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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丁一權,일본식 이름: 中島一權 나카시마 이치켄, 1917년 11월 21일 ~ 1994년 1월 17일)은 만주국의 군인이며, 1940년대 만주국군 장교로 지냈고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이다. 해방후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었고, 박정희의 군사쿠테타를 도와 외교관과 정치가가 되었다.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살해 사건의 배후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現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함경북도 경원군이었다. 일본군 장교와 3대, 5대 주미 대사, 11대, 13대 외무부장관, 9대 국무총리, 국정자문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정일진(丁一鎭)이며 호는 청사(淸史)이다. 러시아 연해주 니콜리스크로 이주한 이주민의 자녀로 출생하여 함경북도 경원에서 성장하였다. 그뒤 함경북도 경원으로 되돌아와 경원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나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1930년 만주 영신중학교에에 입학했다가 통합되어 광명중학교로 졸업하였다. 광명중학교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 학교 선배이자 영어교사인 장내원의 권유와 교련 교관의 추천을 받아 봉천군관학교로 진학한다.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로 졸업, 성적우수자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편입학했으며,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광복 후 귀국, 대한민국 육군에 참여하였고, 1949년 육군 준장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에 참여하였다. 군 복무시 5대, 8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한국 전쟁에 한국군 주요 지휘관으로 참전하였다. 1950년 5대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국군 총사령관을 겸임하여 육해공군을 지휘하였으나 국민방위군 사건,거창민간인 학살사건로 사퇴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1954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나 휴전 후의 대한민국 국군 내 만주군 인맥의 한사람으로서 군내 파벌 갈등에 가담하였다. 1957년 예편 후 이승만에 의해 주터키대사로 임명된 뒤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주프랑스대사, 주미국 대사로 임명된 뒤 미국에서 4.19 혁명을 접하였으며, 과도 내각에서 주미대사,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거쳐 5.16 군사 정변 발생 후 박정희를 지지하였다. 1964년 총리가 된 뒤 한일협정의 체결을 성사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66년~67년에는 다시 외무부 장관이 되어 총리로 외무장관을 겸직하며 한일협정 직후의 문제를 수습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 자신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살해 사건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빚자 총리직을 사퇴했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상임 고문을 지냈으며 1971년부터 8, 9,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73년부터 국회의장을 지냈고 1980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뒤 국정자문위원을 거쳐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 총재에 취임하였다. 한일 회담 강행과 정인숙 사건 등으로 비판 여론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의 신임으로 정계에 머물러 있을수 있었다. <위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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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대구 - 1989년 6월 18일)은 제5대, 제6대, 제7대,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 가톨릭 신자이고 세례명은 아길로. 1930년 일본 도쿄대학교(東京大學敎) 독문과(獨文科) 졸업. 1936년 《가톨릭청년》지(誌)에 <기적>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 1945년 경상북도 학무국장에 취임, 52년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문리대학 학장.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투신. 63~71년 6, 7대 국회의원, 국회의장을 역임. IPU․APU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겸직. 1973년 9대 국회의원에 당선, 같은 해 3월에는 공화당 의장서리 겸 당무위원. 79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공화당총재 상임고문에 취임. 선거 때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효시. <위키에서 발췌>
이효상(李孝祥)은 대구 출신으로 김보록 신부의 지도로 입교하여 해성학교, 대구고보를 거쳐 1924년 안세화 주교의 장학금을 받아 동경대 독문학과에 유학하고, 한 때, <천주교회보> 편집장도 맡아보고 <가톨릭청년>에 기고활동을 해 왔다. 또한 1952년 경북대 문리대 학장을 지냈고, 벨기에 루벵으로 유학갔다 귀국하여 1956년 9월 다시 학장직을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