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대왕 석탈해도 인도 남부의 타밀출신이다
타밀어로 '석'= 대장장이, '탈해'=우두머리,
'단야구'=대장간 도구, '니사금'= 왕
.... 삼국유사및 삼국사기 내용과 일치
한국 고대사 최대 미스터리의 하나인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許王侯 서기 32년 ~ 189년)의 고향 아유타(阿喩陀)에대해 필자는 경향신문의 주간지 '뉴스메이커'( 637호, 지난 8월 16일자 )에서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州)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다른 미스터리인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 재임 서기 57~80년)의 출신지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은 어디인가?
필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나오는 석탈해의 설화 내용을 당시 타밀인의 언어및 사회상과 비교하여 분석한 결과, 다음의 몇가지 근거로 그도 허왕후와 마찬가지로 인도 남부 타밀지역에서 온 인물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지난 수년간 캐나다 토론토대학 남아시아연구센타의 소장인 셀바 카나간따캄교수, 토론토의 타밀인협회 산무감 코한 사무총장, 남아시아 여성센터의 자얀티 레이놀드 상담관 , 타밀어교사 칼란티 쿨라나한, 그리고 힌두교 성직자등 수많은 인도인들과 직접 만나 취재했고 토론토대학등 여러 도서관의 자료들을 추적한 결과이다.
우선, 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 의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Goldsmith나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들의 남자이름에 남아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르켜 그가 바다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들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석탈해의 다른 이름 토해( 吐解 )는 타밀어 토헤(Tohe)나 토하이(Tohai)와 일치하는 데 이는 '새의 날개, 특히 공작새 날개'와 '보호자, 후견인'등 2가지 뜻을 갖고 있어 석토해라는 이름은 '대장장이의 보호자'임을 내비치고 있다.
덧붙여 석탈해가 어린시절 석총을 짓고 살았던 '토함산'의 토함(Toham)도 '토하이'에서 발전한 타밀어로 '보호, 후견'을 뜻해 신라의 수호산을 기원하며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죽은 지 6백년뒤 문무왕이 석탈해의 시신 뼈로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의 산신으로 만든 것도 신라 왕조를 수호해 줄 것을 기원했기때문이다..
더구나 석탈해가 '대장간 도구'를 '단야구'(鍛冶具)라고 불렀는 데 당시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그 발음및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약 2천년전 당시 타밀인이 세운 촐라왕국(Chola Kingdom) 등 인도 남부지역은 당대 세계 최고 품질인 우츠 (Wootz)강철의 원산지인 철의 선진국으로서 동서양에 철을 수출하던 '철의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 석탈해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초기철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한반도에 칼이나 철제 농기구등 인도 남부의 강력한 선진철기문화를 갖고 들어와 기존 토착세력에 맞서 신라의 왕권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게 된 것이다.
둘째로,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하는 또 다른 단어는 석탈해의 제안에 의해 제3대 유리(儒理)왕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니사금'(Nisagum)이라는 왕을 뜻하는 용어이다. 제2대왕 남해(南解) 차차웅의 후임 왕자리를 놓고 노례(努禮)왕자가 장자상속의 기득권을 포기, 매부인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을 정도로 석탈해가 지닌 인도 남부 철기문화의 힘이 가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석탈해는 "이가 많은 사람을 후임 왕으로 정하자"고 제안, 결국 떡에 물린 이자국이 많은 노례왕자가 제3대 유리니사금(尼師今)으로 칭하기 시작한다. '니사금'은 사실 당시 타밀어로 '대왕'(= a great king), 또는 '황제'(=an emperor)의 뜻으로 일반적인 왕보다는 상위의 개념이었다.
당시 타밀어 '니'가 우리말에 들어와 '이'가 됐는 데 삼국유사에선 '니사금'을 '치질금(齒叱今)'으로도 표현한 것은 '니'를 훈독하여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빨은 타밀어로 '니' 와 '빨'등 2가지로 쓰이다가 현재는 '빨'만 쓰이는 데 2가지가 합쳐진 '니빨'이 우리말에선 '이빨'이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따르면 신라 석씨계의 마지막 왕인 제16대 홀해왕(재위310-356)까지 니사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김(金)씨가문에의한 왕자리 독점을 알리는 제17대 내물왕부터 왕은 '마립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자신의 모국어에서 빌려온 니사금은 석씨계의 몰락과 함께 신라왕의 명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세째로, 석탈해가 자신의 부친을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 , 줄여서 함달(含達)왕이라고 밝히고 있는 데 함달파 (함달)는 타밀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 '한다파(Handappa), 줄여서 '한단(Handan)'과 거의 일치한다.
'한다파'는 힌두교 3대신의 하나인 시바(Shiva)의 둘째 아들 이름으로 인도 북부의 아리안들이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고 남부 타밀인들만이 으뜸으로 섬기는 신인지라 타밀 남성들 이름에도 자주 등장한다.
아울러 '한다파'는 당시 타밀어로 '아버지'라는 뜻도 있기때문에 석탈해가 자신의 아버지를 타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신 '한다파'의 한자 표기로 함달파왕, 또는 함달왕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한다파'는 최근에 와선 무루간(Murugan)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다.
넷째, 서기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왕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뒤 국무총리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았는 데 당시 타밀 나라에선 왕의 신하들가운데 측근을 뜻하는 '데보(Devo)'와 일치한다.
'데보'는 남자 신 (God)을 뜻하는 '데반(Devan)'과 여자 신(Goddess)및 왕비(queen)을 뜻하는 '데비(Devi)'와 같은 뿌리로 '신의 다음 자리'(next to God)'와 '막강한 사람(a powerful man)이라는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왕은 신처럼 받들어졌기에 '신의 다음자리'와 '막강한 시람'이라는 2가지 뜻을 갖는 '데보(Devo)'가 바로 왕다음의 권력자를 가르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대보(大輔)자리에 석탈해가 신라역사상 처음으로 오른 것은 그가 타밀 나라 출신임을 시사한다.
또 제3대 유리(儒理)왕이 죽어 서기 57년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대보자리에 자신에게 집을 양도했던 '표주박(瓢)을 허리에 찬 호공(瓢公)' 을 발탁했는 데, 신라 1천년역사에서 왕의 최측근인 대보(大補)라는 직위를 맡았던 사람은 석탈해와 호공, 그리고 이들이 함께 발굴해낸 김알지등 3인이라는 점에 있어 이 둘이 매우 특수한 관계임을 알 수 있는 바 호공또한 타밀출신으로 추정된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족속과 성도 자세히 모른다.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일컫는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호공에 대한 최초의 장면이자 그의 정체에 대한 설명의 전부인데 전형적인 왜인은 아니지만 아무튼 왜가 있는 지역에 건너왔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며 타밀인들은 기원전부터 뜨거운 날씨때문에 목을 추기기위해 허리에 표주박등 물통을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박이나 은, 진흙으로 만든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렸다.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oosani Kudam),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이라고 각각 칭한다.
호공도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정착했던 타밀인들중 한 사람으로 석탈해보다 먼저 바다건너 신라땅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대보처럼 당시 타밀어의 발음과 뜻이 일치하는 직책으로 대보 다음의 관직인 각간(角干)이 있다.석탈해의 지원을 얻어 왕위에 오른 3대 유리왕이 도입한 각간은 당시 타밀어로 걱간(Kokkan), 또는 일랑걱간(Ilangkokkan)으로 불렸으며 이벌찬(伊伐飡)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飡) ·각찬(角粲) 등으로 불린 또 다른 명칭들은 우리말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다섯째로 주목되는 것은 석탈해가 한반도에 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동물의 뿔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가 고구려나 백제에선 결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발굴 되고 있다는 점.
지금까지 고고역사학계에선 시베리아나 몽골등의 북방 기마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뿔잔이 이 두 나라에만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방의 각배가 어떻게 지리적으로 근접해있는 고구려나 백제를 건너뛰어 한반도 동남쪽 신라와 기야에만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 의문은 신라와 가야의 각배들이 북방이 아니라 남방의 바닷길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면 쉽게 풀린다. 각배는 그리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지중해및 중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발생했는데 이들나라와 기원전부터 이미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던 타밀인의 인도 남부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타밀인들이 신라와 가야, 그리고 일본에 각배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각배를 타밀어로 쿠디꿈 콤부( Kudikkum Combu)라고 부르는 데 타밀출신의 석탈해와 허왕후가 각각 신라와 가야에 이를 소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섯째로 석탈해와 관련된 토함산에 있는 우물 요내(遙乃), 또는 예내는 당시 타밀어로 요네(요나이), 예네(예나이)로 불렸으며 작은 연못이나 작은 호수등을 뜻했다.지금은 예리로 불려지고 있다.
이쯤되면 석탈해의 본적을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러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신국 다파나국(多婆那國) , 또는 용성국(龍城國)이 과연 어디인가를 마지막으로 짚어보자.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 ', 즉 '태양국 (太陽國) '은 당시 타밀인 나라 촐라왕국의 별명이었다.
아울러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용성국(龍城國)의 용성(龍城)은 당시 촐라왕국 도시들가운데 대장간과 철기제작으로 잘 알려진 항구도시 나가파티남(Nagappattinam)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다.
타밀어로 나가(Naga)는 본래 '코브라'를 뜻하지만 힌두교도들에겐 코브라가 용으로 전화되어 숭배대상이 됐기때문에 '용'으로도 일컬어지며 ,파티남(pattinam)은 '도시'를 뜻해 '나가파티남'은 '용성'(CIity of Dragon)을 의미한다. 따라서 석탈해가 철기생산및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국제도시 나가파티남, 즉 용성이 소재했던 촐라 왕국을 용성국으로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파티남은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석갈린감'의 줄인 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거주했었고, 동시에 타밀인들의 해외 진출 전진기지였던 만큼 대장장이 가문인 석탈해의 가족들이 이 곳에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역사서 모두 모두 석탈해의 출신지가 "왜의 동북쪽 1,000리 (약 435km) 되는 곳" 이라고만 밝히고 있을 뿐인데 당시 왜가 큐슈(九州)북쪽을 가리켰다는 점에서 다파나국의 위치는 오늘날 교도현(京都県) 부근으로 볼 수 있다.1세기 후반 저술된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기원전 현재의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왜에는 100여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통역관에의해 한(漢)나라와 의사소통이 되는 곳이 30나라"라고 밝히고 있는 만큼 다파나국도 이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 있던 타밀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석탈해가 자신의 고국 별명인 '다파나국' 또는 '용성국'으로 가르켰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유럽에서 대서양건너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여 집단거주지역을 캐나다에선 'London', 미국에선 'New England'와 'New York'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약2천년전 막강한 선진 철기문화와 해상력을 갖춘 타밀인들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과 중국 남부지역등을 누비며 해상무역과 힌두교 전파에 주력하면서 타이완(臺灣)위쪽에 흐르는 흑조(黑潮,쿠로시오)난류를 타고 일본에까지 도착했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푸난 (Funan 扶南,서기1세기-6세기) 왕국및 베트남의 참파(Champa 占婆,서기 2세기 -17세기) 왕국등 철기를 사용하는 동남아 힌두교 왕국의 유물과 유적에서 당시 타밀인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의 증거들이 고고역사학적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를 휘젓고 다니던 타밀인들이 한국및 일본과도 교류했다는 증거는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 스며든 타밀어의 영향에서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타밀어등 드라비다어와 한국어간의 친연성을 처음으로 포착한 인물은 조선고종의 외교고문이자 미국 감리회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 헐버트는 1905년『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 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저서에서 "두 언어가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들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 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선 지난 70년대 뒤늦게 자극받아 시바 수수무(しば すすむ , 교토(京都)여자대학)교수를 필두로 후지와라 아키라(Akira Fujiwara)와 고 미노루( Minoru Go)교수등 일본의 언어학자들은 타밀어등 드라비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제기했다.
마침내 일본의 원로 언어학자 오노 수수무(大野 晉, 86세) 학습원(学習院)대학 일본 국어학 명예교수가 타밀인들이 기원전 수세기에 이미 일본열도에 도착, 집단 거주했음를 시사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오노교수는 『일본어의 기원』(1994년),『일본어와 타밀어』(2000년), 『야요이(弥生)문명과 남인도』(2004년)등 일련의 역작을 통해 "야요이문명시대의 특징으로서 논의 쌀경작(水田稲作)、철, 기직(機織,베틀이나 기계로 짠 직물)등" 3가지로 거론하면서 " 이 분야에 앞섰던 인도 남부의 선진 타밀문명이 기원전 수세기 일본에 도래, 북 규슈(九州)를 중심으로한 야요이시대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타밀어가 일본어 형성에 영향을 끼쳐 두 언어의 유사단어가 수백개나 남아있으며 한반도에까지 확산돼 타밀어와 한국어도 유사한 단어들이 상당히 있다고 오노교수는 강조했다.
이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를 통해 논의 쌀경작(水田稲作)과 철제품등이 일본에 전해져 야요이문명이 열렸다는 기존의 북방전래설에다 남방전래설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의 고대 문영이 남과 북 양쪽에 의해 함께 수용돼 형성됐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남방전래설을 강조한 헐버트와 오노등 동북아시아측에서의 연구와 더불어 인도측에서도 언어및 종교적 유사성을 비교 분석하여 타밀과 일본 양측의 교류가 있었다는 인도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로케쉬 찬드라(Lokesh Chandra, 뉴 델리의 인도 문화 국제연구소 소장)와 발람발(Balambal,델리대학교 일본어 교사 ), 타밀지역의 사비트리 비스완나탄(Savithri Viswanathan)박사등은 타밀어와 일본어의 유사성을 집중 연구한 학자들이다.
또 인도의 역사학자 싱할(D. P. Singhal) 박사는 '인도와 세계문명( India and World Civilization)'(1969년 발간) 이라는 저서에서 " 인도와 일본이 해상으로 직접 연관되어져 있었다는 증거들을 일본 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면서 (교도(京都) 현県과 접하고 있는) "미에(三重)현県 시마군( 志摩郡)등 일부 지역에 거주하던 일단의 인도인들이 천축낭인(天竺浪人)이라고 불렸으며 힌두교의 가네쉬와 비슈누등 주요 신들의 이미지가 일본의 신도(神道)나 불교 사원에서 나타나 있다"고 지적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근거로 신라 제 4대왕인 석탈해도 인도 남부의 타밀출신으로 추정한다.
한국 타밀연구회 namkimm@hanmail.net
민족역사학자 이이화선생님은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은
아리안(인도사람)이고 석탈해 또한 아리안으로 봅니다 ...
한국 타밀연구회(Korean Society of Tamil Studies)가 최초로 발족됐습니다.
한국과 타밀간의 역사적, 언어적, 인종적 유관성을 연구 조사하는 순수한 비영리 동인회입니다.
타밀어는 현재 인도에선 힌두어등과 함께 18개 공용어(Official Language)에 속하며 싱가포르에서도 영어, 중국어, 말레이시아어와 함께, 스리랑카에선 싱할리어와 함께 공용어입니다.
또 말레이시아에선 공용어는 아니지만 중국어와 함께 상용어 (Public Language)입니다.
이는 타밀인들이 일찍부터 동남아시아지역으로 크게 진출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밀어는 비록 독립된 나라의 언어는 아니지만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등 4개국에서 신문방송을 비롯 사업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세계 굴지의 언어입니다.
타밀어을 쓰는 인구는 우리의 한글을 사용하는 7천5백만과 비슷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 타밀연구회(Korean Society of Tamil Studies)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인동포 몇사람들로 출범했으나 한국은 물론 전세계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회원 가입은 무료이고 회원들은 인터넷을 통해 상호간의 의견들을 주고 받으며 타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합니다.
타밀 연구회의 발전을 위해 충고와 조언을 해주실 분들은 다음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namkimm@ hanmail.net 캐나다 토론토 416-512-6623
본연구회는 우선 다음과 같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1. '한국어-타밀어 비교사전' 출간
2. '타밀 역사와 문화' 출간
3. 2천년전 타밀에서 한반도까지 바닷길 재현 - 범선 (帆船 sailing ship)을 타고 허왕후의 항해 따라 가기
4. 소녀 허황옥, 3개월동안의 대장정을 그린 가상 소설 공모및 영화제작..... 미스 허,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어떻게 지냈나? 왜 가야를 택하게 됐는가?
5. 타밀 현지 방문, 지속적 현장 조사 연구
6.. 한국-타밀 역사및 언어적 유관성에대한 세미나 개최
7.. 한국- 타밀간의 음악, 무용등 문화 에술 축제 개최
8. 2004년 12월 쓰나미로 고통받고 있는 타밀인 돕는 모금운동및 자선 바자회개최
(출처 : http://www.kyunggi.ca/bbs/view.php?id=kgcanada&page=3&sn1=&divpage=1&sn=on&ss=on&sc=off&keyword=김정남&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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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토 발간 한국일보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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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 공모에서 이민수기 '잃어버린 왕궤를 찾아서'로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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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초대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는 인도 타밀 출신이다’
‘석탈해도 인도 타밀지역에서 왔다’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는 가야인이다’ 등 3편의 발굴기사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