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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
라) 용어
강독사(講讀師)
강담사講談師․강창사講唱師라고도 한다.
강담사(story teller)는 세상에서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이야기꾼이며, 강창사(singer of tale)는 강담사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창唱으로 구연口演하는 판소리 광대廣大를 지칭한다(임형택, 「18‧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 『고전문학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76 참조). 특히 강독사는 소설을 청중에게 낭독하던 사람으로 조수삼의 『추재집』에 나오는 전기수傳奇叟와 같다. 강독사의 출현은 ‘읽는 소설’에서 ‘듣는 소설’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강담’이란 용어는 우리보다는 일본에서 널리 퍼진 명칭이다. 강담(講談)은 ‘고단(こう-だん)’이라 한다. 明治めいじ 이후에 강담사 혼자 무용담·복수담·군담 등에 가락을 붙여 샤쿠다이(釋臺:고단할 때 앞에 놓인 받침대)를 부채로 두들기며 재미있게 들려주는 연예의 일종이었다. 아마 이 강담을 하는 이들이 우리로 치면 전기수에 해당되지 않을까한다. 일본에서는 1909년 노마 세이지[野間淸治]가 이 고단을 끌어 와 ‘고단샤[講談社]’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오늘날 일본 출판문화를 선도하는 거대 기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강담사․강독사라 부르기 보다는, 조수삼의 『추재집』에 보이는 ‘전기수’라는 명칭을 사용해야겠다.
전기수(傳奇
‘듣는 소설’의 시대를 열다
‘듣는 소설’의 시대는 전기수가 활짝 열어 젖혔다.
‘전기수’는 소설을 구연해 주던 전문직업인이다.
소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유통되었으니, 필사, 낭독, 세책 등이다. 전기수는 두 번째인 낭독을 통한 소설의 유통이다. 실상 글을 읽지 못하는 촌사람들도 웬만한 소설 내용을 꿰고 있는 데는 전기수의 역할이 컸다. 여러모로 종합해보건대 전기수는 음성을 통한 고저와 긴장, 문장의 운율, 인물의 행동, 서사의 임의적 변개에도 능수능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수삼(趙秀三, 1762 ~1849)의 『추재집』에 보이는 전기수는 소설류를 책을 보지도 않고 구송口誦하였는데, 소설의 주요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말을 중단하여 사람들이 듣고 싶어서 돈을 던지게도 하였으니 이를 ‘요전법邀錢法’이라고도 적고 있다.
소설이 구송되었음은 18세기 홍취영洪就榮이 “패설을 낭송하는 것은 재미가 너무 좋아 턱이 빠질 만하네(稗誦津津爲解頤).” (홍취영, 기삼, 『녹은집』 12책)라는 이시평소설以詩評小說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덕무의 「은애전」에는 소설을 듣다가 분개하여 이야기책을 읽던 사람을 찔러 죽인 이야기가 나오고, 심노승도 「남천일록南遷日錄」에서 『임장군전』을 전기수가 낭독하는데 김자점이 임장군에게 죄를 씌우는 장면에서 듣던 자가 담배 써는 칼로 낭독자를 찔러 죽였다고 기록이 보인다. 박지원(朴趾源, 1737 ~1805)의 『열하일기』 ‘관제묘기’에도 중국의 전기수를 보며 “이는 꼭 우리나라에서 <임장군>을 외우는 것 같다.”고 기록해 놓았다.
조수삼의 『추재집』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전기수는 동문 밖에 살고 있다. 언과패설(국문소설)을 구송하는데, 『숙향전』․『소대성전』․『심청전』․『설인귀전』 등의 전기이다(傳奇叟居東門外 口誦諺課稗說 如淑香 蘇大成 沈淸 薛仁貴等 傳奇也). (조수삼, 『추재집』 7, 「기이」, ‘전기수’, 보진재, 1939, 7쪽)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19세기를 풍미한 이런 이야기꾼은 1910~1930년대까지도 존재했었다. 한설야의 <나의 인간수업, 작가수업>에는 신소설을 읽고 있는 전기수의 모습이 아래와 같이 잘 그려져 있다. 구경꾼들은 대부분 인력거꾼, 행랑어멈 등 어렵게 사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시간도 그들이 일을 마친 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기수와 책쾌를 겸하여 읽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소설을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흐르며 직업은 변천한다.
거기에는 허줄한 사나이가 가스등을 놓고 앉아있으며, 그 사나이는 무슨 책을 펴 고래고래 소리 높여 읽고 있었다. 그 사나이 앞 가스등 아래에도 그런 책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울긋불긋 악물스런 빛깔로 그려진 서툰 그림을 그린 표지 우에 ‘신소설’이라고 박혀 있고 그 아래에 소설제명이 보다 큰 글자로 박혀 있었다. 그 사나이는 이 소설을 팔려 나온 것이며 그리하여 밤마다 목청을 뽑아가며 신소설을 낭송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나이의 주변에는 허줄하게 차린 사람들이 언제나 뺑 둘러 앉아 있었다. 얼른 보아 내 눈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인력거꾼, 행랑어멈 같은 뒷골목 사람들이었다. 거기에는 젊은 여인의 얼굴도 띄엄띄엄 섞여있었다.
전기수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보기는 어려우나 문헌에 몇 명 그 이름이 보이는 자가 있어 다. 그 중, 장붕익에 의해 살해된 비운의 전기수와 오물음 김중진(金仲眞)과 이자상(李子常), 김홍철(金弘喆), 이업복(李業福)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 장붕익에 의해 살해된 비운의 전기수
이 기록은 영조 때 무신이었던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인다. 글에 의하면 그는 십여 세 쯤된 상놈이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는 여인들의 읽는 언문을 익혔으며, 글을 잘 읽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여인과 흡사하였다 한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남녀추니’라고 하는데 이 녀석이 바로 그러한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이 녀석이 어느 날 홀연 자취를 감추었고, 알고 보니 여장을 하고서는 사대부집을 드나들며 진맥도하고 방물장수 노릇도 하며 소설을 여인들에게 읽어준 듯하다. 더욱이 여승과 모의해서는 불공까지 드려주었다고 하니 맹랑하기 그지없다. 물론 사대부집의 아녀자들은 너나없이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되었고, 급기야 일부의 여인들은 잠자리도 하며 음란한 짓을 하자 판서 장붕익(張鵬翼,1674 ~ 1735)이 이 사실을 입막음 하려고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 글에서 소설 잘 읽으면 경제적인 이윤은 물론 여인도 따르는 시절이라 읽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인들은 규방 속에 가두어 둔데서 비롯된 애처롭고도 비극적인 소설사의 한 사건이 아닌가 한다.
㉯ 오물음 김중진(金仲眞)
우선 오물음 김중진부터 보자. ‘오물음’이란 별명이 재미있는데 설명을 듣자 치면 이렇다. 오이를 쪄서 푹 익혀 초간장을 치고 생강과 후추를 섞으면 부드럽고 맛이 있어 이 없는 노인에게 드릴만하니 이를 ‘오물음(瓜濃)’이라고 한다. 오물음에 대한 기록은『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청구야담(靑邱野談)』, 『추재집(秋齋集)』에도 보인다.
유재건(劉在建, 1793 ~ 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권 3부터 보면, “정조 때에 김종진이란 사람은 늙기도 전에 이가 모두 빠져서 사람들이 조롱하여 부르기를 오물음이라했다. 그는 익살스런 농담이나 비루한 이야기를 잘했는데, 인정물태에 대해서곡진하고 섬세하여 종종 들을 만한 것이었다.”라 하였다.
이 오물음이 역시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吳物音)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는 야담의 주인공이다. 야담의 서두가 “서울에는 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옛날이야기를 잘해 세상에 명성이 나서 정승 판서 집을 두루 다녔다. 성품이 오이를 익힌 나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오이물음이라고 불렀다”라는 사연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오씨 성은 ‘오이물음’의 ‘오’를 성으로 착각하여 추정한 것이 아닌가한다.
세 번 째 기록은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추재집(秋齋集)』권 7, ‘설낭’(說囊)에 보인다. 조수삼은 아예 설랑, 즉 ‘이야기 주머니’라고 불렀는데 그 전문은 이렇다.
“이야기 주머니 김옹(金翁)은 속된 이야기를 잘하여 듣는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배꼽을 잡는다. 그가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면 핵심을 꼭꼭 찌른다.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이 재빠른지 귀신이 도와주는 듯하다. 그래서 우스개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두머리라 할 만하다. 그 심중을 가만히 살펴보면, 또한 모두가 세상을 가볍게 보고 풍속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설낭’이라 불린 ‘이야기 주머니’, 김옹이 바로 오물음이다.
안대희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18~19세기 왈자 패거리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무숙이타령>에 나오는 외무릅이 바로 이 오물음이라 한다. <무숙이타령>을 보자.
“노래 명창 황사진이, 가사 명창 백운학이,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거짓말 일수 허재순이, 거문고의 어진창이, 일금 일수 장계랑이, 퉁소 일수 서계수며, 장고 일수 김창옥이, 젓대 일수 박보안이, 피리 일수 □(원본 확인 불가)오랑이, 해금 일수 홍일등이, 선소리의 송흥록이 모흥갑이 다 가 있구나.”
이야기 일수 외무릅이 바로 오물음이다.
㉰ 군문에서 봉급을 받은 이자상(李子常)
이자상(李子常) 역시 『이향견문록』권 3에 기록되어 있다. 『이향견문록』에 따르면 ‘자상’은 이름이 아니고 호인 듯한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자상(子常)이란 호를 가진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이 있기도 하지만 시대로 보아 저 이자상은 아니다. 일단『이향견문록』권 3의 기록을 따라가 보자.
기록에는 “이자상의 기록을 잊어버렸는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각종 술서(術書)를 모두 읽었다. 또 패관잡서들에 익숙해서 중국의 백화체로 쓰인 소설책을 모조리 꿰뚫었다. 그렇지만 혼자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지 못할 만큼 가난해서 재상집에 출입하였다. 소설책을 잘 읽는 솜씨를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군문(軍門)으로부터 적은 봉급을 받았고, 친지들의 집에 자주 기식했다.”라고 적어 놓았다.
이로 미루어 이자상은 꽤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역관 김홍철(金弘喆)
전문적인 전기수가 아니면서도 이름난 이야기꾼들이 있었다. 연암 소설 <민옹전>의 주인공인 민옹이 그렇고 김홍철(金弘喆,1741~1827) 또한 정조 때 역관을 지낸 이이나 이야기에 관해서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를 보여준다. 직업적인 전기수는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솜씨가 전문 직업인들 못지않은 이야기꾼들은 전국각지에 하다하였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는 내 할머니가 그러하셨다.
이조참판을 지닌 홍낙인(洪樂仁)은 역관 김홍철이 어찌나 구수하게 <수호전>을 이야기하였는지 이런 시를 남겼다.
맑고탁함 높고낮음을 입놀림에 내맡기고
깊은 밤 등불 앞에서 안석에 기대 누웠네.
북송의 정강시절호걸 협객 산중으로 들어가고
김성탄(金聖嘆) 문장은 소설가 중에 으뜸이지.
변화가 무궁하여 귀신들도 놀라게 하고
실마리가 뒤엉키니 용이 내달리네.
궁조(宮調)와 우조(羽調)가 서로 어울려
빼어난 변방 저녁 뿔피리 소리 듣는구나.
이 외에도 여성의 복색을 입고 규방에 출입하면서 소설을 읽어주기도 하다가 남녀간의 일로 인하여 장붕익張鵬翼에게 죽음을 당한 낭독자, 「요로원야화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금곡의 김호주金戶主, 마을 사람들에게 소설을 읽어주고 소설책을 팔기도 했다던 방물장수인 책장수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경기 안산에 살았던 문사 유경종(柳慶種,1714~1784)의 『해암고(海巖稿)』에 <서유기>를 암송하는 떠돌이 구연자를 만난 일만 더 보자. 유종경은 “엊그제 남의 집에서 <서유기>를 암송하는 자를 보았다. 한문과 언문을 섞어 외웠는데 소리가 유장하고 곡절이 있어 정말 들을 만했다. 아깝다! 그 재능을 잘못 사용하여 남에게 부림이나 당한 바가 되었구나.”
그리고 유종경은 이런 시를 지었다.
<서유기> 외우는 자 나타나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와.
기이한 재능을 헛되이 쓰는 것은 아까우나
환상적 사연을 자세히도 말하네.
한 부(部)의 <수신기(授神記)> 책이니
천 가지 연극 마당인 듯하네.
맑은 목소리에 곡절도 교묘하여
오래도록 귓전에 맴돌아 잊지를 못하겠네.
<서유기>를 어찌나 장 낭송하는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재주가 있는 들 당시에는 그저 그 재능을 잘못 사용하여 남에게 부림이나 당할 뿐이었다. 유종경은 한편으론 그이 재주를 감탄하면 듣고, 한편으로 그의 재주를 펼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을 지은자도 억눌린 자들이요, 그 소설을 읊조리는 자도 그렇다. 저 시절의 소설에는 저러한 아픔이 곳곳에 배어 있다.
㉲ 청지기 이업복(李業福)
이업복(李業福)에 관해 야담집 『파수록破睡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업복은 청지기 신분이다. 아이 적부터 언서(諺書)나 패관(稗官)을 잘 읽었다. 그 소리가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는가하면, 또 웃는 것 같기도 하며,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호방하고 뛰어난 사람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때로는 곱고 예쁜 계집의 아름다운 자태를 짓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 책의 내용에 따라 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의 부자들은 그를 불러서 책 읽는 소리를 듣곤 하였는데, 어느 서리 부부는 그 재주에 반해서 그를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아예 일가처럼 터놓고 지냈다.”
노래하는 듯, 원망하는 듯, 웃는 듯, 슬퍼하는 듯, 호방하고 뛰어난 사람인 듯, 또 때로는 곱고 예쁜 계집인 듯 아름다운 자태를 짓는다. 저 재주로 미루어 보면 가히 연예대상감이니, 이업복이 지금 태어났다하면 최고의 탤런트(talent) 자리는 저이였을 듯하다.
이러한 전기수들의 낭독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2호인 ‘송서’(誦書)와 ‘율창’(律唱)이 그것이다. 송서는 산문에 가락과 사설을 실어 읊는 것이요, 율창은 한시에 가락을 실어 노래한다. 일제 강점기 때도 부잣집 사랑채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풍류였다고 하는데, 송서는 일부 판소리 명창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노래가 된 고소설’ 참조)
<안녕하십니까, 박인규입니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규헌 옹
정규헌옹은 1936년생으로 충남 청양 출생으로 충남도지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받았다. 문화제로 지정 받은 것은 최후의 전기수이기 때문이다. 부친인 정백섭을 따라 어릴 적부터 소설을 가락을 얹어 읽어주는 활동을 했으나 잠시 다른 직업을 가졌다가 다시 전기수를 한다고 한다. 그는 주로 <춘향전>․<심청전>․<신유복전>․<조웅전>․<장끼전> 등을 외워 사람들에게 들려준다고 한다.
전기수는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있었다고 한다.
요전법(邀錢法)
조수삼(趙秀三, 1762 ~1849)의 『추재집』에 보인다. 전기수가 소설을 구송(口誦)하다 주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말을 중단하여 사람들이 듣고 싶어서 돈을 던지게 하는 방법이다.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로 ‘교환가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설 또한 이러한 경제 상황에 자연스럽게 변화한 흔적이다.
그러나 외워대기를 잘하였기 때문에 곁에서 듣는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게 된다.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묵묵하니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다음을 듣고 싶어서 다투어 돈을 던져주었으니 이를 곧 ‘요전법’이라고 한다.
사내계집 상심하여 눈물이 날리고
영웅의 승패, 이별은 검 자루에 분간키 어렵네
말 많을 곳 묵묵하니 요전법이라
묘한 곳 사람 맘이 급히 듣고 싶어서이지
(而以善讀 故傍觀匝圍 夫至最喫緊甚可聽之句節 忽黙而無聲 人欲聽其下回 爭以錢投之曰 此乃邀錢法云 男女傷心涕自雰 英雄勝敗劍難分 言多黙少邀錢法 妙在人情最急聞)
(조수삼, 『추재집』 7, 「기이」, ‘전기수’, 보진재, 1939, 7쪽)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담뱃가게(烟肆)
소설을 낭독하던 공간은 어디였을까?
여인들의 규방, 종로거리, 시장터 등 사람이 모이기 좋은 곳이었겠지만, 가장 문헌에 많이 나오는 소설문화 공간은 담뱃가게이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옛날 어떤 남자가 종가의 담배 가게에서 패사 읽는 것을 듣다가 영웅이 실의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으로 거품을 뿜으며 담배 써는 칼로 패사를 읽던 사람을 찌르니 선 채로 죽었다(古有一男子 鍾街煙肆 聽人讀稗史 至英雄最失意處 忽裂眦噴沫 提截煙刀 擊讀史人立斃之).
(이덕무, 「아정유고」 국역 청장관전서 4, 민족문화추진회 편(영인), 1979, 8쪽)
이 글은 이덕무(1741 ~1793)의 <은애전(銀愛傳)> 일부이다. 심노숭(沈魯崇, 1762 ~1837)도 「남천일록南遷日錄」에서도 이와 똑같이 담배 써는 칼로 낭독자를 찔러 죽였다고 기록이 보인다. 심노숭의 기록은 더욱 구체적으로 전기수가 낭독하던 소설은 <임장군전>이요, 김자점이 임 장군에게 죄를 씌우는 장면에서 찔렀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서울의 담뱃가게, 밥집의 불량배와 악소배들이 낭독하는 언문소설(此是 景裡草市 饌肆 破落惡少輩 所讀諺傳”이라고 또 담뱃가게를 지목한다. 이옥(李鈺, 1760 ~1813)도 「언패(諺稗)」에서 어떤 사람이 <소대성전>을 보라고 가져왔다하며 “이 책은 서울의 담뱃가게에서 부채를 치면 낭독하는 것들이 아닌가?(此其京師烟肆中 拍扇而朗讀者歟?)”라고 한다. 소설 낭독 장소로 담뱃가게가 꽤나 이용된 듯하다.
담뱃가게 이야기가 나오니 잠시 담배에 대해 훑어보자.
지금이야 담배를 피우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조선 후기에는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 가마꾼과 초동목수에 이르기까지 피우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음은 여러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장유(張維)의『계곡만필(谿谷漫筆)』 제1권, 「만필(漫筆)」, ‘남령초 흡연(南靈草吸煙)’ 을 보면, “담배는 ‘남령초(南靈草)’혹은 ‘담박괴(談博怪)’라고도 한다. 4ㆍ5년 전에 그 종자가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남방 사람들이 가져다 심어서 부유하게 된 자가 많았다.”라고 되어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담파고(淡婆姑)’에는 더 재미있는 기록도 보인다.
남쪽 오랑캐의 나라에 담파고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담질(痰疾)을 앓다가 남령초(南靈草 담배)를 먹고 병이 낫자 이에 그 여자의 이름을 따서 이 풀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광해군(光海君)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왜국(倭國)으로부터 들어왔는데, 장유(張維)가 이를 흡입하기를 가장 즐겨하였으므로 그의 장인 김상용(金尙容)이 임금에게 건의하여 이 요망한 풀을 금하도록 청하였다. 그 뒤에 심인(瀋人)들이 이를 재배하여 은밀히 팔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원(元)나라 때에 답화선(踏花仙)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그 여자의 무덤 위에 난 풀이 사람을 즐겁게 하였으므로 더러 이것을 답화귀(踏花鬼)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정조가 담배골초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정조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권6을 보면 담배의 예찬이 있으니 너댓 줄로 줄여 보자.
“즉위한 이래로는 책을 읽던 버릇이 일체 정무로까지 옮겨져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만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추고(推敲)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사람에게 유익함은 있어도 실제로 독은 없다고 하였다. 점차 세상에 성행하게 되고 심지어는 말 한 필과 남초 한 근을 바꾸기도 하며, 지금에 와서는 곳곳에 재배하고 사람마다 효험을 보고 있는 데 금지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쓰임에 유용하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말하자면 차나 술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담배예찬까지 한 골초였던 정조가 담뱃가게에서 읽혀지는 소설은 탄압했으니, 그래 우리네 삶이 소설처럼 아귀가 잘 안 맞는지도 모르겠다.
책쾌(冊
‘책비’가 책을 읽어주는 여자라면 ‘책쾌’는 책을 읽어 주는 남자다. ‘책쾌’는 ‘서쾌’, ‘책거간꾼’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직업은 세계적으로도 유사하니 우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서반(序班), 러시아의 오페나, 프랑스의 콜포르퇴르는 모두 우리의 책쾌에 해당한다.
조선후기의 책쾌는 두 유형이 있었다.
지식인형과 전문가형이다. 지식인형은 양반이나 중인 출신의 지식인으로 생계 유지를 위해 책쾌가 된 경우이다. 이양제(李亮濟)와 홍윤수(洪胤琇)가 그런 예이다. 그들은 독서와 학문에 힘쓰는 지식인이지만 가난하여 책장수로 생계를 이어갔다.
전문가형은 지식인은 아니지만, 책장수를 전문 직업으로 삼아 문화전파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확장한 경우다. 그들은 그 책들의 ‘뜻’을 알지 못했지만, 책의 저자, 주석자, 권이나 책수, 문목(門目), 의례에 관한 서지정보는 물론이고, 책의 소장자, 소장연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책의 가치보다는 책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려는 장사치였다. 전문가형 책쾌로는 조신선이 이름을 드날렸는데 정약용의 기록을 이윤에 꽤 밝은 듯하다. 정약용의 <조신선전>에는 조신선이 “욕심이 많아 고아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싼 값에 사들여 팔 때는 배로 받았다. 그러므로 책을 판 사람들이 그를 언짢아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책괘가 책을 구입하는 경로는 다양했는데 대략 셋으로 나뉜다.
첫째는 조신선 처럼 몰락한 집안에서 처분하는 책들을 사들이는 경우요, 둘째는 서사를 통해서, 셋째는 중국 사행에 참가한 역관을 통해 수입하는 것이다. 즉 역관-책쾌-독서인에 이르는 서적유통의 관계망이 형성된 것이었다.
미암 유희춘(柳希春, 1513 ~1577)의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는 책거간꾼에 대한 이러한 부분이 눈에 띈다.
“들으니 서울 의금부 북쪽에 박의석이란 책쾌가 있는데, 여러 곳에 있는 서책들을 반값으로 사들여서는 제값으로 판다고 한다(聞京中 義禁府北 有冊儈名朴義碩 凡諸處書冊 無不半價買 而全價賣云).” (유탁일, 「고소설의 유통구조」 『한국고소설론』, 아세아문화사, 1991, 358쪽에서 재인용)
책쾌(쾌가)는 채제공(蔡濟恭, 1720 ~1799)의 「여사서서女四書序」(번암선생문집 권33, 장4)에서도 보이고 정조의 어록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28권 <유의평례(類義評例)> 2 제17권 ‘첨(籤)’에도 “상의 첨에 이르기를, “… 대저 경륜(經綸)에 무익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에 무익한데 쓸데없이 많이 등사(謄寫)하여 책장사들 입에나 오르게 만든다면 매우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大抵無益於經綸, 無益於進修, 而漫費煩謄, 以資冊儈之誦傳, 不亦無義之甚乎.)”라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책쾌라는 직업이 꽤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후기의 책거리도도 방증이 될 것이다.
책비(冊婢)라는 여성 직업인도 있었다. ‘이규태코너’ <세책본(貰冊本)>이란 글이 흥미로워 내용을 인용해본다.
시장에서 빌린 필사본 이야기책 서너 권을 보자기에 싸들고 예약된 안방마님을 찾아간다. 본처인 큰 마님은 아랫목에 눕고 첩인 작은 마님들은 그 발치에 무릎을 세우고 앉는다.
그 세책(貰冊)에는 우는 대목과 웃는 대목이 나오는데, 우는 대목이면 소리를 죽여가며 우느냐 목놓아 우는냐 등등 약속된 36가지 부호가 표시돼 있어 36가지 목청을 달리해 가며 울리고 웃긴다. 마님들은 치마에 얼굴을 묻고 울어댄다. 책비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한 번 울리는 책비는 솔 짠보, 두 번 울리면 매화 짠보, 다섯 번 울리면 난초 짠보라 했다. 짠보란 눈물로 적셔 짜게 찌든 치마를 뜻한 것일 게다.
이 세책에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禁書)가 있었다. 사나이들을 발아래 거느리는 여자 영웅 <박씨전>, 여장하여 권문귀족의 여인들을 농락하는 <사방지전(舍方知傳)>등이 그것이다. 들키면 속칭 팔거지악(八去之惡)으로 쫓겨났다하니 소설의 위세를 가히 짐작할만하잖은가.
쿠랑의「한국문화사 서설」에 보면 책 세본은 담배쌈지나 망건 등 잡화상의 좌판 한쪽 구석에 놓고 세간살이를 잡고 5일장 돌아오는 동안 빌려주었으며, 책세가는 주로 몰락한 양반들인지라 언문책 파는 것을 창피하게 알고 숨겨놓고 빌려주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이러한 소설은 궁중까지 들어가 있었다.
궁중에서도 소설에 관한 이런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다 한다.
제위를 강탈당하고 창덕궁에 은거한 순종 황제는 궁녀에게 이야기책을 읽히며 소일했다고 한다. 한 번은 무슨 이야기책인가를 읽히는데, 임금이 호유오락에 빠져 민정을 돌아보지 않아 다른 나라에 빼앗겼다는 대목에 이르자 곁에 앉아 있던 천(千)씨 성을 가진 상궁이 “어느 임금이던 그 따위 짓하면 나라가 견뎌내겠느냐”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래, 이를 듣고 있던 순종이 벌떡 일어나 천 상궁의 뺨을 후려치며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이런 괘씸한 것! 나를 빗대는 발칙한 소리를!”
그건 그렇고, 책을 빌려주는 영리적 장사꾼인 쾌가儈家와 세책가貰冊家 등의 명칭도 18세기 중반 이후 자주 보인다. 이렇듯 영리적 장사꾼이 등장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소설에 대한 인식도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탁장책가도(卓欌冊架圖) 18세기후기 154x83.4
책가도(冊架圖)는 문방도(文房圖), 우리말로 ‘책거리 그림’이다. 책거리의 거리는 ‘구경거리’할 때의 거리와 쓰임이 같다. 이러한 그림은 18세기 후반에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선비방의 풍경이나 저 속에 소설 한 권 찾아낸들 흉될 것은 없으리라.
쾌가는 채제공(蔡濟恭, 1720 ~1799)의 「여사서서女四書序」(『번암선생문집』 권33, 장4)에서, 세책가는 「한국서지서설韓國書誌序說」(모리스 쿠랑 저, 박상규 역, 『한국의 서지와 문화』, 신구문화사, 1974, 18쪽)에 보인다.
<사방지전>이란, 『점필재집』 시집 제3권 ,(시(詩)), <사방지(舍方知)>에 보이는 내용이다. <사방지>는 세조 때에 사내종 이름인데 용모가 꼭 여자 같았으며, 불알이 항상 살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사방지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보이는데, 야사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전기수들에게는 여느 소설 못지않은 얘기임에 틀림없다.
『점필재집』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사방지는 여염집에서 부리고 또는 매매 되었던 종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모친이 그에게 여아의 옷을 입히고 화장을 바르고 옷 짓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가 자라서는 구실아치들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하녀들과 많이 간통을 했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李氏)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이었는데, 과부로 지내면서 사방지를 끌어들여 옷을 짓는다고 칭탁하고 밤낮으로 함께 거처한 지가 거의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천순(天順 :명 영종의 연호: 1457∼1464) 7년 봄에 사헌부에서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국문하다가 그와 평소에 통해왔던 한 비구니를 신문하기에 이르렀는데, 비구니가 “양도(陽道 남자의 성기를 뜻함)가 매우 장대했다.”고 하므로, 여의사인 반덕(班德)에게 그것을 만져보게 한 결과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승정원 및 영순군 이보(李溥), 정현조(鄭顯祖) 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하성위의 누이가 바로 이씨의 며느리가 되었으므로, 하성위 또한 놀라 혀를 널름거리며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웃고는 특별히 더 이상 추문하지 말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순지의 가문(家門)을 오멸시킬까 염려된다.”라 하고, 사방지를 순지에게 알아서 처벌하도록 하였다. 순지가 사방지에게 곤장 10여 대만을 쳐서 경기도 안에 있는 사내종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머지않아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여왔다. 순지가 죽은 뒤에는 더욱 끝없이 방자하게 굴었다.
금년 봄에 대신들이 상의 앞에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사실을 아뢰고, 사방지를 신창현(新昌縣)으로 곤장을 때려 유배시켰다. 내가 이 사실을 듣고 두 수를 부하였다.
비단 장막 깊은 곳에 몇 번이나 몸을 숨겼나 絳羅深處幾潛身
치마 비녀 벗고 보니 진실이 문득 드러났네 脫却裙釵便露眞
조물주는 예전부터 변환을 용납하기에 造物從來容變幻
세간에는 도리어 이의를 겸한 사람이 있다오 世間還有二儀人
남녀를 어찌 번거로이 산파에게 물을 것 있나 男女何煩問座婆
요망한 여우가 굴을 파서 남의 집 패망시켰네 妖狐穴地敗人家
가두에는 시끄러이 하간전을 노래하는데 街頭喧誦河間傳
규방 안에서는 양백화를 슬피 노래하누나 閨裏悲歌楊白華
<민족문화추진회> 번역문을 그대로 따랐다.
책사(冊肆)/서사(書肆)
책사와 서사, 서책사(書冊肆), 서포(書鋪)는 모두 책방을 말한다.
책사가 생기기 전에는 차람(借覽)이나 임사(賃寫) 방법을 이용했다. ‘차람’이나 ‘임사’는 모두 소설의 비상업적 유통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차람’은 ‘빌려 본다’는 뜻이고, ‘임사’는 독자가 필요로 하는 책을 대신 필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두 방법 모두 폭발적인 소설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여기에서 책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를 보면 “정릉동 병문에도 있고, 육조 앞에도 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百家)의 여러 가지 책을 판다.”라고 적어 놓았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간행이 조선 중기(1530)이니, 이 시기에 한성에는 이미 여러 개의 서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조보감』제20권, 중종 14년 7월조를 보면 “경성에 서사를 설치하였다(七月 設書肆于京城)”라고 하였다. 이때가 1519년이었다.
그러나 정조 때, 박제가나 정성기 등이 서책의 원활한 보급을 위하여 책을 찍어내는 곳과 책을 취급하는 사서를 설치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영조 때 강감찬요(綱鑑纂要) 사건으로 서사가 많이 줄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양가>(1848년)나 모리스쿠랑의 저서 등으로 미루어, 이 책사는 종각에서 남대문까지 걸쳐 있었으며 특히 광통교 근처에 많았던 듯하다.
대표적인 책사 네 곳만 살펴 그 규모를 짐작해 보자.
㉮ 박고서사(博古書肆)
유몽인(柳夢寅, 1559 ~ 1623)의 『어우집후집』권 3에 보면 「박고서사에 부치는 서」(博古書肆序)란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박고서사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이 글을 보면 누군가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 남원에 서사를 개설하고 유몽인에게 글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은 ‘주인이 어떻게 해서 서점을 열게 되었는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등의 이야기를 적고는 “옛날에는 없었고 지금은 있다. 사방에는 없으니 구하러 오는 자가 어깨를 부딪치면서 문을 들어와 마치 시장거리 같으니 남원의 재물을 모두 쓸어가지 않겠는가?(古無而今有。使四方無之而求有之者。側肩爭門。如趨市爲。則南原其壠斷乎)”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7세기에 서사는 그다지 활성화되지는 못 하였다. 18세기 들어와 여기저기 서사가 들어선 듯한데, 그것도 영조시절 ‘강감찬요사건’ 이후에는 아예 그 자취를 감주고, 조선시대 책의 보급은 책쾌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 약계책사(藥契冊肆)
1752년(영조 28년) 당시 서울에는 약계책사(藥契冊肆)라는 서사가 있었다. 사대부 지향이 아니라 중인과 몰락양반의 문화소통의 중요 경로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약계책사로 추정해보면, 책사는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책사가 전국적으로 산재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응하다. 약계책사는 중인이 경영하고 몰락한 양반이 드나든 책방이었다. 『열국지』 등과 한글책 등 당시 사대부 체제가 금기시하는 책들을 팔았다. 당시 중국소설과 우리 국문소설의 유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약계책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 임신(1752, 건륭 17) 4월 18일(기유) ’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이양제를 신문하니, 이양제가 공초하기를,
“금월 15,16일간에 초정의 언찰을 받았는데, 그 아들 이경명이 가지고 왔기에 서소문 안 박주부(朴主簿)의 약계책사(藥契冊肆) 바깥채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신은 포도대장의 집에 두 번 투서한 뒤에는 가평으로 내려가려고 하였고, 요사스러운 술법(術法)은 <열국지(列國志)>와 언문 책 속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영조 시대 서소문에 박주부라는 이가 경영하는 약계책사(藥契冊肆)라는 책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주부는 박섬(朴暹)인데, 이인석(李寅錫)과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이 약계책사를 드나들었던 이로 이량제(李亮濟)라는 책쾌도 있었다.
㉰ 박도량서사(朴道亮書肆)
19세기에는 박도량(朴道亮)의 서사가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조신선전>에 보인다.
조희룡의 생존연대로 보아 박도량서사는 1800년대 중반쯤에 있었던 듯하다.
㉱ 회동서관(匯東書館)
회동서관 터 사적비/서울의 광교 근처 조흥은행
본점에서 을지로 쪽으로 돌면 조그만 표석이 보인다.
딱지본 ~紙本
: 국문소설류를 신식 활판(구활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구활자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소설은 1912년 보급서관(普及書館)에서 나온 <옥중화(獄中花)>이다. 표지가 아이들 놀이의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되어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혹은 서점 이름이 인쇄된 딱지를 붙여 준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 딱지본을 ‘육전소설六錢小說’이라고도 하는데, 육전소설과 통용될 명칭은 아니다. ‘육전소설’이란 명칭에서는 당시 고소설 시장의 대중성과 상업의 치열함을 읽을 수 있다. 1913년 최남선이 세운 당시 서울의 대표적 출판사였던 신문관(新文館)에서는 육전소설문고를 기획, 1913년 9월 5일, <심청전>을 시발로 <홍길동전>․<사씨남정기>․<흥부전>․<삼설기>․<전우치전> 등 10여 종을 발간하며 붙인 이름이다. 이미 1909년에 십전소설十錢小說’을 출간한 바 있는 신문관이 그보다 더 싼 육전소설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구활자본의 책값은 분량에 10~65전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 중 30~40전 정도가 가장 많았으니, 육전소설이 얼마나 파격적인 값인 줄을 알 수 있다.
굳이 ‘6전’이라함은 당시 값싸게 사 먹을 수 있는 국숫값이 6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사들의 과당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1930년대 말까지 출간된 고소설은 약 250여 종에 출판사만도 무려 60여 곳이었다. <춘향전>을 개작한 이해조의 <옥중화>는 1912년 처음 나와 30년까지 1000쇄를 찍었고 1년에 40만부나 팔렸다는 전설적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육전소설은 “연은 녯 맛이 새로우며 글은 원법에 마지며 은 얌젼며 갑슨 싼지라”라고 소설의 내용과 값을 따졌다는, 그래 “군긔셔 다히 깃븜으로 마지시기를 쳔만 바라이다”라는 발간사와는 달리 독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썩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듯 싶다. 비록 값은 싸다지만 체재가 보잘 것 없었고, 더욱이 육전소설이 방각본을 대상으로 작품을 선정하여 약간의 개작을 거친 것이기에 기존에 유통되던 방각본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어서였다.
녹책(錄冊)과 전책(傳冊)
국문소설은 분량에 따라서 두 가지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기만 하고 한 책으로 끝나는 것은 ‘ ― 전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전책(傳冊)이라 할 수 있다.
한 대 또는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의 흥망을 다룬 작품은 분량이 길어지게 마련이고 ‘ ○ ○ ○ 록(錄)’ 이라는 제목이 흔하여 녹책(錄冊)이다. 김만중의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석중옥기연록>․<소씨명행록> 등은 대표적인 녹책이고 전책은 대부분 국문본이다.
전책에는 영웅소설이 많고,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것도 적지 않았다. 〈옥단춘전 玉丹春傳> 같은 애정소설, 〈진대방전 陳大房傳> 같은 교훈소설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비교적 하층 독자들에게 읽혔다.
이보다 격조가 높다고 인정되어 사대부 부녀자들이 애독한 녹책은 국문으로만 되어 있는 경우, 한문본보다 분량이 더 늘어나 대장편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을 무대로 하는 관례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무척 흥미롭고 복잡한 사건을 전개하면서 초경험적인 설정을 계속 활용하였다.
여성(女性)
조선시대의 규범과 사회적 법도는 여성에게 남자의 그림자로서 만의 인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소설에서만 큼은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고소설의 물줄기를 따라잡다보면 남성에서 시작되어 여성으로 흘러갔음을 여실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소설사에서, 특히 조선후기로 오며 ‘여성’은 남자의 그림자가 아닌, 하나의 용어로 존재한다. 이를 ‘사친(思親)’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친’이란 어버이를 생각한다는 뜻이나 우리 고소설에서는 특히 어머니를 그리는 정이다. 이러한 사친은 유독 고소설에서만 보이는 현상이기에 ‘사친론’이라 이름할 수 있는데, 이 사치론은 17세기 후반 이재(李縡:1680 ~1746)가 말한 김만중의 <구운몽> 창작 경위를 출발점으로 한다. 물론 조정위(趙正緯)의 졸수재집(拙修齋集)에 쓴 조성기(趙聖期:1638 ~1689)의 「행장」에 보이는 어머니에 대한 기록(조성기, 졸수재집, 여강출판사(영인), 222쪽)과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誌)에 보이는 조성기(趙聖期, 1638 ~1689)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 등에도 보인다.
이처럼 자식이 노모를 위해서 소설책을 읽어 주거나 짓는 관행은 17세기 후반 김만중의 <구운몽> 창작 이후에 이 전통이 효와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계승된 듯하다. 여기서 효의 주체인 자식은 특히 아들이요, 대상은 어머니이다. 모자(母子) 간의 이러한 현상은 사실 한국인의 정서와 맥을 잇대고 있다. 한 논문에 의하면 한국의 전설 중, 효의 주체와 대상을 조사해보니 아들과 어머니가 43%, 아들과 아버지가 35%, 딸과 아버지가 8%, 딸과 어머니가 6%로 조사 되었다는 보고도 있다.(차준구, 「한국전설에 나타난 효의 문화정신의학적 고찰」, 신경정신의학18~1(별책), 1979, 82쪽) 한국인의 효라는 정서에 ‘아들과 어머니’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재(李縡)가 말한 김만중의 <구운몽> 창작 경위에는 다음과 같이 사친론이 잘 정리되어 있다.
서포 김만중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다. 유복자로 태어나서 아비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기에 종신토록 애통해 하였으며, 어머니 윤씨 부인 섬기기를 지극히 하였다. … 패설에 <구운몽> 같은 것이 있는데, 서포의 작이다. 대개 부귀공명으로써 일장춘몽을 돌아보니 윤씨 부인의 근심을 풀어주기 위함이다.(西浦金公 性至孝 自以腹子生 不識父面 爲終身痛 事母尹夫人 有深愛 … 稗說有九雲夢 卽西浦所作 大旨以功名富貴 歸之於一場春夢 要以慰釋大夫人憂思) (이재, 삼관기 耳, 부산대 소장본)
이렇듯 자식들이 노모를 위해서 소설책을 읽어 주거나 짓는 관행은 ‘사친지념(思親之念)’이기에, 소설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성을 확보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한글소설인 청화담(淸華談)에서는 ‘자녀 위해 소설지음’이라고 하여 이 사친론의 외연이 넓어짐을 알 수 있다.(김락효 역주, ‘자녀 위해 소설지음’, 주해 청화담(註解 淸華談), 박이정, 1996, 6 ~11쪽 참조)
조선후기로 오며 여성들의 소설 읽기는 꽤 널리 퍼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가족 단위로 소설을 읽는 기사도 보인다. 여성들의 소설에 대한 기록은 황종림(黃鍾林:1796 ~1875)의 영세보장(永世寶藏) 등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외할머니께서 눈병이 나서 매양 소일하시기 어려워 하셔서, 외삼촌 형제분들과 외숙모들이 언문책을 구하여 번갈아 가며 서로 읽어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사 오 세부터 언문을 배우고 익히셔서 십 세 전에는 거의 못 보신 책이 없으셨는데, 前代의 治亂興亡한 자취와 人物의 賢愚淑慝한 分數를 널리 아시어, 실로 글 읽은 남자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계셨다. 열 줄을 한 번에 내리 외우시고 하루에 문득 수십 권을 보시고, 매양 책을 덮으면 몸소 말씀 외우시듯 하시더니, 하루는 둘째 외삼촌께서 그치기를 청하여 가로되, ‘아는 바가 이미 많은지라. 이제 그만하라. 여자의 행실은 그름도 없고 옳음도 없는지라. 오직 술과 밥을 의논할 뿐, 비록 사기와 경전의 끄트럭이 말이라도 반드시 많이 알지 아니 하려든, 하물며 시속의 법 되지 아닌 글은 말이 褻慢함이 많으니 여자가 마땅히 익힐 바가 아니니, 어찌 힘쓰지 아니리오.’ 하시니 이로부터 어머니께서는 뜻을 결단하시어 다시 책을 보지 아니하시니, 다른 사람이 혹시 신기한 책으로써 시험하여 내어 올 지라도 한 번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더니, 말년에 미치시어 불초의 무리 만일 빌려 드리는 바가 있으면 혹 뒤적여 보시나, 문득 외삼촌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으로써 가르쳐 가로되 ‘나이 젊은 여편네가 이로써 업을 삼는 자는 다만 가사를 황폐할 뿐 아니라, 왕왕 보니 인가의 여편네가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일로써 문자를 지어 여러 사람 가운데 돌리되 유식한 이의 가만히 웃음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심히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하시더라.” (黃鍾林 諺解, 鄭良婉 譯註, 「先夫人語錄」, 永世寶藏, 태학사, 1998, 228쪽)
이 책은 황종림이 돌아가신 양어머니 여산 송씨(宋氏, 1759 ~1821)를 위하여 쓴 글이다. 황종림은 황기옥의 양자로, 황기옥은 영조의 따님인 화유옹주의 아들이었다. 송씨는 친정어머니가 여러 해 눈병으로 고생을 하며 소일할 거리가 없자 오빠 내외와 함께 언문책을 번갈아 가며 읽어 드렸음을 알 수 있다.
홍희복(洪羲福,1794 ~1859)의 「졔일긔언서문」에 보이는 다음 글은 가족들과 더불어 소설을 읽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다만 긴 밤과 한가한 아에 노친을 뫼시고 병처와 부녀를 거려 번 보고 두 번 닑어 그 강개 상쾌 곳의 다라는 셔로 일컬어 탄샹고 그 담쇼회해 곳에 다라는 셔로 또 일장환쇼면 이 죡히 쓰인다 것이니 그 엇지 무용리요.” (정규복․박재연 교주, 제일기언, 국학자료원, 2001, 23 ~24쪽)
<「독서하는 여인」, 비단에 채색, 20×14.3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윤덕희>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본관은 해남, 호는 낙서(駱西)이다. 그는 숙종의 어진을 그리는데 감독관으로 참여할 정도로 이름 높은 18세기의 화가이다. 아버지 역시 귀 없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다.
얌전하게 생긴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인이 단아하게 평상에 앉아 긴 목선 위에 자리한 눈을 살포시 내리깔고 책을 읽고 있다. 얹은머리 모양으로 미루어 사대부집의 부인네로 갓 설흔을 넘긴 듯싶다. 조선 후기 많은 여인들이 머리에 치장을 많이 한 것에 비추어 꽤 소박한 차림이다. 여인의 오른 편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길렀던 식물인 큼지막한 파초가 있고 바로 뒤엔 나무틀에 끼워 세우는 병풍인 삽병(揷屛)이, 여인의 왼쪽 어깻죽지 위l엔 새 한 마리가 그려졌다. 파초는 다년생 식물로 불에 탄 뒤라도 속심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나온다하여 기사회생, 잎이 넓어 신선의 풍취와 부귀를, 파초의 푸름 속에서 군자의 기상을 찾을 수 있어 상당히 격조 높은 식물로 취급했다. 이러한 파초는 특히 책거리 그림 속에는 여지없이 등장한다. 삽병에 그려진 달과 구름 그림은 십장생에 속하는 것들이다. 여인의 왼편에는 새 한 마리가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여인의 자세는 전연 미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여인의 갸름한 왼쪽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글씨가 종으로 씌어있다. 이 여인은 지금 어떤 책을 읽는 것일까?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지마는, 혹 소설은 아닐는지. 그렇다면 제목은 무엇일까? <주생전>, 아니면 <홍백화전>?
윤덕희는 꽤 많은 소설을 읽었다.
그가 지은 『수발집(溲勃集)』‘소설경람자’에는 무려 127종의 소설명을 거론하고 있다. ‘소설경람자’를 쓴 시기를 그의 나이 78세인 1762년에서 1763년 사이이다. 위의 「독서하는 여인」은 윤덕희 이러한 소설편력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 소설 들을 옮겨본다.
<충의수호지>․<북송연의>․<우초지>․<봉황지>․<삼국연의>․<손방연의>․<봉신기>․<소리소>․<서유기>․<후수호전>․<평요전>․<하양비미>․<서한기>․<개벽연역>․<선진일사>․<후서유기>․<수당지>․<행화천>․<성세항언>․<쾌사전>․<열국지>․<몽월루>․<정사>․<금의단>․<오대사>․<전등신화>․<옥교리>․<금향정>․<남송연의>․<문원사귤>․<원앙영>․<소양취사>․<금병매>․<인봉소>․<농정쾌사>․<서호가화>․<서호이집>․<치파자전>․<새화령>․<동한기>․<호구전>․<용도신단>․<김취교전>․<동유기>․<열선전>․<왕경룡전>․<옥루춘>․<정정인>․<춘류앵>․<귀련몽>․<서상기>․<상전>․<유인안>․<오봉음>․<하도연>․<사몽기>․<염이편>․<남정기>․<산해경>․<여선외사>․<태평광기>․<대명영렬전>․<연정인>․<금고기관>․<오색석>․<국색천향>․<경몽제>․<육포단>․<주생전>․<홍백화전>․<홍백화전>․<기단원>․<성풍류>․<속정등>․<옥지기>․<최효몽>․<한위소사>․<탐환보>․<일편정>․<행홍삼>․<양정도설>․<인아보>․<정충전>․<변이차>․<감응도설>․<십이봉>․<고열녀전>․<서호지>․<천고기문>․<낭사>․<양육랑전>․<호접매>․<비화염상>․<서양기>․<육재자전>․<과천홍>․<서루기>․<경세통언>․<일침기>․<화진기언>․<재구봉>․<성세인연>․<환희원가>․<정몽석>․<교련주>․<인중화>․<무몽연>․<인월단>․<쌍검설>․<춘풍안>․<우기연>․<전등여화>․<후삼국지>․<천하이기>․<박안경기>․<각세명언>․<오강설>․<난해집>․<팔동천>․<적광경>․<양교혼전>․<석씨원류>․<수양염사>․<홍서>․<일석화>․<금분석>․<회문전>․<평산냉연> 등 127종이다.
장서가(藏書家)
명말인 진계유(陳繼儒, 1558~1639)는 『태평청화』에서 “조선 사람들은 책을 제일 좋아 한다. 사신의 공물을 바치러 들어오는 경우는 50인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혹은 옛 책과 새 책, 패관소설로서 조선에 없는 것을 날마다 시중으로 나가 각자 서목(書目)을 베껴 들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두루 물어 보고는 값이 비싼 것을 아랑곳 않고는 구입해 간다.”라고 기록을 해 놓았다. 이 기록이 16세기에서 17세기 초반의 경험인 점으로 당대인들의 서적에 대한 관심이 여하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연령인 허균(許筠, 1569 ~ 1618)만 하더라도 1614년과 1625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이때 4천 권이나 되는 서적을 구입해 왔다한다.
이제 서적은 단순하게 독서물에서 나아가 가문의 자랑거리이거나 매니아 층을 형성하며 완상물로 나아갔으니 ‘책의 존재방식’의 일대 변환이다. 여기에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역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독서문화는 조선의 경제 쪽으로 그 전개도를 서서히 넓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경화세족(京華世族), 즉 번화한 서울을 주된 생활공간으로 하여 대대로 살아온 양반가문의 장서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장서가’란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이다. 장서가가 생겼다는 사실은 소설독서 문화에 꽤 주목을 요한다.
예를 들어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4)은 두 차례 북경을 들어가 (1720,1732) 대량의 서적을 사왔는데 무려 1416권이나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서적시장이던 ‘유리창(琉璃廠)’을 통해서였다. 유리창은 비약적으로 발전 한 강남지방의 인쇄업이 만들어 낸 서적의 집결지였고 시기적으로 건륭(1735~1796) 시대와 연결된다.
심상규(沈象奎,1766~1838)는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호화주택을 짓고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책을 한꺼번에 다섯줄씩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 심념조가 책을 즐겨 읽어 장서가 만 권이 넘었으며,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각 방면으로 책을 수집, 장서가 많기로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홍한주(洪翰周,1798∼1868)의 『지수염필(智水拈筆)』이란 책을 보면, “비록 좁고 작은 우리나라지만 심상규(沈象奎)의 적당(績堂)은 거의 4만 권이 넘었고 유하 조병구(趙秉龜,1801~1845), 석취 윤치정(尹致定,1800~?) 두 분의 집 역시 3,4만 권 이하는 아니다. 기타 진천현 초평리의 화곡 정승 이경억(李慶億,1620~1673)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 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두릉리에 있는 8천 권이 또 그 다음이다. 대개 서울에 있는 오래된 집안으로서 천 권이나 만 권의 서적을 소유하고 있는 자는 손가락으로 이루다 꼽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구체적인 책 명은 남아있지 않지만 저 속에 고소설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외에도 이하곤(1677~124), 서형수(1749~1824), 원인손(1721~1774), 그리고 안동김씨가 등이 손꼽히는 장서가였다. 그런데 이들이 소장한 책은 중국의 책이 대부분이었으며, 조선의 서적에 대한 반응은 싱거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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