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 (臨在)
폴 브랜드 (Paul Brand)
런던의 한 병원에서 수련의로서 야근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81세 된 할머니 트위그 부인의 병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활발하고 용감하던 이 부인은 후두암을 앓고 있었는데, 골골한 목소리에 근력이 부치는 듯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재치 있고 쾌활했다. 그녀는 생명의 연장을 위해 의학적으로 가능한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의 교수들 중 한 분이 그녀의 후두와 그 주변의 악성조직을 제거해 버렸다.
트위그 부인은 한동안 잘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2시에 나는 위급하게 그녀의 병동으로 불려갔다.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병상 위에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무서운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는 즉시 그녀의 목구멍 속에 있는 동맥이 터진 것을 직감했다. 유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손가락을 그녀의 목구멍에 넣어 피가 나오는 지점을 지혈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집게손가락을 미끈미끈한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동맥을 찾아 이를 막아 버렸다. 간호사들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는 동안 트위그 부인은 호흡을 되찾고 목이 막히는 느낌을 간신히 이겨냈다. 그녀가 나를 신뢰하게 되면서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십 분쯤 지나 다시 정상 호흡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의 머리를 약간 뒤로 하고 내 손가락을 빼고 기구로 대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기구를 밀어넣을 만큼 목구멍 깊숙이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가락을 뺄 때마다 다시 유혈이 시작되고 트위그 부인은 겁에 질렸다. 그녀의 턱은 떨렸고 눈은 튀어 나왔고 나의 팔을 힘주어 붙들었다. 마침내 나는 손가락으로 유혈을 막으면서 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가 올 때를 기다려보자고 말해 그녀를 안정시켰다.
우리는 위치를 바로 잡았다. 나의 오른팔은 그녀 뒤로 머리를 받쳐 주었다. 그리고 나의 왼손은 거의 그녀의 일그러진 입 속으로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집게손가락은 계속 출혈 지점을 막고 있었다. 나는 치과 의사를 방문한 적이 있어, 왜소한 트위그 부인이 그와 같이 오랫동안 손을 입에 물 만큼 입을 벌리고 있으려면 여간 지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강렬한 푸른 눈동자에서 필요하다면 며칠이라도 참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내 얼굴에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가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호흡까지도 피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말없이 내게 “움직이지 말고, 손을 떼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만일 내가 우리의 어색한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그녀는 피를 흘려 운명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간절히 도움을 호소하는 그녀의 눈은 내 눈을 떠난 적이 없었다. 처음 한 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근육 경련으로 나의 손에 통증이 느껴졌을 때, 나는 피가 멈췄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약간 움직여 보려 했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트위그 부인은 그녀의 목구멍으로 따뜻한 액체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자 불안스레 내 어깨를 꼭 붙들었다.
내가 어떻게 두 시간을 견뎌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근육은 고통 중에 부르짖고 있었다. 나의 손가락 끝은 완전히 감각을 잃었다. 나는 몇 시간동안 로프 하나로 추락한 동료들을 바위 위에서 붙들고 있는 암벽 등반가들을 생각했다. 이 경우에는 너무나 저려서 감각을 상실한 10cm짜리 나의 손가락 하나가 목숨이 떨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 한 가닥의 생명줄이었다. 20대의 젊은 수련의였던 나와 80세가 넘은 이 할머니는 초인적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생존이 나의 손가락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외과 의사가 왔다. 조수들이 수술실을 준비했고 마취과 의사가 화학 약품을 준비시켰다. 이상한 자세로 포옹하고 있던 트위그 부인과 나는 침대 째로 그대로 수술실까지 이송되었다. 여러 사람이 번뜩이는 기구를 갖추고 있는 수술실에서 나는 서서히 그녀의 목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나는 피가 솟아는 것을 느끼지 않았다. 내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시간 동안의 지혈에 의해 마침내 지혈된 것일까? 나는 부인의 입에서 손을 뺐다. 그런데도 그녀는 쉽게 호흡을 했다. 그녀의 눈은 계속해 내 어깨를 잡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내 얼굴만을 살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그리고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벌겋게 늘어난 얼굴 모서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지혈된 것이다.
그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후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근육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았다. 나는 그녀의 공포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병동에서 보낸 두 시간 동안, 우리는 거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트위그 부인과 함께했던 그날 밤을 회상해 볼 때, 그 경험은 인간의 무력함과 우리 내부의 신적 능력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듯하다. 이 경우에는 나의 의학도로서의 훈련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임재(함께함)와 또 다른 인간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침으로 절박한 상황에 응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더불어 나는 종종 진짜 고통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 고통은 지진과도 같이 갑작스레 파괴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몰아닥친다. 한 여자가 자기 가슴에 조그만 혹 같은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러면 그녀의 성적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이가 사산된다. 그러면 산모는 고통 중에 오열한다. “9개월 동안 참고 기다린 결과가 겨우 이런 것이란 말인가 ! 그렇게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낙태시키는데 나는 건강한 아이 하나를 얻기 위해 나의 생명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어린 소년이 자동차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아 얼굴에 흉한 상처를 입는다. 그의 기억은 고장난 스위치처럼 오락가락한다. 신중한 의사들도 별다른 희망을 주지 못한다.
고난이 닥치면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들은 그 충격으로 맥이 빠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목이 메이는 것을 참고 용기를 내어 병원으로 찾아가 격려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을까 하고 기사를 뒤적인다.
그러나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당신이 고통당할 때 누가 도움을 주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나는 이상스럽고 불분명한 대답을 듣는다. 도움을 주었다는 사람은 고통에 대한 쉬운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많은 말을 하기보다 들어 주며, 판단하거나 많은 충고의 말을 하지 않는, 잠잠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다. 함께한다는 임재감각(s sense of presence) -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 붙들 수 있는 손, 이해심이 넘치는 태도, 따뜻한 포옹, 같이 목이 메어 울먹이는 사랑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내가 수술편람에서 공부하는 기술과 같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심리적 공식을 원한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란 편람같은 것으로 다루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그곳에 있어 주는 것이며, 보고 만지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트위그 부인과 함께 병실에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뼈, 근육, 피, 두뇌 등 모든 부분이 아름답게 서로 협동함으로써 나는 환자의 생명을 지연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나는 또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잠시동안 피의 유출을 지연시키는 것이며, 암이 더 이상 번지는 것을 지연시켜 주는 것이다. 대신 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는 상징적이다. 조이 데이비드맨은 “사람이 대양을 물컵 하나에 담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말도, 사상도 하나님의 신성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들이 대개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을 나타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둔 자신을 버리고 도주했던 겁 많고 연약한 제자들의 무리를 제외하고, 믿지 않는 세계 앞에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지상에 아무런 몸도 남겨 두지 않고 승천하셨다. 우리가 바로 예수께서 세상에 남겨둔 자들이다. 그분은 책이나 교리적 성명서나 사상체계를 남겨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을 구현하고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도록 가시적 공동체를 남겨두셨다.
은유와 직유의 대가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거론하는 곳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 안에 거하셨다. 그리고 세상은 주로 우리의 모습을 통해, 즉 우리가 그분을 “육신으로 나타내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 계신가?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더 이상 지성소를 가리키거나 나사렛의 목수를 가리킬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형성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학생들은 나치스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영국의 많은 파손 건물들 중에서 예배당 건물 하나를 보수해 주겠다고 자원했다. 일이 진척됨에 따라, 예수님이 팔을 펴고 계시고 “내게 오라”는 귀에 익은 문구가 새겨진 대규모 동상을 어떻게 원상 복구시킬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조심스레 땜질을 하면 동상의 파손은 대부분 보수할 수가 있었는데, 폭탄 파편에 의해 잘려나간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은 복구시킬 수가 없었다. 없어진 손을 다시 조각하는 정교한 작업을 시작할 것인가?
마침내 작업반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동상엔 손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 동상 비문에는 “그리스도께는 손이 없지만 우리의 손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출처 :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생명의말씀사 역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