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직업인을 키운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금, 전문 직업인 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특별한 교육을 펼치고 있는 외국의 직업 전문학교는 귀감(龜鑑)으로 삼을 만하다. 이들 학교는 짧게는 9개월, 길게는 4년 동안 실기 중심의 교육을 통해 아마추어 입학생을 관련 업계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는 프로로 훈련시켜 배출한다. 패션, 영화, 호텔경영, 요리, 와인 등 최근 관련 산업이 성장하고, 젊은층에 인기를 끌고 있는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한 해외의 유명 전문학교 5곳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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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T 자랑거리인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박물관. |
미국 뉴욕 맨해튼의 27가와 7번 애버뉴가 만나는 첼시 지역에 위치한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는 세계적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과 노마 카마리가 다닌 곳이다. 맨해튼의 학교 대부분이 그렇듯 아름다운 교정과 수목 대신 현대식 이미지의 콘크리트 건물 속에 위치하고 있다.
파슨스와 함께 미국 패션학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FIT는 1944년 뉴욕주립대 산하의 패션디자인·비즈니스학교로 설립됐다. ‘의복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이 모토다.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에 필요한 의복의 제작 과정을 모두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옷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인 섬유, 디자인, 재단, 재봉, 가공 과정을 가르치고 실습하도록 한다. 또 모자, 귀고리, 보석 디자인 등 의복과 관련된 액세서리도 가르친다.
FIT의 한희명 교수는 “의복을 스타일화하고 제작의 전 과정을 매니지먼트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에는 매니지먼트가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옷을 만들어 그냥 팔면 됐지만 지금은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옷이 과연 상품가치가 있는지 시장조사를 해야 하고, 싸게 공급할 수 있는 제작처를 전 세계 국가 가운데에서 골라야 한다.
요즘은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패턴(재단)이나 디자인, 섬유 선택, 컬러링 등을 모두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첨단 컴퓨터 교육도 집중적으로 시킨다.
FIT의 학생은 모두 1만2000명 정도. 이 중 절반 이상이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에서 찾아온 외국인이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중국·일본·필리핀 등에서 학생들이 찾아오는데 한국학생의 비율은 전체의 8% 정도로 추정된다. 총 36개 학과 가운데 재단과 패션학과의 경우 한국인이 유독 많아 3분의 1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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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생들의 졸업 작품 발표회. |
FIT에는 정규 코스로 2년제 준학사(고교 졸업생 대상)와 4년제 학사, 2년제 석사 과정이 있다. 지원자들은 2년제 준학사 과정을 선택하는 사례가 많다. 이밖에 학위와 무관한 학점 인정 프로그램, 수료증 부여 프로그램, 온라인 강좌 프로그램도 있다. 풀타임과 파트타임으로 나눠 학생을 모집한다. 봄 학기는 10월 1일까지, 가을 학기는 1월 1일까지 원서를 내야 한다. 원서를 내는 순서대로 당락 여부를 판단해 통보하기 때문에 원서를 미리 내는 것이 유리하다.
풀타임의 경우 적어도 6개월 전에 신청해서 입학허가를 받아야 등록할 수 있다. 학부생의 경우 550점(컴퓨터 213점) 이상의 토플 성적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파트타임은 평일 야간이나 주말에 한두 과목씩 원하는 것을 선택해 들으면 된다. 토플 성적을 제출할 필요가 없어서 전세계 많은 사람이 이 과정을 애용한다.
만약 파트타임으로 공부하던 사람이 학위 취득으로 옮기려고 할 경우에는 25학점을 수료한 뒤 토플 성적과 함께 학위 신청을 해야 한다. 학위를 취득하려면 70학점 이상을 이수해야 한다.
패션계의 흐름이 계속 바뀌면서 새로운 학과목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재단학과의 경우 16개 학과목을 가르치는데 컴퓨터 재단 관련 과목이 인기다. 최근에는 기업체들이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인건비가 싼 중국에서 의류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 재단사보다 제작의 전 과정을 관리하는 전문디자이너(Technical Designer)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FIT의 최대 장점은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살아있는 교육이다. 교양과목을 제외한 다른 과목들은 학교와 산업현장 경험을 6년 이상 지닌 교수들이 지도한다.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교수로 채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 경험과 실기의 비중을 매우 중시한다. 특히 교수는 1년에 두 번씩 동료교수 및 학생들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주립학교이기 때문에 학비가 매우 저렴하다는 것도 FIT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외국 학생의 경우 학기당 4611달러(약 450만원)의 학비를 내야 한다. 장학금제도가 있으나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대상이다.
뉴욕의 생활비 등을 감안하면 연간 비용은 최소 3만달러 정도가 필요하다고 학교 측은 설명한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일부 유명 사립학교보다는 등록금이 훨씬 저렴하다.
주립학교라고 해서 시설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재정이 튼튼해 각종 최신식의 컴퓨터와 장비를 대량 갖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1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시설도 있다.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FIT 졸업생 니노 안(37)씨는 “학비가 싸고 학과가 다양하며, 교수진이 실기에 매우 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말한다. 안씨는 또 자신의 전공 외에도 디자인·재단·재봉·해외 생산·마케팅·광고 등을 모두 가르쳐 주기 때문에 의류 생산과정 전체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다른 부문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고 회상했다. 다만 학생들의 열정은 뜨겁지만 학생수가 많고 공립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학생 작품전시회 등 개별 학생에 대한 배려는 사립학교보다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FIT의 또 다른 특색 중 하나는 세계 최대의 의류박물관. 18세기 이래 약 5500벌의 의상과 액세서리, 옷감이 전시되어 있다. 3개의 전시실에는 의상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는데 유명 디자이너인 발렌티노 등을 초청해 작품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또 매년 한 번씩 교수ㆍ대학원생의 작품전, 패션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학생들과 근처 패션업체 종사자들이 몰려 성황을 이룬다. FIT가 위치한 맨해튼 첼시 지역은 과거에 섬유업체가 밀집한 섬유중심지였다.
미국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이 FIT도 산업현장과의 유대관계를 중요시한다. 동문회 조직은 이러한 운영방침을 연결하는 끈이다. 동창생 중에는 기업을 운영하거나 직장에 다니면서 장학금과 기부금을 내는 사람이 많다. 또 동창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일자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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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의 중심지 뉴욕에 자리잡은 FIT 전경. |
FIT 출신 인사들은 패션디자인뿐 아니라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 신시아 로리, 노마 카말리, 데이비드 추 등이 FIT 출신이다. 한국에서는 신혜순 국제복장학원장, 이병철 데코 이사, 정성혜 인하대 교수, 김혜련 아드리안느 대표 등이 있다. FIT 졸업생들은 도나 카렌, 캘빈 클라인, 노티카 등 미국의 다양한 의류업체에 취직한다. 졸업생의 취업률은 80% 이상이다.
FIT는 뉴욕 패션을 대표한다. 그래서 뉴욕과 함께 세계 패션의 양대 산맥인 유럽에서도 많은 학생이 공부하러 온다고 한다. 파리나 밀라노처럼 패션의 일번지에서 FIT로 유학을 오는 이유는 다른 스타일의 패션을 배우기 위해서다. 유럽은 소규모의 섬세한 수공예 작업에 뛰어나다.
이에 반해 뉴욕은 세계 최대 경제중심지에 맞게 대중성과 편리함을 추구한다. 최근에는 세계화 추세에 맞춰 뉴욕 패션이 세계 패션을 지배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뉴욕의 ‘7번 애버뉴(패션 거리)’에서 파리나 밀라노의 옷을 본뜨기도 하지만 그러한 옷은 극소수를 위한 명품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뉴욕 패션계에서 성공하려면 멋스러운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편하고 오랫동안 입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성공의 첫째 조건이다.
FIT는 유럽 문화의 장점을 흡수하기 위해 유럽에서 교수를 초청해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한 학기를 보낼 수도 있다. FIT는 인도와 일본에도 분교를 두고 현지의 노하우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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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T 현장경험을 중시하는 살아있는 교육을 강조한다. |
뉴욕 패션계에서 한류가 싹틀 가능성은 있을까. 한국 유학생들에게 희망을 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쉽게도 아직 부정적이다. 뉴욕의 패션전문가들은 한국이나 중국·일본 등 아시아 패션이 뉴요커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시아 패션은 뉴요커가 선호하는 의상의 요건 가운데 편리성에서 뒤떨어진다는 평가다.
한 패션전문가는 “한국 사람들은 옷이 좋으면 불편해도 입고 다니지만 미국 사람들은 좋은 옷이라도 불편하면 입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한두 작품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저변을 확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FIT 출신 한국계 디자이너 가운데 뉴욕 패션계에서 성공한 사례는 대부분 뉴욕과 유럽의 패션 스타일을 유지한 케이스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한국의 패션 지망생들이 ‘7번 애버뉴’의 세계화 추세에 맞춰 점점 중요해지는 테크니컬 디자이너에 주목하라고 권고한다. 한국인들의 입지가 튼튼하지 않은 뉴욕 패션계에서 한국인 특유의 꼼꼼함과 성실함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 손재주 뛰어나 미국 회사에서 인기, 창조적인 아이디어 개발에 더욱 힘써야 "
- FIT에서 21년째 재직 중인 한희명 교수
“FIT의 교육은 실기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학생들이 취업을 하면 매우 적응이 빠릅니다.” FIT에서 21년째 재직 중인 한희명(韓熙明) 교수는 “실기 위주의 교육이 FIT의 최대 장점”이라며 “그래서 학생들의 취업이 쉽다”고 말한다. 한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와 성신여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8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85년부터 FIT 재단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 교수는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실력이 뛰어난 학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며 “FIT 학생의 경우 실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기 때문에 취업률이 80%가 넘는다”고 말한다.
한국 학생들은 미국 회사에서 선호하는 부류에 속한다.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게 일을 할 뿐 아니라 손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내가 보낸 학생들 가운데 취업을 하지 못한 학생이 거의 없다”며 “회사에서도 만족한다는 의사를 표시해왔다”고 말한다.
20년 전에는 뉴욕 패션계에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나 카렌 등 미국의 유명업체 곳곳에 한국인이 들어가 활약하고 있다. 한 교수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부문을 제외하면 한국 학생들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한국의 패션 수준도 점점 높아져 미국에 비해 거의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의 경우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부문에서는 미국 학생에게 다소 뒤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교육을 받아서 미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재단 실력은 탁월하다”며 “하지만 최근에 중국 학생들이 약진하면서 한국 학생들의 지위가 위축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