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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표
신중현과 THE MAN, 검은 나비, 호랑나비 전) 저작권 협회 수석 이사, 한국 청년 작가회(하모니회) 회장역임 서울 국제 가요제 동상,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편곡상, 그룹 2040멤버 대표곡: 내마음 당신 곁으로, 사랑은 차가운 유혹, 서울여자, 사랑의 불시착, 사랑은 무슨 사랑, 그대슬픔까지 사랑해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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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2년 11월 1일 장소: 서울 재즈아카데미 질문: 신현준 이용우 정리: 이용우
김기표(본명 김성철)는 1952년 6월 14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서울에 올라와 배재중고를 나왔고, 모 대학 음대(작곡 전공)를 중퇴했다. 김기표란 이름은 히트곡을 많이 만들어낸 작곡가(그리고 편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내 마음 당신 곁으로', '사랑은 차가운 유혹', '사랑의 불시착', '사랑은 무슨 사랑',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 '서울 여자' 등이 바로 그가 만들어낸 히트곡들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안치행과 손잡고 안타 프로덕션을 만들면서 작편곡가로서 활약했다. 서울 국제가요제, 서울 가요대상에서 작곡과 편곡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작곡가로서 상업적인 성공에 가려 있지만, 김기표는 1970-80년대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키보디스트였다. 약관의 나이에 신중현에게 발탁되어 더 멘에서 키보드를 연주했고, 검은 나비에서 뛰어난 기타 솜씨를 선보였으며, 기타, 키보드, 색서폰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멀티 플레이어로서 명성을 얻었다. 작곡가로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호랑나비, 황금박쥐, 서울 앙상블, 불나비, 비상구 등을 조직해 1970-80년대 호텔 나이트 클럽가를 평정했다. 데블스, 템페스트, 영 에이스, 히 식스, 코리아 슈퍼 세션, 2040 등 잠깐씩 관여한 그룹들의 면면은 그의 명성과 재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족일 것이다.
저작권 협회 수석 이사, 한국 청년작가회(하모니회) 회장을 거친 김기표는 현재 서울 재즈아카데미 음악학부 학과장을 역임하면서 작곡과 편곡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그가 곡을 만들고 편곡한 최헌의 신보가 발매되었다.
고교 시절, 페이퍼스란 팀으로 미8군 '리그'에 진출하다
Q:상투적인 질문인데, 중고등학교 때 인상 깊게 들었던 음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또 배재 다니실 때 밴드부 활동을 하셨는데요. 휘닉스의 심형섭님이 배재 밴드부 선배라고 알고 있습니다. - 중고등학교 때 즐겨들었던 것은 록 음악이었죠. 벤처스, 비틀스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배재 밴드부는 당시 인원이 40-50명 정도 되었고, 신규복 선생님이라고, 유명한 분이 밴드부를 지도해주셨습니다. '얼굴'이란 노래를 작곡하신 분인데, 지금 저작권협회 이사로 계시죠. 당시 동도고등학교에 재직하셨는데 저희가 코치로 초빙한 거죠. 이 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밴드부에서 제가 맡은 악기는 앨토 색서폰이었구요. 심형섭 형은 졸업하고 나중에 봤습니다. 심형섭 형이 졸업하고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으니까 학교에서는 볼 수가 없었죠.
Q:밴드부에는 건반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건반은 언제 배우셨나요? - 건반은 밴드부에 없었죠. 하지만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에 피아노와 풍금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배웠죠. 물론 전공처럼 한참 한 건 아니고, 성가대원에게 기본만 배웠던 겁니다. 기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님한테 배웠습니다. 아버님이 유명한 원로 동양화가신데, 음악을 좋아하셔서 지금도 성가대 만들고 그러신 분이니까. 중학교 들어가면서 팝 음악에 미치면서 기타에 좀더 몰두하게 되었죠. 처음 기타를 잡은 게 1960년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40년이 넘습니다. 제가 대선배님들하고 굉장히 관계가 깊은 게 음악을 빨리 시작했고, 학교 다니면서도 하고 그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그때 피아노나 오르간 들어간 음악으로 즐겨 듣거나 연습했던 곡은 어떤 게 있었나요? -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도어스도 좀 뒤고..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거, 스포트닉스 등등. 뭐 몇 군데 외에는 거의 기타 위주의 음악들이었죠..
Q:1952년 생이시면 고등학교 때 이미 미8군 무대에 들어가셨단 얘긴데, 미8군 무대에 진출한 과정은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하네요. -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페이퍼스란 보컬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연주할 무대가 많지 않아서 페이퍼스는 카니발, 예식장, YMCA 강당 같은 데서 연주하곤 했는데, 우리가 연주하는 걸 보고 조성국 씨(깨꾸)가 미8군 무대에 소개를 해주고 일을 봐줬습니다. 미8군에 들어가서 처음에 오픈 밴드도 하고 무척 고생했죠. 음악 한다고 거의 학교를 안 다녀서 학교도 간신히 졸업했습니다.
Q:연주는 주로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패키지 쇼와 하우스 밴드 중 어느 쪽이셨습니까? - 화양, 유왕, 유니버설에 소속으로 있으면서 굉장히 많은 곳을 다녔죠. 문산에서 오래 했고, 평택, 왜관, 회덕에도 있었고...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패키지 쇼도 하고 하우스 밴드도 했습니다. 이태원 킹 클럽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는 색서폰도 하고, 키보드도 하고, 기타도 하고 그랬죠. 제가 세 가지 악기를 다 다뤘기 때문에, 이 그룹에선 이거 했다가, 저 그룹에선 저거했다가...
Q:같이 하셨던 분 중에 저희가 알만한 분들 있나요? 말씀 들어보니까 데블스와도 같은 무대에 섰을 것 같은데... - 우리 그룹에서 같이 했던 친구들은 지금 다 음악 안 합니다. 데블스는 잘 알죠. 아, 데블스에도 잠깐 있었어요. 그게 1971년도였던가? 하여튼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그때 데블스 멤버는 연석원, 김명길(기타), 문석(드럼), 최인규(베이스)였습니다. 최성근 씨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내가 대신 들어가서 색서폰을 불었던 거죠(트럼펫은 그때 없었고 홍필주 씨는 나중에 들어왔습니다). 데블스의 매니저 더벅이가 픽업했는데, 한 2-3개월 정도 있었죠. 이태원 아메리칸 클럽에서 연주했구요. 학교 문제가 있어서 오래하진 않았습니다.
Q:그때 키보드는 어떤 기종을 쓰셨나요? 보통 야마하라고 들었는데요. 좀 얘기가 새지만, 하몬드나 파라피사는 들어온 적이 없었나요? - 나는 야마하 YC 20이란 걸 썼어요. 그때 하몬드 쓰는 사람은 없었고, 복스(vox)는 바보스의 이진, 그리고 와일드 캐츠랑 딕 패밀리에 있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정택 씨가 썼습니다. 복스도 괜찮았지만, 나는 주로 야마하를 썼습니다.
Q:키보드는 아무래도 운반이 불편할 텐데, 클럽에 세팅되어 있었나요? 그리고 연습은 어디서 하셨는지요? - 그랬죠. 하우스 밴드니까. 연습은 끝나고 클럽에서 하든가, 집에서 혼자 하든가 했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연습하는 게 문제 없었죠.
더 멘: 약관에 신중현에 발탁되어 신인왕급 활약을 펼치다
Q:그럼 더 멘으로 본격적인 그룹생활을 하신 건가요? 또 누가 김기표님을 픽업했는지 궁금합니다. - 본격적인 그룹 생활은 그전에도 한 거죠. 일반(무대)으로는 더 멘이 본격적인 처음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더 멘에 들어가게 된 건 신중현 씨가 더 멘이란 팀을 만드는데 키보드를 찾았거든요. 근데 더 멘에 있던 박광수 씨가 그 전에 내가 연주하는 걸 오랫동안 봤거든요. 그래서 박광수 씨가 나를 신중현 씨한테 추천하게 된 거죠. 드럼 치는 문영배는 내가 데리고 간 친구고.
Q:더 멘은 1971년에 결성해서 1973년에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데, 박광수님한테 픽업되신 게 거의 (고등학교)졸업과 동시이겠네요? 혹시 오디션도 보셨나요? - 아마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될 겁니다. 학교는 거의 개념이 없었습니다만. 나는 오디션 없이 더 멘에 들어갔습니다.
Q:그때 라인업이 신중현 기타, 김기표 오르간, 이태현 베이스, 손학래 오보에·색서폰, 문영배 드럼, 박광수 보컬인데, 이 라인업으로 계속 쭉 갔나요, 아니면 변동이 있었나요? 그리고 보컬은 박광수님이 고정 멤버였나요? 장현이나 김정미 같은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요? - 더 멘은 처음 라인업 그대로 갔습니다. 보컬은 박광수 씨가 고정이죠. 장현이나 김정미 같은 분들은 신중현 씨 가수죠. 물론 장현, 김정미, 박인수 같은 분들이 더 멘 무대에 같이 올라가서 노래하기도 하고, 더 멘이 레코딩 반주도 해주고 그랬지만 정규 멤버는 아니었고, 정식 멤버는 박광수 씨였죠. 김정미 씨 같은 경우는 레코딩 때문에 매일 와서 연습하고 그랬어요. 우리가 다 반주하고 그랬으니까. 아, 참 옛날 얘기네요.
Q:음반 녹음에 대해 좀 여쭤보겠습니다. 그때 주로 녹음하신 데가 마장동 스튜디오였나요? 녹음은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요즘처럼 멀티 트랙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녹음할 때 더빙(그때 용어로 오도아와세) 같은 것도 하셨나요? - 더 멘 시절에는 주로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습니다. 당시엔 당연히 멀티 트랙은 아니죠. 2채널, 8트랙 정도로 기억합니다. 녹음할 때 더빙은 없었고(오도아와세는 일본말이죠), 노래 더빙만 있었습니다. 2채널이니까 한 채널은 반주, 한 채널은 노래를 담거나, 동시에 담았죠.
Q:그럼 나중에 믹싱은 어떻게 했나요? - 트랙으로 잡아 가지고 했죠. 무슨 얘기냐면, 그러니까 그때 아마 16트랙도 채 안되었을 겁니다. 8트랙이었을 텐데, 악기를 8트랙에 잡아서 다 넣어야 될 거 아니에요? 하나나 두개는 보이스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악기로 다 하고. 그렇게 8트랙으로 녹음한 걸 한 채널에는 전부 반주를 집어넣고 다른 한 채널은 노래를 집어넣어서 2채널로 만들어서 믹싱을 하는 거죠. 장비도 열악한 데다 더빙도 하고 그러는 바람에 그때 음반을 들어보면 사운드가 난리예요.(좌중 웃음) 틀리고 이런 건 예사였고.
Q:그런데 장현과 더 멘이 같이 낸 음반 있잖아요. 뒷면을 보면 '아름다운 강산' 오리지널 버전 같은 경우 사운드가 굉장히 두텁던데요. '빠바바바' 하고 색서폰 들어가고 기타도 와와 들어가고... 그건 더빙을 많이 한 건가요? - 아니요. 그땐 채널이 그렇게 될 리가 없었어요. 그 곡 녹음한 건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아름다운 강산'이란 곡이 가사와 작곡이 거의 스튜디오에서 이뤄진 겁니다. 신중현 씨가 일을 미리미리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뭐 음악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그걸 다 만들고 편곡하더라구요(그 분이 워낙 대단한 분이라 제작자도 다 맡겨놓은 상태고 그러니까). 그룹 편곡이란 게 그렇게 해서 더 좋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곡은 다 해와야 했는데, 작곡도, 가사도 스튜디오에서 거의 다 했습니다. 그만큼 순발력이 있는 분이죠.
Q:더 멘이 실질적으로 활동한 것은 1년이 좀 넘는 정도인데, 굉장히 많은 음반을 녹음했습니다. 음반 하나 레코딩 하는데 몇 일이 소요되었나요? 보통 몇 일 안되던데요. 요즘 음악인들은 꿈도 못 꿀 기간에...(웃음) - 음반 하나 녹음하는데 하루 이틀에 다하죠. 요즘 친구들이 못하는 건 생산 능력이 그렇게 안되니까요. 만드는 작업을 전부 미디에 의존하고 그러니까. 기계는 좋은 대신 재능은 떨어지는 거죠.
Q:음반에 음반 번호와 발매 날짜가 있긴 하지만, 녹음 순서와 다를 수도 있고 또 어떤 음반들은 날짜가 별 차이도 안 나는데요. 더 멘이 처음 녹음한 것은 어떤 음반인가요? - 처음 녹음 한 건 오리지널 '아름다운 강산' 있는 음반이에요. 그게 왜 제목이 '장현과 더 멘'이냐면, 앞면에 장현이고 뒷면에 더 멘이고 해서... 하지만 나중에 음반 보고 황당하긴 했죠. 더 멘이 장현의 백 밴드처럼 읽히거든요.
[장현 and The Men](1972)과 [윤용균 and The Men](1973) 음반에서 각각 더 멘의 '롱 버전 곡' 세 곡을 모은 복각 CD. 신중현과 더 멘의 [아름다운 강산/거짓말이야](SJHMVD, 2002) 커버 사진.
Q:장현과 함께 한 음반이 더 멘의 음반 중 발매 날짜가 처음은 아닌데(1972년 10월 29일), 꼭 녹음된 순서대로 나온 건 아니로군요. 더 멘이 양희은님, 서유석님, 김정미님의 음반도 참여하셨죠? 윤용균님과 함께 한 음반은 더 멘이 '거짓말이야'를 한 20분 동안 한 게 있던데요. - 양희은 씨, 서유석 씨 음반을 녹음한 건 맞습니다. 김정미 씨 음반도 전부 다 했구요. 아니, 1집은 골든 그레입스가 한 것 같네요. 하여튼 김정미 씨 음반은 '간다고 하지 마오' 있는 음반(2집)부터 다 했죠. 윤용균 음반은 기억이 안 나네요. 들어봐야 알겠네요.
Q:김정미님, (김)지연님 같은 분들은 싸이키델릭 음악을 스스로 알고 한 것 같진 않은데, 신중현님이 그렇게 키운 건지... 또 김정미님이나 (김)지연님 같은 여가수들 녹음할 때 재미있는 뒷 얘기들 없으세요? - 뒷 얘기는 말하기 곤란한데요...(좌중 웃음) 내가 더 멘 할 때 김정미는 이미 들어와 있었고... 김지연은 잘 생각이 안 나네요. 음악을 들으면 알겠지만. 김정미, 김지연 같은 분들은 신중현 씨가 키워서 싸이키델릭 한 거죠. 그때는 가수가 알고 한 게 아니라...
Q:그 음반들을 들어보면, 현악 편곡도 들어가던데 세션을 추가한 건가요? 현악 세션은 보통 몇 분 정도 참여하는 건지도 궁금합니다. - 악사들을 세션으로 불러서 녹음한 겁니다. 클래식 하는 분들은 아니고, 대중음악 쪽에서 현 하는 분들이죠. 신상철 씨, 김동석 씨 이런 분들입니다. 지금도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죠. 현악 세션은 보통 네 명, 한 명도 하다가 많을 땐 여덟 명, 두 명도 합니다. 그러니까 네 명, 한 명이란 건 바이올린 넷, 첼로 하나. 그리고 여덟, 둘, 둘 갈 때는 바이올린 여덟, 비올라 둘, 첼로 둘.
Q:그건 다 신중현님과 그룹에서 결정하는 건가요? 장현 음반은 현악이 없던데 의도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 제작자와 상관없이 그룹 자체에서 결정하는 거예요. 현악 편곡을 하기로 하면, 세션을 부르는 거죠. 뭐 신중현 씨가 아무래도 이교숙 선생한테 공부했기 때문에, 버라이어티한 음악부터 그룹 음악까지 다 소화를 했으니까.. 곡에 따라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현악을 쓰는 거죠.
Q:더 멘 때 신중현님 음악이 앞서 했던 퀘션스나 골든 그레입스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기타는 솔로도 많지 않고 역할도 별로 크지 않은 반면, 키보드나 오보에 역할이 굉장히 크고요. 베이스도 날라 다니는 것 같고. - 달라졌죠, 많이. 그 전의 음악은 신중현 씨가 자신과 거의 비슷한 세대랑 음악을 하다가 더 멘에서 나하고 음악을 같이 하면서부터 세대가 다르니까 내 나이 쪽의 음악들을 접하게 되었죠. 요즘 말로 젊은 피 수혈이었죠. 내가 카피해서 편곡해 간 음악은 시카고 음악이라든지, 타워 오브 파워(Tower Of Power)라든지 이런 그 당시 많이 유행하던 젊은 록 음악들이었죠. 딥 퍼플이라든지, 산타나라든지, 바닐라 퍼지... 또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Blood, Sweat & Tears) 같은 관악이 들어간 음악들도 새로 편곡해서 많이 연주했죠. 신중현 씨 음악이 많이 달라지다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건 지미 헨드릭스 영화를 보면서였죠. 그러면서 신중현 씨가 엽전들이란 팀을 만들게 되는 거죠. 딱 3명이랑 그런 걸 위주로 한...
Q:그렇다면 신중현 음악에서 더 멘은 그 이전과 엽전들 이후를 가르는 과도기 같은 것이었단 말씀이신가요? - 그런데 그때는 레퍼토리가 애니멀스의 에릭 버든(Eric Burden)이 했던 더 워(The War)라는 그룹의 곡을 비롯해 흑인 음악들을 많이 했어요. 템테이션스(The Temptations) 이런 걸. 더 멘 때 음악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특히 박광수 씨가 블루스, 소울 그런 쪽에 강했고.. 그런데다가 색서폰이 들어가니까 아무래도 음악이 컬러풀했죠.
Q:그럼 서울시향(서울시교향악단)에 있던 손학래(오보에, 색서폰)님이 들어온 것도 그런 컬러풀한 음악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나요? - 손학래 씨가 당시 서울시향에 있으면서, 최병걸 씨 아버지(아, 유명한 기타리스트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가 이끄는 팀에서 색서폰 주자로 '밤일'을 일했다구요. 그런데 신중현 씨가 색서폰이 필요하다 그래서 픽업한 거죠. 신중현 씨로서는 그때 색깔을 확 바꿔보려고 시도를 했던 거죠.
Q:키보드가 좀 들어간 음악을 그룹 사운드 쪽에선 김기표님, 포크 쪽에선 나현구 프로덕션의 이호준님, 또 약간 뒤인데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님이 많이 하신 것 같은데, 1970년대 초중반부터 키보드를 많이 넣는 그런 분위기가 생겨났나요? 또 더 멘 때도 야마하 YC 20을 쓰셨는지도 말씀해주시구요. - 그때는 키보드 음악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죠. 키보드가 많이 나오게 된 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게 산타나와 딥 퍼플이었죠. 신서사이저는 그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 후에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L&P)라든지, 예스 같은 팀들 나오면서 신서사이저 음악이 많이 나왔죠. 그때부터 미디 음악이 시작됐죠. 그리고 더 멘 때 쓴 악기는 역시 야마하 YC 20이었습니다.
Q:보통 키보드가 있는 경우는 기타, 베이스, 드럼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그냥 사운드를 메꿔주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더 멘의 경우는 아니었는데요. - 아니죠. 그게 왜 그랬냐면... 내가 어린 나이였지만 외국 음악에 대해 굉장히 앞서 있었구요. 더 멘으로 픽업이 된 것도, 그 당시에는 키보드 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긴 했지만, 뭐 사람들이 내가 특출나다고 얘기들을 했어요. 그 당시에, 지금은 별 볼 일 없지만.(좌중 웃음) 사실 나는 기타를 치고 싶었는데 신중현 씨가 있으니까 신중현 씨 팀에서 내가 칠 이유가 없죠.(좌중 웃음)
Q:그때 여관 같은데서 합숙하면서 연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더 멘은 어땠나요? 다들 개성 강한 분들인데... - 더 멘이 결성된 뒤 정식으로 연습하기까지 두 달 가량 공백이 있었어요. 그때 명동에 왕성이라고 악기 잡히는 유명한 전당포가 있었어요. 그때 음악 했던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 전당포에 악기 다 잡히고... 그때 명동의 건설회관에 그룹 사운드 협회라는 게 있었는데, 신중현 씨가 회장이었거든요. 그 사무실에 매일 나가는 거예요. 두 달 동안을, 언제 연습하나 기다리면서. 근데 그때 안 할 수가 없었죠. 당시 신중현 씨랑 음악 하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Q:연습은 주로 어디서 했는지, 무대에서 레퍼토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무대에서 복장은 어떤 걸 입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런 거 여쭤보기 좀 그런데, 그때 개런티는 얼마나 되었는지도... - 로얄호텔에 전속으로 출연을 할 때였으니까 로얄호텔 지하 나이트 클럽에서 연습했죠. 레퍼토리는 신중현 씨 곡 외에 아까 얘기했던 그런 음악들이예요. 외국곡들 위주로 했죠.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Slipping Into Darkness'나, 아이작 헤이스(Isaac Hayes)의 'The Shaft', 템테이션스의 'Cloud Nine', 시카고의 'Colour My World', 'Make Me Smile', 'Low Down' 등등 많죠. 우리는 무대에서 다 따로따로 입었어요. 다들 무대복 입고 했지만, 우리는 자유롭게 입었죠. 개런티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였죠. 글쎄, 한 달에 한 15만원 받았었나?
Q:더 멘이 있던 로얄호텔 외에도, 닐바나나 풍전 이런 곳도 융성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밴드들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좀... - 닐바나에는 키 브라더스, 메가톤스가 있었어요. 메가톤스는 오세은이 보컬, 나중에 딕 훼밀리 한 서성원이 드럼, 이진동이 기타였죠. 매니저가 박원웅 씨였어요. 메가톤스 초창기에는 나도 한 6개월 정도 있었어요. 풍전호텔 클럽에는 템페스트가 있었습니다. 검은 나비 이후에 나는 템페스트에도 한 한달 있었습니다. 또 타워호텔도 있죠. 더 멘도 타워호텔에 섰습니다. 처음에 로얄호텔에 있다가,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오픈할 때 미도파 살롱에 있던 이길봉 악단하고 같이 들어갔죠. 더 멘 해산 이후에 검은 나비가 또 타워호텔에 섰구요.
Q:고고 클럽 같은 데는 아무래도 춤추는 음악이 필요할 텐데, 더 멘의 음악은 춤추는 분위기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 우리가 댄스 음악 때문에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타워호텔에 있을 때 이길봉 악단, 키 브라더스, 그리고 더 멘이 있었는데, 사장이 우리만 아주 내놨죠. '춤을 추건 말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 당시 음악으로선 굉장히 앞선 음악이었기 때문에 춤을 추기 힘들고. 우린 춤추기 좋은 음악은 잘 안 했어요. 그런데, 그때 흑인들이 가끔 왔는데, 사실 흑인들이 오면 미칠 그럴 음악들이 많았죠. 그런데 그 당시에 한국 사람들은 다 체조니까, 춤이 아니고.(좌중 웃음) 그러니까 잘 안 맞았죠.
Q:그때 매니저는 이태현님이었나요? - 네. 더 멘은 이태현 씨가 매니저였어요. 이태현 씨가 비즈니스 관계된 일은 도맡아서 했죠. 그 분이 그쪽으로 수완이 있어서, 나중에 검은 나비를 끝으로 연주자 그만두고 전업적으로 매니저 일을 했습니다. 안타에서 매니저 하다가, 나가서 나훈아 매니저도 하고 조용필 매니저도 했고, 서울기획을 설립해서 활동하고 있죠.
Q:더 멘과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히 식스의 김홍탁님과는 교류가 없으셨는지요? 또 서병후님, 정홍탁님 같은 기자들과는 좀 교류가 있으셨는지요? - 김홍탁 씨는 알긴 알았지만, 음악을 같이 하진 않았습니다. 당시 서병후 씨와 정홍탁 씨는 연예기자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죠. 일간스포츠에 있던 지웅 씨도 그렇구요. 지웅 씨는 작사도 하셨는데, 그 분이 검은 나비라는 이름을 지어줬죠.
Q:더 멘의 음악은 소울의 영향도 있고 싸이키델릭하기도 한데, 더 멘의 음악 스타일을 정리해서 말한다면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 신중현 씨가 지미 헨드릭스 영향을 받으면서 좀 싸이키델릭하게 음악이 갔죠. 그 전엔 신중현 씨가 철저하게 소울 음악을 했었어요. 그러다 백인 음악 쪽으로 갔다가. 음악 하는 사람들이, 저도 마찬가진데, 흑인 음악 쪽으로 갔다가 또 백인 음악 쪽으로 갔다가, 몇 년 단위로 음악들이 좀 변화합니다. 하다보면 좀 질리게 되고 그래서 또 좀 담백한 걸 원하기도 하고. 신중현 씨도 마찬가지죠.
Q:더 멘이 해체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시 돈 문제가 걸려 있다던가...(웃음) - 해체된 이유는... 뭐 돈 문제도 많았죠. 그리고 음악적인 불만도 있었고.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하나의 커 가는 과정에서 우린 젊으니까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죠. 어쨌든 그래서 합의하에 팀을 해산하기로 했습니다.
'엽전들 초기'라고 알려졌던 문제의 그 라인업. 왼쪽부터 이남이, 김기표(김성철), 문영배, 신중현, 최이철.
Q:엽전들 초기에는 같이 활동 안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엽전들 초기라면서 사진이 한 장 있더라구요. 신중현, 이남이, 문영배, 최이철님이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요. 저희가 관련된 분 만나뵐 때마다 확인해가고 있거든요. - 저는 엽전들은 안 했어요. 그 사진은 엽전들이 아닙니다. 이름이 영 에이스였나? 신중현과 영 에이스였던가? 암튼, 최이철, 이남이, 문영배, 나... 그러니까 대구에서 하다가 올라온 그 멤버에다 신중현 씨만 껴서 새로 만든 팀인데, 더 멘 끝나고 잠깐 한 거예요. 몇 개월 정도? 음반 낸 것도 없고 그냥 업소에서 연주만 잠깐 한 거죠. 레퍼토리는 우리가 하던 레퍼토리에다 신중현 씨 곡 몇 곡 했죠. 그러다 그게 세 팀으로 갈라집니다. 내가 만든 검은 나비, 그리고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 신중현의 엽전들.
검은 나비: 1970년대 그룹 사운드 올스타로 이적하다
Q:더 멘이 끝나고 1974년 최헌(보컬), 손학래(오보에, 색서폰), 이태현(베이스), 문영배(드럼), 김영균(보컬, 키보드), 김인섭(트럼펫)과 함께 검은 나비를 결성하게 됩니다. 대마초 사건을 계기로 검은 나비는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신문 기사를 하나 봤는데, '손학래와 검은 나비'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철저한 클래식 록을 지향하는 7인조로, 모차르트의 호른 콘체르토를 팝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중이다'라고 써있던데요. 더 멘과 비교해 검은 나비의 음악을 설명하신다면? 브라스 록이라고 볼 수 있나요? - 아니(웃음), 철저한 클래식 록이니 하는 그런 건 아니었구요. 그때도 흑인음악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 혼이 두 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음악들을 많이 했죠. 검은 나비의 음악은 일종의 브라스 록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만 얘기하면 안되고. 왜냐면 색서폰이 있으니까. 검은 나비는 음악이 진짜 좋았어요. 당시 음악 하던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더 멘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죠.
Q:그렇다면 무대에서도 주로 흑인 음악 쪽으로 연주했나요? 창작곡 말고 외국 곡의 경우 말입니다. 또 주로 연주한 곳은 어디인지요? - 관악이 첨가된 음악들, 아까 얘기한 블러드, 스웻 앤 티어스라든지, 타워 오브 파워라든지, 시카고라든지, 체이스 등등. 그 당시 그런 흑인 음악들이 많았어요. 검은 나비는 무교동에 있는 서울관광호텔에 섰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 동아방송 '팝스 투나잇'에도 나갔구요.
Q:아까 신문 기사 말씀드렸지만, 당시 신문 같은 데 그룹 이름이 '손학래와 검은 나비'라고 소개된 경우도 많던데... - 그것 때문에 무척 말이 많았어요. 그것 때문에 깨진 거예요.(좌중 웃음) 우리는 철저하게 '그룹'을 지향했는데, '최헌과 검은 나비', '손학래와 검은 나비'라고 나와서...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건데, 그때는 그랬어요.
Q:말 나온 김에, 그룹 이름에 대해서 좀더 여쭤 볼께요. 더 멘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아까 검은 나비란 이름은 지웅님이 지어줬다 그랬는데, 어떤 의미인지요? '나비'란 게 약간 싸이키델릭한 의미인지? 그 후에도 불나비, 호랑나비 등 나비란 이름이 계속 들어가는데... - 더 멘이란 이름은 신중현 씨가 지은 걸로 기억하구요. 나비는 싸이키델릭한 의미로 볼 수도 있겠죠. 지웅 씨가 그런 의미로 지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나비 이후에 불나비, 호랑나비 등 그 나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좌중 웃음)
Q:검은 나비 1집 중 김기표님께서 만드신 곡은 어떤 곡인지 궁금합니다. 또 '사랑한 후에'랑 '당신은 볼라'는 김홍탁님 곡으로 알고 있는데, 김홍탁님이 검은 나비 멤버도 아니고 이때는 미국으로 건너가신 이후인데, 곡을 취입한 경위는 어떻게 되는지요. - 1집에서 내가 만든 곡은 '사랑한 후에', '내 마음', '큰 별', '마음의 노래' 이렇게 네 곡입니다. 이건 내가 다 작사 작곡 한 거고. '사랑한 후에'가 김홍탁 씨 곡이라고 나왔다면 잘못 나온 겁니다. 제가 작곡한 곡이 맞습니다. 그때는 잘못 나오는 경우가 많았죠. '당신은 몰라'의 작사는 강찬호 씨입니다.
Q:1집의 '그녀' 같은 노래는 훵키한 데요. 당시 훵키한 리듬의 음악도 많이 하셨는지, 외국곡의 경우 번안이나 편곡은 누가 했는지요? - '그녀'는 번안곡입니다. 원곡은 워(The War)의 'Me And Baby Brother'이죠. 번안이나 편곡을 누가 했는지는 기억에 없네요. 그때 훵키한 스타일의 곡도 많이 했죠.
Q:검은 나비는 대마초 사건 이후 일단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데, 이후에도 손학래님 중심으로 계속 활동한 것 같습니다. 1979년 [보니 엠 힛트 리바이벌]이란 음반도 나왔구요. 그 음반에 최헌 씨도 있고. - 검은 나비는 계속 있었는데, 난 1년 하고 그만 두었어요. 이후의 검은 나비는 내가 잘 모르겠습니다. [보니 엠 히트 리바이벌] 같은 경우는 손학래 씨가 했겠죠.
Q:더 멘도 그렇고 검은 나비도 그렇고 주로 1년 정도 하셨는데요. - 원인이 음악 때문이죠. 내가 프로듀서, 편곡, 작곡 다했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가 안 맞으면 그만둬야 하죠. 음악을 위해서는.
Q:문영배님과는 계속 하신 편인 것 같은데, 호흡이 잘 맞아서 그랬던 건가요? - 문영배와는 검은 나비 뒤로도 오래 같이 했어요. 나랑 동갑인 친구이고, 음악이나 호흡도 잘 맞고, 드럼도 잘 쳤으니까요. 그때는 문영배가 드러머 중에 유명했어요. 지금은 CCM 쪽에서 제일 유명할 거예요.
안타 프로덕션: 세션으로 걸어나가고 작편곡가로 연속 '안타'를 치며 MVP에 등극하다
Q:1970년대 중반부터 지구 레코드에서 나온 가수들의 독집 음반들 세션으로 많이 참여하셨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세션으로 많이 하신 건가요? - 내가 신중현 씨랑 음악 하면서부터 이교숙 선생님한테 공부하러 다녔거든요. 물론 그전부터도 나름대로 음악공부를 했기 때문에, 편곡을 빨리 시작할 수 있었죠. 검은 나비를 하면서부터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왜냐하면 더 멘 때 신중현 씨랑 같이 있으면서 제작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저는 철저하게 신중현 씨에 의해 큰 사람이에요. 음악 하는 사람으로 신중현 씨를 가장 존경했고, 내가 클 수 있도록 많은 영향을 주셨고...
Q:더 멘은 킹레코드 소속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중에 가수 독집들 세션해준 건 지구레코드에서였는데요. 지구레코드로 옮긴 거라고 말할 수 있는지, 혹시 전속 같은 걸로 있던 건 아니었는지요. 덧붙여 구체적으로 휘닉스, 이성애 음반 외에 어떤 음반들에 참여하신 건지요. 이은하 음반에도 참여하셨나요? - 지구에 전속으로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건 건당 편곡을 한 겁니다. 정확히 어떤 음반들에 참여했는지는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세세하게는 기억을 못합니다. 이성애 음반은 기억 나는데, 기타 연주를 했죠. 이은하 음반은 관여하지 않았구요. 이은하는 데블스가 했죠.
Q:세션으로 참여하실 당시 지구레코드가 벽제로 옮긴 다음이었나요, 아니면 장충동이었나요? 지구가 벽제로 옮긴 게 이 무렵 아닌가 해서요. - 그런 것 같네요. 벽제로 옮긴 다음에 한 것 같습니다. 근데 내가 세션은 많이 했지만 지구하고 그렇게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교류가 많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지구나 오아시스 같은 경우는 음악 방향도 다르고...
Q:휘닉스의 음반에도 참여하셨는데요. 휘닉스의 '밤길' 키보드도 김기표님께서 하신 거죠? '필살 키보드'로 불릴.(웃음) 대곡이던데요. 중간에 'Highway Star' 비슷하게 키보드 솔로 나오다가 기타 솔로 나오고 그런 게... - 휘닉스에 정규 멤버로 있었던 건 아니고, 세션으로 음반에 참여한 겁니다. '밤길' 키보드가 '필살'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웃음),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신선했을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싸이키델릭 음악에 내가 앞서 있었거든요. 그때는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한 게 아니고 대충 했지만,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를 제대로 받고 했기 때문에, 작곡 편곡 공부를 다 하고 했기 때문에 좀 달랐던 거죠,
Q:공부라고 말씀하신 건 이교숙님한테 배우신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네. 예전에 내가 이교숙, 이판근 씨한테 레슨을 받았습니다. 이교숙 선생님한테는 다른 분들도 많이 받았지만 다들 조금 하다 그만뒀고 나는 오래했습니다. 1973년부터 한 4년 동안 퇴계로의 선생님 댁에서 받았죠. 이판근 씨한테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여관에서도 받고, 술집에서도 받고 그랬습니다. 두 분에게 작곡, 편곡을 배웠죠. 지금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도 작곡과 편곡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자연스럽게 작편곡 얘기로 넘어가는데요. 김기표님은 안타 프로덕션 만드신 후 그룹에서의 연주보다는 작곡가로서 주력하셨잖아요. - 작곡을 많이 했지만 그룹 생활도 계속 했습니다. 그룹 하다가 깨지면 작곡하고, 작곡하다 그룹하고. 물론 그룹을 하면서 많이 데었죠. 자꾸 하고 깨지고, 재산 손실도 많았고. 그러다가 녹음을 하게 되니까 많이 달라졌죠. 김명곤이 활약하기 전이니까 그땐 녹음을 굉장히 많이 했죠. 안타에서 만든 것은 거의 전부 내가 했습니다.
Q:안치행님과의 만남과 안타 프로덕션의 설립 과정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 안치행 씨는 미8군에서 만났습니다. 후에 영 사운드에 내가 잠깐 있기도 했고. 안타는 내가 안치행 씨하고 같이 영 사운드를 하다가, 내가 기타를 치는 바람에 안치행 씨가 갈 길이 없어진 거죠. 안치행 씨가 사업에 꿈이 있어서 킹박하고 같이 미국에 이민을 가려했는데, 나하고 이태현 씨하고 최헌 씨하고 셋이서 뭘 해보자, 음반을 내보자 그랬거든요. 그런데 음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래 돈이 대주기로 한 사람이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안치행 씨가 집을 잡혀 가지고 졸지에 안치행 씨가 사장이 되고,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가수는 최헌, 작편곡은 김기표, 사장은 안치행, 홍보는 이태현 체제가 이뤄진 거죠. 안타가 프로덕션 1호라고 볼 수 있죠. 스튜디오는 따로 없었고, 주로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습니다. 안타의 위치는 처음에 퇴계로에 있다가, 이태원 퍼시픽호텔 옆으로 옮겼다가, 논현동으로 갔다가, 거기서 또 능동으로 갔다가, 다시 성내동으로 갔다가, 지금 있는 데(강남역 부근)로 갔어요.
Q:작곡은 주로 어디서 하시는지, 기타와 키보드 중 어떤 걸로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둘 다 사용하신다면, 경우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예를 들어 말씀해주세요. - 작곡은 주로 집에서 합니다. 곡 만들 때는 기타로도 하고, 건반으로도 하고 때에 따라 다르죠. '내 마음은 당신 곁으로' 같은 곡은 기타로 작곡한 겁니다. 리드미컬한 건 기타로, 발라드 같이 멜로디 중심인 건 건반으로 하는 편이죠. 그렇지만 보통 세팅을 다 해놓고 그때 그때에 따라 선택하죠.
Q:작곡하실 때 가수를 염두에 두시고 하세요? '내 마음 당신 곁으로' 같은 곡은 꽤 여러 사람이 불렀는데요. 김정수님도 불렀고, 민혜경님도 불렀고. - 곡 만들 때 당연히 가수를 염두에 두고 하죠. '내 마음 당신 곁으로'는 오리지널이 김정수입니다. 김정수하고 그의 동생인 김혜정 둘이서 불렀죠. 둘이서 부른 버전이 아니면 다 가짜예요. 민혜경이 부른 건 일본에서 한 겁니다.
Q:그때 만든 곡에 대해 '다소 상업적이지 않느냐' 이런 평도 있는데요. 그런 의견에 대한 생각은? - 그건 당연한 거예요. '내 마음 당신 곁으로' 같은 건 당시 빠른 음악이었고, 당시에 우리나라에 그런 리듬이 거의 없었죠. 그게 식스틴(16) 비트인데(하나를 네 번 때리는 건데 더블 타임이라 그러죠), 그 당시에는 식스틴 비트가 거의 없었을 때죠. 그래서 (리듬 면에서) 앞섰지만, 멜로디는 가요죠.
Q:그룹 활동하면서 외국 곡 연주하시다가, 갑자기 국내 가요 풍 이런 게 어떻게 나온 건지 그것도 궁금하거든요. -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타를 칠 때는 기타 곡이라는 게, 연주곡이라는 게 거의 없었어요. 벌써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뽕짝을 많이 접했습니다. 내가 기타 처음 배울 때는 '울며 해진 부산항' 그런 거 가지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실 나는 뽕짝 가락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숙했던 거죠. 물론 10대부터 팝 음악, 록 음악을 했지만, 이런 게 몸 속에 잠재적으로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금방 그런 멜로디가 나왔죠.
Q:그런 곡 만드셨던 게 본인이 소신껏 만드신 건지 아니면 다분히 생계를 염두에 둔 건지요. 진짜 하고 싶었던 건 음악은 따로 있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하면서 양보하면서 만드신 건지... - 뭐 그건 상업적으로 만든 거예요. 그게 결정적으로 내가 안타 프로덕션에 있었기 때문이죠. 무슨 얘기냐면 그때 소속되어 있는 데가 예를 들어 동아기획이라든지, 나현구 씨가 하던 오리엔트라든지 그런 쪽이면 달랐겠지만, 안타는 철저하게 트로트 계열이니까요. 물론 뽕짝은 아니지만. 뽕짝뽕짝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그렇게 편곡한 건 거의 없으니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죠.
인기 작곡가의 이면: 야간 리그의 리더이자 감독으로 양동 작전을 펼치다
Q:1976년부터 작곡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그룹 사운드 활동도 병행하셨는데요. - 1976년 호랑나비를 결성했습니다. 오리지널 멤버는 보컬 최헌, 기타 김기표, 세컨드 기타 박동찬, 베이스 김현규, 드럼 이봉학, 키보드 김유신입니다. 최헌 씨가 '오동잎' 녹음하면서 솔로로 독립하였고, 그 후임으로 박일서(1980년대에 도시의 아이들을 했죠) 씨가 들어왔죠. 그런데 멤버들이 군입대하면서 호랑나비 생활은 접고, 1977년인가 78년쯤에 황금박쥐란 그룹을 만들어 퍼시픽 호텔 지하 무겐하고 뉴서울 호텔에서 연주했죠. 1979년에 히 식스에 다시 들어가서 1년 정도 하다가, 1980년에 서울 앙상블이란 그룹을 만들어 영동호텔에서 연주했습니다. 서울 앙상블이 음반은 낸 게 없지만, 음악은 아주 좋았고 인정도 많이 받았죠. 서울 앙상블은 박용성인가 김용성(지금 재즈 잡지 발행인인데) 씨가 기타, 이남이 씨가 베이스, 나와 삼천포(본명은 모르겠어요. 김명곤 말고 사랑과 평화 키보드였는데)가 키보드였죠.
Q:그룹을 통해 추구했던 음악은 어떤 것이었나요? 또 그룹 생활이랑 작곡가 생활이랑 어떤 게 더 수입이 좋으세요? - 물론 작곡이 수입이 훨씬 좋죠. 작곡해서 돈을 벌어다 그룹에 투자했죠. 내가 음악 하면서 집을 두 번 날렸는데, 황금박쥐와 서울 앙상블 하면서였습니다. 집을 날리긴 했지만 음악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후회하진 않았습니다. 그 팀으로 음반을 못 낸 게 아쉽지만. 암튼, 멤버들 모두 우리 집에서 숙식하고, 놀 때도 개런티 다 지급해주고 그랬습니다. 절대 상업적이지 않은 음악을 한 거죠. 그래도 내가 기술이 있으니까 레코딩할 때는 상업적으로 하고, 작곡가로서 못하는 음악을 그룹으로 했죠.
Q:불나비는 '과거의 용사들'이 다시 모인 건가요? - 그렇게 볼 수 있겠죠. 최헌 씨랑 소주 먹다가 '야 또 하자' 그래서 만들게 됐죠.(좌중 웃음) 이태현 씨가 기획했구요. 불나비 이후에 비상구란 팀을 만들어서 대전 유성에서 활동했어요. 멤버는 내가 기타, 임동신이 보컬, 박종배가 리듬 기타, 임종훈이 베이스, 황수건과 양이도가 키보드, 정헌영이 드럼입니다. 1987년 초에 낸 음반이 방송도 많이 나오고 히트할 기세였는데, 싱어 임동신이 주현미하고 결혼하면서 나가고 그러면서 그룹이 끝났죠. 나도 그걸 마지막으로 그룹 생활을 접었구요. 그 후로는 연주는 레코딩할 때만 하고 라이브는 안합니다. 코리아 슈퍼 세션하고 2040은 레코딩 한번 한 정도구요.
Q:저희가 음악 하는 젊은 친구들을 좀 아는데, 한 20대 후반에 접어들면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더군요. 그룹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김기표님은 돈 버는 음악도 하시고 하고 싶은 음악도 하신, 좋은 의미에서 지혜롭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상업적인 성공도 누리시고, 평판도 좋으시고. 그런 지혜를 후배들에게 말씀해주신다면. 또 그럼에도 좀 후회가 되는 점이 있다면. 너무 무겁나요?(웃음) - 우리 때는 음악을 진짜 좋아서 했습니다. 음악 하면 손가락질을 받았고 홍보도 쉽지 않았죠. 하지만 숫자는 적었어도 진짜 알짜들이 많았어요. 반면 요즘은 매스 미디어가 워낙 발전되고 음악산업도 커져서 홍보도 쉽고, 음악 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받지도 않죠. 그래서인지 음악의 기본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하고 기계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많은 게 상실되고 죽어 가고 있어요. 내 경우를 보면 어떨 땐 갑자기 우리 집 전화번호를 모르겠더군요. 다 입력해놨기 때문에. 그렇듯이 음악이란 것도 하얀 건반 칠 때 필링이 다르고, 검은 건반 위주로 할 때 필링이 다르건데, 요즘은 모듈레이션이라든지 기계와 컴퓨터로 다 작업하니까 문제죠. 물론 나도 필요할 때는 가끔 쓰지만, 거기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까 창작 능력이 많이 떨어지죠. 그런 걸 똑똑한 친구들이 빨리 좀 깨우쳐야 될 것 같아요. 또 젊었을 때 그룹을 해야 해요. 희생을 해야 하고. 단체라는 건 자기희생이 없으면 안되니까. 사실 저는 지금 음악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힘들어요. 같이 할 사람들이 없고. 내가 젊은 친구들하고 시도를 해봤거든요. 근데 필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게 다르기 때문에. 지금 제일 안타까운 게 그겁니다. 지금도 내 소원이 그룹하는 거예요.
Q:앞으로 성과를 남기고 싶은 음악적 방향 같은 게 있으시다면. - 난 나이 먹은 우리 나라 가요의 40대 이상(40대 이하는 말고), 즉 40대-50대가 진짜 좋아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들고 싶어요. 록을 바탕으로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한 음악을 하고 싶네요.
200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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