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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그림 ‘바보산수’와
이지엽, 고두현의 시
강 경 호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을 떠올릴 땐 악성 베토벤이 생각난다. 청각장애로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세상에 없는 소리조차 들을 줄 알고 만들어낸 베토벤처럼 김기창은 내면적인 시각 언어로 이 세상에 어디서 본 것이 아닌 그의 독창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한시도 끊이지 않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사는 인간은 그 소리를 통해 세상을 읽고 소통하기 마련이다. 그 소리들은 대부분 관념화된 것들로 그것들로 인해 의미를 전달받고 읽어낸다. 그러나 김기창은 보통학교 입학 무렵까지 단성사에서 손님을 부르기 위해 호객하던 날라리 소리, 북소리, 돈화문을 지키던 수비병들이 새벽 교대 때마다 불던 나팔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이후 세상의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일곱 살 무렵 장티푸스로 고열에 의한 청각장애를 얻은 이후 그는 그의 말대로 ‘침묵의 세계로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가 그의 예술을 통해 들려주는 이미지의 하모니는 이 세상 처음 보는 아름다운 색과 형태의 소리였다. 육신의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 대신 깊고 깊은 영혼의 소리였던 것이다. 내면에 새로 생긴 귀로 그는 가장 순박하고 천진난만한 색채와 형태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김기창 화백
운보 김기창은 1914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며 처음으로 붓과 먹과 벼루와 인연을 맺는다. 그러나 보통학교에 입학한 그해 청각을 잃어 수업시간에 우두커니 앉아 선생님의 얼굴만 열심히 바라보는 꼴이 되었다. 공책에 낙서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생겨난 버릇이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치과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퇴근하여 글과 셈을 가르쳤다. 독서에 취미를 가지면서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해 1928년 《어린이》 잡지에 투고해 「매암이와 쓰르람이의 노래」가 당선되어 실리기도 했다. 아들의 글솜씨와 그림솜씨를 알아본 그의 어머니의 혜안에 의해 김기창은 16세 되던 해 당시 서화계의 중진인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업의 길에 들어선다.
1930년에 조선 미전에 당선되어 그의 실력을 인정받지만 그의 그림은 인물중심의 채색화로 사실적 화풍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일본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과 일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와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1945년 해방과 함께 호를 바꾼다. 운포(雲圃)의 포(圃)에서 사각형 둘레는 벗긴 것이다. 즉 운보(雲甫)가 된 것이다.
새벽종소리 -산 그리고 물 시리즈, 1975년
흔히 많은 사람들이 김기창을 가리켜 ‘바보산수’의 화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예술적 변화를 시도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변신해 왔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지칠줄 모르는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상에서 추상으로, 때로는 추상과 구상을 함께, 그리고 수묵담채와 반추상 경향으로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청록산수, 마지막엔 점과 선에 대한 탐구를 실험했던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의 그림과 삶을 시인들의 눈을 통해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이다. 만년에 보여준 ‘바보산수’는 시인들에게 새롭고 의미있게 읽혀지고 있어 흥미롭다.
많은 시인들이 화가의 삶보다 작품에 주목하여 시를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청각장애와 농아라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한국화의 새로운 장을 펼친 김기창의 삶에 시인들이 관심을 많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김기창이 1999년 작고한 이래 몇몇 시인들에 의해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 시로 표현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이지엽과 고두현 시인의 작품이다.
이지엽은 「나무」라는 작품을 통해 김기창이라는 화가와 바보산수를 형상화시켰고, 고두현은 「바보산수」 연작시에서 부제 ‘운보와의 대화 1’를 붙인 작품을 통해 김기창과의 대화를 시로 표현하였다. 두 시인의 작품 모두 김기창의 특정 작품에 대한 감상이거나 변용시킨 시가 아니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
그림도 진짜 그림은 말하는 거
아니 칡덩굴 엉킨 걸레 같은 삶이라도
농주 같은 웃음 한 사발로 넘길 수 있는 거
웃다가 웃다가, 웃는 눈가 찔끔 눈물 나는 거
할 말 다 쌓아 붓끝으로 풀어내며
수묵 짙은 한국 산하 울리고 가는 저 사람
두벅부벅 황소 걸음으로만
우먹우먹 황소 눈빛으로만
말하는 사람
웅장한 산맥과 폭포들의 소리
저 신의 소리 들을 수 없어도 그 소리 죄다 받아내어
한쪽은 새떼들 불러와 한나절 놀고
한쪽은 떼내 우향의 처마에 걸어두고
북녘 땅 동생을 향해 웃는 저 어린이
오늘, 바보가 무단히 그립다.
-이지엽, 「나무」 전문
달밤 -산 그리고 물 시리즈, 1976년
화가 김기창을 얘기할 때, 그의 아내 우향(雨鄕) 박래현(朴來賢)을 빼놓을 수 없다. 박래현은 1920년 평남 진남포 출생으로 6세 때 호남평야의 대지주였던 아버지를 따라 전북 군산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보통학교만 졸업한 청각장애인이자 농아인 가난한 노총각과 대지주의 딸이면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처녀의 결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박래현이 1976년 56세로 타계할 때까지 30여년에 걸쳐 부부전시회를 12회나 개최할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끊임없는 예술적 투혼과 상상력을 주고 받았다. 김기창도 그랬지만 박래현도 한국 동양화의 현대화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런데 김기창은 아내가 1976년 1월 2일 타계하자 실의에 빠져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가 4개월만에 다시 붓을 들고 맹렬하게 작업을 시작한다. 불과 2개월 동안에 80점에 이르는 작품을 완성한다. 이때 그린 작품들을 김기창은 스스로 ‘바보산수’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 그는 ‘바보화조’ ‘청록산수’도 그렸는데 ‘바보산수’와 궤를 같이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이른바 바보산수는 당시까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민화에 대한 관심에서 그려진 작품들이었다. 민화를 새롭게 해석한 현대적 미술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1986년부터 1980년대까지 그린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그리고 청록산수를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바보’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민화가 조선시대 아마추어 화가들에 의해 치졸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귀머거리에 말도 못하는 자신을 비하한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치졸함 못지 않게 자신을 낮춘 겸양의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도 ‘가장 순진한 사람’ 또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자신을 천진난만한 세계에서 살고 싶은 염원이 한때 그가 그린 그림에 대해 ‘바보’라고 붙였을 것이다. 그것은 민화가 ‘순수한 동심이 넘치는 인간 본능의 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行旅 2 -산 그리고 물 시리즈, 1976년
이처럼 민화풍의 그림 바보산수의 기저에 대해 김기창이 “나는 작가의 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을 동심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그 예술은 결국 즉은 것”이며 동심으로 그린 그림이야말로 “진짜 그림”인 것이다. 이지엽은 예술도 그렇지만 인간의 삶 또한 “칡넝쿨 엉킨 걸레 같은 삶이라도/농주 같은 웃음 한 사발로 넘길 수 있는 거/웃다가 웃다가, 웃는 눈가 찔끔 눈물나는 거”라고 말한다. 어쩌면 일생을 바보처럼 눈물 찔끔나게 순수하고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김기창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농아였던 김기창은 소리를 듣지 못해 비록 그가 한글을 깨우치긴 했더라도 일곱 살 이후 평생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아득한 시절에 익혔던 말을 기억하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더듬더듬 말을 하곤 했다. 이처럼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보통사람들보다 말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할말 다 쌓아” 그는 “붓 끝으로 풀어”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하는 방식은 세상의 말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림으로 그렸듯이 자신만의 언어로 “웅장한 산맥과 폭포들의 소리”를 재현해내고 “신의 소리 들을 수 없어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진실하게 “죄다 받아” 낸다. 이지엽의 「나무」 3연의 1,2,3행은 김기창의 작품 속의 풍경들을 묘사한 부분으로 실제 김기창의 바보산수에서는 노루와 새떼, 학, 소나무, 거북이, 구름과 달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머지 4,5행 즉 “한쪽은 떼내 우향의 처마에 걸어두고/북녘 땅 동생을 향해 웃는 저 어린이”는 죽은 아내에 대한 김기창의 그리움과 김기창이 죽기 전에 이산가족 상봉으로 서울에서 만난 아우, 또는 수십 년 동안 이산가족으로 살아온 북녘에 있는 아우에 대한 그리움을 시인이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蓮萊山 -산 그리고 물 시리즈, 1976년
필자는 언젠가 김기창이 텔레비전에 나와 거의 소통이 안 되는 말로 자신의 삶과 예술을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에 대한 인상이 “두벅부벅 황소 걸음으로만/우먹우먹 황소 눈빛으로만/말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지엽의 시행처럼 큰 덩치에 약간은 다급하고 우직한 성미를 가진 듯한 모습, 그리고 순진하고 순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운보 김기창’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바보'같은 다시 말해 순박하고 순진한 김기창과 그의 예술에 바치는 헌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런 사람이 드물어 “바보가 무단히 그”리워지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 공감한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고두현의 「바보산수」는 김기창의 한스러운 삶과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온 그의 일생을 응축하고 있다.
20세기 말 둥근 유리지구, 흑백진공관 속으로
무성영화 돌리며 빨간 양말 한 켤레 걸어가네
당장, 구화(口話)를 배워야 해, 네, 미래는, 저
하늘… 만큼 크지만 , 네 장애는, 바늘… 구멍보담
작은 걸, 말을… 할 줄 … 알면, 내가, 이, 다음에
꼭… 취직, 시켜 줄게
충북농아복지회 유리창 밖으로 깃 하나 떨구고
호르르 날아가는 멧새, 저 귀먹고 눈 총총한!
-고두현, 「바보 산수-운보와의 대화 1」 전문
이 작품의 형식을 살펴보면 1연과 3연은 3인칭 전지적 시점에서 화가 김기창, 또는 농아들을 위해 헌신한 김기창을 바라보고 있다. 2연에서는 김기창이 어눌하지만 직접 말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난청 청년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말 끊김을 묘사한 2연은 농아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김기창의 인간됨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 시의 효과를 효율적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비오는 날, 1976년
1연은 김기창의 삶을 압축해 놓은 것이다. 청각장애인이었던 그를 “20세기 말 둥근 유리지구, 흑백 진공관 속”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특히 “무성영화 돌리며 빨간 양말 한 켤레 걸어”간다고 묘사했는데 김기창을 “빨간 양말 한 켤레”라고 표현한 점이 눈에 띤다. 1연은 색채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시적대상을 부각시킨 점이 두드러지는데 “흑백 진공관”과 “빨간 양말 한 켤레”가 그 부분이다. “흑백 진공관”은 흑백(黑白)이 상징하는 것처럼 색깔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여기에서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뜻에서의 청각이미지를 시각이미지로 치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창은 삶과 예술을 자신의 의지대로 꿋꿋하게 살아낸다. 화자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김기창을 눈에 띠는 “빨간”이라는 강렬한 색채 이미지로 표현하여 그의 존재를 드러냈다. 1연을 살펴보면 의미를 중첩시키거나 혼융하여 시어들이 서로 부딪치게 하여 귀먹어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간 김기창이라는 존재를 잘 형상화시켰다. 즉 “둥근 유리지구” “흑백 진공관” “무성영화”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또는 말을 잘 못하는 농아 김기창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어들은 의미가 겹치거나 같은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농아 또는 귀머거리 `김기창'이라는 이미지를 잘 연출하고 있다.
湖水 -산 그리고 물 시리즈, 1976년
직접 김기창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2연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청년에게 꿋꿋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실제로 김기창은 한 난청 학생과 편지교환을 했는데 편지에서 “오냐,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자. 박군보다 50년이나 먼저 난청의 비애를 느낀 내가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후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고 생각하며 〈한국농아복지회〉를 1980년대 초에 발족했다. 그리고 청주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와 아내의 호를 합해 〈운향 미술관〉을 발족시키고 미술관을 운영한다. 이때 농아복지사업을 실시한다. 김기창은 농아복지사업을 실시하며 난청 청년에게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만 배울 것이 아니라 정상인들과의 관계를 좁힐 수 있는 구화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자신이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는 청각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들과 함께 소통하며 잘 살기를 소망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2연에서 “네, 미래는 저, 하늘…만큼 크지만, 네 장애는 바늘 … 구멍보담 작은 걸.”에서 알 수 있듯이 수십 년 동안 장애인으로 살면서도 자신의 꿈을 키워온, 그래서 그 꿈을 실현시킨 김기창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감을 갖고 장애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큰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이 삶을 포기하고 취직하는데 주저하는 것에 대해 용기를 주고 있는 점에서 인간 김기창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
午睡, 1976년
그가 〈충북농아복지회〉에 심혈을 기울여 헌신하다가 마침내 1999년 이승을 떠나 그의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갔다. 3연에서 화자는 김기창을 “호르르 날아가는 멧새”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 귀먹고 눈 총총한!” 멧새였던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이지엽과 고두현은 청각장애와 농아라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우리나라 한국화를 현대화시켜 독자적 화풍의 세계를 연 불세출의 예술가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형상화시켰다.
이지엽은 김기창의 ‘바보산수’를 뭉뚱그려 그려내면서 그것들을 통해 김기창이라는 인간과 예술가를 그려냈다. ‘바보’라는 말이 내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리석고 바보스럽다는 의미보다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뜻한다. 형식의 규범과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스러움도 투사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세계는 김기창이라는 인간적 품성을 꼭 닮은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이지엽·고두현 두 시인이 김기창에게 주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蓮唐,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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