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한산도 대첩과 관련하여 사이트에서 퍼온 글 입니다.
한 번 잃어 보시고 다음주 드라마를 보면 재미가 더 할 듯 하군요
1 . 왜군의 대책
왜군은 육전에서는 연일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는 반면 해전에서는 연전 연패하여 전선 및 병사의 손실이 막대할 뿐 아니라 남해 연안부터 서해 연안까지 점진적으로 왜성을 쌓아 서해로 우회하여 한강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내륙지방은 조령, 추풍령 등 험준한 산악이 많아 군수품 보급로가 되지 못한다. 이미 보급선(補給船)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고 때가 마침 보리고개라 군량의 현지 조달도 여의치 못하여 보급에 적신호가 발생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조선의 청야작전(淸野作戰)은 철저하여 어려움을 더하였다. 그러던 차에 구주의 나고야 본진에 있는 풍신수길은 해군의 연속되는 패전소식에 크게 노하고 서해 돌파없이는 침략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판단아래 수륙양면의 새로운 공격부대를 재편성하여 건곤일척의 총공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풍신수길은 조선에 파견되어 있는 수군 장수들을 총망라하여 대단위 함대를 편성하였는데 선봉장에는 협판안치(脇坂安治)를, 중군에는 구귀가융(九鬼嘉隆)을, 그리고 가등가명(加藤嘉明)을 참모로 삼아 서해 돌파 작전에 나서게 했다. 이들 3인은 그동안 육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협판안치는 중무소보 (中務少輔)의 관직을 가진 일본 병고현(兵庫縣)의 3만석 대명(大名)으로 개전이래 최대 규모인 5만 조선군의 최대저항이 있었던 용인전투에서 난마쾌도(亂麻快刀)로 단 30분만에 조선대군을 패주케하여 실질적으로 조선 지상군의 예봉을 완전히 꺾은 명장이요, 구귀가융은 해군장관격인 장수로 대외수(大외守)의 관직에 있던 삼중현(三重縣) 3만5천석의 대명으로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아 조선 침략을 위하여 각 영주들에게 병선 건조를 할당 독려했던 수군장이요,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형 거북선과 철갑선 건조에 힘썼다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왜의 수군에 있어서 협판안치와 등당고호(藤堂高虎)가 전투를 잘하는 맹장이라면 구기가융은 전략가형의 장수였다. 그리고 부사령관이자 참모인 가등가명은 어릴 적부터 풍신수길이 양육하여 전쟁터마다 데리고 다닌 가신으로서 좌마조(左馬助)의 관직에 있 던 애원현(愛援縣) 6만석의 대명이었다. 이 수군 편성만 보아도 왜국은 서해 돌파작전에 얼마나 애를 쓰고 있 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와 동시 육군은 백전의 용장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과 입화통호 (立花通虎) 그리고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으로 하여금 3만의 정병(精兵)으로 전라방면의 공격을 명령하였다. 육군의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은 서울 이북지역에서 각각 할당된 영지 건설에 착수하였기 때문에 이번 동원에는 빠지게 되었다. 평양성의 소서행장과 종의지는 그들의 수군이 서 ·남해를 둘러 북상하여 대동강을 통하여 평양성에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히 육지에서는 전주성, 금산성, 이치, 웅치에서 전투가 개시되고 바다에서는 저 유명한 한산해전을 시발로 안골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전이 숨가쁘게 전개되었다. 일본 나고야 본영에서는 이 협공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수륙군이 평양에서 만나 대열을 재정비, 수륙병진하여 명나라 진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 조선(전라감영)의 대응
조선군은 임금과 조정 중신들마저 피란가고 전 국토가 왜병에게 유린 당하여 오직 전라감영만이 살아남아 가까스로 전쟁수행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인솔한 4만 관군과 충청순찰사 윤국형(尹國馨) 그리고 경상순찰사 김수(金수)의 병사 1만, 총 5만의 근왕군이 편성되어 6월 7일 용인에 있는 북두산 전투에서 회심의 일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단단히 믿었던 근왕군마저 협판안치에게 역공을 당해 개전 불과 반시간 만에 전군이 참패, 궤멸되어 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걸려 있게 되었다. 그 북새통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은 스스로 전주성 방어차 북상을 서둘렸고 고경명(高敬命)이 이끄는 조선 의병군이 처음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오직 해전에서만은 조선수군의 선전으로 겨우 전라도 땅을 지키며 척의 서해 우회를 봉쇄하고는 있었으나 경상우도의 정보로는 요즘 10에서 30여척에 이르는 왜의 선단이 자주 출몰하고 있어 또다시 수륙 양면에 왜적의 이상동태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급한대로 전라함대로 하여금 이에 대응토록 하는 초비상 전국에 돌입하고 있었다. |
3. 이순신의 제 3차 출동 준비
2차 출동에서 돌아와 부상병 치료, 선박과 무기 수리 등의 일로 한참 바쁜 와중에 육지쪽의 왜적이 전라도 공략을 서두르고 이에 왜의 수군도 호응하여 서진(西進)하는 기미가 있다는 정보가 계속 입수되어 이순신은 다시 출동의 뜻을 굳혔다. 7월 4일 약속대로 이억기 함대가 여수 본영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지난번에는 양 함대가 당포 해상에서 조우하여 철저한 합동훈련을 할 겨를이 없이 곧 바로 당항포 해전에 뛰어 들었으나 이번 3차 출동에는 전라우수영 함대가 미리 왔으므로 7월 5일 좌우 함대의 합동기동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정보도 분석하고 다가올 해전의 공동작전을 세웠다. 다음날 7월 6일 함대가 발진하여 경상우수영 함대와 노량에서 합류, 창선도에 정박하여 밤을 새웠다. |
4. 당포 김천손의 황금정보
7월 7일 동풍이 세차게 불어 힘든 항해 끝에 또 다시 전진기지인 당포에 도착하여 식수와 연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 당포의 목동 김 천손(金千孫)이 우리 배를 보고 급히 달려와서 전하기를 “오늘(7월 7일) 2시경 왜선 대.중.소선 합하여 약 70여척이 영등포와 거제를 거쳐서 지금 견내량에 닿아 있다”고 하였다. 김천손은 이곳 목관(牧官:군마를 돌보는 직) 밑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김천손이 전하는 정보 내용은 해전이 끝난 뒤에 밝혀졌지만 적 함대의 척수, 이동경로 및 이동시간 등이 아주 정확하여 조선함대가 앞서 해전의 대세(大勢)를 장악하는데 결정적 정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견내량에 왜선이 오후 2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당일 20km의 거리를 약 4시간만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힘들여 달려왔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함대는 이 정보를 기초로 제장들과 밤샘 작전회의를 통하여 필승의 결의를 다쳤으며, 다음날 7월 8일 아침 일찍이 적이 정박하고 있는 견내량 해역으로 달려갔다. |
5. 적정
우리 함대가 견내량 바깥 바다에서 적진을 바라보고 있을 즈음에 왜의 척후선 2척이 우리 함대의 동태를 살피고서 자기들 본진으로 쏜살같이 되돌아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왜의 수군은 이미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을 조선수군의 예상항로에 배치해 두고 정탐 중이었으며, 우리 척후선이 추격하자 그들의 선단으로 재빨리 되돌아 갔다. 가까이 추격하여 확인해보니 왜의 수군의 함대는 우리 함대보다 규모가 큰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의 대선단이었다. 이들은 나고야에 있는 풍신수길의 명을 받아 지난 6월 14일에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전비를 갖추어 웅천에 일단 집결하였다가 제일 먼저 출발한 협판안치가 이끄는 제1제대 소속 함대 73척이었다. 나머지 제2제대와 제3제대 소속 함대는 견내량에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서해돌파작전에 동원된 왜의 전선수는 총 115척이었다. |
6. 견내량의 지형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 반도가 만들어낸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300 내지 400m의 좁은 해협이다. 이 해협은 부산, 마산 방면으로 향해하는 많은 선박으로 붐비는데 해협 양쪽 입구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하고 물살이 거셀 뿐 아니라 바다 밑에 암초가 많아 옛날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이런 좁은 해협은 배를 붙이고 적선에 기어올라 단병접전을 주전법으로 하는 왜의 수군에게는 더없이 좋은 지형이지만 피아간의 함대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익진을 펴고 적선을 향하여 일제타방(집중포격)을 주 전법으로 하는 조선수군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지형이었다. |
7. 유인전
이순신은 한산해전을 이긴 후 조정에 보낸 장계(狀뺨)에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 해전하기가 어렵고 또 왜는 전세가 불리하면 육지에 상륙하여 도망갈 수도 있으므로 한산도 앞 바다 한가운데까지 유인하여 때려 잡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현 통영) 중간에 있는데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어서 상륙하더라도 굶어죽게 될 것이므로…”라고 하여 한산해전을 유인, 매복, 학익진, 집중포격, 아사의 단계작전으로 임했음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먼저 판옥선 5, 6 척을 보내어 도망친 왜의 척후선을 추격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은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왔다. 이에 사전 명령에 따라 우리 추격선은 물론 전 함대가 후퇴하자 왜적들은 기세가 올라 우리 수군을 쫓아 넓은 바다로 나왔다. |
8. 학익진과 일제집중타방
조선수군은 계속해서 도망을 가고 기세가 오른 왜군은 맹렬히 추격을 하여 거의 한바다에 이르렀다. 그때 근처의 방화도와 화도에 매복해 두였던 조선 주력함대가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 쫓기고 있던 전선을 엄호함과 동시에 기함의 명령일하에 선수를 일제히 왜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마치 합죽선을 펼치듯 학익진을 만들어 추격해오는 왜군을 향하여 역진(逆進)하였다. 이어 각기 지자, 현자, 승자 등 각종 총통을 쏘기 시작하여 먼저 2, 3척을 깨뜨리자 왜적은 주춤하고 도망할 기미가 보였다. 기세가 오른 조선 장수와 병사들은 서로 다투어 돌진해 들어가 화살과 탄환을 교대로 퍼부었다. 적은 조선수군의 집중포격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고, 조선 수군은 삽시간에 적선을 모두 깨뜨리고, 포획하고, 불태웠으며 수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왜병 약 400명은 형세가 궁하자 이순신이 예상했던 대로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올라갔다. 그 날 조선수군은 종일 접전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피곤한데다가 황혼이 찾아와 궁한 척을 더 쫓지 않고 견내량 한쪽 바다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날 7월 9일에는 적선을 찾아 가덕으로 향하던 중 거의 같은 시간에 왜군장수 구귀가융과 가등가명의 40여척이 부산에서 가덕도를 거쳐 안골포로 향하고 있었고 그것이 조선의 척후선에 포착되었다. 하지만 날이 곧 저물고 바다에 바람도 거세 온천량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새벽 안골포로 출동하여 그곳에 정박하고 있던 층루선과 대선을 수없이 파괴하였고 살아남은 왜군은 모두 포격을 피하여 육지로 도망갔다. 7월 12일 이순신 장군이 안골포 해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산도에 도착하여 보니 상륙했던 왜군들온 며칠을 굶어 걷지도 못하고 지쳐서 해변에서 졸고 있는 것을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머리 셋을 베고 나머지는 도망할 길이 없어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았다. |
9. 전과
순천부사 권준(權俊)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 왜의 층각 선 1척을 깨뜨려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하여 수급 10개를 베었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앞서 돌격해 들어가 층각선 1척을 사로잡았으며 왜장을 쏘아 맞추어 잡아왔다. 이 왜장은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했고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목을 베었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대선 1척을 사로잡고 왜장을 비롯한 수급 16 개를 그리고 홍양현감 배흥립(裵興立)도 대선 1척을 사로잡고 수급 8개 를 베었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대선 1척을 완전히 깨뜨리고 수급 4개를 그리고 좌돌격장 이기남(李奇男)은 대선 1척을 사로잡고 수급 7개를 베었다. 좌별도장이며 군관인 전 만호 윤사공(尹思恭)과 가안책(賣安責) 등은 층각선 2척을 사로잡고 수급 6개를,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대선 1척을 사로잡고 수급 7개를 베었다. 녹도만호 정운(鄭運)은 층각선 2척을 불사르고 총통으로 속까지 꿰뚫린 적선을 여러 척 협공하여 불사르고 수급 3개를 베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 2명을 도로 찾아왔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대선 1척을 사로잡고 수급 3개를,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1척을 협공하여 깨뜨리고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리고 유군 1영장 손윤문은 소선 2척에 총을 쏘고 산 위에까지 적을 추격하였고, 오영장 전 봉사 최도전은 우리나라 소년 3명을 도로 빼앗아 왔다. 우별도장 전 만호 송민은 수급 2개, 흥양통장 전 현감 최천보(崔天寶)는 수급 3개, 참퇴장 전 참사 이응화(李應華)는 수급 1개, 우격돌장 급제 박이량은 수급 1개, 그리고 기함에서 수급 56개를 각각 베어왔다.기타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은 전라좌 ·우도 여러 장수들이 합력하여 불태움으로써 조선수군은 층각선 6척, 대선 29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모두 59척의 적션을 사로잡거나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살아 도망친 왜선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으로 모두 14척에 불과했다. 이들은 전투개시 때부터 뒤에 물러서 있다가 틈을 보아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사살된 적병수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다음과 같이 추산해 보기로 한다. 대선 35척×200명=7,OO0명 중선 17척×100명=1,700명 소선 7척× 40명= 280명 계 8980명 위의 척당 송선 인원은 당시 통상적인 왜의 전선의 승선인원을 기초로 한 것인데, 이 숫자는 임진왜란 중 왜국에 붙잡혀 갔다가 탈출하여 돌아 온 전 경상우수군 군관이며 전 훈련원 봉사였던 제만춘(諸萬春)이 그곳에 잡혀갔을 때 보고 온 왜의 《병량조발건기(兵糧調發件記)》에 기록된 병원의 감소내용과 거의 같다. 그 기록에 의하면 협판안치 휘하의 병사가 처음에는 1만명이었는데 9,000명이 줄어 1,000명이 되어 있었다 한다. |
10. 한산해전의 세계사적 의의
이순신의 제 1차, 2차, 3차 출동기간에 전개되었던 여러 해전은 이 한산해전을 제외하면 해전의 형태와 규모에 있어서 모두 비정규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구에 전선을 정박한 채 마을에 상륙하여 약탈 중인 왜군을 조선수군이 기습공격한 말하자면 게릴라 작전과 같은 해전이었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등 규모가 큰 해전도 모두 그러했다. 그러나 한산해전은 완전히 달랐다. 조선측의 전라 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연합함대와 그동안 육전에 종사하던 왜의 수군장들이 총망라되어 남해안에 집결하여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싸운 말하자면 양국의 주력함대끼리의 총력전이었다. 그리고 조선에게는 국가의 존망이, 왜국에게는 전쟁의 승패가 걸린 한 판 결전이었다. 조선수군의 대승으로 끝난 이 해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까지 왜군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모든 전선에 걸쳐 소극적, 수세적 군사활동만을 하도록 만들었다. 조선수군의 승인(勝因)은 우수한 함재포와 거북선 및 판옥선과 같은 전투력이 뛰어난 병선 그리고 이순신의 천재적인 전략과 전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수군은 뒤떨어진 조선기술과 포함전술의 부재 그리고 개전 후 육지 쪽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해 온데다가 지난 용언전투에서 조선 5만 근왕군 의 허상(虛像)을 직접 목격한 협판안치의 자만심이 패전을 초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진왜란과 거의 같은 시기(1588년)에 지구의 건너편 유럽에서도 신흥 해양국가인 영국과 당시 초강대륙 세력이었던 스페인 사이에 세계사를 바꾸는 한판 대해전이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알마다 무적함대를 앞세운 스페인은 한산 해전의 왜군과 같이 재래식 해전법을 고수하였고, 영국은 조선함대와 같은 신 해전술인 포함전으로 맞선 결과, 영국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세계의 제해권을 손에 쥐게 되고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여 약 4세기 동안 세계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이순신의 한산해전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남.서해 우회작전이 성공하고 다시 수륙병진하여 명나라로 진격하였다면 금세기에 우리가 겪었던 한일합방의 역사는 그 시점이 약 300여년 전으로 소급되었을 수도 있으며, 그 당시 내우외환에 극도로 피로해 있었던 명나라의 형편으로 보아 일본의 대륙지배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받아 패 잔선 13척으로 울돌목에 있는 천험의 수로에 의지하여 적선 200여척 을 맞아 했던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라는 말씀이 세계사의 현실로 되었던 것이다. 섬나라 해적국이었던 영국과 일본이 각기 동양과 서양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륙지배를 기도했지만 일본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전술 앞에 그들의 기도가 좌절되어 그후 약 300여년간 일본해군은 긴 침묵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순신의 해전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후 많은 전략·전술가들이 그의 위업에 최상급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영국의 해군 중장 밸러드(G.A. Ballad)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밸러드는 그의 저서에서 한산해전을 평가하여 말하기를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불과 6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 그는 적의 전투함대를 여지없이 파멸시켰고, 적의 병참을 차단하고, 적의 수송선단을 소탕하여 육전에서 이기고 있는 적 지상군의 태세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적의 야심에 찬 계획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넬슨 (Nelson), 블레이크(Blake)라 할지라도 자주 잔혹한 외국의 압제를 받아왔던 아주 조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난 그리고 외국에는 전혀 알려 져 있지 않은 이 지휘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조국 밖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다” 라고 이순신을 세계해전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904년에 있었던 러.일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일본을 구한 일본 근대 해군의 명장, 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이 창안했다는 정자(丁字)전법은 기실 이순신의 학익진법의 모작이었다. 이 전법의 효과는 설정된 목표에 일시에 집중포격을 가하여 함포의 명중율을 높여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히는 것인 데 이는 곧 이순신의 학익진을 이용한 일제집중다방전법(一齊集中打方戰法), 바로 그것을 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자 전법은 글자의 모양을 따라 T자형 전법으로 서방 세계에 소개되어 세계 제 2차대전 때까지 근세해전의 주전법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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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왜군의 퇴각
협판안치의 함대는 한산해전에서, 구기가융의 함대는 안골포해전에서 각각 궤멸당했다. 이로써 왜 수군의 주력은 완전히 와해되고 전주를 넘보던 육군도 같은 날 7월 8일에 있었던 곰재 싸움의 격전으로 큰 손실을 입은 끝에 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어 이치4 금산 싸움에서 조선군에게 대패하여 경상도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특히 7월 10일 결행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금산성 공격은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문관 출신으로 병술에 서툴러 낙마하여 전사하였지만 이날 고경명의 분투는 실로 눈물겨운 바 있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벌어졌던 이 일련의 전투가 전운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총체적 전황의 국면이 왜군 쪽으로 서서히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왜군의 전라도에 대한 수륙협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간 서울, 평양 등지에서 현지 조달한 군량도 바닥이 났다. 염려해 오던 병참선(兵站線)도 조선수군의 남해안 제해권 장악으로 완전히 차단되었다. 나고야 사령부의 풍신수길은 추후 절대로 조선수군과는 해전을 피하도록 엄명을 내리게 되었고, 다음 번 부산포해전에서 왜는 약 500척의 전선 가운데 단지 4척만 응전하고 나머지는 방파제 안에서 종일토록 포격을 당하고도 꼼짝하지 않은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더 큰 일은 도도히 북상했던 소서행장, 가등청정, 소조천융경 등 왜장들이 퇴군할 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다음해 1월초에는 평양성 싸움에서 조.명연합군에 대패, 서울까지 후퇴했다가 혹한과 기아로 많은 병력의 감손이 생겨 부득이 서울을 포기하고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 그리고 그 해 7, 8월경 남해안을 따라 20여개의 왜성을 쌓고 농성작전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전투주력부대는 모두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왜군은 1597년 정유년에 또 다시 재침하여 남해안에 잔류해 왔던 왜병과 합세하여 조선국 침략을 재시도하지만 뒤 이은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전쟁 강행의 주체가 소멸되었고, 또 오랜 전쟁으로 인한 염전증이 전 왜군에 확산되어 전의가 완전히 상실된 채 패전의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길고 비극적인 전쟁이 왜군측의 패전으로 결말나게 되는 운명적 동기가 이미 이 한산해전 속에 잉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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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한산도와 삼도수군 통제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한산도는 목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데 옛날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수로상에 있었다. 지리상으로 한산도는 북서부에 발달한 구릉성 산각간(山脚間)의 소곡 (小谷)이 침수되어 형성된 전형적인 익곡만(溺谷灣)으로서 만의 입구 가 게의 집게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내만에 또 다시 깊은 몇개의 작은 만을 안고 있어 수군기지로서 찾아보기 힘든 천혜의 조건을 갖춘 양항이다. 이분(李芬)의 《행장록에 “계사년 7월 14일 공은 본영이 전라도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해상을 막고 지휘하기가 어려우므로 마침내 진을 한산도로 옮기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도 이를 허락하였다. 그 섬은 거제 남쪽 30리에 있는데 산 하나가 바다굽이를 껴안아 안에는 배를 감출 수 있고 밖에서는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뿐더러 또 왜적들이 전라도로 가자면 반드시 이 길을 거치게 되는 곳이라 공이 늘 요긴한 곳이라 하더니 이때 여기다 진을 치게 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 한산도로 이순신을 찾아왔던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도 한산만의 지세를 자세히 보고서 과연 진을 둘만한 곳이라 하였다고 전해 진다. 이순신도 여수에 본영을 두고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할 때마다 이 한산수로를 지나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순신의 한산도 이진(移陣)은 오늘날의 마한제독의 중앙적 위치 전략이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같은 해 8월에 조정에서는 삼도수군을 통합 ·주관하는 장수가 없어 불편을 느껴오다가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 겸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조선함대는 비로소 삼도수군의 통합명령체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한산도 본영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으면서 그동안의 해전경험과 앞으로 닥칠 문제를 예견하여 전선건조, 총통제작, 군량확보, 그리고 통제사의 지휘권 등에 관하여 그 대비책을 조정에 헌책하였다. 제승당을 비롯하여 수영의 각종 시설을 창건하고 아울러 군비 증강에 힘쓰는 한편 특히 척수에 있어서 절대 약세였던 전선의 증강에 힘을 쏟아 이진 당시 143척(충청수군 40척 포함)이었던 전선이 250척으로 늘 어 났으며 왜군이 사용하는 조총과 성능이 같은 총통을 시험제작하여 각 진포에 보급하여 만들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백성을 불러 모아 둔전을 짓게하여 군량 확보에 힘쓰는 한편 고기도 잡고 질그릇도 구워 그것을 판 돈으로 군량을 비축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진중의 병사들이 멀리 과거보러 가지 않고도 진중에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조정에 주청하여 1594년(갑오) 4월 6일에 첫 특별 무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여기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견내량 해협의 천험에 의지하여 중과부적의 왜군과 약 4년간 대치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던 동안 결코 견내량 이서(以西)해역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순신의 진중생활은 향상 근검절제하며 우국일념하는 모습이 마치 구도자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또 본시 문무겸전 하신 분이라 진중의 망중한(忙中閔)에 불후의 우국시도 여럿 남겼다. 그러나 우매한 조정 중신들 때문에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죄인의 누명을 쓰고 이곳 한산도로부터 서울로 압송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 날이 1597년 2월 26일 이었다. 제2대 통제사가 된 원균은 무절제한 진중생활로 장수의 권위가 실추되어 군사를 통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정유년 7월 15일 철천량 해전에서는 그동안 이순신이 노심초사 키워온 조선 수군 정예병과 전선(250척)을 모두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고성땅에 원혼(寃塊)을 묻고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겼다. 해전은 포격술, 해상 결진 등 고도의 용병술이 요구된다. 이순신이 떠난 후의 조선수군은 쓸모가 없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해전에서 생사를 같이 하며 키워온 이순신과 여러 장수들 그리고 병사들간의 이심전심의 경지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함대는 경상수사 배설(裵模)이 도망 올 때 인솔한 전선 겨우 12척 뿐이었다. 이 패잔선이 “우리 수군이 약하니 해전은 피하고 육전에 힘쓰라”는 조정의 명령에 이순신이 장계에서 “…이제 신에게 전선이 12척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今庫 戰船尙有 十二 出死力租戰 則觸可碼也)”28) 라고 주장한 그 12척이었다. 배설은 철천량해전에서 우리 수군이 패몰하자 일단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와 제승당을 비롯한 대소 공해와 군령, 군기 등을 모조리 소각하였다. 그래서 한산도 본영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영조 15년(1779) 제107 대 조경 통제사가 다시 중건할 때까지 142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다. 한산도에 있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제6대 통제사 이경준 장군의 주청으로 1604년 9월 9일 가까운 두룡포(현 통영항)에 새 터를 잡아 이영(移營)하게 되어 그후 약 300년간의 통제영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왜국은 그후 1894년 청일해전 때까지 조선 해역을 단 한번도 넘보지 못했다. |
한산대첩기념제전사
국난극복의 상징인 한산대첩을 기림과 아울러 이충무공의 위업 선양을 목적으로 1962년 한산대첩기념제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해부터 개최해 온 한산대첩기념제전은 2000년 39회를 맞는다. 그간 1979년에는 사정에 의해 행사를 쉬었고, 제2회, 제5회 두 차례에 걸쳐 국가원수가 임석하기도 했다. 또한 제2회까지 봄철에 열어 오던 것을 장마를 피하기 위해 3회부터는 가을철에 열어 오고 있다. 이 제전은 회를 거듭하는 동안 행사의 규모면에서나 내용면에서 이렇다 할 이벤트적 요소가 적었으므로 당초의 기대감과는 달리 범국민적 관심권에 들지 못한 채 한낱 지역축제로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제34회 때는 광복50주년 기념행사로 국가차원에서 대규모 해상연주회를 열었는데, 이 행사는 통영만이 간직한 해양문화의 특성을 살림으로써 한산대첩기녕제전의 하이라이트 행사가 되어 계속행사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제35회에 와서는 종전의 면모를 과감히 탈피, 행사의 규모나 내용면에서 대폭적인 변신을 도모함으로써 온 시민이 동참하는 대동축제로, 그리고 통영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종합문화예술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우선 시민의 날 행사와 통합, 범시민 축제를 단일화함으로써 시민의 동참 분위기 조성은 물론 축제의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해마다 유동적이던 축제기간을 영구히 고정시킴으로써 혼란없이 사전 준비도 완벽을 기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는 성격이 상호 비슷한 다른 지역 축제와의 차별화를 꾀함으로 써 이 축제를 고부가가치의 문화상품으로, 지역경쟁력의 총아로 육성시키자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각종 행사를 강구안에 마련된 「통영문화마당」에 집결시켜 치름으로써 시민의 참여의식을 높였고, 각종 전시행사는 종합전시관을 마련한 곳으로 집결, 시민의 관람이 편하도록 했다. 서막식 또한 종전의 집합식 행사에서 벗어나 통영의 상징인 세병관에 서 군점을 위주로 열었다는 점 등이다. 한산대첩기념제전의 세부행사로는 전야제, 서막식, 군점, 길놀이, 풍어제, 한글시백일장, 사생대회, 음악경연대회, 무용경연대회, 서예실기대회, 건전가요대회, 승전무공연, 통영오광대공연, 두레패와 이무기놀이, 영남 남녀궁도대회, 씨름대회, 아마복싱선수권대회, 농악경연대회, 가장행렬, 군악대 및 의장대시범, 공예품전시, 수석분재전시, 우표전시, 고서화전 시, 축구대회, 바다낚시대회, 시민체육대회 등 다양하게 펼쳐 왔다. 이 제전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경상남도, 통영시의 지원금과 내외 향인들의 협찬금으로 매년 치러 오고 있으며, 제전기간동안 국내.외 관광 객이 어느 때보다 많이 몰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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