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두 차례나 시험할 것 없소 / 진정 극문선사
진정스님이 행각할 때 두 스님과 동행하여 곡은산 (谷隱山) 을 찾아가니 설대두 (薛大頭) 가 물었다.
ꡒ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드시 그 중에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누가 지혜있는 자인가?ꡓ
두 스님은 말이 없고 진정스님이 어깨 아래 서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악! 하고 할을 하였다. 설대두가 주먹을 세우고 때리려는 태세를 보이자 진정스님이 말하였다.
ꡒ번거롭게 두 차례나 시험할 것 없습니다!ꡓ하자, 설대두는 주장자를 끌고 달아나 버렸다. 설대두는 석문산 (石門山) 자조 (慈照:谷隱睛聰) 선사를 친견한 스님이다.
12. 하마대 (下馬臺) / 덕부 (德敷) 선사
운정산 (雲頂山) 의 부 (德敷) 선사가 성도부 (成都府) 부사의 청으로 관아에 가서 법좌에 올랐을 때, 악영장 (樂營將) 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 절을 하고 일어나서 관아 문밖의 하마대 (下馬臺) 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ꡒ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는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저 관아 문밖의 하마대를 삼켜버릴 수 있겠습니까?ꡓ
스님은 양손을 펴보이면서, 곱게 가루내어 가져오라고 외치니 이 말에 악영장은 깨친 바 있었다.
13. 문병 온 사람을 고자질하다니 / 원통 (圓通) 선사
자경 (自慶) 장주 (藏主) 는 촉 사람으로, 총림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진여 (眞如:慕喆) ․회당 (晦堂:祖心) ․보각 (普覺) 등 큰스님을 두루 찾아뵈었다. 그가 여산 (山) 을 돌아다니다가 도성에 들어와 법운사 (法雲寺) 의 원통선사 (圓通禪師:法雲法秀, 운문종) 를 만나보고자 수 (秀) 대사와 함께 법운사를 찾아갔다. 수대사는 거기서 공부하게 되었고, 자경스님은 경장주 (慶藏主) 라고 이름을 알리자 원통스님은 잠시 다른 곳에 머물도록 하라면서 자리가 비면 곧 들어오게 하겠다고 하였다. 자경스님은 지해사 (智海寺) 에 머물다가 우연히 병을 앓아 눕게 되었는데 수대사는 그를 문병하고 싶었으나 사중의 일로 여가가 없었으므로 몰래 산문을 빠져나와 지해사로 찾아가 자경을 만났다. 자경은 원통스님에게 서신을 보내 수대사가 법규를 어기고 산문을 출입하였다고 알렸다. 원통스님은 서신을 받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야참법문에서 몹시 꾸짖었다.
ꡒ자경은 참으로 소인이다. 도리를 하느라 문병하러 질문을 나간 사람을 도리어 고자질하다니 이 어찌 제대로 된 사람이 할 일이겠는가?ꡓ
자경스님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숨을 거두었는데 총림에서는 모두 그가 원통스님의 꾸지람을 듣고 죽었다고 하였다.
14. 의리를 높이 사다 / 원통 (圓通) 선사
무주 (撫州) 명수사 (明水寺) 의 손 (法遜) 선사가 법운사 (法雲寺) 에서 시자를 하고 있을 무렵 도림 임 (道林琳) 스님이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방장스님이 특별히 신참스님을 위해 차를 마련하였다. 법손스님은 몸소 요사채로 찾아가 그를 초청하였는데 때마침 도림스님은 자리에 없었고 그와 동행한 승려가 옆방에 있다가 돌아가 있으라고 하면서 그가 오면 대신 말해주겠다고 하였다. 법손스님이 간 후 그 스님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공양이 끝난 뒤 북을 울려 차 모임에 모이게 하였으나 도림스님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원통 (圓通) 스님은 신참스님이 왔느냐면서 빨리 데려오라고 하였다. 도림스님이 도착하자 원통스님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 대중 앞에 서게 하고서 꾸짖었다.
ꡒ산문에서 특별히 차를 마련하여 총림의 예의를 표하려 하였는데 너는 무슨 까닭에 게으름 피우며 제때에 오지 않았느냐?ꡓ
ꡒ북소리를 듣던 차에 때마침 뱃속이 거북하여 곧장 달려오지 못했습니다.ꡓ
ꡒ내가 파두 (巴豆:설사제 생약) 를 가지고 북을 쳐서 네 똥이 나오게 한 것은 아니다.ꡓ
원통스님이 이렇게 꾸짖는데 법손스님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ꡒ제가 그를 청하는 일을 잊었기 때문이니 저를 절에서 쫓아내십시오.ꡓ
그러자 동행했던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ꡒ이 일은 시자와 신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시자의 말을 받아 놓고 잊어버렸기 때문이니, 제가 두 사람을 대신하여 절을 나가겠습니다.ꡓ
원통스님은 그들의 의리를 높이 사서 모두 용서해 주었다.
15. 사리 이야기 / 진정 극문선사
여러 총림에서는 큰스님들이 입적한 후 전신을 화장하여 사리를 얻는 일이 매우 많다. 그 중에서도 진정 (眞淨) 선사의 사리는 크기가 콩알 만하고 오색이 영롱하면서도 견고하였다. 곡산 조 (谷山祖) 선사는 진정스님의 수제자였는데 스님의 사리를 많이 거두어다가 유리병에 담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공양하였다. 묘희 (妙喜) 스님이 곡산을 지나는 길에 한번 시험하고자 쇠다듬이 위에 사리를 올려 놓고 망치를 들어 내리쳤으나 다듬이와 망치는 모두 움푹 패여 들어갔지만 사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이는 평소 실천이 명백하였고 깨달은 경지가 초연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16. 견처만 분명하다면 / 흥양 현 (賢) 선사
쑥대머리 현 (賢蓬頭:興陽 賢스님의 별명) 스님은 강주 (江州) 사람으로 위산사(潙山寺) 진여 (眞如:大慕喆) 스님의 문하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견처가 분명하고 기봉 (機鋒) 이 날카로워 스승을 능가하는 일이 있기도 하였으나 행실이 근엄하지 못하여 대중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다. 진여스님은 방장실 뒷편에 암자를 마련하여 현스님 혼자 거처하도록 하고 방장실 앞으로 좁은 길을 내서 형제들의 왕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후 2년 만에 그를 대중의 수좌로 추천하고 입승으로서 불자 (拂子) 를 잡게 하니 남보다 설법을 훨씬 잘하여 모든 대중이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후 영주 (州) 흥양사 (興陽寺) 의 주지로 여러 해를 살면서 불법을 크게 펼쳤으며 입적한 뒤 육신이 허물어지지 않았다.
원오 (圓悟克勤) 스님이 위산사에 있을 때 그 일을 직접 보았으며, 묘희스님이 흥양 (興陽) 에 갔을 때까지도 그의 육신사리를 보았다고 한다.
17. 대중에 살 때처럼 주지하다 / 담당 문준선사
담당 문준 (湛堂文準) 스님은 흥원부 (興元府) 사람이며 진정스님의 맏상좌이다. 분령(分寧) 운암사 (雲巖寺) 에 주지자리가 비어 군수가 황룡 사심 (黃龍死心:悟新, 1043~1114) 선사에게 아는 사람을 천거해 주면 그 자리에 모시겠다고 하자 사심스님이 말하였다.
ꡒ준산주 (準山主) 가 주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의「세발송 (洗鉢頌)」 만 보아도 매우 훌륭합니다.ꡓ
군수가 그 게송을 들려달라고 하자 사심스님은 게송을 소개하였다.
다 쓸데없는 일
납승의 콧구멍 큰 물건은 아래로 처져 있도다
만일 모르겠거든
동쪽마을 왕씨 아줌마에게 물어보렴.
之乎者也 衲僧鼻孔 大頭向下
若也不會 問取東村王大姐
군수가 남달리 생각하고 예를 갖추어 간곡히 맞이하자 문준스님 또한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검약으로 자신을 다스려왔으며 비록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펴는 주지였지만 대중승으로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뒷편 시렁에서 뜨거운 물을 한 국자 떠서 얼굴을 씻고 다시 그 물로 발을 씻었으며, 그 밖의 생활도 대략 이와 같았다. 법회가 끝나면 방장이나 행자나 길 가는 사람처럼 평등하게 지냈고, 땅을 쓸고 차 끓이는 일까지도 몸소 하여 옛사람의 풍채가 있었다. 참으로 후손들에게 좋은 모범이었다.
18. 나한상을 불 때서 얻은 사리들 / 불조 고 (佛祖曠) 선사
법운사 (法雲寺) 불조 고 (佛照曠) 선사가 지난 날 경덕사 (景德寺) 철나한원 (鐵羅漢院) 에 물러나 있었는데 법당에는 나무로 깎은 나한 (羅漢) 이 몇 분 봉안되어 있었다. 겨울의 날씨가 몹시 추웠으므로 고스님은 그것을 태워 화롯불을 감싸안고 새벽까지 지냈는데 이튿날 재를 버리다가 수없이 많은 사리를 얻었다.
여러 좌주 (座主) 들은 모두 그를 외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조스님은 단하 (丹霞天然:729~824) 스님과 같아서 속인의 눈으로는 시험할 수 없다는 분이다.
19. 선사어록에 주해를 붙이다가 / 진료옹 (陳了翁)
연평 (延平) 진료옹 (陳了翁) 의 이름은 관 (瓘) , 자는 영중 (瑩中) 이며 자호는 화엄거사 (華嚴居君) 이다. 조정에서는 꼿꼿하고 강직하여 옛사람의 매서운 기품이 있었다. 그리고 불경에 뜻이 있어 논리는 좌중을 압도하였지만 참선만은 크게 깨치지 못한 채 선종의 기연을 뜻으로 해석하였다. 남 (黃龍慧南) 선사의 어록을 무척 좋아하여 거의 다 주해를 붙혔지만, ꡐ금강 (金剛) 과 토우 (土偶) 가 등을 맞대고 비비면…'이라는 구절만은 손을 대지 못했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이 말은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인데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속담에 ꡐ매우 지혜로운 사람도 눈 앞의 석 자 (尺) 에는 어두울 때가 있다'함이 과연 거짓말이 아니다.
20. 「석문록」에 빠진 일화 / 자조 온총 (慈照睛聰) 선사
자조 온총 (慈照睛聰) 선사는 수산 (首山省念:926~993) 스님의 법제자이다. 함평 (咸平:998~1003) 연간에 양주 (襄州) 석문사 (石門寺) 에 주지를 지냈는데 어느 날 그 고을 태수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매질을 하고 모욕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중들이 길 왼편에 서서 맞이하였고 수좌가 앞으로 달려나와 태수가 아무 죄 없는 스님께 이처럼 모욕을 하였다고 위로하였다. 자조스님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ꡒ평지에서 뼈무더기가 일어날 것이다ꡓ라고 하였는데, 손가락 끝을 따라 한 무더기의 흙이 솟아 올랐다. 태수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곳을 깎아버리자 또다시 처음처럼 솟아올랐는데 그 후 태수의 온 가족이 양주 (襄州) 에서 몰사하였다.
한 스님이 총스님에게 물었다.
ꡒ깊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도 불법이 있습니까?ꡓ
ꡒ있지!ꡓ
ꡒ무엇이 깊은 산 가파른 절벽에 있는 불법입니까?ꡓ
ꡒ기괴한 바윗돌은 범의 모습이요, 불붙은 소나무는 그 기세 용과 같다.
무진거사 (無盡居君:張商英) 는 스님의 이 이야기를 좋아했으면서도 `「석문록 (石門錄:온총스님의 어록)」에 이 두 가지 일만은 기재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묘희스님이 무진거사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