鎭南館
개관(槪觀)
여수 진남관은 1599년(선조 32)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3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 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진남관(鎭南館)
진남관의 詳細說明
전라좌수영성은 1485년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1491년 5년여에 걸쳐 성보가 완성 되었는데, 석성의 높이는 13척 길이가 3,634척에 달하였고, 각종 건물들이 총 80여 채에 517칸의 건물이 있었다. 그 밖에도 성보에는 6곳의 포루와 7곳의 우물 그리고 1개의 연못을 가진 거대한 수군이 본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성종 10년)에 설영되어 1895년(고종 32년) 폐영 되기까지 416년간 존속 되었다.
망해루(望海樓)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서서 통제문(統制門)을 지나면 널찍한 마당에 우뚝 선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이 바로 진남관(鎭南舘)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왜군에 의해 전라좌수영의 본영 진해루(鎭海樓)가 불타버렸는데,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뒤를 이은 이시언(李時言) 통제사가 1599년에 그 자리에 75칸의 거대한 객사(客舍)를 짓고, 당호(堂號)를 鎭南舘 이라 했다.
그 후 현종5년(1664)에 절도사 이도빈(李道彬)이 개축하였는데 그로부터 52년 뒤인 숙종42년(1716) 9월 절도사 이여옥(李汝玉)때 화재로 몽땅 소실된 것을 숙종44년(1718) 7월 절도사 이제면(李濟冕)이 다시 신축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 후에도 몇 차례 중수(重修)가 있었으나 그 때의 골격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324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 304호로 승격되었다.
진남관은 정 남향의 건물인데(계좌정향:癸坐丁向) 정면이 15칸이고 길이가 54.5m 이며, 측면은 5칸으로 길이가 14m이다. 면적은 230평이며. 건물 높이는 기단을 포함하여 14m이다. 여기에 쓰인 목재는 돌산이나 금오도 지구에서 베어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연석 위에 거대한 민흘림기둥을 세웠는데 큰 것은 둘레가272cm, 작은 것은 둘레가 200cm이다. 사람이 양팔로 껴안아도 30cm 내지 50cm가 남는 어마어마한 기둥이다.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아 정면 칸이 385cm로 제일 넓고, 양 끝 칸이 175cm로 제일 좁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전면과 측면에는 툇마루로 돌렸다. 마루에 오르는 계단도 하늘색을 띤 사암인데 정면에 셋, 측면에 둘이며, 뒷면에는 계단이 없다. 뒷면 초석을 살펴보면 옛날의 기둥자리가 지금 기둥위치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불탄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290년 전 흔적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았다는 것은 특이하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발이 기단에 닿지 않는데, 이는 계단을 통하지 않고는 마루에 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면 계단은 사람이 동시에 3명, 나머지 계단은 1명씩 오를 수 있는 넓이다.
기둥 위에는 익공계의 주심포식 공포(拱包)를 설치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공포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게 또한 특징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이 배치되었는데 그 문양이 놀랍다. 뱀이 몸을 뒤틀어 귀면상을 만들었는데 무서운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웃음기를 살짝 띤 개구쟁이 도깨비를 연상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뛰어난 걸작이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명품이다.
서남쪽 화반은 천정이 무거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폭소를 자아낸다. 뒤편 우물에서 바라본 화반은 물을 꿀꺽 삼키는 표정인데 아주 익살스럽다. 동편의 화반은 해가 솟음과 함께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 생동하는 듯하고, 서편의 화반은 무겁고 음침함을 느끼게 한다.
관광객 여러분은 이 귀면상을 촬영해서 방에 걸어 두고 심심할 때 또는 답답할 때 보시면 저절로 웃음이 날 것이다.
대들보 역시 진남관답게 큼직큼직 튼튼하다. 웅장한 감마저 든다. 대들보 위에는 종보가 있고 그 위에 연꽃 그림이 뚜렷한 판대공이 얹혔다. 그 위로 종도리가 길게 뻗었다. 동서 양편의 충량은 대들보 위로 목을 내민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힘차게 전진하는 모습으로 가구되고, 이 용은 합각의 중도리와 종보를 받쳤다. 북편 창방에는 검은색 바탕에 글씨를 쓴 편액이 붙었는데, 동쪽부터 戊戌六月日. 鎭南舘重修記. 鎭南舘重建上樑文, 鎭南舘重建識, 重修監董錄 등이다.
이제면 수사가 1716년에 소실된 진남관을 1718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1953년 진남관 보수 시에 발견된 진남관 중건지에는 「병신년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정유년(1717) 봄에 여기에 부임하여 불타버린 진남관을 둘러보고 중건할 것을 계획하여 가을에 기와를 굽고 겨울에 나무를 베어… 다음 해 5월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사는 6 - 8개월 만에 준공(1718년)된 것으로 추정된다. 놀랄만한 빠른 진척은 엄청난 군민이 동원됐다는 것을 뜻하며 그 만큼 절실한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포는 사방에 걸쳐 외 2출목이며 처마는 겹쳐마다. 단청이 퇴색된 게 아쉽다. 용마루는 직선인 것 같으면서도 곡선이고, 추녀 끝을 살짝 들어올린 처마의 곡선미는 우리나라 예술의 자랑거리다. 또한 자연석 위에 기둥을 세우는 그렝이 법은 서양인들이 신비해 마지않는 우리의 건축 공법이다. 굵은 뿌리를 박은 거대한 수목도 태풍에 여지없이 넘어지고 마는데, 우둘투둘한 돌 위에 뿌리도 없이 그대로 세운 기둥으로 지어진 우리의 건축은 태풍 ‘사라’나 ‘매미’가 쳐도 끄떡없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조 건물의 수명은 철근 넣은 콘크리트 건물보다 훨씬 길다. 아파트도 40년이 되면 재건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흥국사는 400년, 진남관은 300년 가까운 건물이지만 아직도 건재하지 않는가!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에 소재한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말기 작품이니까 700년이 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면, 진남관은 어떤 목적으로 건립되었을까?
객사라는 말 때문에 외부 관리를 맞이하는 숙소라고 말하기도 하나, 우선 온돌 시설이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손님이 온다면 몇 명이나 될 거라고 230평이나 되는 집이 필요할 것인가. 객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진남관처럼 기둥만 세워진 건물이다. 다대포 객사, 창녕객사, 통영의 세병관 등이다. 또 하나는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翼軒)으로 구성된 것인데 이런 건물이 말 그대로의 객사다. 안성 객사, 무장 객사, 경주의 동명관 등이다. 주관은 궐패를 모셔두고 대궐을 향해 배례하던 곳이고,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한다. 같은 지붕 아래 익헌을 설치했다면 관리가 임금님과 동격이 되는 것이다.
진남관은 군사적 목적이 주(主)였고, 다만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향궐망배(向闕望拜)의식을 그곳에서 행했던 것이다. 손님의 숙소는 처음부터 의도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기둥만 세워진 객사는 전부가 군사적 목적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규모가 작은 것은 향궐망배 의식을 위한 것이었고, 진남관이나 세병관처럼 규모가 큰 것은 군사적 목적이었다. 임금님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는 의식을 행할 때만 안치했고, 평상시에는 없었기 때문에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남관이 있는 여수는 전라좌수영이었고, 세병관이 있는 통영은 경상우수영이었다. 수군 본영으로 쓰였던 것이다. 특히나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우천 시나 혹서기에 실내 훈련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며 병사의 휴식처이기도 했다. 해전이 아닌 육전에서는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넓은 공간은 다목적용이 될 수 있다. 군사를 집결 출전시키고, 군기나 군량미를 쌓아 둘 수도 있고, 부상병을 치료하며, 병사의 숙박 장소로 이용될 수 있다.
망해루(望海樓), 통제문(統制門), 진남관(鎭南舘) ― 모두가 다 군사적 용어다. 세병관(洗兵舘) 역시 그렇다. 진남이란 남쪽 바다를 진무한다는 뜻이고, 진무(鎭撫)란 난리를 평정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세병이란 병기를 씻어서 거둔다는 뜻으로, 전쟁을 그침을 이르는 말이다. 둘 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
진남관 마루에 오를 때는 신을 벗었을까, 신었을까? 당연히 신었다. 맨발로 훈련하는 병사를 상상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동시에 신을 벗어 놓을 구조가 아니다. 댓돌에서 툇마루까지의 높이는 70cm~79cm이다. 옛날에 신을 신었다고 해서 지금도 신을 신고 오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보로서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서 양 끝에서 세 번째 정면 고주(高柱)가 뒤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
양편 천정에 있는 두 마리의 용을 기단에서 시원히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그 고주가 제자리에 있다면 용을 보는 시야를 방해한다.
왜 툇마루가 정면과 측면으로 빙 둘렀을까?
직사광선을 피하려는 한옥의 기본 구조이지만, 실내 교육을 할 때 툇마루에 초병을 세워 바깥을 경계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뒷면 평주와 고주 사이는 툇마루가 아니고, 왜 대청과 바로 이어져 있을까?
늘 그늘이 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고관들의 통로이거나 짐을 옮기는 장소였던 듯 하다. 대들보의 머리초는 8판 연화문이며, 종보는 주화문이다. 기둥은 반주화 머리초이다.
진남관 현판 글씨는 크고 힘차고 반듯반듯한 것이 진남관 기둥을 그대로 닮았다. 건물과 글씨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필이다. 현재의 진남관 현판은 여수 서예가 석우 김상현(石友 金象絃:1854 ~ 1916)이가 43세 때인 1896년(丙申)에 쓴 것이며, 다음 해(丁酉年) 여수 향교가 건립되면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 현판도 썼다. 그의 문하생인 추수 김중호(秋水 金仲祜)는 지금 진남관에 남아있는 「麗水 公立 普通學校」 정문 표지석의 글을 썼고, 김중호의 문하생 일정 정우종(一丁 鄭祐宗)은 망해루(望海樓) 현판을 썼다.
일제 때에 좌수영의 모든 관아가 사라지고 유독 진남관만 살아남은 것은 1911년부터 학교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수 공립 보통 학교로 시작하여 1961년 여수 상업 고등학교가 철수할 때까지 50년간은 학교였다.
진남관 중앙어간 앞뜰에는 석주화대(石柱火臺)가 서 있다. 이는 야간에 불을 밝혀 훈련할 수 있게 만든 170cm의 돌기둥이다. 「난중일기」(1592년 2월 3일) 에 화대석 4개를 실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호남 여수읍지」에는, 하나는 진남관 앞뜰에, 한 개는 동헌 뜰 위에, 두 개는 전선에서 배를 매어 화포를 설치하던 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없애버려 두 개만이 파손된 채로 진남관 앞뜰에 남아있다. 지금은 마모되어 얼핏 원형기둥처럼 보이나 원래는 8각 기둥이었다.
통제문 옆에는 높이 2m의 여수석인(麗水石人)이 서 있는데, 호남여수읍지에 석인칠구(石人七軀)라 하여「남문 밖, 선창의 전선을 매었던 곳에 있다. 이미 충무공의 고적에 올라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순신 장군께서 세우셨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인상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의인전술의 일환으로 세웠다고 설명되고 있으나 무인석(武人石)이 아닌 문인석(文人石)이며 양손을 얌전히 포개고 단정한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는 숙인 듯 하며 관모는 관세음보살을 연상케 하여 출전하는 우리 수군의 무사안녕을 비는 기도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진남관은 전체적으로 봐서 웅장하고 패기 넘치는 당당함이 있다. 남쪽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 장수의 진군소리가 들린다.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조상님들께 머리가 숙여진다.
몇마디 덧붙인다:
진남관 화반을 도안화하여 상품화한다면 좋은 반응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여수 캐릭터로도 안성맞춤이다.
『統制門』현판은 학남 정항섭(鶴南 鄭恒燮)의 글씨이며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용도 암수가 있다. 진남관 동서 양 측면 충량의 거대한 두 마리 용은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 쪽이 숫놈이고 후면 쪽이 암놈이다.
진남관 주소는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이며, 등기부에 의하면 대지는 4,939㎡(1500평)이다.(발행일 2004/02/12)
진남관 임란 유물 전시관 준공일은 2001년 4월 26일이다.
진남관 주차장 준공일은 2002년 10월 1일이다.
진남관 서편에 있었던 비석들을 2003년 4월에 담장 밖 서남쪽 아래로 옮겼는데, 근년에 산성비 등으로 급속히 마모되면서,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덮개 지붕을 씌웠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킨 산뜻한 양식으로 처마는 금속기와를 얹었고 지붕은 이보다 살짝 낮추어 도움(Dome)형을 이루는데 렉산으로 입혔다.
지붕을 한 지붕으로 하지 않고 셋으로 나눈 것은 비석의 높낮이를 고려한 것으로 뒤편 진남관 담보다는 낮게 하고자하는 의도이고, 한 지붕으로 하면 그만큼 철제 기둥이 두꺼워지므로 이를 피하고자하는 뜻이다.
진남관 석주화대를 비롯한 사암들은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덕산에서 채취한 것이다. 지금은 여수 공항 비행장이 돼 있다.
진남관 초석의 상당수는 갯가에서 올라 왔다. 지금도 굴 껍데기가 눈에 띈다. 400여 년 전의 굴 껍데기를 지금도 볼 수 있다니!
하늘색을 띤 사암(砂岩) 기단 위에 점토기와가 깔려있는데 이 기와는 1991년 보수 시 광주 미도산업에서 생산한 것이다.
진남관의 길이 측정(실측 함) 오차 2-3cm
(1) 마루 기준 : 가로 : 54.35m
세로 : 13.78m (약 226.95평)
(2) 기단 기준 : 가로 : 58.75m
세로 : 18.23m (약 324.55평)
(3) 처마 기준 : 가로 : 61.94m
세로 : 20.61m (약 386.84평)
글 쓴 날: 2003. 12. 2. 일부정정 : 2007. 9.1
진남관은 국보 304호(2001. 4. 17)로 지정된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전라도 좌수영의 본영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9대 성종 10년(1479년)에 설영
되었다. 그리고 고종32년(1895년)에 폐영 되기까지 416년간 존속되었다. 당시
에는 진해루(鎭海褸)라는 2층의 누각이었다. 그런데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
년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1597년 8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이 곳은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수군 그리고 이 고장 5관(순천, 광양, 보성, 낙안
흥양) 5포(방답진, 여도진. 사도진, 발포진, 녹동진)의 백성들이 합심하여 23전
23승이라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과로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를 구한
구국의 성지이다.
진남관은 진해루가 소실된 자리에 1599년(선조 32) 이시언 수사가 건립한
건물로서 남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진압하여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뜻으 담고 있다.
그후 1716년(숙종 42) 이여옥 수사 때 소실된 것을 이제면(李濟冕)수사가
1718년(숙종44)에 중창 하여 그 면모를 간직한채 290년을 견디어 왔다.
건물규모는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30평으로 현존하는 목조 건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 전경(鎭南館 前景)
진남관 앞에서 본 모습 - 장군도, 돌산대교, 바다, 건물들, 교회 등이
보입니다. 그리고 앞 광장을 정비했으면 합니다.
鎭南館의 龍
鎭南館에는 衝樑의 龍像을 비롯하여 네군데 모서
리 안쪽. 正面 중앙과 양끝에 각각 두 마리씩의 龍이
있답니다.
오시면 찾아보세요. 모두 ? 마리 ?
[東便 衝樑의 龍 - 암수를 구별해 보세요]
[西便 衝樑의 龍 - 암수를 구별해 보세요]
[東便 양 모서리 안쪽에 龍이 살아요. 찾아주세요.]
東 右 龍 東 左 龍
[西便 양 모서리 안쪽에도 龍이 살아요. 찾아주세요.]
西 右 龍 西 左 龍
[中央 鎭南館 현판 양쪽에도 龍이 지키고 있답니다.]
中央 右 龍 中央 左 龍
[正面 양 끝쪽 귀공포에도 龍이 보이네요. 찾아보세요.]
東 귀공포 龍 西 귀공포 龍
鎭南館內 懸板內容과 풀이 - 戊戌六月日
** 戊戌六月日 **
戊戌六月日(1718년 6월일)
수 상 국 이 제 면
水相國 李濟冕
우 후 권 수 봉
虞侯 權壽鳳
군 관 정 성
軍官 鄭晟
책 응 도 감 이 명 함 이 운 면 김 시 좌
責應都監 李明咸 李雲冕 金時佐
성 조 도 감 이 경 인 이 두 진 이 윤 명 남 익 관 신 영 식 김 명 선 홍 우 규
成造都監 李景仁 李斗鎭 李潤明 南益寬 愼榮植 金鳴善 洪禹圭
※ 수상국(水相國): 특수직으로서 당시 최고의 수군장. 즉 건축 책임자.
우후(虞侯): 조선 시대에, 각 도에 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일을
맡아보던 무관 벼슬. 병마우후가 종삼품, 수군우후가 정사품이었다.
군관(軍官): 각 도의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에 배치되어 진장(鎭將)을
수행 보좌하고 군사를 감독하는 지방군의 중추적 존재였다. 이들은 군사적
면보다는 재정적 성격을 지녀 흔히 수포군관(收布軍官)으로 통칭되었다.
도감(都監): 고려 ·조선 시대에 국상(國喪)이 나거나 궁궐을 짓는 등 국가의
중대사(重大事)를 관장하게 할 목적으로 임시로 둔 관청.
鎭南館內 懸板內用과 풀이 - 鎭南館 重修記
진남관 중수기(鎭南舘 重修記) 풀이
郡之舘昔日節度(군지관석일절도): 군의 공관(진남관)은 옛날 절도사가
始 刱 建 在 於(시창건재어): 처음으로 창건했네.
成宗朝設營之己(성종조설영지기): 조선 성종 전라좌수영성을 설치한 것은 기해년(1479년)
度使李公濟冕以(도사이공제면이): 절도사 이제면 공이
玆繕舘詰戎之政(자선관힐융지정): 여기에 진남관을 수선하여 오랑캐를 치는 행정을 폈네.
闢湫隘而鞏基增(벽추애이공기증): 낡고 좁은 터를 확장하고 공고히 하여
之宏傑制度之奇(지굉걸제도지기): 굉장하고 크며 기묘한 제도를 펴
經紀而自古湖南(경기이자고호남): 자고로 호남을 위한 실마리와 길을 찾으니
鎭南舘爲第一焉(진남관위제일언); 진남관이야말로 제일이다.
劫盛衰有數逮于(겁성쇠유수체우); 오랜 세월동안 성쇠에는 위협이 미치더니
戌遽爾有顚蹶之(술거이유전궐지); 무술년에 이르러 갑자기 그가 넘어 지려고 했다.
慨然有志於此舘(개연유지어차관): 개연히 이 진남관에 뜻하는 바 있어
經始重修之役而(경시중수지역이): 중수하는 일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不才踵其後而將(불재종기후이장): 재주도 업는 내가 그 뒤를 이어 맡아
日董飭庶民出力(일동칙서민출력): 날마다 감독하고 신칙하자, 서민들이 힘을 내주어서
月告厥竣工端倪(월고궐준공단예): 달이 갈수록 준공의 끝을 알게 되었다.
舊制而重修事半(구제이중수사반): 구제도로 중수하니 일이 절반이 되고
運人傑地靈襟山(운인걸지영금산); 운과 사람, 땅과 신령 그리고 아름다운 산
年城池疊榭層楹(연성지첩사층영); 해마다 성과 연못, 층마다 크고 둥근 기둥의 정자가 겹치고
奐壯固壯矣高亦(환장고장의고역): 빛나도다! 장엄하고 견고함 역시 높도다!
武李公奏捷于此(무이공주첩우차); 충무 이공은 이곳에서 승첩을 아뢰었다.
櫓素稱關防重地(노소칭관방중지): 노는 본디 관방(국경을 지킴)의 중요한 곳을 일컫는데
南舘之爲湖南第(남관지위호남제): 진남관이 호남의 제일이라 하겠다.
覽之志矣今爲知(람지지의금위지): 그 뜻과 의지를 지금 군수가 되어 살펴보니
偶然也哉玆於落(우연야재자어락): 우연이겠는가? 이와 같은 낙성(落成)이.
畧擧其顚末云爾(약거기전말운이): 대략 그 전말을 들었을 따름이다.
光武三年陰曆己 : 광무 3년(1899년) 음력 己亥年.
知郡崔 : 郡守 최정익(崔正益)
어려운 한자 풀이
鎭南館內 懸板內容과 풀이 - 鎭南館 重建上樑文
鎭南舘 重建 上樑文
설 관 방 이 고 국 승 구 장 공 액 지 형 소 회 신 이 입 기 신 구 진 윤 환 지 제
設關防而固國 勝區壯控扼之形 掃灰燼而立基 新構盡輪奐之制
쟁 쾌 선 현 실 광 구 규 산 하 삼 남 요 충 성 지 일 우 보 장
爭快先顯 實光舊規 山河三南要衝 城池一隅保障
흉 봉 범 경 월 도 이 천 식 지 시 구 관 명 명 즉 충 무① 수 사 지 지
凶鋒犯境 粤島夷荐食之時 舊館命名 卽忠武 首事之地
탕 소 일 자 지 추 류 경 재 조 어 방 가 특 피 천 서 지 총 포 수 대 명 어 우 주
蕩掃日滋之醜類 慶再造於邦家 特被天書之寵褒 垂大名於宇宙
인 각 지 풍 공 독 천 후 래 수 추 공 해 지 고 지 유 존 전 사 가 고
麟閣之豊功獨擅 後來誰追 公廨之故址猶存 前事可考
중 란 어 창 용 지 세 회 록 어 적 원 지 년
重攔於蒼龍之歲 回祿於赤猿之年
내 금 절 도 이 공② 우 국 망 사 탄 금 상 고 민 무 지 이 연 사 창 하 처 지 망 신
迺今節度李公 憂國忘私 歎今傷古 憫無地以練士 悵何處之望宸
소 장 계 재 경 영 난 일 이 상 연 봉 판 비 공 급 태 거 만 여
召匠計材經營 難一二狀 捐俸辦費供給 殆鉅萬餘
개 기 어 계 춘 지 교 구 좌 협 길 수 구 어 맹 하 지 절 연 작 하 성
開基於季春之交 龜莝叶吉 授矩於孟夏之節 燕雀賀成
상 출 중 소 가 위 공 중 누 각 하 임 무 제 유 대 안 전 창 명
上出重霄 可謂空中樓閣 下臨無際 惟對眼前滄溟
공 비 세 인 유 녕 황 약 신 선 소 관
恐非世人攸寧 怳若神仙所館
서 헌 동 실 편 빈 주 지 흥 거 호 달 용 문 이 문 무 지 출 입
西軒東室 便賓主之興居 虎闥龍門 異文武之出入
부 상③ 여 제 부 간 세 일 지 지 봉 도④ 사 미 요 지 참 경 지 해
扶桑 如薺 俯看洗日之池 逢島 似眉 遙指斬鯨之海
구 장 일 취 어 계 하 희 복 고 이 치 관 호 사 뢰 등 어 함 전 앙 열 무 지 유 소
鳩杖日聚於꜐下 喜復古而侈觀 虎士雷騰於檻前 仰閱武之有所
주 책 좌 운 어 천 리 인 민 영 뢰 어 삼 수 루 선 핍 파 청 작 황 룡 지 축
籌策坐運於千里 人民永賴於三陲 樓船乏 波靑雀黃龍之舳
융 기 즙 고 자 전 청 상⑤ 지 광 고 무 호 상 지 중 취 주 포 덕
戎器蕺庫 紫電淸霜 之光 鼓舞犒賞之中 醉酒飽德
등 임 강 개 지 제 면 의 서 충 욱 이 여 인 청 아 단 창
登臨慷慨之際 勉義誓忠 勗爾輿人 聽我短唱
포 량 동 효 일 부 천 탕 해 홍 수 저 어 룡 안 굴 택 희 간 왕 화 급 인 충
抛樑東 曉日浮天蕩海紅 水底魚龍安窟宅 喜看王化及鱗忠
포 량 서 여 수 군 만 망 불 미 채 득 강 금 성 설 악 일 휘 유 가 소 조 제
抛樑西 麗水群巒望不迷 採得剛金成雪鍔 一揮猶可掃雕題
포 량 남 천 광 운 영 공 상 함 섬 파 부 동 명 여 경 입 해 여 주⑥ 수 가 탐
抛樑南 天光雲影共相涵 纖波不動明如鏡 入海驪珠 手可探
포 량 북 오 운 다 처 망 신 극 등 임 두 각 금 회 관 벽 해 장 천 공 일 색
抛樑北 五雲多處望宸極 登臨斗覺襟懷寬 碧海長天共一色
포 량 상 상 유 노 인 광 채 왕 경 야 분 향 화 축⑦ 여 일 염 지 일 면 유 장⑧
抛樑上 上有老人光彩旺 竟夜焚香華祝 餘 一簾遲日眠油帳
포 량 하 악 독 수 진 강 백 가 충 국 둔 전⑨ 수 갱 번 황 운⑩ 여 해 만 평 야
抛樑下 岳瀆輸珍降百叚 充國屯田 誰更煩 黃雲 如海滿平野
복 원 상 량 지 후 주 사 협 심 훼 복 사 백 유 호 표 재 산 지 세
伏願上樑之後 舟師協心 卉服禠魄 有虎豹在山之勢
익 진 공 고 지 도 무 경 예 발 랑 지 우 영 창 진 복 지 화
益盡鞏固之圖 無鯨鯢跋浪之憂 永彰鎭服之化
무 술 중 하 하 한 사 촌 교 객 고
戊戌中夏 下澣 沙村僑客 稿
진남관 중건 상량문(鎭南舘 重建 上樑文) 풀이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국가를 튼튼히 하니 뛰어난 경관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불탄 곳을 쓸어내어 터를 닦으니, 새 집은 윤환(輪奐)의 제도를 극진히 하였네. 다투어 먼저 보는 것을 유쾌히 생각하니, 실로 예전의 규모 보다 빛나기 때문이네. 산하(山河)는 삼남(三南)의 요충지(要衝地)요. 성지(城池)는 한 지역의 보장(保障)이라네. 흉포한 칼날이 경계를 범한 것은, 저 섬 오랑캐가 침략해 올 때였고, 예전 건물의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①충무공(忠武公)이 처음 왜란을 맞았던 곳이라네. 날로 치솟던 적세를 소탕하여, 경하(慶賀)롭게도 나라를 다시 세우듯 하였으니, 특별히 천자가 글을 내려 총애하고 포상하여, 세상에 큰 이름을 남겼다네.
기린각(麒麟閣)의 넉넉한 공훈 홀로 드날리시니, 후세에 누가 따라가겠는가? 공관(公館) 건물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있으니, 예전 일을 고찰할 수 있도다. 갑진년(甲辰年 : 1664年)에 다시 세웠다가, 병신년(丙申年 : 1716年)에 화재를 만났다네. 지금 절도사 ②이공은 나라를 걱정하고 사사로운 생각을 떨쳐, 오늘의 일을 탄식하고 예전 일에 마음 아파하였네.
연병(練兵)할 땅이 없음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망궐례(望闕禮) 행할 곳 없음을 마음 아파하였네. 대목을 부르고 목재를 헤아려 건축을 시작하니 한두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으나, 봉급을 출연하고 경비를 마련하여 공급하니 자금이 거의 수만 냥도 넘었다네.
삼월 여름에 터를 개척하니 점괘도 길하게 나왔으며, 사월에 공사를 시작하니 제비와 참새도 축하(祝賀)하였다네. 위로 짙푸른 하늘에 솟아 있으니 공중(空中)의 누각(樓閣)이라 이를 말하고, 아래로 가없음에 다다라 있으니 오직 보이는 것은 눈앞의 푸른 바다뿐이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편안히 있을 곳이 아니고, 마치 신선이 머무는 곳처럼 황홀하도다.
서쪽 헌함과 동쪽 방은 손님과 주인의 흥취와 주거에 편리하고, 호달(虎闥)과 용문(龍門)으로 문관과 무관의 출입을 다르게 하였네. ③부상(扶桑)이 냉이와 같아 해가 목욕하는 못을 굽어보고, ④봉도(蓬島)가 눈썹과 같아 고래 잡는 바다를 아득히 가리키네.
노인들이 계단 아래 날마다 모여, 화려한 옛 건물의 복원됨을 기뻐하고 무사들은 헌함 앞에 우레처럼 뛰면서 연병(練兵) 모습 봐줄 곳을 우러러본다. 좋은 계책은 앉아서 천리를 관장케 하고 사람들은 동 서 남 세 방향의 바다에 길이 의지한다. 누선(樓船)이 물결에 떠있으니 푸른 새 누런 용이 그려진 큰 배들이요, 무기가 창고에 갈무리 되어 있으니 ⑤붉은 번개 푸른 서릿발 같이 빛난다. 북치고 춤추며 잔치를 베풀고 상을 내리는 가운데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며 누각에 올라 비분 강개한 마음을 가지며 의리에 힘쓰고 충성을 맹세한다. 힘쓸 지어다 여러분! 나의 짧은 노래를 들어보오.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노니, 새벽 해 하늘에 떠서 붉은 바다를 쓸어낸다. 물 밑의 고기들이 제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니 왕의 교화가 물고기에까지 미침을 기뻐한다.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노니, 고운 물 뭇 봉우리 볼수록 뚜렷하다. 강한 쇠를 찾아내어 눈빛 칼날을 만든다면 한번만 휘둘러도 오랑캐를 쓸어낼 수 있으리.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노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서로 함께 잠겨있네. 가는 물결 움직이지 않음에 밝기가 거울 같으니 바다에 들면 ⑥여룡(驪龍)의 구슬도 더듬어 찾겠네.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노니, 오색구름 많은 곳 임 계신 대궐을 바라본다. 올라보면 생각이 넓어짐을 문득 깨닫겠으니 푸른 바다와 넓은 하늘이 같은 빛깔로 한 덩어리라네.
들보를 위로 던지노니, 위에는 노인성(老人星)이 광채를 발하고 있네. ⑦밤 다하도록 향 피우며 재변(災變)과 병난(兵難)이 없기를 빈 뒤에 해 늦도록 발 드리운 ⑧유장(油帳)에서 잠을 잤었네.
들보를 아래로 던지노니, 산과 내가 보물을 실어다 줌에 온갖 복이 내려옴이로다. ⑨충국(忠國)의 둔전(屯田)을 누가 다시 일구었는가? ⑩누른 구름(黃雲) 바다처럼 평야에 가득하다네.
바라건대, 상량(上樑)을 한 뒤로는 우리 수병(水兵)은 협심(協心)하고 오랑캐는 정신이 흩어져서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있는 형세로 공고히 하는 계책을 공고히 하는 계책을 더욱 극진히 하며 고래들이 파도를 일으킬 염려 없이 복종 시킬 수 있는 교화가 영원히 들어나기를.
무술년(戊戌年 : 1718年) 중하(中夏 : 5월) 하순에 사촌에서 교거(僑居)하는 나그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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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①충무공(忠武公) : 이순신을 가리킴. 이순신이 1591년에 정읍현감에서 좌수사로 부임하여 왜란 을 대비 임진년과 계사년 사이 누란지위에 있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웠다.
②이공(李公) : 당시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재면(李濟冕)을 가리킴.
③부상(扶桑) : 해뜨는 곳에 있다고 하는 신화속의 나무.
④봉도(蓬島) :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사상의 섬
⑤자전청상(紫電淸霜) : 등왕각서(凳王閣序)에 보이는 ‘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에서 따온 말이 므로 ‘淸霜’은 ‘靑霜’을 잘 못 쓴 것이다.
⑥여룡(驪龍)의 구슬 : 검은 용의 턱밑에 있는 귀중한 구슬. 여의주(如意珠). 진주(眞珠)
⑦화축(華祝) : 육축(六祝)의 하나인 ‘化祝’이 아닌가 한다. 華祝은 재병과 병난을 없애주는 것 이다.
⑧유장(油帳) : 습기를 막기 위하여 기름을 친 장막.
⑨충국의 둔전(忠國의 屯田) : 한(漢)나라 때 나이 일흔이 넘은 조충국(趙忠國)이 장수가 되어 屯田을 치면서 오랑캐를 대비한 적이 있음.(漢書 趙忠國傳)
⑩누른 구름 : 들판에 누렇게 익어 일렁이는 보리밭 풍경을 묘사한 말.
鎭南館內 顯板內容과 풀이 - 鎭南館 重建識
鎭南舘 重建識
호 좌 지 수 영 구 유 진 남 관 추 애 경 비 고 기 주 갑 지 갑 진 이 절 도 도 빈 씨 개 구 지
湖左之水營 舊有鎭南舘 湫隘傾圮 故其周甲之甲辰 李節度道彬氏 改構之
지 병 신 재 언 여 어 정 유 춘 첨 안 우 자 신 허 참 목 즉 모 소 이 중 건 추 번 와 동 벌 재
至丙申灾焉 余於丁酉春 忝按于玆 燼墟慘目 卽謀所以重建 秋燔瓦 冬伐材
군 기 탄 성 중 장 효 능 월 명 년 오 월 공 고 흘 출 붕 소 압 경 해 수 위 지 장 무 괴 의
群技殫誠 衆匠效能 越明年五月工告訖 出鵬霄壓鯨海 雖謂之壯 無怪矣
희 갑 진 이 병 신 병 신 이 무 술 기 간 흥 폐 불 일 이 시 역 야 적 성 어 충 무 공 입 근 지 세
噫甲辰而丙申 丙申而戊戌 其間興廢不一 而是亦也 適成於忠武公立慬之歲
사 개 비 유 대 이 연 야 망 공 의 개 차 내 충 무 수 사 지 지 액 양 호 인 후 진 소 위 해 방 요 충 야
斯豈非有待而然耶 亡공 矣蓋此乃忠武首事之地 扼兩湖咽喉 眞所謂海防要衝也
제 군 자 지 등 사 필 유 부 앙 강 개 고 명 사 의 익 진 기 고 어 지 도 이 서 성 상 남 고 지 우 자 의
諸君子之登斯 必有俯仰慷慨 顧名思義 益盡其固圉之圖而紓 聖上南顧之憂者矣
숭 정 기 원 후 구 십 일 년 무 술 중 하 전 의 이 제 면 지
崇禎紀元後九十一年 戊戌 中夏 全義 李濟冕 識
※ 崇禎紀元 曆書 : 중국 명나라 말에 서광계(徐光啓)가 중심이 되어 중국 재류(在留)
의 기독교 선교사 샤알(Schall Adam)등의 힘을 빌어 편집된 서양 천문학의 총
서(叢書).
※ 崇禎紀元은 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1628-1644)의 연호이다. 따라서 崇
禎紀元 元年은 1628년이다. 상기‘崇禎紀元後 91년 戊戌 中夏‘란 곧 1628+90=1718
즉 ’서기 1718년 무술년 5월’을 이름이다.
※ ‘鎭南舘 重建識‘는 鎭南舘 補修 工事中(1953년) 천장에서 발견된 이제면 수사의
懸板 原文이다. 이는 진남관 건물 내 후면 창방에 걸려 있다.
※ 상기 重建識文은 原文 懸板 글씨와 대조 확인함.
진남관 중건지(鎭南舘 重建識) 풀이
호남 좌수영에는 이전부터 진남관이 있었으나 추하고 좁은데다 기울어 넘어졌었다. 그래서 창건한지 60년이 더 지난 甲辰年(1664년)에 절도사(節度使) 이도빈(李道彬)씨가 다시 고쳤다. 그러나 또 丙申年(1716년)에 이르러 불이 났다. 내가 丁酉年(1717년) 봄에 부임하여 불에 탄 자리를 보고 참혹하여 욕된 마음을 달랬다. 즉시 重建을 도모하여 가을에 기와를 굽고 겨울에는 목재를 베었다. 여러 기술자가 정성을 다하고 많은 장인(匠人)들이 능력을 다하여 다음 해(1718년) 5월에 완공하게 되었다. 붕새가 나는 듯 하늘 위로 솟아있고, 고래 보다 큰 바다를 진압할 정도로 비록 웅장하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다.
아, 甲辰年에서 丙申年까지(1664-1716), 丙申年에서 戊戌年까지
(1716-1718) 그 동안 흥폐(興廢)가 한결 같지 않았으나, 이 역시 공사가 마침 충무공이 돌아가신 해(戊戌年:1598년)와 같은 해(戊戌年:1718년))에 이루어졌으니(2周甲=120년), 이 어찌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은 충무공이 일했던 땅이요 호남과 영남의 길목으로 해상방위의 요충지이다. 모든 사람이 진남관에 오르면 반드시 고개 숙여 받들고 강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 때 이름(鎭南이라는)을 돌아보면서 그 의미(남쪽 오랑캐를 진무(鎭撫)한다는)를 생각하여 견고히 막을 방도를 더욱 극진히 함으로써, 우리 성상(聖上)의 남쪽에 대한 걱정을 풀어드려야 할 것이다.
숭정기원(崇禎紀元)後 91년 戊戌年(1718년) 중하(中夏 : 5월)
전의(全義) 이제면(李濟冕)이 기록 함.
어려운 한자 풀이
湫(추): 다할 추. 다하다. 바닥나다.
隘(애): 좁을 애. 좁다. 땅이 좁다. 작
다.
傾(경): 기울 경. 뒤집다. 뒤집히다.
圮(비): 무너질 비. 무너지다. 무너뜨
리다.
灾(재): 재앙 재. 재앙. 화재.
余(여): 나 여. 나. 자신.
忝(첨): 더럽힐 첨. 더럽히다. 욕되게
하다. 욕됨.
按(안): 누를 안. 누르다. 어루만지다.
玆(자): 이 자. 이. 이에.
燼(신): 깜부기 불. 깜부기 불. 타다 남
은 것.
墟(허): 불 허. 불다. 울다.
燔(번): 구울 번. 굽다. 말리다.
殫(탄): 다할 탄. 다하다. 쓰러지다. 널
리. 두루.
訖(흘): 이를 흘. 이르다. 마치다. 끝나
다.
鵬(붕): 대붕 새 붕. 대붕 새. 붕새(상상
의 새)
霄(소): 밤 소. 밤. 야간.
雖(수): 비록 수. 비록. 그러나. -라 하
더라도. |
噫(희): 탄식할 희. 탄식하다. 아! 하품.
慬(근): 근심할 근. 근심하다. 용기 있
다. 겨우.
斯(사): 이 사. 이. 대명사. 어조사.
豈(개): 어찌 개. 개가. 그. 조사.
耶(야): 어조사 야. 어조사. 의문 조사.
(공): 도울 공. 돕다.
蓋(개): 덮을 개. 덮다. 덮어씌우다. 덮
개.
扼(액): 누를 액. 누르다. 잡다. 움키다.
咽(인): 목구멍 인. 목구멍. 삼키다. 목
메다.
喉(후): 목구멍 후. 목구멍.
俯(부): 곳집 부. 곳 집. 마을 관청.
慷(강): 강개할 강. 의기가 북받쳐 슬
퍼하다.
慨(개): 분개할 개. 분개하다. 탄식하
다.
顧(고): 돌아볼 고. 돌아보다. 마음에
두다.
圉(어): 마부 어. 마구간. 마부. 감옥.
紓(서): 느슨할 서. 느슨하다. 풀다. 화
해하다.
憂(우): 근심할 우. 근심. 근심하다. |
鎭南館內 懸板內容과 풀이 - 重修 監董錄
중수 감동록(重修 監董錄)
감 동 유 학 김 병 두
監董 幼學 金秉斗
유 학 유하열
幼學 柳河烈
감관 임경묵 장 학 인
監官 林璟黙 張鶴仁
색 리 옥 장화
色吏 玉章化
도 목수 김재 현(거낙안)
都木手 金在顯(居樂安)-낙안에서 거주함.
광무 삼 년 음력 기해 사 월십일 일
光武三年陰曆己亥四月十一日(1899년 4월 11일 착공)
시역구월 십삼일고 준
始役九月十三日告竣(1899년 9월 13일 준공)
※감동(監董): 조선시대 각 궁전을 짓는 공사에서 역사(役事)를 감시하고 독촉하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한 벼슬. 약칭 감동
유학(幼學):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 벼슬자리에 있지 않은 선비.
감관(監官): 조선 때, 관아와 궁가에서 돈이나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며 보살피던
벼슬아치.
색리(色吏): 고려·조선시대 향리의 한 계층. 여러 잡무를 담당하던 이들은 지배구조의 하
부를 맡았으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천인과 다름 없었다.
도목수(都木手): 목수의 우두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