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충무로1가 24-2번지 명동빌딩. 한평 땅값이 1억38510만원으로 서울에서 가장 비싸다. 이 빌딩은 5년전만해도 한 의류회사가 대형 매장을 차렸다가 실패하고 물러난 하자가 있는 곳.
그런 이 건물이 대한민국 최고의 땅값으로 인정받은 것은 `스타벅스의 힘` 때문이다. 5년전 스타벅스의 입점과 함께 상권이 활기를 띠면서 지난 14년간 1위 자리를 지켜 온 서울 중구 명동2가 33-2번지 우리은행 명동지점 부지(평당 1억2562만원)을 밀어낸 것이다.
과거에는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주변에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됐었다. 은행 점포가 들어서면 같은 상권 안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건물로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타벅스 피자헛 등 외식 점포나 복합영화상영관, 대형할인마트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실제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썰렁한 지하철역이나 버스전용차로제 시행으로 손님을 잃은 기존 버스정류장 주변 재래시장, 1층 중앙에서 2층 구석으로 밀린 은행 점포 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강남역, 청담동처럼 나름의 특성을 앞세워 지하철역을 제치고 핵심 상권으로 부상한 경우나 외식 점포의 입점으로 침체돼 있던 주변 상권까지 활성화되는 사례가 많다. 부동산시장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리드하는 요소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불변의 상권은 없다=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서울 강남역. 특히 뉴욕제과 등 지하철역 주변은 오랜 기간 최고의 상권으로 평가받아 온 곳이다. 하지만 지난 2000년 스타벅스가 건너편 시티극장 라인에 들어선 후 강남역의 랜드마크는 자리를 옮겨갔다.
스타벅스 개점 후 커피전문점, 패밀리레스토랑 등 잇따라 새로운 외식 상권이 들어서면서 기존 상권보다 지하철역에서 더 멀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일대 상권의 최고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 성북시장과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시장 등도 마찬가지. 이들 재래시장은 이용 수요가 많아 지역내에서는 꽤 유명한 상권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버스전용차로제가 시행되면서 시장 입구에 설치돼 있던 버스정류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그 여파로 손님은 절반 이상 줄어드는 등 상권이 크게 위축됐다.
몇 십년간 명맥을 유지하던 상권이 순식간에 죽어버린 셈이다. 반면 같은 지역에서도 버스정류장과 횡단보도가 새로 설치된 곳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는 등 변화가 한창이다.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빌딩은 지난해 1층 점포가 바뀌었다. 몇 년 동안 빌딩의 얼굴인 1층을 굳게 지켰던 은행 점포가 2층으로 자리를 옮기고 24시간 편의점과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들어선 것이다.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빌딩에도 1층 은행 점포 자리에 피자전문점이 들어섰다. 상권에서 `금융기관〓1층` 공식이 깨진 것은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전세를 고집하는 은행들의 점포 재계약률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5일 근무제 시행과 인터넷 금융망 활성화로 유동 인구 흡입력이 약화된 것도 은행 점포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상권을 재편한다=커피전문점 패밀리레스토랑 패스트푸드점 등 외식 점포는 지하철역을 제치고, 또 빌딩 1층에서 은행을 밀어내는 등 막강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스타벅스의 경우 여의도 금융계는 물론 강남 일대 대형 오피스 빌딩가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피자헛 역시 빌딩 임대시장에서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지난해 서울 구로공단과 신림사거리, 충주 등 4~5곳에서 과거 은행 지점이었던 자리에 당당히 간판을 내 건 것도 그 위치를 실감케한다. 이밖에 배스킨라빈스31 던킨도너츠 맥도날드 베니건스 아웃벡스테이크 등 패스트푸드점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 외식 점포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건물의 가치를 높이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하기 때문.
대표적인 예로 스타벅스 명동점은 입점 5년만에 빌딩 가격이 6678만원이나 뛰어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이 됐고, 여의도 서울증권의 경우 스타벅스 입점 후 건물 지하에 토니로마스 스파게띠아 매드포갈릭 등 유명 패밀리레스토랑을 줄줄이 유치, 짭짤한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다.
부동산컨설팅업체 시간과공간 한광호 대표는 "상업용 건물 가치를 좌우하는 키 테넌트(핵심 사업자)가 외환 위기 이후 은행 점포에서 커피전문점 등 외식 점포로 바뀌고 있다"면서 "외식 점포들은 특정 빌딩에 인기 점포가 입주하면 유사한 외식 점포들이 잇따라 입주하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당분간 외식 점포 선호 현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외식점포 뿐 아니라 복합영화 상영관인 CGV도 빌딩 업주들에게 건물 가치를 올리는 점포로 인식되고 있다. 복합영화 상영관 유치 여부가 최근 상가 분양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것도 이같은 시장 상황을 설명하는 한 예이다.
신한은행 고준석 PB사업부 부동산재테크팀장은 "CGV 등 복합영화 상영관은 유동인구를 끌어 들여 주변 상권을 확 바꿔 놓는 경우가 많다"면서 "인기 점포의 입점은 해당 건물의 가치를 올리는 동시에 주변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또 다시 건물 가치를 상승하는 선순환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부지를 직접 매입하는 방식으로 입점하는 이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할인점도 상권지도를 바꾸는데 한몫한다. 업종이 겹치지 않는 음식점과 유흥주점 중심으로 상권의 변화를 촉진시킨다.
이마트가 입점하기 전 잡화 의류 등 종합 상권이 형성돼 있었던 서울 도봉구 창동상권이 이마트와 경쟁관계에 있는 업종의 상가들은 모두 문을 닫고 음식점 중심 상권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