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고선
제5회 산행일지 : 경북 청도군 억산(참 반가웠던 국제신문 시그널)
일시 : 2003년 1월 11일(토) 11:30-18:30
차량 : 승용차 이용, 운문사 입구 주차장 야영지에서 시작
날씨 : 맑고 포근함
며칠 전 금도현 집사가 사고를 당했다. 교회 일로 짐을 하역하다가 쏳아지는 짐을 이기지못하고 왼 무릎을 뒤로 접지르는 큰 사고로 지난 화요일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 회복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산에 다니는 데에는 지장이 없어야 할텐데... 아뭏튼 빠르고 완전한 회복을 기대해 본다.
새해 첫 등반인데 금집사를 빠트려 놓고 산행하기가 약간은 발걸음이 무겁다. 그것도 많지 않은 회원 중에 한 멤버를 병원에 두고...
억산은 지난 12월에 등반하기로 하였었는데 비로 취소되는 탓에 미루어 두었던 산이다.
계룡산이나 대둔산을 계획하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억산으로 정하게 되었다.
출발이 다소 늦어 9시 30분 경 대명동을 출발하였다. 내가 전날 대전 출장 다녀와 피곤하다고 김생곤 집사가 운전대를 잡았다.
팔조령 터널을 지나 청도읍 우회도로, 동곡을 지나 운문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웬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주차비 2,000원을 달랜다. 돈을 준비하며 억산을 물었더니 동곡으로 가랜다.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돌려 운문댐을 지나던 중 인터넷에서 뽑은 산행기를 다시 보았더니 운문사 버스정류장이 출발점이 맞다. 하여 다시 차를 돌려 운문사를 향했다.
30분 가량이 지체되었으나 이번엔 주차료를 물기 직전에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너 야영장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30분의 시간 대가로 얻은 2,000원은 작지만 향후에도 이번 주차정보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다소의 위안이 되었다.
신발 끈을 조여 메니 11시30분. 운문사 방향으로 200여 미터 가면 솔밭이 나오고 우측으로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비교적 넓은 길이 이어진다.
등심바위를 가려면 곧바로 우측으로 난 어느 길이든 택하여 산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약간은 큰 돌들이 흘러내린 곳을 지나는 등 약 20여분을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계속해서 다소 많은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기를 10여분 하면 앞에 큰 바위를 만난다. 등심바위. 밧줄을 잡고 올라보면 경치가 괜챦다. 정상에 선 느낌이다. 왜 등심바위인지는 모르나 바위가 크고 운문사, 운문댐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다. 쉬면서 사진도 찍고.
이곳에서부터는 전형적인 능선 길이다. 왼쪽으로는 넓고 웅장한 운문사가 한눈에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운문댐과 그 상류 계곡이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조금씩 반복되는 능선길을 쉬지 않고 30여분 지나면 왼쪽으로는 운문사, 오른쪽으로는 대비사로 가는 교차로를 만나고 다시 앞을 가로막고 나타나는 하나의 봉우리가 있으니 이곳이 666봉이다.
그리 힘들지는 않지만 숨을 몰아쉬며 20여분 올라야 666봉의 정상에 닿는다. 바로 앞의 시멘트로 포장된 헬기장이 나타나면 여기서 숨을 돌리거나 식사를 하면 좋다. 바람도 자고 햇빛은 쏳아지는 양지마른 포근한 곳이다.
666봉에 도착한 시간이 1시 20분. 시장기를 느끼고 라면과 식은 밥, 그리고 김치로 배를 불리고 곧바로 일어섰다.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에 다소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식후 길은 당분간 편안한 능선길이다.
산이 점점 깊어간다. 북쪽사면의 산과 계곡들, 봉우리를 오르는 길엔 산짐승과 사람의 발자국이 번갈아 새겨져 있는 눈길이다. 40여분은 예의 능선처럼 오르막, 내리막이 평범하나 영남알프스의 주능선에 닿는 마지막 오르막은 그리 녹녹한 길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20여분 쉬지 않아야 주능선과 억산으로 나뉘어지는 삼거리에 닿을 수 있다.
오늘 산행 중 유일한 한사람을 만난 곳도 이 오름 길에서 힘들어 할 때였다. 그 사람은 나보다 연배로 보였는데 혼자서 석남사에서 7시에 출발하여 가지산, 운문산을 거쳐 하산 길이었다. 그때의 시간이 2시 45분 경이었으니 정말 대단한 산행가로 보였다. 그
사람에게서 약간의 에네르기를 얻은 탓인지 곧 분발하여 주능선에 닿았다.
오후 3시. 여기서 왼편 주능선으로 운문산 정상까지는 약 2km. 이 지점의 높이는 얼추 해발 900m는 넘어 보였다.
오른 편의 억산이 994미터인데 비슷한 눈높이였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 등반의 목표는 억산인데 앞에 보이는 억산에 닿을려면 상당히 내려간 후 다시 올라야 했다. 그리고 겨울시간이라서 하산을 재촉할 필요도 있었고. 더구나 억산에 닿은 후에는 차량 탓에 다시 뒷걸음쳐서 와야했기에 다시 억산을 내려와 이곳까지 오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고 체력의 안배에도 그리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충고하거니와 체력이나 시간이 만만치 않으시면, 그리고 반드시 운문사 쪽으로 하산하여야 한다면 억산 정복은 한번 더 생각해 보시라.
물론 억산을 정복한 후 석골사 경유 밀양군 산내면 원서리로 하산하려면 (이 하산로는 억산에서 1시간 이내의 비교적 짧은 길이다) 당연히 억산을 보아야 하지만 말이다.
오후 3시 10분, 그래도 억산이 목표인데 하면서 웅장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정없는 내리막 길. 그러나 이제 어쩌랴. 뒤의 올라갈 길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리막 길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10여분을 내려가 닿은 재는 팔풍재. 여기서 왼쪽으로 하산하면 원서리 길이다. 억산 500m라는 이정표와 앞을 가로막는 정말로 거대한 바위가 더욱 우리를 짖눌렀다.
억산 정상길은 만만치 않았다. 20여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힘도 많이 부쳤다. 어쨎든 한번 쉬었다가 억산 정상에 닿았다.
멀리 가지산이 들어오고 운문산 정상도 또렸이 보였다. 영남알프스의 주봉들이 켜켜이 쌓여 멀어지고 있었다.
오후 3시50분. 길어진 그림자를 보며 급히 하산을 했으나 후회한대로 다시 오르막에서는 속도가 나질 않았다.
하산 길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666봉으로 되돌아가긴 싫고 무작정 운문산 정상 쪽 등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4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오르막으로 등산을 하고 있다니, 그것도 겨울산을... 혼자가 아니라 둘의 힘은 이래서 좋은가 보다.
능선길이지만 오르막이었다. 10여분쯤 갔을까. 왼쪽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눈텊힌 길 위로 사람의 발자국은 하나도 없고 노오란 시그널 하나가 희미하게 등산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직도 운문산 정상에 닿을려면 한시간의 추가시간이 필요했기에 무조건 여기쯤에서 하산 길을 택해야 했다. 4시20분.
예상대로 길은 험했다. 눈길엔 짐승과 새의 발자국만 보였고 잡목이 우거져 길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제신문 근교산 취재팀이 붙여 놓은 노란 시그널이 우리의 등대였다. 시그널이 이렇게 반가운 예는 지금껏 없었다.
다행히 이 시그널은 우리가 하산을 마칠 때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은 쉬면서 목도 축이고 싶고, 소피생각도 간절했지만 빛이 있을 때 한말이라도 더 하산하려고 참고 또 참았다.
눈 길 위로 다리는 풀린 듯 뒤로 연이어 미끄러지곤 했다. 길게 이어지던 능선 길이 끝나고 키 작은 대나무들이 많은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저 아래로 큰길과 더 멀리 운문사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이제사 소변을 보고 불편한 오른쪽 신발을 다시 풀어 신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남은 사과 한 알씩 손에 들고 깨물며 운문사 상류 계곡으로 내려왔다. 꽝광 언 얼음사이로 흐르는 물맛을 보고서야 다소 안도하였다. 5시 40분.
운문사로 향하는 길은 어두워지는 저녁분위기와 함께 넓고 단정한 모습으로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운문사 가까이에 이르자 법고소리가 울려오고 이어서 목어, 그리고 운판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우리가 어둠에 휩싸여 가는 운문사 범종루 밑을 지나 경내로 들어설 때에는 범종의 메아리가 막 울려 퍼지기 시작할 때였다. 6시. 넓은 터에 웅장하게 그리고 비구니 승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잡은 운문사. 유흥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운문사에서 법종의 은은한 퍼짐을 듣고 있자니 오히려 경건해 지는 듯 하였다.
우린 복도 많지, 지난 여름 두 가족과 함께 우연히 찾았던 부석사에서 법고, 목어, 운판 그리고 범종까지 들으며 지는 석양에 악양루를 내려다보며 작은 행복을 느꼈던 때가 있었는데 오늘 비록 동행한 가족이 없고, 몸은 피곤하지만 이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으니...
운문사 비구니들의 고무신 이야기를 하던 금도현 집사 얘기를 나누며 그 유명한 운문사 소나무만 보고 경내를 빠져 나왔다.
우리의 차가 있는 곳까지는 다시 20여분을 더 걸어야 했다. 비록 반달이었지만 우리의 달빛그림자를 밟으며 차로 돌아왔다. 6시 30분.
김생곤 집사가 등반 중 찾던 가죽 장갑은 뒷편 차 위에 언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동곡 시장 내 지난 여름 가지산 등반 후 우리가 들렀던 식당에서 된장 한 그릇하고 대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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