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 호>
20030420-광륜사정기법어
심즉시불心卽是佛
우리 현대인들은 아는 것은 퍽 많이 압니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라고 할 정도니까 각양각색의 정보가 여기나 저기나 홍수같이 지금 밀려 있어서 아는 것은 퍽 많이 알지만 그러한 것이 통일이 안 되면 여과가 되고 그런 것이 적당한 진리眞理로 해서 선택이 안 되면 우리의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가령 어떠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존재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하는,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인데 그냥 그 존재, 그것만 현상적인 그것만 집착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보통 습관성習慣性이 되고 업장業障이 돼 있습니다.
가령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도 나라는 존재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겠지, 이렇게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아는 것이 못 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우리는 나라는 존재는 이와같이 내 몸뚱이가 철석같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는 명심하셔야 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나라는 것이 있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다른 가르침과 불교佛敎의 가르침의 가장 근원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결정설決定說입니다. 사자후자獅子吼者 명결정설名決定說이라, 사자가 허튼 말을 그렇게 하지 않듯이 부처님 말씀은 마치 그 사자후같이 꼭 결정적인 그런 말씀만 하십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시고 또는 모든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모든 수행적修行的인 문제도 꼭 사실에 입각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은 참 진眞자 말씀 어語자, 진어眞語라. 또는 실다울 실實자 말씀 어語자, 실어實語라. 또는 여어라, 같을 여如자 말씀 어語자, 여어如語라. 부처님 말씀은 꼭 그 사실에 입각해서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잘 모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각할 때는 대상적對相的으로 있는 것은 꼭 내가 보듯이 이와같이 사실로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것은 이것이고 저것이고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풀끝의 이슬이요 번갯불같이 사실은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이나 그 일반사람이나 불교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그러한 관념觀念이나 또 대상적인 너라는 관념이나 우리 눈에 보이는 유위법有爲法이라, 유위법이란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것이 유위법입니다. 그러한 유위법은 이것은 꿈같고 허깨비같고 그림자같은 거란 말입니다. 사실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어째서 있지가 않은 것인가. 그 유위법이란 것은 그 인연因緣이 화합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일뿐입니다.
부처님가르침과 다른 가르침의 차이를 우리가 교리적으로 말하면 삼법인三法印이라, 잘 명심해두시기 바랍니다. 석 삼三자 법 법法자 도장 인印자, 삼법인이라. 따라서 삼법인이 온전히 갖추어지면 부처님 말씀인 것이고 삼법인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개시마설皆是魔說이라, 그 모두가 다 마구니 소리란 말입니다.
삼법인의 맨 허두에는 그 여러분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무상無常하다. 우리가 무상하다 하면 우선 어감으로 따지면 아주 허무하다 그런걸로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상하다는 그러한 우리 감성적인 의미보다도 그 우주宇宙의 실체實體를 우주의 실상實相을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없을 무無자 항상 상常자, 모두가 다 그때그때 고대고대 변화무쌍變化無雙하기 때문에 시간적時間的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항시 지금 변하고 있는 것이지 그대로 가만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것이 무상無常입니다.
우리는 우선 자기 몸도 무상하다고 생각이 안되고,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자식이나 그런 것도 무상하다고 생각이 안되지 않습니까. 우리 재산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모든 것이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모든 조건條件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徹頭徹尾 과학적科學的이고 또는 철학적哲學的이고 또는 종교적宗敎的입니다.
우리는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이, 부처님가르침은 그 우주의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 과학적으로 합리적이고 말입니다. 철학적으로 또 근원을 들어서 말씀하시고 또는 종교적으로 모든 그런 근원과 하나가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누가 반대할래야 반대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흔히 말하기를 아까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알기는 많이 아는데 현대인들이 철학이 없단 말입니다. 철학의 빈곤이라, 철학의 부재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철학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까도 대체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것의 그 형상적인 현상적 존재는 어렴풋이 알 듯 말 듯 하지만 그 근본은 모른단 말입니다. 불교전문술어로 말하면 상相은 많이 알지만 그 성품性品, 성性을 모른단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本質은 모릅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 그 비유를 이렇게 들어있어요. 가령 사람이 그 개란 짐승이 귀찮아서 흙덩어리나 또는 돌멩이를 던지면 총명한 놈같으면 던진 사람한테 물려고 들어야 할 것인데 사람한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흙덩어리나 돌멩이를 쫓아간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그런 격입니다. 무슨 사건이나 무엇이 생기면 근원을 캘라고 하지 않고서 우선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그것만 가지고 따집니다. 그러니까 해결될 턱이 없지요.
그 몇 가지 술어정도는 우리 불자님들이 잘 아실분은 잘 아시겠지만 모르실 분이 있을 터니까 말씀을 제가 드립니다마는 그 일원론一元論이라, 한 일一자 으뜸 원元자, 일원론이라, 일원론이란 것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로 포괄돼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일원론이라. 둘이나 셋이 아니라,
우주가 둘의 원리로 돼있다고 그러면 그때는 이원론二元論아닙니까. 두 이二자 으뜸 원元자, 이원론이고.
또는 둘이 아니라 그 모든 많은 원리가 합해서 우주의 모든 현상이 되었다면 그때는 다원론多元論이라. 많을 다多자 말입니다.
따라서 일원론 또는 이원론 다원론 그런 정도는 우리가 알아두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필요합니다. 책을 보나 그때그때 우리가 사색思索을 하나 참 필요한 술어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원론은 천지우주를 모두를 다 하나의 진리로 뭉뚱그려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겉만 보니까 이렇게 많게 보이고 다 다양하게 보이는 것이지, 근원적인 본래 본체本體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또는 진여眞如란 말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 근원자리는 진여인 동시에 바로 불성입니다.
생명生命존재기 때문에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그러는 것이고 우주의 도리기 때문에 우주란 것은 생명과 그런 도리나 그런 진리가 둘이 아닙니다. 우주의 도리기 때문에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근본불교根本佛敎나 소승적小乘的인 그런 가르침에서는 이런 진여란 말씀이 많이 안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적인 가르침은 꼭 진여가 항시 전제가 된단 말입니다.
가사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마명대사馬鳴大師가 이것은 저술한 대승의 신앙심을 일으키는 그런 이른바 경전인데, 대승기신론에는 심진여자心眞如者 대총상법문체야大總相法門體也라, 진여란 것은 이것은 대총상, 모든 법문을 통틀은 그야말로 하나의 완전무결完全無缺한 통합적統合的인 그런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여러 불자님께서는 그러니까 진여는 확실히는 다 감이 안잡히신다하더라도 모든 것의 진리가 다 진여뿐이다, 이것은 아주 명심하셔서 차근차근 나중에 거기에 따르는 신앙심信仰心을 더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일원론이라, 일원론은 이것은 우리 불교는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일원론아닙니까. 모든 것이 부처님이라는 진리로 다 거기에 포괄되니까 일원론입니다.
천지우주란 것은 창조주가 있어가지고 창조를 한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창조한 창조주와 창조를 당한 그런 자연과 이것이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우주를 누가 창조를 했다고 생각할 때는 또 창조한 하나님이 있어야 되고 또는 창조된 자연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질적으로 창조한 그런 하나님과 또는 창조당한 것과는 그때는 질적으로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유태교猶太敎나 기독교基督敎나 이슬람교나 그런 가르침들은 대체로 그런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있고 그런 이념입니다. 그네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저 위에가 있고 우리는 저 밑에 창조를 당한 하나의 자연물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차별적인 관념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돼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은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 가르침은 부처님가르침과 똑같은 그러한 훌륭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나 철학을 비판할 때에 그런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됩니다. 하나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그러한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조한 하나님과 창조를 당한 자연과 이렇게 나누어서 보지만 예수님의 참뜻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구약적인 그러한 가르침은 나누어서 보는 것이고 신약적인 가르침은 그렇게 안본단 말입니다.
성인聖人이란 것은 공자孔子님 말씀이나 노자老子님 말씀이나 석가釋迦님 말씀이나 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때그때 표현은 다르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주의 진리를 모르면 성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주의 진리와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그걸 다 알아야 이른바 성인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성인이라고 하면 벌써 전제적으로 시인을 해야 됩니다. 우주의 진리를 참으로 바르게 알으셨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목적도 역시 지금 성인이 되고자 해서 우리가 불법을 믿지 않습니까.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그 일원적인 우리가 확실한 철학을 가져야 됩니다.
유마거사維摩居士 그 말씀도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그 유마경維摩經의 어렵고도 난해한 그런 법문의 내용을 다 한말로 포괄하면 입불이법문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하나의 생명生命이라는, 그런 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 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의 대승가르침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더 줄여서 말하면 그때는 가장 줄여서 말하면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이른바 자성自性이라. 우리는 지금 자성을 안가진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자기 성품은 바로 자기 마음을 말합니다.
인류역사 이후에 무슨 종교나 무슨 철학이나 간에 이 마음이란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 마음에 대해서 다 골치도 아프고 또 깨닫기도 하고 못깨닫기도 하고 그런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마음을 푸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도 그렇고 또는 육조스님 말씀도 그렇고 또는 마조스님이나 그런 아주 그 직설적으로 불법을 말씀하신 그런 분도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세상에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 범부는 내 마음 내가 모릅니다. 지금 한번 자기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을 시원스럽게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참말로 안다고 생각할 때는 찌푸릴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비관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세상이 이와 같이 혼란스러울 필요도 없어요.
어째서 그런고 하면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일체가 유심조라. 그 화엄경 그 방대한 팔십화엄경八十華嚴經, 화엄경의 대요가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소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마음뿐이란 도리가 아니면 불교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했으니 결국은 마음알면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대단히 축복祝福된 그러한 이 세상의 가장 축복되고 행복스런 그러한 존속이 우리 불교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불교인들은 자기 스스로 그 일부러 우리가 거부해서 그렇지 거부만 안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의 실상인 마음을 훤히 우리가 알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은 어디서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지금 다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보통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양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양이 없으니까 우리가 어떻게 잡을 수가 없어요. 공간성空間性도 없고 시간성時間性도 없어놔서 말입니다. 그 공간성과 시간성과 인과율因果律을 초월超越한 순수純粹한 생명체生命體가 바로 마음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면 부처는 어디가 있습니까.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역사적으로 나오신 그런 부처님아닙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어느 때나 우주에 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우주생명宇宙生命으로 존재하는 그런 법신法身부처님,
그 법신부처님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그런 법신부처님도 역시 모양이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니까 진리로 존재하니까 위대한 분들이 성인들이 애쓰고 수행修行하고 난행고행難行苦行해서 깨닫고 하지 않습니까.
참다운 진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러한 성인聖人이 나올 수도 없고 또는 성인이 되고자 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현자賢者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예수가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진리는 영원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로서의 부처님 마음이 있습니다. 진리로서의 부처님이나 또는 진리로서의 하나님이나 똑같습니다.
같은 불교인도 그런 마음자리를 자기 종파라든가 또는 자기 주관적으로 좁혀서 얘기도 하고 잘못 얘기도 하겠지요. 같은 기독교인도 신교다르고 구교다르고. 그렇게 자기들 하나님 자리를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하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하나님, 참다운 부처님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존재하는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바로 우주 생명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크기가 얼마나 클 것인가. 우리가 짐작할 수 없지 않습니까.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은 사실 크기도 무량무변無量無邊합니다. 무량무변 한도 끝도 없이 넓습니다. 한계가 있으면 그때는 그야말로 마음이라고도 할 수가 없지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끝도 가도 없이 우주를 다 포함해 있는 이른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아까 우리가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독송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역시 내내야 마음풀이입니다. 마음풀이,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마음은 텅 빈 허공과 같아서 광대무변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 남 미워할 때 마음이라든가 욕심을 내는 마음은 그렇게 넓고 큰마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하찮은 것에 대해서 마음을 꽁꽁 묶어놓고 사람들은 삽니다. 이른바 우리 중생마음은 폐쇄가 돼있는 것입니다. 참마음은 폐쇄가 안된 그 본래적인 끝도 가도 없는 광대무변한 마음이 이른바 우리 참마음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이른바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부처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자리, 즉 바로 부처님 자리, 심즉시불이라. 그 마음이 광대무변하고 한도 끝도 없이 그런 그야말로 영원한 마음 이것이 우리 본마음인데 본마음을 찾는 것이 결국은 불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또 넓기만 넓고 또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해서 영원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 능력能力도 없고 공덕功德도 없으면 우리가 애쓰고 찾을라고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가운데는 또 한도 끝도 없는 공덕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 아인슈타인 같은 그런 대 천재라든가 또는 에디슨같은 그런 발명가라든가 그 위대한 분들 모두가 다 마음을 닦아서 마음에서 우러난 지혜로 해서 그와같이 인류사회에 공헌을 다 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공덕입니다.
사회가 지금 그야말로 핵무기로 해서 아주 위험한 사회 아닙니까. 그리고 또 기계나 기술의 발달 따라서 벼라별 물질을 다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마음이 만들었단 말입니다.
마음의 심부름을 우리가 하면서 우리 손이나 발이나 모두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겠지만 근원적인 원조는 내내야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마음은 그러기 때문에 그 한량없는 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이 조금 어디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해가지고 거기에 상응한 약을 먹어야되겠지. 이렇게 그냥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약을 자시지 말라고 말씀은 안드립니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이나 그런 것도 꼭 약을 먹어야만 낫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이란 것은 마음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정말로 마음의 공덕이 우리가 확실히 신앙심을 가지고 있고 또는 마음이 불심佛心에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는 웬만한 것은 다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몹쓸 병, 저는 영험록靈驗錄을 그때그때 주의해서 봅니다마는 영험록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 세속적으로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을 기도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자기들 신앙으로 해서 충분히 극복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란 말입니다.
이조李朝때 서원스님이란 그분은, 맨 처음에 자기 부모가 똑같이 이른바 나병환자였어요. 어린애까지도 결국은 나병에 걸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 불행한 샘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저기 갔다왔다 하다가 지리산智異山 벽송사碧松寺 가가지고서 그 우리 둘이는 무방하지만 꼬마 이놈마저도 이렇게 되다가는 중간에 죽어서 파묻고 말겠구나 생각돼서 그래서 벽송사에 들어가서 거기서 얻어먹고 하룻밤을 자면서 그 노스님한테 부탁을 했어요.
우리 내외간 둘이도 지금 건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꼬마 좀 어떻게 맡아서 스님께서 알아서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노스님도 그 정상이 하도 딱하거든요. 딱하고 또 꼬마를 보니까 비록 그 나병환자 아들은 아들이지만 또 이상한 또 그런 하나의 영기靈氣가 보인단 말입니다. 아, 그래서 그러면 그래라!
그래서 그 소년 그애한테 너 꼭 내 말 들어야 산다. 그러니까 부모님한테 시달리기도 하고 저도 또 아파서 고생하니까 스님말씀을 안 들을 수가 있습니까. 어린 것이 최선을 다해서 스님시키는대로 기도도 모시고 했단 말입니다.
그 딱 백일동안 기도모셨는데 나중에, 그 나병은 피부에 딱지가생기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차근차근 다 벗어지고 아주 완전한 깨끗한 그야말로 참 미소년이 되었다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영험록에는 한두군데가 있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 마음이란 것은 그와같이 우리 생리를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람들은 우선 처음부터 그냥 우리 마음에 져버려요. 모든 것은 꼭 거기에 상응된 그런 진단을 받아야 되고 약을 먹어야 되고,
의사님들이나 그런 분들은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아, 저 노닥다리가 비상식적인 말을 한다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영험록이 그 한두군데가 아니어요. 저같은 사람도 신통한 그런 경험은 없으나 좀 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작년에 좀 허리가 아파서 그래서 옆에서 침을 맞으라 하고 또 병원에 아는 원장이 이래저래 일부러 와서 링겔주사도 놔주고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을 또 마다할 수도 없고. 거기서 또 오라고 그래서 종합진단도 받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이가 팔십이 그렇게 되어가니까 골다공증으로 뼈가 삐긋하니 벌어지니까 그런다고 그래요. 그래서 당연히 그러면 그러겠다고. 그래서 입원치료도 하라고 그러고 또는 그때그때 여러 가지 또 치료하는 그런 도움을 주세요. 그러나 나중에는 다 사절을 했습니다. 사절을.
그러고 또 노장이 되어놔서 아는 분들이 또 거기에 따르는 일제약도 보냈고 미제약도 보내고 약을 보내요. 한 봉도 안 먹었습니다.
차근차근 다 나아버려요. 차근차근, 그 부처님생각하고 있으니까 차근차근 몸이 시원해서 그때는 이렇게 시원하면 몸에 있는 그런 여러 가지 부정스런 것이라든가 또는 불협화 에너지가 다 도망가겠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어져요. 다 도망가버려요. 모두가 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마는. 역시 우리 불자님도 몸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정신일도精神一到하면,
한계는 있겠지만, 도인같으면 한계가 없습니다. 도인경계에서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해놔서 한계가 없습니다. 더 오래 살라면 살 수도 있고 그러나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는 안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우리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을 믿으셔야 됩니다. 마음은 그와같이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데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우주를 감싸있고 또는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중단이 없단 말입니다. 영원적인 것이고 한도 끝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우주를 다 감싸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면 그 법신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에 언제나 존재하는 참 부처님, 참 하느님은 무엇인가. 참 부처님이나 참 하나님도 역시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지만 참말로 있으니까 우리가 법신부처님을 찾고 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찾고 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진리의 하나님, 진리의 부처님은 우리 마음과 같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하더라도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 우리 마음이나 또는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는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똑같습니다. 똑같기 때문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그러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라, 이런단 말입니다.
부처님말씀대로 따르면 신앙같이 제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있는대로 믿으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억지로나 가짜로 믿을라고 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것도 허망한 것인데,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각 원소가 잠시간 업業따라서 업의 뭉치가 즉 말하자면 이 육체란 말입니다.
보통은 내 육체 이 고깃덩어리가 나라고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잠시간 합해져서 순간순간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다 무상해서 항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이 너무나 허망해서 살 필요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허무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우리 번뇌煩惱만 초월하면 우리의 번뇌만 소멸을 시키면 그때는 영원히 행복스러운 해탈解脫의 경계가 항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열반경계 열반적정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여러 가지 그런 법의 기준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그러한 법문과 또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법문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이 세가지가 이른바 삼법인三法印 그래요. 삼법인이라.
우리 불자님들 삼법인을 잘 들으시고서 잘 납득이 안 되시면 그때그때 마음으로 반추反芻를 많이 하십시오.
우리 마음이란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한도 끝도 없는 그러한 마음인 동시에 또는 무량의 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총명스러운 총명한 기운도 갖추고 있고 불교말로 하면 이른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원히 안락스럽고 또 영원히 상주부동常住不動해서 그런 중단이 없고 말입니다. 또는 그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그래서 그 나라는 그런 개념속에는 모든 능력이 다 포함돼 있어요. 그 마음에 철저해지면 그때는 팔대자재아,
팔대자재아는 어떤 것인고 하면 우리 몸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라든가 그 뒤에도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도인들은 신통神通을 다 했어요. 모두가 다. 그러면 신통은 신화같은 얘기인데 그러면 왜 지금 사람들은 못하는가. 지금 사람들은 마음이 산란스러워서 깊은 삼매三昧에 못 들어갑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야 돼요.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서 우리 개인적인 그런 나라는 관념과 내 소유라는 관념이나 이런 것을 몽땅 다 없애버려야 그래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이른바 신통을 우리가 낸단 말입니다. 신통을 못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느 누구나가 우리 공부여하에 따라서는 꼭 신통을 낼 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같은 사람도 신통을 지금 못하는 것은 깊은 삼매에 아직 다 못들어갔단 말입니다. 어째서 못 들어갔는가. 그건 뻔하지요. 그 부처님말씀대로 제대로 온전히 공부를 다 못했단 말입니다.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 되고 삼매에 들라면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되고 또는 복잡한 인연因緣을 다 떨쳐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야 돼요. 그것이 이른바 삼매아닙니까. 명상에 잠기는 것이 삼매입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잠겨야 그래야 이른바 우리 업장業障을 녹인단 말입니다. 금생에 지은 업장, 또 무수생동안에 지어내려온 업장이 지금 버릇으로 해서 우리한테 딱 붙어있어놔서 순식간에는 그걸 녹이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또는 계행도 아주 청정하니 절대로 그 허투로 무엇을 먹지도 않고 말입니다.
우리 불자들한테 함부로 고기도 자시지 말고 술도 자시지 말고 그러한 것이 다 말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신상에 지대한 영향이 있습니다.
철저한 계행이 아니면 절대로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함부로 먹고 함부로 이성관계異姓關係하고 그러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지금 결혼했든 안했든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결혼한 분들은 또 동기로 알고서 같이 공부하면 되는 것이고 또 결혼안한 분들은 가급적이면 또 안하는 것이 좋고 말입니다.
그 어떻든 간에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번뇌가운데서 가장 하급적인 번뇌가 내내야 음식과 이성간의 욕심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극복을 해야 그래야 깊은 삼매에 들어가져요.
깊은 삼매에 들어서 우리 업장만 녹아지면 신통은 그때 나오지 말라고 해도 신통이 안나올 수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 못하는 것은 우리한테 허물이 있는 것이지 부처님법이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만능萬能의 법法이어요. 만능의 법. 우리 불자님들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법은 만능의 법입니다.
나중에 아실 분들은 꼭 그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그 아我라는 공덕, 나라는 공덕가운데 들어있는, 열반사덕涅槃四德가운데 있는 팔대자재아는 그 여덟 가지로, 우리 몸을 우리 마음이 자재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불교사전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조그마한 사전에는 안나올런지 몰라도 큰 사전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알아두면 더욱 더 또 신심이 나오고 정진들 하시겠지요.
아무튼 어떻든 간에 우리 중생들이 깊은 삼매, 깊은 명상에 못들어가는 것은 꼭 하여튼 우리 음식 함부로 먹지 말고. 부처님께서 육재일六齋日날 우리한테 금기하신 그 교훈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육재일은 하루 일종 아닙니까. 사실은 우리 출가인들은 항시 일종을 하라는 그런 가르침이고 재가불자는 그렇게 못하니까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하루에 한끼먹고 내외간도 한자리에 안눕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는 것이 우리 공부와 또는 우리 생리에도 꼭 필요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책인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보면 병자구입病者口入이라. 병은 대체로 우리 입으로 들어간단 말입니다.
잘못 먹는다거나 너무 많이 먹는다거나 그 무절제하게 먹는데서 우리 병이 생깁니다. 따라서 적게 먹고 깨끗이 먹고 그래 놓으면 결국은 우리가 병에서도 역시 웬만한 것은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의지심意志心은 차근차근 더 강해집니다. 우리가 음식한테 져버리고 또는 이성관념에 져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성불成佛할 기약이 없지요.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무량무변의 생명존재입니다.
또는 마음차원에서는 너 나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우주가 하나의 마음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라는 뜻이나 또는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라는 뜻이나 또는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眞如라는 뜻이나 또는 법성法性 또는 법계法界 또는 금강삼매金剛三昧 모두가 같은 뜻이어요. 모두가.
우리 자성自性, 또는 부처불자 성품성자 불성佛性, 또는 참진자 같을여자 진여眞如, 또는 실상實相 실다울 실實자 형상 상相자, 실상이나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그런 과거의 위대한 성인들은 우리한테 우리의 근본성품根本性品자리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갈 자리, 우리는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왔다가 진여불성으로 지금 돌아갑니다. 우리 고향故鄕은 부처가 되는 길이 우리 고향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하는 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다 그렇게 많이 있으나 가장 쉽고 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한테 공덕이 많은 것이 염불念佛공부여요.
다른 여러 가지 공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식도 있고 또는 같은 불교도 여러 가지 식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가운데서 우리 마음을 가장 다스리기 쉽고 가장 하기 쉬운 공부가 이른바 염불공부念佛工夫입니다.
본래 내가 부처거니, 부처를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염불아닙니까. 사람들은 염불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내가 부처인데 부처를 생각한 외에 딴 생각이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너나 나나 이것이나 저것이나 과거나 현재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덩어리인데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무슨 허튼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고 부처님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다 갖추고 있어놔서 우리가 한번 부처님을 외면, 우리가 평소에는 본래 부처이면서 부처를 잊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란 것이 무량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부처의 공덕이 조금 줄어지거나 또는 덜하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주에 충만한 그런 부처님 공덕은 항시 그 공덕도 역시 거기에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우리가 한번 외면 왼만치 다시 우리한테 또 역시 공덕이 돌아온단 말입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 우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일 마음을 모으기 쉬운 것이 부처님 이름을 외는 것입니다.
내 고향이고 내 생명의 본바탕이고 동시에 지금 내 마음의 본바탕이고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생명 바로 자체고. 그래서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그때그때 놓치지 마르시고 정말로 그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은 생명의 빛이고 또는 만덕의 원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처님의 공덕이 우리 몸 전체에 다 실린단 말입니다. 부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중국 그 명明나라 때 위대한 철인인 동시에 충신이고 또 군인이고 한, 이른바 양명학陽明學의 그 대도사인 왕양명王陽明이가 있어요. 왕양명이가 한 말 가운데서 부처란 것은 비롱환非聾患이라, 부처는 귀머거리가 아니란 그 말입니다.
부처는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생생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속으로 생각하고 이름으로 외나 항시 부처님은 우리를 다시 돌아보고 우리한테 무한히 또 타력적인 여러 가지 공덕을 주신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불자님은 방금 말씀드린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소식. 가장 쉽지만 가장 함축성이 많고 불교의 모든 진리를 거기에 다 포함해 있는 가르침으로 해서 꼭 그 인생을 어둡게 살지 마르시고 말입니다. 어둡게 살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장에 우리 몸이 그대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손해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 몸뚱이만 바꾸는 것이지 생명은 원래 죽음이 없습니다.
금생에 잘 살았으면 죽자마자 그때는 더 좋은 데에 가 태어납니다. 금생에 잘못 살았으면 그때는 자기 책임으로 해서 이보다 더 못할 수가 있겠지요.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모든 생명은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로 돌아갑니다. 부처님 자리는 바로 우리 생명의 일체존재의 근원자리입니다. 부처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또 나왔다가 이렇게 해서 영생무궁永生無窮하니, 우리 생명도 그렇고 우주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마음을 아주 잘 다스리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느끼는 모두는 다 허망하고 꿈같은 것이니까 꿈같고 허망한 것에 너무나 마음을 팔리지 말고. 이런 것은 존재하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것이나 또는 어떠한 지금 현재 받고 있는 불행不幸이나 그런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다 허망한 것이어요. 아, 꿈이 무슨 실체가 있습니까. 물거품이 무슨 실체가 있습니까.
그렇게 없듯이 우리가 느끼는 그런 몸이 아픈 것이나 자기 아들이 잘못된 것이나 모두가 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하고 나가는 것이나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어요.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지로는 결국은 다 허무한 공空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금강경金剛經에서 여래설명如來說名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 진시보살眞是菩薩이라. 통달무아법자, 그 모든, 나라는 것이 원래 없다는 나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그런 법에 통달한 사람이 참다운 부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참다운 그런 보살菩薩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하게 음식 함부로 자시지 말고 이성관계, 그 사람 수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으면 큰 탈입니다. 가급적이면 하여튼 줄여야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줄일 수는 없는 문제아닙니까.
그 성욕을 억제하고. 음식과 성욕과도 그것이 관계가 있습니다. 고기 많이 먹고 기름기 많이 먹어놓으면 그것이 또 성욕을 북돋아요.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소박하니 자시면 몸에 좋고 또는 그런 하급적인 욕망인 성욕도 덜 일어나고 그러겠지요.
그렇게 해서 금생에 좀 가볍게 행복스럽게 지내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30420-광륜사정기법회-청화대선사설법
*20030420-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200511-05-DVD작업-본정 김영동
*20070903-녹취워드작업-지혜림 이주미
*20070911-정리-본정 김영동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작업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