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방문기
(2010. 5. 24 ~ 6. 2)
2010년 5월 24일(월)
14년만의 방문이다. 지난 1997년 1월에 잠깐 다녀온 후 어연간 13년이 흘렀다. 어떤 분은 해마다 두세 번씩 다녀오지만 나는 13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다니 참 나도 너무 했다 싶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꼭 필요하거나 강제되지 않으면 나서지 않는 성격이라 기다리다 보니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 사실 작년 2학기부터 연구년이라 연구하러 한 번 외국을 다녀와야만 할 형편이다. 게다가 지도교수님이 이제 연세가 73세가 넘어서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한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꼭 찾아뵙고 저를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또 옛 친구들과 사람들도 만나보고 또 연구 자료들 특히 주석들을 좀 구해 와야 한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아침 일찍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가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니 부산의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들이 인사를 한다. 부산노회 서부시찰 소속으로서 이번에 서부 유럽 여행을 한다고 한다. 서부 시찰에서만 스무 명 정도 간다고 하니 대단하다.
런던까지는 12시간이 걸렸는데 지루했다. 주일 날 피로가 아직 덜 풀린데다가 아침 일찍 서두르다 보니 피곤하다. 그래도 자지 않고 계속 버텼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려서 암스테르담 비행기로 갈아 탔다. 영국 공항에서 잠깐 느낀 것이지만 영국 영어는 발음이 분명하고 품위가 느껴진다. 약간 차고 거만하다고나 할까. 사람들 모습도 세련되어 보이고 약간 긴장되어 보인다. 대영제국의 도도함이랄까. 현재 경제 위기의 모습은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암스테르담 행 비행기 안의 모습은 판이했다. 편안하고 자연스런 웃음으로 맞이하는 승무원들, 그리고 자연스레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화란 사람들, 여기저기서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나온다. 오랜만에 화란어를 들으니 재미있다. 어느 손님과 승무원이 화란어로 주고받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시골 아가씨 같다고나 할까, 시골 아줌마 같다고나 할까, 편안하고 복스런 스튜어디스가 하는 말이 "오늘이 두 번째 오순절 날이라서 승객이 많다."고 한다. '두 번째 오순절 날' ... 그렇다. 오늘은 어제 성령강림절(오순절)에 이어 화란에서는 휴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휴가를 많이 떠나고 해서 비행기가 만원이다. 이처럼 화란에서는(아마 유럽 전체가 그럴 것이다) 오순절 곧 성령강림절을 국가적인 행사로 지킨다. 물론 지금은 신앙심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저 관습이고 문화일 뿐이다. 그렇지만 성령강림절을 아예 모르고 지키지도 않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여기는 기독교 국가이고 기독교 문화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암스테르담 스킵홀 공항에 내리니 깜뻔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민 목사가 마중 나와 주었다. 오랜만에 네덜란드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니 길이 조금은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밤 열 시가 넘었는데도 바깥이 훤하다. 위도가 높은데다가 서머 타임을 시행하니 밤 열 한 시가 되어야 어두워진다. 그러니 저녁에 전기료가 얼마나 절약되고 또 야외활동하기에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서머 타임을 실시하게 된 배경에는 그런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아직도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는 사상이 보편화되었다. 사실 시간이란 인간이 정하고 약속하기 나름이 아닌가? 우리나라도 속히 서머 타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보란트를 지나 좁은 2차선 도로를 타고 깜뻔으로 들어가는 길, 전에는 버스를 타고 이 길을 자주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오니, 길이 제법 생소하게 느껴지다가도 아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든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 김 목사가 기거하는 집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2층집이다. 오래된 허름한 집, 그러나 합리적인 구조이다. 짐을 풀고 근 열두 시가 되어서 2층에 있는 조그만 침대에 누워서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2010년 5월 25일(화)
오랜 시간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고단해서 깊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현지 시간으로 6시 20분이다. 침대 옆에서 기도를 좀 드리고 씻고서 내려와 김 목사와 함께 간단한 아침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네덜란드 빵과 커피를 먹으니 맛있다. 1985년에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는 빵을 먹는 것을 왜 그리 힘들어했던지 ... 그러나 이제 화란 빵이 맛있고 우유도 좋고 버터와 치즈도 다 맛있다. 사실 네덜란드 유제품은 세계 제일이 아닌가? 물론 우리나라 제품도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역시 품질 차이가 느껴진다. 특히 화란 커피는 진짜 맛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원두로 커피를 내려 마셔도 이 맛이 안 나는데 화란에 오면 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왜일까? 아내가 같이 와서 마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났다.
아침 식사 후에 우선 나의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네덜란드에서는 한번 지도교수는 영원토록 지도교수이다. 영원한 스승, 사부님이다. 지도교수님이 전화를 받으시는데 일흔셋이 넘었는데 목소리는 여전하시다. 사오십대의 젊은이 같다. 오랜만에 지도교수님과 전화로 통화하고 화란 말을 하는데, 다행히 화란어가 귀에 잘 들어오고 또 말이 별로 안 막혔다. 나는 당장 오늘 오후에 아뻘도른으로 가서 지도교수님을 만나 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이리 저리 스케줄을 보시더니만 금요일 오후에 깜뻔에 회의가 있어서 오니까 그때 와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신다. 참,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화란 사람들이다. 내가 이것을 깜빡 잊고 한국식으로 생각하다가 한방 맞은 기분이다. 그래도 지도교수님이 나의 형편을 생각해서 금요일 오후에 와서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데려다주시겠다고 한다. 자동차로 한 50분 거리인데 이렇게 배려해 주시다니 감사하다.
그러고 나서 옛날 친구인 삐어에게 전화하니 그 부인인 요꺼가 받는다. 참 오랜만이다. 전에 깜뻔에서 공부할 때 삐어도 신학생이었고 그 가정과는 친밀한 관계를 가졌었다. 같이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같이 하고 제일 친하게 지냈었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깊이 교제했기 때문에 제일 보고 싶은 친구다. 요꺼가 삐어와 의논하더니만 내일 낮에 데리러 오겠단다. 내일 만나면 그 가정과는 나눌 이야기가 너무 많다.
오전에 김 목사와 함께 아우더스트라트 거리를 오랜만에 걸었다. 감회가 깊었다. 그런데 거리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참 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을 준다. 건물이 오래되어서 낡은 느낌이 들지만, 오래된 건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예술품들이다. 매시간마다 땡그랑땡그랑 종을 치던 시청 앞의 종탑이 보수 공사를 하느라 종을 치지 않아서 좀 아쉽다. 시간마다, 아니 15분마다 종을 치면 마치 중세의 동화 속의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했었다. 깜뻔은 참 아름답고 편안하고 아늑한 도시이다.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긴장이나 불만은 찾아볼 수 없다. 편안하게 마음을 풀고서,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좋다, 아름답다, 고맙다”는 말이 늘 입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간간이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좀 우중충한 여인들이 보인다. 무슬림들이다. 기독교 문화의 유럽에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저 사람들도 여기에 들어와서 살고 있고 ... 참 골치덩어리다. 저들은 똘똘 뭉쳐서 모스크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자기들의 문화를 고집하니 .... 앞으로 유럽이 걱정된다.
도서관에 갔다. 전에 7년 동안 다니던, 아담하지만 책들이 잘 구비되어 있는 도서관이다. 내가 보기에 세계에서 최고다. 미국에도 가보았지만 이처럼 양질의 도서를 잘 구비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 도서관에는 신학석사 학위를 가진 사서가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도서관의 질을 매우 높여 놓았다. 신학자 뺨치는 실력으로 화란어, 독일어, 영어, 불어,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꿰뚫고서 꼭 필요한 책들만을 엄선해서 구비해 놓았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7년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도서관 사서실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몇 달 전부터 풀리지 않던 것 하나를 물었다. 흐레이다너스가 그의 책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약자 H.R.E.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침 오래 전에 은퇴하고서 자원봉사자로 와서 도서관 일을 돕고 있던 메이어 씨가 바로 대답한다. Herzog가 편집한 Realencyklopaedie일 것이라고.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지하실로 같이 내려갔다. 내려가니 흐레이다너스가 소장하다가 기증한 책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거기에 찾던 책들이 쫙 진열되어 있었다. 직접 확인하니 역시 메이어 씨의 말이 맞다. 흐레이다너스는 아마도 그 책들의 제1판을 사용한 것 같다. 그것이 2판을 거쳐서 3판이 나오면서 책 제목이 바뀌고 약자가 바뀌고 또 편집자도 바뀌었던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 와서 몇 달간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를 속 시원하게 풀었다. 또 하나 여기서 들은 비화는 흐레이다너스는 아주 경제적으로 책을 구입했는데, 흐로쉐이드가 사는 책은 자기가 사지 않고 또 자기가 사는 책은 흐로쉐이드가 사지 않고, 이렇게 해서 아주 경제적으로 책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좋은 주석들과 책들을 많이 쓰고 하늘나라에 가자 그 가진 책들을 다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다.
도서관 열람실을 지나 교수 연구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다 옛날에 나를 가르친 교수들의 제자들이 가르치고 있다. 그냥 연구실 문을 두드려 보니 몇 명의 교수들이 있다. 전에 같이 공부하던 G. K.도 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니 대뜸 북한 이야기를 꺼낸다. 저렇게 끔찍한 독재정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문제라고 한다. 그렇지만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할 수 없지 않느냐?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을 위해 오늘도 기도했다고 한다. 참 우리보다 더 우리를 생각해 주니 감사하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으면 북한은 몇 달 못 버티고 무너질 것이라고. 이처럼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진된 것은 결국 그동안 몇십년 동안의 자매관계를 통한 교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처음에 내가 왔을 때에는 한국이 인도네시아 옆에 붙어 있느냐고 질문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한국을 다들 잘 아는 것 같다.
점심시간에는 김 목사와 함께 시내에 나와서 중국 음식점에 들러서 ‘찹초이’와 ‘계란요리’를 시켜서 먹었다. 제일 싸고 무난한 것들을 먹으면서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옛날에는 ‘쉬네이스(중국 사람)’라고 하면 욕이었는데, 요즘은 중국 사람들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그러나 아직은 많이 멀었다. 경제력만 가지고 다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역시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럽은 다른 나라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문화, 소프트웨어, 지적 재산권을 가지고 있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열람실에 앉아 공부를 좀 했다. 옛날 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먼저 화란 주석들을 쭉 살펴보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쭉 찾아서 적었다. 빠진 것들을 이번에 구입해서 가져가고자 함이다. 간간이 메이어 교수와 친구 롤프 목사와 또 다른 친구에서 전화를 하는데 통 받지를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화요일인데, 오순절 휴가는 어제로서 끝이 났지만 오늘까지 휴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다 싶었다.
저녁에는 여기서 공부하고 있는 다른 제자인 구 목사 집에 초대받아 가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 식사 후에도 한참 동안 이런 저런 신학적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에 있을 때 토론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여기에서는 늘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그야말로 신학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머물면서 조용히 연구하고 싶은 마음도 많이 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그리 신학이 재미없는가? 책을 써도 읽는 사람도 없고, 반응도 없고, 도무지 진리에 관심이 없다. 앞으로 가능하면 여기에 자주 와서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5월 26일(수)
수요일 낮에 삐어가 왔다. 14년만에 보니 흰 머리가 약간 있으나 얼굴은 붉고 건강해 보인다. 반갑게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눈 후에 그의 차로 하를링언으로 갔다. 북쪽으로 가는 길도 참 오랜만이다. 넓은 초원에 띄엄띄엄 있는 농부 집들과 소들 풍경은 언제 보나 한가하고 여유롭다. 온 세상이 다 평화로워 보이고 시간이 멎은 것 같다. 1시간 정도 달린 후에 압슬라이트데이크(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제일 긴 댐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항구 도시 하를링언에 도착했다. 삐어와 요꺼는 교회 사택에 살고 있는데, 넓은 거실과 넓은 정원이 좋았다. 부인 요꺼는 신문 배달을 하느라 나가고 없었다. 좀 있으니 요꺼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니 나이가 좀 든 것 같다. 그러나 삐어와 요꺼가 참으로 다정하게 반갑게 맞이하고 내가 온 것을 몹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신앙으로 사는 게 무척 좋았다.
이들은 일곱 자녀가 있는데 큰 아들 시*러는 두 달 전에 결혼했다고 한다. 시*러는 우리 큰 딸 **와 같은 또래로 깜뻔에 있을 때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참 착한 아이였는데 결국 목사가 되려고 아뻘도른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고 이제 곧 졸업한단다. 믿음이 좋은 훌륭한 간호사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둘째 아들 베*민은 흐로닝언에서 법학을 공부한다고 한다. 셋째는 치*리너인데 유일한 딸이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레이던 대학에 들어갔는데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또 치*리너가 남이 안 하는 특별한 것을 하고 싶어서 중국어를 공부한다고 한다. 작년에는 교환학생으로 중국의 지난(제남)에 1년간 갔다 왔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화란을 거의 떠나본 적이 없는 부모로서는 어찌된 일인가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나는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치*리너가 영어 자격증만 따면 중국에서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하기사 삐어와 요꺼는 자기 나라를 떠나본 적이 거의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라 중국이 너무나 멀리 느껴지고 생소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 딸 치*리너가 중국어를 잘 읽고 이해한다니 ... 참 하나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넷째는 다*어인데 음악을 좋아하고 성품이 좋아서 친구들이 많고 그래서 공부 집중이 좀 어렵다고 한다. 베*민과 마찬가지로 흐로닝언에서 법학을 공부한다고 한다. 다섯째는 요*아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1년간 기독교적 생활을 훈련해 주는 학교에 들어가서 훈련받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경건 생활, 그리고 스스로 요리하는 법, 친구 관계 등등 실제적인 것들에 대해 기독교적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정부 보조가 없어서 돈이 꽤 많이 드는데도 기독교 교육을 중요시여기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1년 늦추면서까지 이런 교육을 시키고 있다. 여섯째는 요*인데 고등학교 2학년이고 집에서 다니고 있다. 틈틈이 수퍼마켓에 가서 일을 해서 학비를 벌고 있다. 일곱째 막내는 나*인데 중학교 3학년으로 귀염둥이이다. 집에서 부모와 같이 생활한다.
이들은 식사 전에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해설해 놓은 스퍼전의 책에서 좀 읽는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하니 나*이 떠듬떠듬 대답하고, 잘 못하는 것은 부모가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서 두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한다. 전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적으로 된 것 같다. 우리도 이렇게 자녀 신앙 교육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날짜별로 기도 제목이 적혀 있는 무슨 팸플릿이 있는데 거기에 보니 오늘은 북한을 위해 기도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보다 더 북한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니 감사하고 또 우리 자신이 부끄럽다.
저녁 식사 후에 삐어는 결혼을 앞둔 젊은 남녀를 심방하고 대화를 나누러 가고 요꺼는 교회에서 몇몇 성도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하러 갔다. 매일 저녁에 기도 모임이 있는데 기도할 사람 몇 명이 자유롭게 와서 같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한다. 이번에 와서 느낀 건데 화란 교회 전체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많아진 것 같다. 나에게도 같이 가겠느냐고 해서 웬만하면 같이 가려고 하였으나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지난밤에 두 시간밖에 못 자서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혼자 침대에 좀 누워 있는다는 게 잠에 곯아떨어져서 그들이 돌아온 것도 모르고 계속 자버렸다. 원래는 그들이 돌아오면 저녁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세상모르고 자다가 밤 1시가 되어서 깼다. 시차 적응이 쉽게 안 된다.
2010년 5월 27일(목)
푹 쉬고 일어났다. 아침에 삐어네 가족과 식사를 하는데 먼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 돌아가면서 쭉 기도하는데 나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기도하고 그들은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음식은 그저 빵과 치즈, 홍차 등으로 단순하지만 영의 양식인 말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전에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깜뻔에서 공부할 때 우리 가족과 삐어네 가족은 오랫동안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학교 게시판에 책을 판다는 광고가 붙어 있어서 내가 책을 사러 그의 집에 가서 만난 게 만남의 시작이었다. 다음에 그 집 식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고, 그렇게 해서 만남이 계속되었다. 그들이 새 집으로 이사한 후에도 교제가 계속되었는데, 그 집 큰 아들 씨*러와 우리집 딸 *희는 나중에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학년도 같았다. 서로의 만남은 성경공부로 이어졌고 또 기도회 모임으로 연결되었다. 삐어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때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산상보훈을 공부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이었지만, 그때 은혜가 많이 역사하였다. 삐어는 조그만 공책을 가지고 와서 열심히 받아 적곤 했었다. 나중에 같은 프리슬란트 출신인 시* 페인스트라 가족과도 기도회 모임을 같이 하였는데, 그들은 그 후에 남아공화국에 선교사로 가서 줄루족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삐어네를 만나서 느낀 것이지만 그때보다 더 경건하고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11시가 지나자 한국인 학생(목사) 두 명이 왔다. 프라네꺼에 있는 고서점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해 둔 터였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어서 중국과 아마존에 가서 강의한 사진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 사진들도 조금 보여 주었다. 그러자 요꺼는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연방 말하면서 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어서 전해 달라고 한다. 화란 사람들은 아직도 편지 쓰고 카드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정원에서 점심을 먹는데, 점심시간에는 성경을 해설한 스퍼전의 책에서 한 부분을 읽는다. 이삭과 야곱에 대한 본문 중 일부였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같이 찍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프라네꺼로 갔다.
프라네꺼는 옛날에 유명한 신학교가 있던 곳인데 그래서 엄청 큰 고서점이 있다. 내가 깜뻔에서 공부할 때는 친구들과 함께 프라네꺼에 자주 들렀는데 요즘 학생들은 이 서점을 모른다고 한다. 나는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기보다 내가 찾는 책들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그 중에서 주석과 관계된 것들을 조금 샀다. 그래도 두 박스가 나온다. 운송료가 비쌌지만 우편으로 부쳐 달라고 부탁하고 나왔다. 요즘은 사람들이 책을 안 사서 서점들이 다 어렵다고 한다. 그 유명한 꼭(Kok) 출판사도 위기를 맞이했다고 하니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
깜뻔에 돌아와서 구 목사 집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고는 저녁에 얀 끄라이*가를 찾아갔다. 깜뻔 맞은편의 에이썰마이던에 살고 있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였는데 내가 떠난 후에, 정신적으로 너무 긴장이 되어서 신학 공부는 마쳤으나 목사는 못 되었다고 한다. 근 20년이나 소식이 끊겼는데, 이 친구는 그 후에 계속 혼자 지내다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그러니까 아마도 나이 40이 넘어서 결혼했다고 한다. 16개월 전에 아기를 낳았는데 일찍 태어나서 600그램도 안 되었다고 한다. 엄청 어려웠으나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잉큐베이터에서 잘 자라서 이제 집에 와 있는데 제법 자랐고 이뻐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얀은 이 아기를 엄청 좋아하고 정성껏 돌본다. 조금 있으니 그 부인이 들어와서 같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얀이 전에도 그랬지만 한국 사람에 대해 대단히 다정하게 대한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는데 훌쩍 두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가려고 하자 얀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자기가 기도한다. 전에는 학생들 사이에 이런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는데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화란에도 기도 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고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곤하게 잠들었다.
2010년 5월 28일(금)
오늘은 중요한 만남이 있는 날이다. 오전에는 롤* 판 오* 목사가 왔다. 전에 독토랄 스크립씨(석사학위 논문) 쓸 때 화란어 교정을 봐준 친구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가 좀 있는 젊은 학생이었지만 대단히 예의발라서 사귀고 있다. 13년 전에 왔을 때 그가 목회하고 있는 시골 교회를 아내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자매와 사귄다고 사진을 보여 주었는데 그 후에 결혼하여 지금은 아이가 셋이다. 지금은 깜뻔 가까이의 다른 곳에서 목회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보니 털이 좀 많다. 가족들 사진을 보여 주면서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 친구가 해석학에 관심이 있어서 뒤늦게나마 박사 학위 공부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석학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지도교수인 판 브루헌 교수를 기다렸다. 깜뻔에서 회의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다. 3시가 넘어서 드디어 나타나셨는데, 아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팔팔하시다. 곧 만 74세가 되시는데 오십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신다. 머리는 원래 나이 서른 때부터 하얗게 세었지만 얼굴은 붉은 빛에 건강해 보인다. 그리고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프랑스제 푸조 차를 타신다.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시속 120km로 달리시는데 누가 일흔이 넘었다고 하겠는가? 주석 작업을 지휘하시고 강의하시고 글 쓰시느라 여전히 활동적이시다.
한 시간쯤 달려 아뻘도른에 도착하여 교수님 댁으로 갔다. 전에는 깜뻔의 전망 좋은 곳에 사셨는데 은퇴와 더불어 아뻘도른으로 이사하셨는데 새로 지은 좋은, 저택 같은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바로 앞에 공원이 있고 맞은편에 아뻘도른 신학교가 있다. 오랜만에 사모님을 뵈니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연세가 드신 게 표가 난다. 반갑게 맞이하고 저녁을 손수 지어 주신다. 오랜만에 화란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니 교수님이 성경을 가지고 와서 읽으시고 또 기도하신다. 식사 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화란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경건이다. (갓 출판되어 가지고 온 나의 빌립보서 주석을 지도교수님께 한 권 드렸다.)
또 놀라운 것은 교수님이 웹사이트를 개설하셨다고 한다. 지금 화란에는 목사를 못 구한 교회들이 많아서 장로가 설교를 대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을 위해 설교를 작성하여 올려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서 설교 시간에 읽는다고 한다. vanbruggenpreken.nl 을 치면 화란어 설교들과 글들,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것들을 볼 수 있다. 저의 지도교수님은 오랫동안 늙지 않고 앞으로도 하나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구(공부)를 열심히 하면 잘 늙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은 자녀를 일곱 두셨는데 지금은 다 결혼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다 잘 되고 손자가 총 25명이란다. 그래서 자녀들과 자부들, 손자들이 다 모이면 총 41명이 된다. 큰 아들은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목사가 되었는데 군종 목사가 되어 해군에서 복무하고 또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 왔다고 한다. 마닉스는 한국에도 온 적이 있는데 컴퓨터 보안 계통의 회사를 세워서 6-7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자녀들과 손자들 모두 다 잘 되고 복 받은 훌륭한 가문이다.
그리고 사모님은 전에 우리가 깜뻔에 있을 때의 우리 사진들을 앨범에 고이 보관해 두었다가 보여주셨다. 거기에 보니 내 아내가 경*이를 낳아서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나도 몰랐던 모습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저녁에 교수님이 깜뻔까지 데려다주었다. 사모님도 같이 따라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사모님이 내 아내에게 긴 편지를 써서 선물들과 함께 주면서 전해 달라고 한다. 참 고전적이다.
이렇게 지도교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 동안 못했던 숙제를 한 것 같아 속이 시원하였다. 지도교수님은 2001년 9월 말에 은퇴하셨는데, 그때 나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은퇴식에 가서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려고 하였으나, 그때 9.11 테러 때문에 뉴욕 인근의 공항이 다 폐쇄되어 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어렵게 우체국을 찾아 전신을 보내었는데, 매우 비싸서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 정도 들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얼마나 죄스럽고 송구하였던지 ... 그러나 이번에 와서 그때 공항이 폐쇄되어 오지 못하였다고 말씀드리고 나니 그 동안의 죄가 다 용서받은 듯 속이 시원하다. 감사하다.
2010년 5월 29일(토)
이제 중요한 일은 거의 끝났다. 메이어 교수님을 만나 뵈어야 하는데 여전히 연락이 안 된다. 아마 휴가를 떠나신 것 같다(나중에 들으니 독일에 휴가 떠나서 내가 떠난 후에야 돌아오신다고 한다. 못 만나뵈어서 대단히 유감이다). 오전에는 수퍼마켓에 들러 선물을 조금 샀다. 그런데 결제를 하려고 신용카드를 내미니 신용카드는 안 받는단다. 세상에 비자 카드를 안 받는다니 ... 여기가 중국도 아니고 아프리카도 아니고 선진국 네덜란드인데 ... 겨우 현금을 털어서 계산을 하였다.
점심시간에는 성 목사의 아들 유*이가 왔다. 여기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예비과정을 끝내고 1학년 과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식사 후에 유*이가 사는 학교 기숙사를 잠깐 구경하고 나서 그냥 걸었다. 아름다운 공원을 지나 옛날에 살던 동네로 갔다. 추억을 되살리는 데는 자동차보다 걷는 것이 최고다. 그런데 길이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길이 똑발랐는데 지금은 교차로를 전부 로타리로 만들어 놓았다.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옛날과 달라서 좀 어색했다. 오픈호프를 지나 옛날에 살던 야꼽까츠스트라트의 아파트를 보았다. 저기 4층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집이 보인다(279번지). 저기서 6년 반을 살았다. 처음에는 아내와 갓 돌 지난 **가 왔었는데 여기서 **이가 태어나고 **이가 태어났다. 아파트 뒤를 보니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딴 동네가 되어 있었다. 전에는 넓은 초원에 소들과 양들이 한가히 풀을 뜯고 있었는데 지금은 온통 집들이다.
옛날 기억을 더듬어 판 데*크 장로 집을 찾아가니 아무도 없다. 아마 어디 간 모양이다(나중에 들으니 영국에 휴가 갔다고 한다). 떠듬떠듬 기억을 더듬어 베*마 교장 집을 찾아가니 마침 그 교장과 부인이 있다. 부인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들지 않았고 건강해 보인다. 교장은 4년 전에 은퇴했는데, 지금은 분리되어 나온 교회에 다닌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교장 집은 매우 경건하고 친절한 가정이었는데 자녀가 일곱이다. 연말이 되면 부인이 '올리발'이라고 하는 도너츠를 만들어서 우리 집에 갖다 주었다. 한번은 우리 가족이 주일 날 오후에 이 집을 방문하였는데, 우리 집 식구 5명과 그 집 식구 9명이 거실에 앉으니 수북하였다. 부인이 와서 과자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과자를 못 받은 사람 누구니?"라고 물으니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아이가 손을 들면서 "저요"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자녀가 많은 가정의 복에 대해 설교할 때 이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자녀들은 지금 다 결혼해서 따로 산다고 한다. 이래저래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저쪽 문에서 한 가족이 들어온다. 바로 그 집 딸 엘리자베트였다. 남편과 자녀 셋을 데리고 잠깐 부모를 방문 온 것이었다. 바로 이 엘**베트가 그때 손 든 딸이었다. 그때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던 같은데 지금은 목사와 결혼하여 자녀 넷을 두었다고 한다. 한 명은 축구를 좋아하여 축구하느라 못 데리고 왔다고 한다. 엘**베트가 당시에 대단히 예뻤는데, 보니까 그 딸 아이가 엄마를 닮아서 대단히 예쁘다. 이렇게 해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가 보다.
그 집을 나와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중심가 거리에 오니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젊은이 두 사람이 길에다 판때기를 세워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투표하라고 한다. 보니까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적혀 있다. 찬성하면 "예"에 한 표, 반대하면 "아니오"에 한 표 적으라고 한다. 나에게도 부탁해서 나는 "예"에 한 표 찍었다. 보니까 "예" 쪽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직도 깜뻔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주일날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경건한 도시라고 한다.
저녁에는 어떤 화란 사람 집에 초청받아 같이 갔다. 젊은 부부인데 남편은 컴퓨터 계통으로 일하고, 부인은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부부 다 마음이 열려 있고 화통하게 우리를 맞이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녀가 셋 있는데 보니 전부 다 피부색이 검은 아프리카 아이들이었다. 셋 다 딸인데 입양해서 키운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잘 키워서 아이들이 다 명랑하게 잘 자라고 있다. 식후에 성경을 읽고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기도를 시키는데, 둘째 딸 노아가 오랫동안 기도한다. 탄자니아 아이 두 명을 이 가정이 후원하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충분한 음식을 얻고 충분한 옷을 얻도록 기도한다. 유치원 1학년 정도의 나이인데 화란말도 잘 하고 기도도 아주 잘 한다.
부인은 깜뻔 시 의원 31명 중의 한 명이다. '크리스턴 우니'라는 정당 소속의 시의원인데, 크리스턴 우니는 깜뻔 시의회에 총 7명을 당선시켜서 제1당이라고 한다. 화란 국회(하원) 의원은 총 150명인데 그 중에서 '크리스턴 우니' 소속 의원이 6명이며, 최근에는 연정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통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단 소속 교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내가 있을 때에는 이 정당 소속 의원은 2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다른 기독교 정당과 연합하여 의석 수가 6개로 늘어나고 드디어 연정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로 연정이 무너져서 곧 투표한다고 한다.
한참 동안 웃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오니 좀 피곤하다. 그러나 마음은 뿌듯하다. 그리고 이 젊은 부부도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힘쓰려고 하고 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지금 화란에서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세속화가 진행되어 교회가 약해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010년 5월 30일(주일)
오늘은 주일이다. 어느 교회로 갈까 망설여졌으나 바자인(나팔) 교회로 가기로 했다. 전에는 교단 소속 교회가 하나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세 개나 된다. 유도끼아 교회가 너무 커서 분리 개척한 교회가 바자인 교회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 뒤로 생겨난 새 주거단지 안에 지어진 현대식 교회인데 지붕 모양이 좀 이상하다. 하여튼 현대식 건물은 옛 건물에 비해 멋이 없고 예술성이 모자란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의 다 이사 가고 새로 온 사람들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휴가 가고 해서 그런지 없다. 목사도 휴가 가고 딴 사람이 설교한다.
예배 의식도 많이 바뀌었다. 전에는 목사 혼자서 예배의 모든 순서를 다 인도했는데, 지금은 장로가 나가서 앞에서 교회 광고를 한다(목사가 휴가 가고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또 성경 봉독은 어떤 여성도가 나와서 한다. 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설교는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서 예도 들고 하는데, 깊이는 좀 덜 한 것 같다.
오후 예배는 유도끼아 교회로 갔다. 여기에는 아는 사람들이 좀 있으리라 생각하고 갔는데 영 없다. 목사도 휴가 가고 없고, 또 교수들 가정도 통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도 아는 사람이 없다니 ... 겨우 한 두 가정 정도 보인다. 그리고 전에는 교회가 오전, 오후로 꽉 찼는데 지금은 오후에 많이 빈다. 전에는 1,120명 교인(어린아이 포함)이 있었고,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 출석이 같았는데 이제는 오후 예배에는 사람들이 적게 온다고 한다. 신앙 열심이 많이 식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것이 1992년이었는데, 그 다음 해에 데꺼 목사가 암으로 갑자기 죽었다. 훌륭한 목사가 죽고 나자 교회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호헌도른 목사와 당회 사이에 알력이 생기고 ... 그래서 급기야 2004년에 교회가 분리되었다고 한다. 많은 분쟁 끝에 호헌도른 목사를 해임하였고, 그래서 호헌도른 목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가서 익투스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전에 내가 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전에는 모든 것이 신사적이고 원리적으로 되어서 이 교회 교인들을 마음으로 존경하였다. 좀 교만한 것 빼고는 아주 훌륭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기들 사이에 온갖 비난과 공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육탄 충돌은 없었다.)
오후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니 왠지 허전하다. 주일이 즐겁지 않고 주일 날 아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없으니 영적으로 공허하다. 전에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고 알던 사람들은 이미 거의 다 하늘나라로 갔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이 교회, 저 교회로 흩어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신실한 분들도 휴가를 떠나고 없다.
저녁에 조용히 집에 있는데 친구 얀 끄라이*가가 찾아오겠다고 한다. 조그만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보니 루터의 유명한 말들을 모은 어록집이다. 얀이 다정하게 대해 주니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글을 화란어로 번역하려고 하는데 교정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꺼이 해 주겠다고 한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얀은 자전거를 타고 자기 집으로 갔다.
2010년 5월 31일(월)
오늘 오전에는 하크 교수를 방문하였다. 학교 옆 건물에 연구실이 있다. 찾아가니 너무 반가워서 놀란 표정을 한참 동안 짓는다. 오랜만에 보니 머리가 많이 빠지고 거의 대머리가 되어 있다. 전에 1996년인가 97년쯤에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그때 부산의 우리 집에 며칠을 묵었다. 그리고 주일에는 연산동에 있는 연희 교회에 가서 설교도 했다. 그때 에베소서 4:12에 대해 설교했는데 인상적이었고 많이 배웠다. 그리고 나서 14, 5년만에 보니 많이 변했다. 그 사이에 아프기도 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아프리카와 인도에도 가고 인도네시아에도 가고 했다고 한다. 한국에도 한 번 더 오고 싶어 한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가 그의 모토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Think globally, act locally and globally."라고 하였다. 하크 교수는 인도네시아 옆에 있는 이리안 자야에서 13년간 선교 사역을 해서 그런지 마음이 넓고 세계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화란 사람들 말로는 "Vrije vogel"(자유로운 새)이라고 한다.
오후에는 아뻘도른에 있는 판 드 깜프 목사를 방문하였다. 이 목사는 요한계시록 연구로 판 브루헌 교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인데, 요한계시록에 대해 좋은 주석을 출판하였고, 내가 즐겨 참조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깜뻔에서 공부하고 있는 구 목사와 함께 가서 방문하니 서재로 안내한다. 책들이 수북이 둘러 있고 한쪽 귀퉁이에 컴퓨터를 두고서 작업하고 있다. 지금 히브리서 주석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엄청 바쁜데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만난 것이다. 알고 보니 옛날에 박성복 목사와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인품이 좋아 보이고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깜뻔에 돌아와서 아우더스트라트에 있는 서점에 둘러 책을 좀 구입하고 집에 돌아왔다. 역시 깜뻔은 강이 있고 옛 거리와 옛 건물들이 있어서 좋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이다. 이 도시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이 아름다움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1일(화)
오늘 낮에는 호헌도른 목사를 방문하였다. 아무래도 이 목사를 만나야만 현재 이 교단 소식과 신학교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현재 이 프레이허막트 교단에 매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교에 대한 비판과 염려가 많다. 성경 비평과 여자 직분 문제, 동성연애 문제 등등. 그래서 호헌도른 목사를 만나서 좀 물어봐야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호헌도른 목사는 기꺼이 만나겠다고 해 주었다. 한 30여분을 걸어서 그의 집을 찾으니 그와 그의 부인이 반갑게 맞이한다. 근 20년 전에 볼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 보이고 인자해 보인다. 그리고 옛날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하고 경건해 보인다. 할 말이 많은지 줄줄 이야기한다. 현재 이 교단이 개혁교회의 전통을 떠나 점점 세상적으로 되어 가고 변질되어 가는 것을 이야기했다.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적 경향도 매우 우려스럽다고 한다. 최근에 아얄론 골짜기에 태양과 달이 머무른 사건(여호수아 10:12-15)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적 표현으로 본 박사학위 논문이 이 학교에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노아 방주의 역사성도 믿지 않는 목사들도 많다고 한다. 하여튼 서양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믿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캐나다 개혁교회는 화란의 이 자매교단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하였다고 한다.
호헌도른 목사는 결국 이 교단에서 나와서 6년 전에 새롭게 교회를 시작하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국 성향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뜻을 같이 하는 교회들을 찾고 있으며 앞으로 국제 관계도 모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여러 자료들을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충성하던 교단이 이렇게 갑자기 변질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성경을 떠나 세상을 따라가고 넓은 길로 가려고 한다고 한다. 확실히 지금이 말세는 말세인가 보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화란에서의 마지막 몇 날은 이런 교회 상황과 영적 상황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고 우울하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기도를 많이 해야겠다.
2010년 6월 2일(수)
네덜란드 방문 마지막 날이다. 열흘간의 방문 일정은 너무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고 딱 좋은 것 같다. 오랜만에 지도교수와 여러 교수들을 만났고, 또 친구들을 만났다. 또 필요한 책들을 사고 현재 교회와 신학교 현황에 대해 좀 들었다. 단지 메이어 교수를 만나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짐을 다 챙기고 오후에 구 목사의 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스킵홀 공항으로 갔다. 돌아가는 마음은 만족과 아울러 착잡함이다. 만족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교수들을 만나고 좋은 관계를 가진 것이다. 원하던 책들도 좀 구입했다. 오랜만에 먹는 화란 빵과 커피도 만족을 더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큰 아쉬움과 씁쓸함이 있었다. 그것은 전에 그렇게도 성경에 충성하던 교회와 신학교가 이렇게도 빨리 무너지다니 ... 가슴이 아팠다. 물론 아직 완전히 무너졌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으니 돌이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영성의 부족이 문제이다. 전에 공부할 때 보니 신학생들이 오직 머리만 가지고 말과 토론을 즐기더니 결국 마음이 비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변질은 시간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개혁교회 교단은 과거에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었다. 목사와 장로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조차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이렇게도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다니 ... 너무나 빠른 속도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놀란다고 한다. 신오달 교단이 25년에 걸쳐서 한 것을 프레이허막트 교단은 5년만에 했다고 한다. 과거에 너무나 지나치게 자기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서 과거의 전통을 허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제야 눈을 떴다고 말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더 큰 문제이다.
돌아오면서도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교회도 변하고 신앙도 변한다. 특히 말세가 되니 순수한 믿음은 점점 사라지는구나.” 그래도 성경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데, 성경 비평을 수용하면 큰일이다. 그러면 말세에 참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의 조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그래도 참 신앙의 성도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어제 오후에 호헌도른 목사 집에서 두 시간여 동안의 대화 끝에 일어서고자 할 때 호헌도른 목사가 기도하자고 하면서 한참 동안 기도한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저께 하크 교수도 오랜 대화 끝에 기도하자고 하면서 기도했다. 친구 얀 끄라이*가도 대화 끝에 일어서기 전에 기도하자고 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삐어네 가족도 식탁에서 구체적으로 많이 기도해 주었다. 지금 화란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도 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 성령의 바람이 분다고나 할까.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의 바람, 타락의 바람이 거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약하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다. 프레이허막트 교단 안에도 '실망한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개혁 신앙을 고수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eeninwaarheid.nl, gereformeerdblijven.nl를 보면 최근의 동향을 알 수 있다.) 호헌도른 목사도 조만간에 웹사이트를 개설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학교 교수들과의 관계도 강화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이들을 한국에 많이 초청해서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또 가능하면 내가 쓴 글을 화란어로 번역해서 이곳에 보내어 이 교단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사명도 느꼈다. 자매관계란 것이 말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끝까지 성경에 충성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자매교회 된 고신교단 소속의 목사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다.
어쨌든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연구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은 나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점들이 많이 있고, 세상에서 아주 매력적인 나라이다. <끝>
첫댓글 생생한 방문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유튜버 채널에 캄펀 공원 사진(동영상) 있습니다.유튜브에서 "변종길"을 쳐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