입구를 지키고 있고
복현이네 부모님집 연선형(3년선배)네집 형수네집 금예누나네집
조상구집.. 오랜전에 이사와 자리잡은 노상원씨댁 등이 소마을을
이루고 있다.
여긴 학선골이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석매리로 알고 있다.
● 윗뜸 아랫뜸 구석뜸 건너뜸 - 우리 마을을 동서남북 4개 구역
으로 나뉘어 부르던 이름
● 방뜸 - 지금의 충호네집 근처 외곽 지역. 옛날에 이곳에 동네
의원 역할을 하던 분(이름이 기억안남. 연만씨??)이 살고 있어서
배만 아프면 가서 주사 맞던 기억....
이 집 싸릿문옆엔 살구나무도 한그루 있었고 집뒤에는 크지 않은
대나무밭이 둘러쳐져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다...ㅡㅡ;;
● 잿빼기 - 구석뜸 서당빵 쪽을 이름
● 서당빵(방) - 우리 동네 최초의 교육기관(?).
아마 50대 이상 어른들은 이곳에서 천자문 안 외어본 사람 없을
것이다.
자옥이 할아버지(우리 큰할아버지이기도 함)가 훈장 어른이셨
다. 내가 초딩 들어 가기전에 한글보다 먼저 한문을 깨우치게
했던 곳.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 틈에 끼어 훈장이신 할아버지빽으로
천자문과 붓글씨를 연마했던 곳.
그 때 수강료가 겉보리 한되, 풍년초 담배 한보 루, 나락 몇되...
그랬던거...^^*
천자문을 다 떼면 책거리 한다고 시루 떡 해오고...^^
쉬는 시간 됐다고 붓글씨 쓰다 획을 다 마치지 않고 나갔다가
할아버지한테 매맞았던 기억.. 온통 방 사방면이 붓글씨 낙서로
까맣던 기억.. 천자문을 함께 낭송할 때는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장단에 맞춰 하늘천 따지.... 하던 기억..
겨울엔 서당 갔다가 점심먹으러 집에 와서 가마솥에 엄니가 쪄
놓으신 물고구마로 대신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 염방죽 - 마을 중심에서 말랭이 넘어 동네 자복이네 준식이네
재실이네들이 살고 있는 지역
● 새집대밭 - 준식이네가 논으로 개간한 염방죽에 잔대들이 수북
했던 대밭. 어렸을 적 우리 또래 또는 그 이상의 선배들의 탈선
장소이기도 했다.
숨어서 담배 피우고 몰래 데이트 하기 딱! 안성맞춤이던 곳.
● 말랭이 - 지금의 송남이네집 옆 언덕위.
얼마전까지 키큰 왕소나무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었지만 지금은
밭이 되어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여름이면 딱 좋은
그늘을 만들어 주어 그 아래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붙일고니'
'사발고니' '장기' '바둑'등을 즐기며 놀았던 놀이터로 풀이 자랄
틈이 없어 땅바닥이 맨질맨질 했었다.
꼽새방죽에 갈려면 1차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 꼽쌔방죽 - 우리 동네 해수욕장(?). 얕으막한 경사로 이루어져
꼬마들도 어렵사리 물놀이를 할수 있었던 곳.
황토색 물로 좀 흐린것이 흠였다. 이곳에서 개셤치며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놀다 나와 보면 어김없이 벗어 놓은 옷가지가 흔적
없이 없어졌다
새고정골에 있던 산수박 원두막을 지키고 있는 송남이네 아버지
가 훔쳐갔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달당달랑 방울(?) 흔들며 찾아가서 재득선배
(10년선배 송남이 부친)또래 형님들의 짖궂은 장난 다 받아 줘야
옷을 입을 수 있었다..ㅜ.ㅜ
암튼 이곳은 아마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추억이 어린곳이기도 할
것이다.
● 새고정꼴 - 지금의 선경이네 배밭이 있는 곳.
구덩이 파서 똥을 퍼다 부었다가 이듬해 봄에 산수박을 심었던
산수박밭이 있었다.
이 원두막은 어린 시절 재득 선배의 다소 허풍(?)이 섞인 월남
참전 무용담(진짜 총을 쏴 봤는지 베트콩을 잡았는지 어쨌는지
는 확인 안됨^^)에 해 가는 줄 몰랐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뜸북이집 꿩집 종달새집 찍찍새집들이 많아 이런 새집 털어 먹는
재미도 솔솔했었다.
이곳에는 모심을 때쯤이면 '삘기'와 개간할 때 뒤엎어진 흙더미
속에 박힌 '띠뿌리(억새풀 같이 생긴 풀의 뿌리. 하얀 국수가닥
같으며 마디가 있음. 씹으면 말로 표현키 어려운 달짝찌근한 물
이 나옴)' 도 유난히 많아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린시절의 먹
거리 자원이 풍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 우렁줄 - 마지기 가는 길초에 있던 논들을 가리키는 지명.
지게로만 농사 짓던 시절 이곳에서 나락 등짐하여 집에까지
져 나르다보면 등골이 휘었었는데...ㅡㅡ;;
우리 논도 있는 곳.. 감회가 새롭습니다..
20여년전..
제가 논 갈고 모 심고 나락 베던 그 논...
지금은 어머님이 직접 농사일을 하실 수 없어서 남에게 위탁농지
로 내 놓았죠..ㅡㅡ;;
이곳을 더 지나면 마지기 동네.. 그 왼쪽으로 우렁줄 맞은편쪽
나즈막한 언덕이 매봉산.. 작년(2006년) 이 동네에 있는 양계장
이 조류인플루엔자(AI) 진원지가 되어 조용한 시골마을이 전세
계적으로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났던 곳..
다시 왼쪽으로 상지원 나환자촌.. 어렸을 적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죽기전에 위문으로 다녀 가기도 했던 곳.
그 때 당시 미국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그려지고 악수하는
두손이 굳게 잡은 그림이 그려진 미국 원조 밀가루포대 등이
트럭에 실려 이상지원에 들어 가는걸 본 어렴풋한 기억..
● 앞방죽 - 방뜸에서 보면 흑산 아래쪽으로 줄풀이 무성한 방죽
하나 있었다.
여기 양수기로 물 품어내면 어른 허벅지 만한 가물치, 팔뚝만한
장어, 메기, 참게, 붕어는 기본이고 빠가사리 등등....
지금 그런 자연산 물괴기.. 맛 보기 힘들어...ㅡㅡ;;
● 일수 - 앞방죽과 연결된 물문으로 기억함. 지완이 부친 성함과
같아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곳, 일수 품어 괴기 잡으러 가자!!!
하고...^^
● 의시림재 - 일수 근처 얕으막한 고개를 이른것으로 기억함.
● 옻다리 - 타 동네지만 귀에 퍽 익은 지명이다.
여름 장마철이면 물이 넘쳐나 다 자란 벼가 물에 잠기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 외꼴 - 외꼴방죽이 있던 곳. 우리 동네서 독산쪽으로 들판 하나
지나면서 야산 기슭에 있는 방죽을 외꼴방죽이라 했다.
풀이 많고 뱀이 진짜 많았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 말에 의하면 동네 선배로 기억되는 누군가가 이곳에서 썰
매를 타다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곳이다.
당시 그 선배는 '여자는 절개 남자는 보짱'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보짱좋게 살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다 익사 했다는...ㅡㅡ;;
● 바르메 - 지금의 류재준 선배 포도밭을 가운대길로 가로 지나
내려가면 있는 곳.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난생 처음 본정이랑 재갑이랑 셋이서
충호 아버님 부탁으로 우께(하청 형식으로 일정한 돈을 받고 일
을 도맡아 한다는 뜻인거 같음)로 비에 모레가 쓸려 논을 덮어
버린 충호네논 '땅띠기' 일로 돈 벌었던 곳이다.
대병으로 막걸리 사다가 처음 일하며 술도 마셔보고..^^
잔이 없어서 검정 고무신 뒤집어서 잔으로 썼던 웃지 못할
기억도..^^
● 배가들산 - 지금 생각해 보니 배씨들 종산인 듯한 이름이다.
그때는 아무 의미없이 '배가덜산'이라 부르며 누비던 야산...
이곳에 잔다귀가 유별나게 많아 여름 지나면서 땀 삘삘 흘리면서
잔다귀 캐 먹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의 교회를 지나 마지기쪽으로 가는 논길 지나면서 오른족으
로 보이는 언덕위 산(지금은 논으로 개간)이 배가들산이다.
● 중실배기 - 황새밭 넘어 용왕골 동네쪽. 감나무밭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는 복숭아 원두막이 있었다.
?柱만? 한되 갖고 가서 복숭아 몇개 사 먹었던 기억.. 그나마
그런 기회도 한번 있을까 말까 하여 복숭아가 먹고 싶어
친구들과 학교 갔다 오다 책포(이때는 가방도 없었어..ㅜ.ㅜ) 숨
겨 놓고 복숭아 서리 하다 들켜 용왕골방죽뚝으로 내달려 용왕
골 박씨네 재실 있던 산으로 숨어 후환을 피하곤 했던 기억..
이 때 친구 진선이의 때때기(진선이 별명)나르듯 달리는 솜씨가
일품여서 서리한 복숭아 보따리를 들고 뛰는건 진선이 몫이었던
것 같다.
● 인근 마을 이름
<친근한 토박이 마을 이름들인데 ( )안 이름은 아마 일본놈들이 한자식으로
억지로 붙여 만든 이름이리라...ㅡㅡ;;>
도마리 - 우리 마을과 흑산을 경계를 하고 있는 마을
갱이 - 도마리 옆동네
멀메 - 우리 마을과 독산을 경계로 하고 있는 마을
중리 - 멀메 옆동네
덩령굴 - 중리 넘어 동네
과꼴(과동) - 우리 동네서 와리 가는중간쯤에 있는 마을
범방죽 - 과꼴 지나 말패기 가까이 가면 양쪽으로 틔여 있는 들녁.
어렸을 적 한겨울 등교길에 이곳 지나칠 때가 제일 추웠다.
옛날엔 길 양쪽 논에서 토탄을 참 많이도 캤던 곳.
말패기 - 범방죽 지나 와리 입구 쯤 된다. 지금은 없어진 방앗간이
있어 말패기라 했을까? 옛날엔 방앗간의 말구루마(일본말
죄송)로 각 동네를 돌며 도정할 나락가마니를 실어 날랐었
다. 비라도 올라치면 황톳길은 곧 수렁이 되어 말구루마가
쉽게 갈수 없어 말을 패야 겨우 겨우 구루마가 끌려 갔었다.
(해설이 맞나용? ㅋㅋㅋ~~~~~~)
왕골(용왕) - 요왕산(공동묘지가 많았던 산였는데 지금은 채석장
으로..) 밑으로 우리 마을에서 보면 황새밭지나 보이는 동네
두리기(두라) - 용왕골 지나 32번 국도 건너 동네
마지기(매교) - 다송리 쪽으로 가는에 있는 마을
방아다리(방교) - 마지기 길건너 동네
박전지 - 방아다리 건너편 동네
왠말(와야 외얏말) - 방아다리 뒷 동네
상지원 - 음성 나환자 집단 거주지
● 점빵(방) -
계속~~~~~~~~~~~~~~^^
( 동네 토박이말 기억하고 있는 향우님 꼬리글 부탁합니다.)
첫댓글 알지도 못하는 우리 고장의 역사를 한 눈에 알게 해준 오라바니의 정성에 탄복하고 있당께요. 한가지 방뜸에는 내 친구 향자네 아버지께서 의원역할을 했었는데.. 주사맞는 단골은 내가 단골이였거든..
맞아... 향자.. 기억 난다.. 친구였었구나.. 지금은 다 어디 가서들 사는지 원... 쩝...ㅡㅡ;;
향자 아버지는 아마도 생을 달리 하신걸로 아는데.. 아닌가? 글구 아저씨 존함이 00만씨 인가요? 생각이 날듯 말듯 그러네요. 나이들어 기억나지 않는 게 어디 한 두가지 여야지...
재삼선배님네 집뒤에 있던 소나무밭더라 뭐라했지롱? 왕 소나무뭐라했던거라생각나는데..........
우리때는 별 의미 없이 '소나무세개'말랭이 그랬는디...
재은아! 넌 뭐.. 어렸을 적 우리 동네 관련 잼난 야그 음냠? 기억 함 더듬어 봐라^^
나이를 먹어 감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ㅜ
허어~~! 너 내 나이 되면 치매걸리겠다.. 임마! 40 나이면 최전성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