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은 어떻게 변할까 ― 부림동 도둑놈골목
김규석
‘숲이 많은 거리’라는 지명유래를 가진 마산시 부림동(富林洞)에는 오래된 숲 속에 나있는 오솔길들만큼이나 많은 골목이 있다. 숲 속의 오솔길들이 뭇 생명들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생겨나듯 골목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부림동 골목들만 놓고 본다면 그 말은 틀림없다.
1924년 마산 공설시장으로 문을 연 부림시장은 어시장과 더불어 오랜 세월 마산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그 오랜 세월의 발걸음들이 부림시장과 부림동의 여기저기에 갖가지 이름의 골목들을 만들어 놓았다. 부림시장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렀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골목을 만들었으며, 그 골목은 화답이라도 하듯 또 다른 골목들을 만들어 냈다. 그 많은 골목 중 하나가 ‘도둑놈 골목’이다.
기차 길 옆 시장골목
‘도둑놈 골목‘을 찾아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가장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은 마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중앙로’를 통해서 가는 길이다. 마산 지도를 보면 부림시장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를 가장 굵은 선으로 표시했는데, 바로 이 도로가 중앙로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왼쪽은 부림 하시장이고, 오른쪽은 부림 상시장인데, 이 두 시장을 통틀어 부림시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부림시장을 관통하는 중앙로는 육호광장에서부터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뻗어 있다가 부림 지하상가를 지나 옛날 연흥극장 앞에서부터 갑자기 왼쪽으로 기우뚱 휘어진다. 바로 거기 오른쪽으로 조그만 골목길이 나 있다. 이 골목이 한때 마산 최대의 ‘중고시장’이었던 ‘도둑놈 골목’이다.
이 도둑놈 골목은 옛날에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탐문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옛날의 부림동은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산시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 중의 중심이었다. 지금은 간판에서나 겨우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중앙로는 예전에 철길이었다.
1905년 일제는 마산~삼랑진 사이에 군용철도 ‘마산선’을 놓았다. 그 뒤 이 철길은 마산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운송수단으로서 해방 후에도 쭈욱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도시산업화로 인해 마산은 급격하게 변모하였고, 급작스런 도시의 팽창은 새로운 도시계획을 필요로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교통의 원활한 흐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걷어내고 도로를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지금의 중앙로는 옛 마산선 철로가 있던 자리에 새로 만들어진 도로인 것이다.
(주* 철길이 없어진 다음 마산선의 종착지인 마산역도 1977년 지금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의 마산역의 위치는 현재 마산 중부경찰서 건너편 자리에 있었다. 1899년 마산이 개항하고 난 후 이 지역에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위치에 마산역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그 옛날에는 도둑놈 골목의 위쪽 환주산 자락 밑으로 마산~진주 간을 오가는 ‘임항선’(구 경남선) 철길이 지났다고 한다. 지금도 3?15 의거탑에서 몽고정 쪽을 보면 사용하지 않는 철로가 남아있다.
말하자면 임항선과 마산선 사이에 도둑놈 골목이 위치했다는 얘기다. 두 개의 기찻길이 나란히 달리다가 옛 마산역에서 합쳐지기 전에 조금씩 좁아지면서 생긴 삼각주처럼 생긴 지역이 도둑놈 골목이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일까.
도로가 되어 사라진 철도 마산선의 흔적은 ‘골목’의 왼쪽 건물들 뒤편 철둑길이었던 곳에 ‘개나리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또 그 옛날 골목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굴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잘려진 콘크리트 흔적이 남아있고 ‘굴다리’라는 선술집 간판도 보인다.
그 옛날 이곳에 철길이 지났고 그래서 이 지역이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이 골목의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철길로 가로놓여있어 부림시장으로 통행이 쉽지 않았을 이곳에 어떻게 시장형 골목이 생겨 날 수 있었을까? 골목은 언제쯤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형성되기 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 골목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봤지만 대부분이 이구동성으로 정확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또 하나같이 박 대목 할아버지를 지목했다.
“박 대목 할아버지라고 계시는데, 그 분이 이 골목에서 가장 오래 동안 가게를 하신 분이니까 혹시 그 분이라면 알고 있을란가.”
귀가 번쩍 뜨였다.
맨 처음 골목에 입주하다
― 박용차(가명), 80세
할아버지의 집은 연흥극장 쪽에서 들어가다 보면 골목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적벽돌 2층 건물의 2층에 살고 있다.
이 집은 1963년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이다. 1층은 목공소, 2층은 살림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40년 이상을 할아버지는 오직 이 집 한 곳을 떠나지 않고 붙박이처럼 살아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처음 이 골목에 들어선 다음부터 하나 둘 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할아버지 가게가 이 골목에 입주한 최초의 가게가 되는 셈이다.
할아버지는 마산 태생으로 추산동이 고향이다. 열여섯 살 때 일본인으로부터 집 짓는 목수 일을 배운 뒤 목수가 되었다. 골목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박 대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반적으로 집을 짓는 목수를 가리켜 ‘대목’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할아버지는 처음에 판잣집 같은 걸 짓기도 했다. 그러다가 목공소를 연 다음부터는 대목이 아닌 소목의 일을 하게 된 셈이다. ‘소목’이란 주로 가구나 문짝 창호 등을 제작하는 목수를 일컫는다. 할아버지는 소목 중에서도 가구제작 보다 창호류 제작을 더 많이 했다.
“내가 여 들어 올 때만 해도 암 것도 없었어. 길만 나 있고. 암 것도 없었지. 요 앞쪽으로는 논도 아이고, 우쨋냐 하면 물이 고이 가꼬 연못 맨치로 그래 있었어."
도대체 황량한 그런 곳에 어떻게 목공소 낼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때는 장사할 것도 엄꼬. 목수 손떼고 다른 걸 할라 캐도 엄두도 안 나고. 돈도 엄꼬. 이 근처에 하꼬방 짓는 일을 내가 했거든. 그래, 어떤 사람이 돈 쪼매 내고 여 살아라 카데. 그래가 눌러 앉았어. 남 집만 짓고 살았제. 셋방 사는 기 싫었고…”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당신의 2층집은 판잣집이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골목에 들어온 다른 입주자들도 할아버지의 집을 본 따서 똑같은 형태의 집을 지었다. 그러다보니 마치 판잣집이 이 골목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2~3년이 지나 ‘골목’은 골목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골목에 들어서는 가게들마다 판잣집을 짓는 일과 관련된 업종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판잣집을 짓다보니 자연적으로 그런 업종들이 2~3개씩 짝을 지어 생겨난 것이다. 목공소, 함석집, 철물점, 고물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골목’의 철물점은 ‘쇠로 된 모든 것’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특히 고물상 같은 경우에는 요즘의 고물상과는 전혀 달랐다. ‘없는 것 빼고 다 갖췄다’는 만물상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만 해도 마산에는 6.25 전쟁이 끝난 뒤 생겨난 넝마주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생존의 한 방편으로 헌 옷, 폐지, 고물, 중고 잡화 등을 수집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사오거나 주워오는 물건들은 대부분 이 ‘골목’ 고물상에서 거래되곤 했다. 만약에 객지에서 아무것도 없이 이 도시에 온 사람이라 해도, 일단 이 골목에만 들어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세간의 거의 대부분을 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골목은 ‘세간 전문점’ 골목이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골목’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이 점이었나 싶다.
근처에 부림 시장이라는 유명한 시장이 있었지만, ‘생필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던 부림시장과는 달리 ‘세간’을 취급하는 업종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부림시장과의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또한 시대적 요인이 한 몫을 했다.
마산은 1970년을 전후하여 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 한국철강, 들이 들어서면서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그 변화의 바람은 ‘골목’에도 불어 왔다. 물밀 듯 밀려드는 산업화로 인해 마산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골목’은 발전을 거듭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민들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이들 이주민들에게는 당장 최소한의 세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골목’은 기존의 업종들을 업그레이드한 중고 세간전문시장으로의 틀을 갖춰갔다.
한편, ‘골목’에도 새로운 업종의 가게들이 생겨났다. 그런가하면 산업화에 따른 발 빠른 대응으로 업종을 변경하는 가게들도 생겨났다.
‘마산의자’를 운영하고 있는 황만수 씨의 가게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도둑놈 골목
― 황만수(가명), 39세, 마산의자 주인
왜 하필 도둑놈 골목인가?
그의 부모는 1965년경 진주에서 이주해 와 현재의 가게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 이후 15년 전부터 그 역시 부모의 대를 이어 ‘마산의자’를 운영하고 있다.
‘골목’ 중간쯤에 위치한 그의 가게는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1층은 매장, 2층은 창고, 3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입구는 두 군데로, 하나는 골목 쪽에 있고 또 하나는 소방도로 쪽에 있다. 골목에서 매장으로 들어가면 건물 뒤편에 있는 소방도로로 빠져 나갈 수 있고, 반대로 나가도 가능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를 만난 건 건물 뒤편에 있는 소방도로에서였다. 골목 쪽으로는 차가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차에서 물건을 싣고 내릴 경우는 소방도로를 이용하곤 했다. 그날도 마침 그는 이 소방도로에서 다음날 납품을 할 짐을 싣고 있었다.
이 도로는 북마산 가구거리에서 정법사(포교당)를 거쳐 3?15 의거탑으로 이어지는 13번 시내버스 노선구간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이 도로는 버스가 다니지 않게 되어 지금은 ‘구 13번 도로’로 불리게 되었다.
“쪼매마 기다리 보이소.”
처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바쁜 모양인지 짧게 대답했다. 활달한 말투와 몸놀림이 큰 키와 어울려 시원시원해 보였다. 짐을 다 내린 다음, 그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 우리는 요새로 따지면 고물상이었지예. 고물상인데…… 잡화류나 미군군복, 미군 통조림깡통, 이런 것도 팔고, 빈 병, 박스, 폐지, 고물, 헌 농, 이런 것도 샀다가 팔고…… 그러다가 의자는 1973년부터 했다카데예.“
고물상을 하다가 철재의자 판매점으로 업종을 바꾸면서 외가 쪽에서 거래처나 의자 제작기술 같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수출자유지역 공장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창원공단이 새로 입주하면서 작업대와 의자 등 공장비품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 시류에 맞춰 그도 신속하게 업종을 바꾸게 되었다.
“ ‘문화의자‘라는 상표도 달고 해가지고 납품했지예. 철재의자라 카는 거는 쇠 의자라는 말이지예. 당시에는 전부 쇠로 된 걸로 의자를 만들었는데, 내 어릴 때 기억에도 쇠 봉 같은 거 자르고, 붙이고 하는 걸 본 기억이 있거든예. 우리가 마산에서는 한 두 손가락 안에 들거든예. 의자를 시작한 걸로 치모, 그란께네 철재의자 원조 비슷하지예. 그래가 마산에서, 우리 집 트레이드마크가 철재의자고, 철재의자 카모 우리 집이다 이래 된 기라예.”
그가 수출자유지역에 철재의자 납품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는 철재의자 취급점포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많을 때는 10여 곳이나 되었다. 그때 이후 철재의자 하면 이 골목을 손꼽을 만큼 마산에서는 철재의자 전문 골목으로 알아주게 되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는 소파 제작에까지 사업을 확장시켰다. 지금은 직접 제작은 하지 않고 대신 당시 그의 가게에서 일하던 종업원들이 독립하여 차린 공장에다가 하청을 맡기고 있다.
“그때 우리 집에서 일했던 형님들이 지금은 마산, 창원에서 소파 공장 사장님이 됐는기라예. 어릴 때 그 형님들한테 맞기도 마이 맞았십니더. 사장한테 불만이나 이런 기 생기모, 사장 아들인 내를 부르는 기라. 그래 얻어맞고, 울민서 집에 들어가모 어무이가 너거가 이아 때??제 카모, 아니라 카고. 요새도 그 형님들 만나가꼬 그때 이야기 하면서 술 마시다 보모 얼매나 웃는고 술이 안 취해예.“
골목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골목과 철길은 놀이터였다. 어릴 적 기억 한 켠에는 넝마주이들에 대한 기억들이 또렷하다.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던 많은 넝마주이들도 그의 기억 속에는 허름한 군복을 입었을 뿐 당당하면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신체 건강한 사내들로 남아있다.
“이 골목이 와 도둑놈 골목인이고 하면, 옛날에 여서 장물 같은 걸 마이 취급해 가꼬 생긴 이름 인기라예. 내 어릴 때 까지만 해도 넝마주이들이 마이 돌아다녔는데 넝마라는 사람들이 훔쳐온다기보다는 뭐가 있으모 그냥 주워 오는 기라. 그때만 해도 넝마들은 내 넝마 바구니 안에 한 번 들어 가모 이거는 내끼야 카는 근성이 있었다는 기라예. 넝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아야지 어어, 하는 사이에 한 번 들어갔다 카모 절대 안 내 놓는 기라. 그런 물건이 골목에 마이 들어오고, 팔리고 하니까, 도둑놈 골목이다, 이래 된 기라예. 어떤 사람들은 중고 물품들을 취급한 곳이 많아 생긴 이름이라카는데, 근데, 장물도 중고 아닙니꺼, 중고거든예. 그란께네 중고가 마이 돌아 댕기는 중고골목은 맞는데, 그라모 와 도둑놈 골목이고 하모, 훔쳐왔든 사왔든 훔쳐온 물건들이 마이 돌아 댕기는 골목이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예.“
골목 이름의 유래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른 골목사람들이 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이다. 어릴 적 골목에 대한 그의 기억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향심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주 세세하기까지 하다.
“내가 일곱 여덟 살 때쯤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 골목은 전부 하꼬방이었어예. 그런데서 함석 도당 두드리고, 문 만들고, 장롱 만들고, 찬장 만들고, 전당포가 있었고, 잡동사니들 팔고, 그 다음에 나무난로, 연탄난로, 석유곤로, 이런 거 팔고, 헌병, 박스장사, 가마이장사도 있었고, 철물점, 모자원, 풀빵집 이런 기 있었고, 나중에는 아가씨들이 있는 삼종 술집도 한군덴가 두 군덴가 생겨날 정도로, 그땐 골목에 경기도 좋았어예. 옛날에는 여 오모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시장 이었어예.”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모자원
그의 말에서 무의식중에 ‘모자원’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밥에 섞인 돌처럼 이 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처럼 들렸다. 궁금했다.
“모자원이라는 거는 전쟁미망인하고 그 자식들이 있었던 곳인 기라예.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없어진 거 같은데, 어릴 때 거서 뛰놀고 그랬지예. 그때는 물 사정이 안 좋고 그랬는데, 모자원 안에는 물을 길어 올리는 펌프가 있었는 기라예. 쇠로 된 펌프. 얼라 때는 물장난 하는 기 얼매나 좋십니꺼. 여름에는 맨날 거서 물장난 하고 그랬지예.”
설명을 듣고나도 궁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 길로 시청도 찾아가고 도청도 가봤다. 너무 오래되어 서류도 폐기처분된 데다가 공무원들의 형식적인 일처리로 인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허탕을 치고 돌아와 이번엔 인터넷을 뒤져보았으나 거기도 별 자료가 뜨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향토사학자 이학렬(83세)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모자원을 처음 설립하고 운영한 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산가족을 만나는 기쁨 못지 않게 반갑고 고마웠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자원은 6.25 전쟁 후 생겨난 전쟁미망인과 그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1955년경 신치일(84세)에 의해 설립되어 1974년경까지 운영되었다. 모자복지에 대한 법적 근거와 사회인식이 척박했던 시기에 세워진 경남 최초의 모자원이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 했다. 그러나 관공서 서류어디에도 모자원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자원에 대한 한 줄의 기록조차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안타까웠다.
당시 6?25 전쟁 전후로 생겨난 고아원이나 사회복지 관련시설 대부분은 종교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런데 이 모자원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일반 개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가 바로 신 치일 씨다.
신치일 씨는 경남 창녕이 고향이다. 스무 살 무렵 마산으로 이주했고, 부산 국제시장을 오가며 고물상 일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난 많은 걸인과 부랑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는 특별히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경남도청이 부산에 있을 때였다. 그는 후생부 국장의 권유로 부림동 일대의 철도용지를 구입하여 방사형 모양의 판잣집을 지어 모자원을 개원하였다. 운영비는 정부로부터 생계비 및 식량 일부를 지원 받아 꾸려나갔다.
모자원에 수용되었던 모자가정은 대부분 경제활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일부만이 콩국이나 죽 등 먹을거리를 부림 시장 근처에서 팔며 생활하였다.
그 뒤 1970년에 ‘사회복지사업법’이 제정되었다. 모자복지에 대한 법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이다. 이 법 제정으로 경남지역에 설립되었던 고아원, 영아원 등은 모자원으로 바뀌었다. ‘골목’의 모자원 역시 법인 설립을 준비하였으나, 신치일 씨 개인의 문제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모자원 때문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이야기는 다시 골목으로 돌아왔다. 이 좁은 골목에 벼라별 가게가 다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상상이 잘 안 된다.
“지금은 이 골목이 조그만 것 같아도 그때는 큰 시장 인기라예.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마산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더라고예. 어시장 쪽하고 부림시장 말고는. 수출(자유지역)이 생기고, 공장들이 생기 나면서 사람들이 늘었다는데, 전부 촌사람들 아닙니꺼. 그 사람들 촌에 쓰던 거 그대로 다 쓰고 우짜다가 한 두 개씩 사지, 요새 맨키로 소비를 마이 안 했거던예. 부림시장의 닭전골목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만 남았지만 옛날엔 닭 집이 몇 군데나 됐다꼬예. 사실 무슨 날 아이모, 누가 닭 먹고 그랬어예? 일년에 몇 번 못 먹어 봤다고.”
죽기보다 싫더니 이젠 장사한 기 잘했다 싶네예
그가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원래 아버지는 진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주하여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가 군대를 제대하고나자 아예 가게를 그에게 떠맡기고 다시 농사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장사에는 젬병이었지만 농사에는 억척꾼이었다. 그 길로 마산 근교의 야산을 과수원과 밭으로 만들어내 현지 농사꾼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는 본래 장사 체질이 영 아닌데, 그냥 잡혔지예. 영감한테, 우리 아버지는 내보다 더한 사람이라. 내보다 더 장사체질이 아닌 기라예. 맨날 밖으로 겉돌고…… 장사는 어머니가 다했지예. 어머니가 생활력이 엄청났거든예. 그러니 아버진 맨날 뒷전이고…… 여자가 생활력이 강하면, 의지력이 있으면, 남자는 바보 되는 기라. 아버진 자기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자기는 뒷전으로 빠지는 깁니더. 그 바람에 내가 잡혔는데…그래 하게 됐지예.”
재수하다 군대 갔고 제대하자마자 장사를 떠맡았으니 환장할 일이었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매일 저녁마다 술로 보냈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힘들었어예. 내가 장사를 해야 되나 체질에도 안 맞는 장사를…… 이제 이걸루 끝이구나 싶으니까 심란하더라구예. 장사한지 한 오년이 다 돼가도록 손님이 와도 ‘어서 오이소’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예. 뭐라캐야 되노. 머. 중국집 배달소년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캐야 하나. 말이 참 안 나오더만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죽기보다 싫은 장사를 지금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입에서 슬그머니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은 스물여섯에 해 버렸지예.”
이왕 장사하기로 마음먹은 것, 결혼이라도 해서 안정을 찾아볼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아내와 맞선을 보았다. 몇 번 만나지 않아 아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 길로 결혼을 했다.
그는 현모양처를 만난 덕분에 오늘의 그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살면서 가장 잘 한 선택인 거 같고예.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 기특한 기라예.”
결혼 뒤부터 그는 안정도 찾고 싫어하던 장사에도 조금씩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안 나오는 소리도 자꾸 억지로 한께네 되긴 되던데, 어찌 보면 대학 안가고 장사한 기 잘했다 싶어예. 대학가고 직장생활 해본들 지금 내가 큰 비젼이나 있겠나 싶은 기.”
아내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번진다.
골목에 불어닥친 변화의 폭풍
1970년을 전후해서 ‘골목’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도시 산업화 이외에도 또 다른 배경이 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마산시외버스주차장은 지금의 한국통신과 3?15 의거탑 중간쯤에 있었다. 그 주차장이 현재의 위치인 합성동으로 옮겨간 것은 1979년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전의 골목은 입구부터 지금과 전혀 달랐다. 당시 골목의 입구는 ‘굴다리’ 쪽에 있었다. (지금 현재 ‘골목’의 입구는 연흥극장 쪽으로 나 있다.) 그리고 골목 입구와 시외버스주차장까지의 거리는 불과 20~30m에 지나지 않았다. 부산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도로와, 함안, 창녕으로 빠져나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따라서 당시 이 일대는 경남 일대에서 마산을 찾아 오고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댔다. 현재 합성동 시외버스주차장 일대의 번화한 거리모습을 연상하면 어렵지 않게 당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이 ‘골목 상권 활성화’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다. 지금은 작고 허술한 굴다리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결코 무시하지 못 할 번화가의 최고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골목’은 1980년을 전후로 하여 엄청난 지각변동을 겪게 되었다.
우선 마산 지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마산시외버스주차장이 지금의 합성동으로 옮겨가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마산역이 옮겨지고, ‘마산선’ 철로 역시 도로로 바뀌어 중앙로가 개통되었다.
변화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먼저 대로가 생기자 ‘골목’의 접근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없었던 가구 판매점들이 생겨났고, 3~4곳에 불과했던 목공소들은 18~19 곳으로 늘어났다. 기존의 업종 중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업종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폐업하는 업종도 생겨났다.
이때부터 ‘골목’의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도둑놈 골목’이라는 이름 대신 ‘가구골목’ 또는 ‘목공소 골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 골목에서 주로 취급하는 품목이 가구라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구골목과 목공소 골목은 엄연히 달랐다. 목공소는 가구를 주문제작하는 곳으로서 맞춤가구를 취급했고, 가구점은 주로 기성가구를 취급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해서 부르기도 하고, 혼동하여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골목은 두 가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현재 볼 수 있는 가게들은 이 시기에 형성된 업종들이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골목’의 또 다른 변화는 2세대들의 등장이다.
‘마산의자’ 황만수 씨의 경우처럼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 받는 사람도 있지만, ‘골목’에서 일을 배워 ‘골목’에서 창업을 하는 새로운 세대들도 생겨났다. ‘자산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태영 씨의 경우가 그러하다.
가구 골목
― 김태영(가명), 53세, 자산목공소 주인
‘골목’의 대를 잇는 2세대의 등장
김태영씨는 이 골목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 골목에서 가구제작 목공기술을 배운 후 1981년경에 현재의 위치에 목공소를 차렸다. 그리고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 목공소를 쭈욱 운영해 오고 있다. 골목의 끝부분에 자리 잡은 그의 목공소는 골목형성 초기의 집 구조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60년대 말에 지어진 이 판잣집은 1층이 목공소, 2층이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변경하여 조금 개조 하였을 뿐 옛 모습 그대로다.
요즘은 목공소에 일거리가 없어 가게를 비워놓는 날이 허다했다. 대신 부인이 목공소를 지키는 날이 많다. 가장 오래 된 목공소를 찾던 중 운 좋게도 그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부인을 통해 그와 만날 약속을 한 날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30여 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내를 찾는 사람이 있다꼬?”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워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가 ‘골목’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는 ‘자산동’ 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고 공부는 늘 눈 밖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빈둥거릴 수도 없었다. 시대 분위기가 그를 빈둥거리게 놔두지를 않았다.
“옛날에는 몬 살고, 공부 몬 하모, 기술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산다, 이런 기 있었어. 아무 기술이라도. 우리 동네 중학교에 목재로 된 건 모든지 수리해주는 목수가 있었어. 동네 아재라. 그 아재가 이런 걸 배워봐라 카면서 데려다 주더라고. 그 가구점 이름이 신흥가구였는데 사장도 아재하고 아는 후배라. 노가다 후배. ‘이 놈 기술 좀 가르켜 줘라’ 해서 하게 됐지.”
그가 처음 일 배운 신흥가구는 일반서민용 가구를 만드는 목공소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목공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목공소’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대신에 가구류를 제작하는 곳을 ‘가구공장’, 문 종류를 제작하는 곳을 ‘다데구 공장’이라고 부른다. 또 어디서 일했냐에 따라서 ‘가구 출신’, ‘다데구 출신’이라고 부른다.
“우린 가구를 했어. 장롱, 찬장 뭐 이런 기였지. 그때야 요새 맨코로 무슨 장식장 이런 것도 없었지. 아, 방 찬장이라고 맨든 기 요즘으로 따지면 장식장 정도겠네.”
골목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모자원’에 대한 기억도 골목에서 유일하게 우물이 있는 곳이어서 물 떠먹으러 다닌 곳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는 같은 골목에서 서너 곳의 목공소를 전전하며 일을 배웠다.
공장이라고 해봤자 판잣집이나 다름없는 하꼬방이었다. 도당(함석)이나 루핑을 대강 올려서 지은, 그런 집들이었다.
“비가 오모 우두두두 천둥소리보다 더 심했어. 포장도 안 돼가꼬 길이 온통 뻘밭이 되고……”
월급은 한 달 일하고 800원 혹은 900원을 받았다. 유일한 낙은 동네친구들과 쉬는 날 놀러 다니고 술 마시는 것이었다. 일은 청소하고 심부름하고 거들어주는 단순한 노동이었다.
“그때 합판집이 창동 황금당 옆에 있었다꼬. 처음에는 니아까(손수레)도 없었어. 여서 거리가 얼매고, 그 먼데를 걸어가가 합판 사들고 오고 그랬지. 당시야 철 없을 때끼네 일을 열심히 한 거는 아닌 거 같고, 내가 뭘 우찌해야 되겠다, 이런 것도 없었고, 단지, 해야 되니까 했는 기고. 일하다가 튀어 나갔다가 일하다가 했지. 놀기 좋아하고 친구 좋아할 때 끼네 일하는 자체가 즐겁고 그런 건 없었고.”
신흥가구에서 4년을 일한 뒤 다른 목공소로 옮겨 갔다. 당시에는 일정기간 수습과정을 거치면 새로운 일터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새로 옮겨간 목공소에서는 1년을 일하다가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목공소에는 일 년도 몬 있었지. 세상이 바뀌 있는 기라. 그때가 생맥주 집이 유행을 했어, 안에 시설을 해야 되거든. 생맥주집을 막걸리 집 맨코로 해 가꼬는 안 된께네, 분위기 나게 내부를 새로 바꾸는 기라. 그래가 목공소 사람들이 그런 델 나가 일하게 된 기야. 목공소에서 일하는 것보다 단가가 좋은 끼네. 요새 말하는 인테리어 현장 일을 나간기지.”
1981년 그는 중고 전동공구 두어 가지를 구입하여 목공소를 차렸다. 드디어 오래 동안 꿈꾸어왔던 ‘목공소 사장’의 꿈을 이룬 것이다.
박대목 할아버지가 ‘골목’에 목공소를 처음 세운 1세대라면 그는 1세대에게 일을 배워 창업한 소위 2세대에 속했다. 2세대 중에서는 그가 최초로 목공소를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목공소를 차린 그 해에 결혼도 했다. 생애 처음 가져보는 꿈같은 날들이었다.
부부는 같은 꿈을 꾸면서 한 공동작업장에서 형제처럼 일했다.
“내 혼자서는 일을 몬 한끼네 마누라가 보조를 하는 기라. 작업하기 좋게 잡아주고, 뻬빠 치고. 그래 안 해 가꼬는 몬 묵고 사니까 그냥 했지. 사실상 머, 없는 사람끼리 만나 가꼬, 음으로 양으로 힘들어도 살아야 안 되겠나, 그런 기 있었을 끼야. 중학교 졸업하고 내는 이 일 배웠고, 마누라라꼬 높은 학교 나왔겠나.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교도 몬 갔거든. 이래 만냈으끼네 이래 해야 안 되겠나, 이래 살았던 모양이야.“
2~3년이 지나면서 ‘골목’에는 다른 목공소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앙로가 개통되고 부림동, 창동, 오동동 등 시내중심가에 각종 매장들이 속속 들어서자 매장용 디스플레이 가구의 수요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수요에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목공소가 여기저기 들어서게 되었다. 그의 목공소 근처에만 15~16곳, 골목에는 19~20곳의 목공소들이 들어섰다.
이들은 주로 마산뿐만 아니라 통영, 삼천포, 진주 등지에서 목공소를 운영했거나 목공소 일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일감은 많았고 사람들은 밤낮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때가 최고의 호황기였다. 아래층 가게에서 밤낮을 안 가리고 기계소리가 돌아가니까 2층 살림집에서 아이들이 잠을 못자 울며 보챘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내는 근처 환주산 자락을 서성이면서 아이를 달래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독서실에 보내기도 했다.
IMF 때는 일감이 사라졌고, IMF가 끝난 뒤에는 일의 시스템이 바뀌었다.
IMF에 빼앗긴 삶
지금 그의 목공소에서는 기계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IMF 전까지만 해도 카운터 같은 거 놀기 삼아 짜 놓으모 잘 나갔다꼬. 옛날에야 인테리어라는 기 없었거든, 꾸미는 데야 좀 꾸미고. 인자는 막걸리집도 시설을 하끼네. 시설을 하면서 거서 다 만들어삐끼네, 거다가 씽크대 공장 같은데서 간단한 거는 다 만들어 삐고. 단가가 그게 싸거든.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기야.”
현재 목공소들은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다. 그는 문 닫은 목공소 중 한 군데를 인수하여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이웃들은 떠나지만 그는 떠날 수가 없다. 오랫동안 일해 왔건만 벌어 놓은 돈이 한 푼도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가끔 인테리어 현장에 목수 일을 다니기도 한다. 일은 힘들다. 목공소를 차리기 전의 힘든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우짤끼고?”
탄식처럼 그가 긴 한숨을 내뱉는다.
“처음에는 공장을 차리고 결혼도 하고 재미도 있고 괜찮더라꼬. 그런데, 지금은 아이라. 그 당시에는 소박한 소망이고, 지금은 시대가 변했으니까. 밥만 묵고 사는 거 갖고는 안 되는 기라. 나이는 들어가고, 아들 결혼하고 나모, 더 늙으모, 용돈이 궁할 거 아니냐. 앞으로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우짤끼냐, 이기 고민이라.”
가끔은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하기도 한다. 예전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전화국에 취직할 기회가 있었다. 단지 시험은 안 치러도 한자만은 꼭 외워야 했다. 그런데 한자라는 놈은 한 달 하다가 두 달 안하면 도망가 버리는 괴물이었다. 한자를 외우는 게 싫어 결국 전화국에 취직하는 걸 포기했다. 지금 그게 못내 후회스럽다.
“우리 일이 힘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야, 머리를 쓰야 돼. 이기 힘든 작업이야. 고생이야 공무원들도 하고, 노가다들도 하고, 다하는데, 이거 하는 거 보다는 나았을 거 아니냐는 거지. 날일 하러 가서 해 지면 돈 받고, 공무원들 맨코로 달되면 월급 나오고, 그라믄 편하거든. 문제없지. 근데 이 일이 머리 쓰가며 일해 가며, 해도 돈이 생각만큼 남냐, 아니다 이기야. 그만큼 힘을 쓰고 머리를 쓰는데 대가가 그만큼 아니라는 거지. 절대적으로 아니라는 거지.”
인자 이 골목은 끝나 뿟어
골목 끝에서 골목 안을 들여다본다. Y자모양의 입구동선이 사람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골목이 어서 오라고 두 팔을 힘껏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제법 대형매장이다 싶은 가구점과 업소용 주방용품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어느 가게에서도 물건을 흥정하는 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은 그냥 스치듯 골목을 통과한다. 상인들도 그들의 무심한 지나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시선 하나가 날아온다. 까딱 고개 짓과 함께 눈인사를 건넨다. ‘골목’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물어본 적이 있는 가구점 아줌마다. 내가 한마디 묻자 아줌마는 곧바로 이렇게 응수했다.
“아따, 아저씨는 팔자도 좋은 갑다. 이 바뿐데 그런 걸 다 묻고 다니고로.”
움찔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언짢았다.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먼저 삐죽 튀어 나간다.
“아따, 아지매는 팔자 좋은 사람 구경도 몬 했는 갑다. 그 사람들이 이런데 오던 기요. 골프장 가지.”
장군 멍군 말을 주고받은 인연을 기회 삼아 아줌마와 눈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몇 발짝 안 가서 만물상 간판이 보인다. 요즘 세상에 웬 만물상이냐 싶어 빙긋 미소 짓게 만드는 간판이다. 세로간판이 상갓집에 내다 건 등 모양을 하고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다. 앞면엔 ‘萬物相’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있고, 뒷면에는 주방기구, 식품기계, 제과제면기, 모타 반죽기, 식당빙수기 따위의 작은 글자들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옆 가게 간판이름은 철물점이다. 근데 진열된 품목은 만물상과 거의 어슷비슷하다. 불고기판, 숯불화덕, 면기계, 돌그릇, 가스버너, 식당기구 등이다. 만물상 품목과는 형님 아우 관계라고 할까, 아니면 보완관계라고 할까. 그게 그거 같은 둘 다 비슷한 품목들이다. 그런데도 간판들은 저 집은 우리 집 하고 아무 상관없는 집이라고 딴청을 부리듯 따로 놀고 있다. 그걸 보면 그 형님에 그 동생이란 생각이 들어 미소가 절로 번진다.
그 건너편은 모자원이 있었던 자리다. 모자원은 급작스럽게 문을 닫고 비워줘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황망스럽게 떠난 뒤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먼지바람만이 스산하게 골목을 휩쓴다.
골목의 중간쯤이다. 어느 날 인적이 드물어 적막감마저 느껴지는 골목길에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박용차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할아버지는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뭔가를 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살며시 쪼그려 앉았다.
일본인 밑에서 일을 배울 때 하도 호되게 당해서 당신도 후배들에게 일을 가르칠 때 독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 되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후회가 된다고 했다.
“살날이 얼매 안 남았다 아이가. 와 그리 독하게 했는고. 축구 같은 기……”
수십 년의 노동으로 진이 빠졌던 걸까.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린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작고 떨렸다.
저만치 ’마산의자‘ 간판이 보인다. 장사가 힘든 것보다 사람이 더 힘들다던 황만수 씨,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사람의 끝을 어디까지 봐야 되겠나 싶은 기. 야, 이 정도의 놈이 끝이겠지 싶은데, 그 위에 놈이 생기고. 진짜 이 놈이 마지막이겠지 싶으마 또 더 한 놈이 꼬이고. 세상 참, 무섭고 겁나고 그렇데예‘.
목공소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목공소들은 하나같이 주인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바닥에는 오래된 먼지와 나무 부스러기들이 함께 뒹굴고 있다. 도대체 저런 곳에서 뭘 만들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골목의 하늘을 덮어씌운 천막들은 다 낡고 삭아서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있다. 그 구멍 사이로 하늘이 점점이 박혀있다.
김태영 씨의 목공소가 저만치 보인다. 그의 목소리가 신음처럼 들린다.
“……힘이, 세월이 가 가꼬 , 힘이 드는 기야. 인자는 뭘 하나를 맨들어도 옛날보다 너무 무거워. 무게가 곱이 뭐꼬, 곱 이상이거든. 이걸 옮기고, 돌리고, 하다보모 그런 과정에서 사람 맥이 풀리삐는 기라. 우리 일은 한 마흔 다섯까지는 하겠더라고. 그런데 오십이 넘어 가끼네 아이더라고. 오십 되기 전에 끝을 내야 돼. 진작, 내야 돼.”
고개를 돌린다. 즐비한 목공소들의 끝이 이 골목 끝이다. 그 골목 끝에서 황만수 씨의 우울한 목소리가 가슴을 적신다.
“나는 겨우 유지만, 현상유지만 하고 있습니더. 근데, 이 골목은 죽었어예. 무너져도 이렇게 허물어지리라고 생각도 못했심더. 이 동네는 없는 사람들이 와 가지고 다 돈 벌었어예. 자기들이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마산경제의 수직상승에 힘입어 한때 전국 7대 도시 안에 들어간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입니꺼. 잘 나갈 때는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어예. 돌아서면 손님이고, 돌아서면 또 손님이고. 면 종류를 시켜 놓으면 나중에 불어터져 가꼬 젓가락만 갖다 대도 툭툭 면이 끊기 가지고 묵도 몬하고, 그랬으니까…… 징글맞도록 손님이 많았어예. 그 때가, 넓게 세상 보는 눈이 있었거나 그런 친척이라도 있었으면, 마산이 그때 잘 나가는 한 철이라는 것만 알았으면 일찍 손 털고 일어났어야 하는데, 장사를 하모 다 그런 줄 알았어예. 이 패턴이 영원할 것 같았고, 그기 다, 거품인데…… 골목 사람들 아무한테나 물어보이소. 대답이 똑같을 낍니다. IMF가 터지고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기라. 이전에는, 진짜 그때는 노났지예, 노 났어. 그러던 기 그라고 나서부터는 끝이 안보이예. 나는 우리나라 웃 대가리들이 하는 짓을 이렇게 비유합니더. 집안의 한 가장이 어데 가서 빚을 내(얻어)와 가지고 집 사고, 차 사고, 아들 옷 입히고, 아버지 잘 만나가꼬 너거는 잘 묵고 잘 사는 줄 알아라 카다가, 그래, 몇 년간을 잘 묵고, 잘 믹이고, 외상백이로 잘 돌아갔는데, 나중에 경기 떨어지니까 너거 껌 팔러 나가라 카는거 아니냐, 내는 늙었고 못하겠으니 내 빚 좀 갚아라, 차관 들여 와 가꼬, 국민들 붕붕 뜨고로 해 낳고는, 빚이 세계에서 3~4위라는 말은 뻥끗도 안하다가, 다 곪아 터지니 말하는데, 빚이 많다고 해 샀는데, 껄떡거렸던 겁니더. 좆도 모르고 우리는 거기에 맞장구 쳤던 깁니더.“
거기서 골목 끝을 바라보면 80년대 이후 들어선 가게의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철재의자, 특수의자, 중고가구, 공예가구, 씽크, 스텐 제작, 문집, 함석집, 목공소, 철물점…… 등. 이 간판의 품목란에 공통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크릴판 위나 함석판 위에 ‘물물교환’, ‘사고팔고’, ‘중고수리’ 따위를 새긴 문구들이다. 옛 명성을 알아달라는 듯 온통 도배를 해 놓았다. 골목과 가게들 역시 20년도 넘은 간판들만큼이나 낡고 썰렁하다.
바로 이곳이 7~80년대 마산 최대의 ‘중고시장’이었다는 그 유명한 ‘도둑놈 골목‘이란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선술집 ‘굴다리 집’ 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는 굴다리 일부 콘크리트 구조물이 제 빛을 잃은 채 흔적만 간신히 남기고 있다. ‘굴다리’는 예전엔 골목의 시작이었으나 지금은 골목 끝이 되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골목 안은 퇴락한 건물들만이 인적 없는 공간을 지키고 서 있다.
‘굴다리 집’ 앞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엇갈려있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든 새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구 연흥극장, 구 13번 도로, 구 분수 로타리, 구 마산 MBC, 구 마산시외버스주차장, 구 중앙극장, 구구구…… 모두 하나같이 이제는 지나간 옛날 이름들뿐이다.
‘인자 이 골목은 끝나 뿟어.’
체념하듯 내뱉는 골목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법사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실려 ‘골목’을 뒤덮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라진 숲 속의 오솔길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