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뎅이차를 주목하라! 나치가 창안했고, 미국 자동차 제조사들은 경멸했고,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사랑했던 차가 바로 폴크스바겐 비틀(Volkswagen Beetle) 일명 풍뎅이 차다.
흔히 '버그'라고도 불리는 이 폴크스바겐 비틀(풍뎅이차)의 역사는, 격동의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몸소 겪은 사람들이나 느낄 수 있는 그런 아이러니한 요소들로 혼재되어 있다. 비틀은 나치 시절 '국민차'로 시작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도 한 성공적인 마케팅 회사의 그럴듯한 포장에 싸여 '심플함의 효율성'을 갖는 자동차의 대명사 자리를 굳히고 있다.
기자이자 자칭 문화역사가인 필 패톤(Phil Patton)은 신간 '버그'를 통해 수십 년에 걸친 비틀의 순탄치 않던 역사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패톤은 미국 소비 문화에 대한 내용을 담은 '메이드 인 USA(Made in the USA)'와
대중 문화 관련 '드림랜드(Dreamland)'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고, 이제는
특별한 차 문화에 대한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비틀은 단순히 자동차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패톤은 말한다.
패톤은 "비틀에 대한 이야기에는 많은 내용들이 있다"며,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책의 관점이 비틀이라는 자동차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아이디어
아돌프 히틀러와 디자이너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비뚤어진 창작물로서의
비틀의 탄생이 비틀 역사의 아이러니 중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수치스러운
부분이다. 패톤은 이 부분의 역사를 보기 좋게 꾸미지 않았다. 사실, 폴크스바겐사로부터 가져온 고문서들의 양을 고려해 볼 때, 폴크스바겐사가 어쨌든 그 프로젝트에 협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처음엔 놀라워 보인다.
"그들은 반대입장을 보였고, 몇 년 전에는 이를 받아 들이려고 노력했으며,
독일 내 최고 권위있는 역사가 중 한 명인 한스 몸젠(Hans Mommsen) 박사에게서 800쪽 분량의 책 한 권을 의뢰했다"고 패톤이 말했다.
패톤은 "하지만, 이러한 의뢰는, 포르쉐의 손자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실질적으로 공장의 운영을 맡았던 사람의 아들인 페르디난트 피흐(Ferdinand Piech) 박사가 권력을 잡기 이전 CEO 체제 하에서 진행된 것이었다"며, "그의 체제 하에서는 이런 역사적 유산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훨씬 폐쇄적이었다. 회사의 주요 제품 배후의 실력자가 20세기 대량학살의
중심 인물 중 하나라면, 홍보 측면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회사의 주력 제품 배후
실력자가 20세기 주요
대량학살자 중 하나라면, 홍보 측면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된다" |
- 필 패톤, '버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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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톤은 폴크스바겐사가 비록 전쟁 당시의 징용노동자 중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 기금을 조성하고 기념관도 설립했지만, 줄곧 이 역사적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는 꺼려해 왔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히틀러 치하 당시 독일의 거물급들과 포르쉐와의 초기 만남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히틀러가 직접 1934년 그린 원형 비틀의 스케치도
들어 있다. 패톤은 현 비틀차와 그 이름에 대한 퓌러(Fuhrer)의 영감이 바로 '메이 비틀(the May Beetel)'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메이 비틀'에 대한 논쟁도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패톤은 독자들에게 비틀의 정교하고 내구성 강한 엔진과 독특한 디자인에
대해서는 물론, 유명한 쿠벨바겐을 비롯해 비틀을 변형한 군용 차량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으며, 전쟁 기간 동안 볼프스부르크(Wolfsburg) 공장에 대한 나치 친위대의 혹독한 통치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고 있다.
정치, 맨슨 그리고 허비
이 작은 차 비틀은 항상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전후,
비틀은 독일 주요 수출품이 되었고, 선전(propaganda)의 한 도구가 되었다.
"독일 분단과 함께 냉전 당시 갑자기 폴크스바겐사는 경제적, 선전적 도구가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이 명확해졌고, 그 경계선은 볼프스부르크에 매우 근접한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폴크스바겐 볼프스부르크 공장의 효율성은 서독에서 채택한 자본주의의 한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고, 이는 낡은 트라반트와 싸구려 자동차들이 가득 찬 동독과 대조적인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도 또다른 아이러니가 있긴 하지만, 비틀의 인기에 가장 큰 공헌자는 유대인이 설립한 DDB(Doyle Dane Bernbach)사가 진행한 비틀의 전설적인 광고 캠페인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생각하세요(Think Small)'과
'레몬(Lemon)'의 지면 광고와 더불어, 유머와 현명함이라는 메시지 전달에서 성공한 TV 광고들로 인해 비틀은 신뢰감, 검소함, 깜찍함이라는 이미지를 모두 얻었고, 1970년대에 그 판매량이 급증하게 되었다.
비틀은 당시 미국 자동차사들의 지나친 거대화에 맞서 절약의 상징으로 미국 젊은이들의 반체제문화에 어필이 되었다. 이 때도 역시 아이러니가 있다. 찰스 맨슨(1969년 영화감독 로만폴란스키의 부인인 여배우 샤론 테이트와 동료 6명을 집단 살해한 사이비종교 지도자)이 비틀에 매료되었고, 그는 '요한 계시록의 말들'이라고 불렀던 변형된 비틀을 타고 횡포를 일삼았다. 한편, 디즈니사는 '러브 버그(the Love Bug)' 허비(Herbie)에 대한 영화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세계 전역에서 비틀의 수가 줄어들고, '골프(Golf)'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 탑 디자이너 J 메이즈(J Mays)에 의해 신형 비틀이 제작되었다. 신형 비틀의 생산으로 폴크스바겐사는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훌륭한 차는 반드시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 것 같다며, 이는 아마도 비틀이
단순한 차 이상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패톤은 설명한다.
"우리는 자기의 견해를 갖고서 특정 사물이나 디자인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비틀에 대해 맘에 드는 점 중 하나는 이 차가 마치
포레스트 검프나 제리그가 했던 것처럼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늘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비틀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중요한 시점마다 늘
그 역사의 장에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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