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원윤씨(漆原尹氏)
본관 연혁
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칠원윤씨 분포가 충남과 경남에 많이 있습니다. 윤씨중에서 칠원윤씨가 가장 역사가 오래 되었습니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윤씨는 182본(本)이 전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칠원윤씨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고 되어있다.
한편 우리나라 윤씨는 해평. 무송. 칠원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 모두 파평윤씨에서 분적됐다
칠원윤씨(漆原尹氏)는 신라 무열왕때 태자 태사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영의 아들 황(璜) 이후에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거부(鉅富)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후 17세손 길보(시호는 충의)가 삼중대광 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고 귀성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칠원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을 칠원으로 하였다.
칠원윤씨의 후손이 중앙 정부에 이름을 내게 된 것은 윤수 때부터다. 고려 원종 때 장군이었던 윤수는 당시 권신 임연을 제거하자는 동지추밀 조오의 제의를 수락한다. 그러나 조오가 주저하자 이를 임연에게 알려 조오가 처형된다. 그 뒤 1207년 임연이 제거되자 원나라로 가서 볼모로 있던 세자 충렬왕과 함께 귀국하여 대장군에 이른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을 지낸 윤환은 윤수의 손자다. 그는 충숙왕 복위 때 일어난 옥사로 원나라로 탈출했으나 충혜왕이 복위하면서 벼슬자리에 복귀한다. 무왕 때까지 다섯 왕을 섬기고 세 차례 재상을 지냈다. 고향 칠원에 큰 기근이 났을 때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했다.
정경공 저(抵)는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제2차 왕자의 난때 태종을 도와 좌명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에 올라 칠원군에 봉해졌다.
성종때 문과에 급제학 석보(碩輔)는 호당(湖當)에 뽑혔고 관찰사,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현령 이(伊)의 아들 탁연(卓然)은 명종때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형조·이조판서를 거쳐 종계변무(宗系辨誣)하여 광국삼등공신으로 칠원군에 봉해졌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이외에도 임창, 이의연과 함께 신임(辛任)의 삼포의(三布衣)로 이름난 지술(志述)과 한성부 판윤,·좌찬성을 거쳐 숭록대부에 오른 사국(師國),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은 형은(衡殷), 치민(致珉) 등은 칠원윤씨의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분파
충효공파(忠孝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칠성공파(漆城公派)
사윤공파(司尹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장군공파(將軍公派)
집성촌 칠원윤씨의 자손들은 충북 제천군 봉양면, 진천군 진천읍, 충남 청양군 일원, 서산군 서산읍, 전남 승주군 낙안면, 보성군 일원, 경남 거제시, 합천군 일원, 경북 고령군 개진면, 칠곡군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주요 세거지
충청북도 제천군 봉양면 장평리
경상남도 거제군, 합천군 일원
충청남도 청양군 일원
우리나라 윤씨는 2000년 현재 파평윤씨가 713,94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 해남윤씨 55,627명, 칠원윤씨 54,263명, 남원윤씨 32,731명, 해평윤씨 26,341명, 무송윤씨 13,384명, 가평윤씨 11,565명 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