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轉車 의 歷史
1. 公州의 自轉車歷史
1894년 9월4일자 지방제도가 13도제로 개편됨으로 충청남북도로 분류되고 공주는 충남의 수부로써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1899년의 군산개항을 계기로 금강수운의 수부역활을 수행하며 정치적, 경제적 중심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기능은 1900년대초 철도교통로가 개통됨에 따라 큰 변혁을 가져왔다.청일전쟁이 끝난뒤 일제는 한국에 대한 특별권리를 얻음으로써 대륙침략을 위한 기반을 굳히게 되며 경부철도가 경성, 공주, 부산간을 연결하도록 계획되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사정이 급박해진 일본은 남은 기간을 단축시킨다는 이유로 대전로선으로 변경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이 새로이 개편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본인 직원이 최초로 자전거를 공주에 공급하였으며 당시 도청소재지이며 교육과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던 공주는 비교적 경제력이 넉넉하여 고가의 자전거를 손쉽게 구입하여 타고다녀 생활환경의 변화를 가져온 공주의 자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1920년 10월 중학정수장 건설부터 수량이 증가하여 현재 시민의 교통수단과 레져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듯 자전거는 시민의 건강과 자연환경의 보전, 에너지절약, 국민소득증대등 미래 지향적인 산업이기 자전거타기를 시민생활의 한부분으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2. 世界史
탄 사람의 힘으로 자주(自走)한다고 하는, 간단하고 또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자전거도 의외로 그 착상은 오래 되지 않았다. 앞뒤로 한 줄로 세운 두 바퀴를 설치한 차체에 타고 발로 지면을 차며 달린다고 하는 착상 가운데에서 가장 오랜 것이라고 보이는 것은 런던 근교 스토크포지에 있는 세인트자일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것이고 1642년의 것이라고 한다. 일반에 유포되고 있는 그림 가운데에서 많은 것이 실제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다르며, 여러 사람의 손이 가해져 별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자전거의 역사에는 억지가 많으며 기술이나 인명 또는 연대·출처의 부정확성, 도면의 신뢰성 등이 눈에 띄게 낮다. 자전거의 발명은 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 등의 각국이 자기 나라가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어떤 형태의 것을 최초의 자전거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① 자력(自力)으로 달리는 2륜차(1790) ② 조향(操向)이 가능한 2륜차(1816∼18) ③ 지면에 발을 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2륜차(1839) ④ 앞바퀴를 페달로 회전시키게 된 2륜차(1861) ⑤ 페달에 의한 회전을 체인으로 뒷바퀴에 전달하는 차(1869) 등이 그 형태이다.
어쨌든 오늘날과 같은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910년대이다. 한국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한 개화시대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서양의 선교사나 개화파 인사들이 처음 들여왔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자전거의 발전은프랑스 귀족들의 놀이를 위한 것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혁명 당시의 상류사회 인사들이 애용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레저용구로서 널리 보급되었다. 이즈음 한국은 서양문물과의 교류가 전혀 없던 터여서 자전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자전거의 제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수리용을 주로 한 부품의 생산에서 시작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파이프의 생산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3. 韓國史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개화기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희성(高羲誠)이 1896년에 장안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것이 처음이라고 하고, 같은 해 서재필박사가 독립문 신축현장에 갈 때처음으로 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자전거를 '괴물차' 혹은'나르는 새' 라하며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약2년이 지난 1898년에 윤치호(尹致昊)가 하와이로부터 도입해 왔는데이것이 두 번째다. 통 타이어를 사용한 이 자전거는 매우 엉성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굴곡이 많은 길을 종횡 무진으로 달리는이 자전거는 심지어 '자행차(自行車)' , 또는 '축지차' 라는 별명까지 생겨 큰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차츰 한 대씩 들어오게 되었는데, 1903년 가을에는 조정의 관리들을 위해 1백대의 자전거를 도입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자전거의 인식이 호전되었음을알 수 있다. 그후 자전거는 교통 수단으로 그리고 운반 수단으로 그 사용이 크게 늘어났다. 공주의 자전거 역사는 1910년부터 행정의 효율성을 돕기 위하여 각면에 자전거 보급이 있게되었다. 이때 보급된 자전거는 주로<라지>와 <후지>자전거가 주로 보급되었다. 자전거의 크기는 28인치로 한국사람에게는 높아서 타기가 힘들었으며 브레이크는 발로 사용되는 고시다 였다고한다. ※ 당시 자전거의 가격은 약 30원(쌀1가마 3원이므로 10가격)이나 되는 엄청난 가격이었다. 또한 1928년경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이용설은 여가선용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자전거 제조는 수리용을 주로한 부품의 생산에서 시작되어 1950년 후반에 이르러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1994년도에는 118만6천4백대를 생산하여 세계주요 자전거 생산국이 되었으며, 차종도 실용 중심에서 레저용 등으로 다양화되었고 수출도 많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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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6년은 공주의 자전거 역사를 새롭게 쓰는 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 "공주바이크"가 탄생한 해이잖아요..화이팅!!
자전거 역사공부 자알 했슴다 고마워유!! 늘 같이 해도 자전거대해 알지 못했는데...울 바이크 마을이 아름답고 활기찬 행복한 마을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