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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어두움. 그리운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몇 장의 거울들이 쨍쨍 빛나기 시작한다. 거울들이 소곤거린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마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고 믿어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 속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프고,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나, 그러나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제 2 장
어두운 정적 속에서 여배우 A, 여배우 B가 나타나 서로 거울을 마주보고 화장을 시작한다. 아주……열심이다. 여배우 A는 눈에 화상이 심하고 진물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같다. 여배우 B는 목에 흰 붕대를 감고 있는데 피가 배어 있다. 화장에 몰두하고 있는 두 여배우 모습은 아주 진지하게 보이면서 한편 왠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약간 슬픈 기색도 띤다. 여배우 B가 의상을 하나 고른다.
1. 00 여배우 A : 야, 그거 내가 골라 놓은거야. 놔둬
2. 00 여배우 B : 뭐 이거 마샤건데.
3. 00 여배우 A : 아냐. 그거 올리가꺼야. (다른 옷) 마샤 여기 있네. (문 여는 소리) 이거 무슨 소리지?
4. 00 여배우 B : 화장실
제 3 장
갑자기 큰 거울(체경) 앞에 여배우 C가 선다. 여배우 C는 「갈매기」에서 니나의 분장을 하고 있다. 손에는 담배.
5. 00 여배우 C : 난 ……갈매기. 아니, 그렇지 않아. 난 ……여배우, 그, 그렇죠!
서서히 조명이 들어온다. 흔히 볼 수 있는 분장실. 여배우 C는 대사 연습을 하고 있다. 여배우 A, 여배우 B는 여배우 C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화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6. 00 여배우 C : ……트리고린도 와 있다고? 상관없어, 그래요, 그 사람. 연극을 우습게 알고 늘 내 꿈을 비웃기만 했지. 그래서 나 신념도 무너지고 맥이 풀리고 말았어요. ……게다가 또 사랑의 고민이니, 질투니, 양육에 대한 공포니 해가지고 자꾸 내 맘을 죄는 바람에 난 소심하고 초라한 여자가 돼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연기를 했죠. 손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도 모르고 무대에 서 있을 수도 없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어요. 형편없는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느낄 때의 기분, 당신은 도저히 모르실거예요. 난 ……갈매기. 코스챠, 기억 나세요? 당신이 갈매기를 쏴 죽이던 날. 그 때, 트리고린이 그랬죠, ‘지나가던 남자가 처녀를 보고 심심풀이로 파멸시켜 버렸다. ……이건 제법 그럴 듯한 단편 소재가 되는데’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아, 무대 ……. 이제 나 돈 받는 여배우가 됐 어요 ……무대에 서면 도취해서 나 자신 훌륭하다고 느껴요. 정신력이 날로 강해져 가는 것을 느껴요. ……연기에서 소중한 게 명성이나 영광 이 아니고 실은 인내력이라는 것을 나 알았어요. 납득 됐지요. 자기 십 자가를 지고 다만 앞으로 나아갈지어다 …… 나 자신을 믿고 있으니까 그다지 괴로울 것도 없고, 여배우로서의 사명을 생각하면 인생도 두렵지 않아요.(귀를 기울이며) 누가 오나? 나 갈께요. 안녕. 제가 유명한 여배 우가 되거든 만나러 오세요, 네. 약속하지요?(가공의 손을 잡는다) 밤이 깊었네. 저 지금 가까스로 서 있는 거예요. 너무 너무 지쳐 버렸어. ……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화장대 위에 있는 쿠키를 먹는다) 아니, 안 돼요. 나오지 마세요. 트리고린을 만나더라도 아무 말 마세요. …… 나 그이가 좋아요. 전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제법 그럴듯한 단편소재죠?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요. 안타깝게 사랑하고 있어요. 코 스차! 전엔 좋았죠. 밝고 따스하고 기쁘고 깨끗한 생활 …… 정답고 산 뜻한 꽃과 같은 감정 …… 기억하세요? …… 인간도, 사자도, 수리도, 뿔 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 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 …… 다시 말해서 모든 생물, 생명이 있는 생물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도 다. …… 이미 수천 세기 동안 지구엔 어떤 생물도 존재 않았으며, 저 가련한 달만 허무한 등불을 켜고 있도다. 이제 목장엔 잠에서 깬 학의 울음소리도 그쳤도다. 보리수 숲에는 딱정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구 나…….
7. 00 소리 : 지금 뭐해요? 다들 식당으로 가고 있어요.
8. 00 여배우 C : 뭐라고?
9. 00 소리 : 배우들 기다린다구요.
10. 0 여배우 C : 어머, 나 좀 봐!
여배우 C, 갑자기 ‘가나다라, 가나다라……’ 발성 연습을 하면서 분장실을 뛰어나간다. 여배우 A, 여배우 B의 표정이 활기를 띈다.
11. 0 여배우 A : 난 ……갈매기. 아니 여배우.
12. 0 여배우 B :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13. 0 여배우 A : 난 ……갈매기. 마흔살 먹은 갈매기.
14. 0 여배우 B : 봐, 저 바보, 모자를 놓구 나갔어
15. 0 여배우 A : 내 옷을 입고 나갔어. 내가 골라놨는데.
여배우 B, 모자 가져다 자기 의자 위에 놓고 깔고 않는다. 당연히 모자는 무참하게 찌부러진다. 여배우 C, 허둥지둥 들어온다.
16. 0 여배우 C : 모다 ……모자 ……모자 …….
의자로 다가가서 모자를 빼려고 한다.
17. 0 여배우 B : ……(엉덩이에 힘을 준다)
18. 0 여배우 C : 왠 일야?!
여배우 C, 더 세게 모자를 끌어당긴다. 여배우 B가 일어선다. 여배우 C, 뒤로 벌렁 넘어진다.
19. 0 여배우 C : 더 못 참아. 내일 당장 분장실을 바꿀거야.
여배우 C, 여배우 A, B가 있는 쪽을 노려보면서
20. 0 여배우 C : 왜 그러지? 여기만 들어오면 냄새가 나. 여기다 썩은 독을 묻었나?
여배우 C는 서둘러 분장실에서 나간다.
21. 0 여배우 B : 음, 새우젓 독을 묻었지.
22. 0 여배우 A : 썩은 독이래, 너.
23. 0 여배우 B : 아니 유자 냄새가 나는걸.
24. 0 여배우 A : 탱자 냄새는 아니구?
25. 0 여배우 B : 그래 난 탱자다.
26. 0 여배우 A : 난 유자다.
27. 0 여배우 A, B : 우린 유자다. 탱자다.(반복)
짦은 사이.
28. 0 여배우 B : 저 여자 모자가 왜 그래. 더 우아한 것을 썼어, 우리 땐.
29. 0 여배우 A : 우리 때?
30. 0 여배우 B : 그래.
31. 0 여배우 A : 흐응.
32. 0 여배우 B : 뭐가 ‘흐응’이야?
33. 0 여배우 A :「갈매기」에서 니나를 해본 것 같잖아.
34. 0 여배우 B : (이 말에 상처를 받고)했지. 한 번 해 봤다고.
35. 0 여배우 A : 한 번?
36. 0 여배우 B : 갈매기는커녕 찌르레기도 못해봤지 당신. 항시 ‘아, 나는 영원한 프롬 프터였어’ 그랬잖아.
37. 0 여배우 A : 누가 할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나도 맥베드 부인은 해봤다고.
38. 0 여배우 B : 오, 셰익스피어의 맥베드 부인 …….
39. 0 여배우 A : 그래, 지방 공연 중이었어. 시꼬꾸였는데 ……맥베드 부인이 아침에 피 조개 먹구 갑자기 토사광란이 일어나서 누워버린거라……
40. 0 여배우 B : 그래. 그래 마침내 기회가 왔어.
41. 0 여배우 A : 난 가자마진자의 부적을 꺼내들고 기도했지. 빨리 뒈져라!맥베드 부인 빨리 죽어.
42. 0 여배우 B : 그러나 해가 지면서 맥베드 부인이 기적적으로 화복하는 바람에 천재 일우의 기회는 날아가고.
43. 0 여배우 A :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
44. 0 여배우 B : 그렇지 않았다고?!
45. 0 여배우 A : 해가 지자 내가 또 토사광란으로 길게 뻗어 버렸어 …….
46. 0 여배우 B : 당신도 피조개 먹었어?
47. 0 여배우 A : (고개를 끄덕인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어. 시꼬꾸 가면 누구든 피조 개 먹잖아.
48. 0 여배우 B : 나도 그랬을 거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피한 적이 없다구.
49. 0 여배우 A : 피조개 정말 맛있어 그거
짦은 사이.
50. 0 여배우 B : 맥베드 부인 ……나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어. 맥베드는 40회, 아니 50 회 이 상 프롬프터를 했지만.
51. 0 여배우 A : 그럼 대사 다 알겠네?
52. 0 여배우 B : 그럼.
53. 0 여배우 A : 까마귀까지도 ……
54. 0 여배우 B : 싫어.
55. 0 여배우 A : 까마귀까지도 ……
56. 0 여배우 B : 으으으으.
57. 0 여배우 A : 까 ~ 악.
58. 0 여배우 B : (맥베드 부인의 대사) 까마귀까지도 당컨이 사자 밥을 짊어지고 이 성 에 와서 죽으려한다고 목쉰 소리로 알리고 있다. 무서운 음모에 끼여든 악령들이여, 어서 와서 날 나약한 여자로부터 벗어나게 해다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잔인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다오! 나의 피를 응결시 켜 연민의 정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아다오, 그리하여 자연히 울어나지 모르는 여자의 눈물이 나의 흉악한 계획을 좀먹지 않게 해다오.
59. 0 여배우 A : 아닌데.
60. 0 여배우 B : 좀먹지 않게 …… 왜 그래 한창 열 났는데, 나.
61. 0 여배우 A : 저, 그거 전후의 번역?
62. 0 여배우 B : 전후?!
63. 0 여배우 A : 달라, 내가 알고 있는 것하고.
64. 0 여배우 B : 어디가?
65. 0 여배우 A : 처음부터.
66. 0 여배우 B : 처음부터? 해봐요. 자.
67. 0 여배우 A :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좀 옛날 느낌이 드는 포즈다) ……까마귀까지 도 당컨이 사자 밥을 등에 지고 이 성에 와서 불상의 임행을 목쉰 소리 로 곡하여 전하고 있다.
68. 0 여배우 B : 불상의 임행?!
69. 0 여배우 A : 무서운 음모에 끼여든 령마들이여, 어서 와 이 나약한 여자 피를 응결 시켜 연민이 흐르는 마음의 입구도 통로도 제지. 동정이라는 자연의 정 이 부지불식간에 발발 하여.
70. 0 여배우 B : 발발!?
71. 0 여배우 A : 나의 흉악한 계획을 뒤틀지 못하게 해다오. 자, 살인의 괴뢰들아, 이 여자 흉중에 틈입하여 이 감로수를 쓰디쓴 담즙으로 바꾸어다오. 너희 들은 보이지 않는 형체로 어디서나 인간 흉사를 방조하지 않느냐!
72. 0 여배우 B : 방조?!
73. 0 여배우 A : ……(대사를 끊는다)
74. 0 여배우 B : 계속해요, 자.
75. 0 여배우 A : 결국 나는 구식이야. 당신보다 나이도 더 먹고 …… 그래, 동정이라는 자연 의 정이 부지불식간에 발발하는 시대였으니까.
76. 0 여배우 B : (위로하는 듯)부지불식간에 발발해 …… 대충 의미는 알아요.
77. 0 여배우 A : 대충?
78. 0 여배우 B : 응, 섬세함은 약간 모자라지만.
79. 0 여배우 A : 그래, 섬세함이 모지라. 그러니까 영원한 프롬포터였어 난.
80. 0 여배우 B : 늘 그렇게 말하다가 삐뚤어져요.
81. 0 여배우 A : 대하기가 거북하지 …… 전전의 사람이라.
82. 0 여배우 B : 당신, 몇 번 무대에 섰었죠. 맥베드 부인이나 니난 아니더라도.
83. 0 여배우 A : 그럼,……귀족A라든가 전령2라든가 문지기3이라든가 편지 배달도 했고
84. 0 여배우 B : 어머, 왜 다 남자.
85. 0 여배우 A : 응……남자배우는 다 전쟁에 동원됐구……. 그래! 노름꾼 역도 했어.
86. 0 여배우 B : 노름꾼?
87. 0 여배우 A : 미요시 쥬로의 「잘리는 남자, 센타」에서.
88. 0 여배우 B : 해봐요.(해보라고 재촉한다)
89. 0 여배우 A : (갑자기 등이 가려울 때 쓰는 도구를 칼로 해서) 당신이 “거기서라 센 타” 해요.
90. 0 여배우 B : 거기서라 센타.
91. 0 여배우 A : 노름판에서 패를 바꿔치다니 일천사해, 익업도세에 없는 법이다, 없는 줄 알면서 패를 바꿔친 나,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오늘 밤은 놓아주십시오. 도망쳐야합니다. 자, 전주 여러분! 당신들 앞에 서는 건방진 소리지만 나는 사람 을 죽이는 건 싫소이다. 죽일 수도 없 소.
92. 0 여배우 B : 어머, 멋있어. 그게 당신 대사?
93. 0 여배우 A : 아니, 이건 센타의 대사. …… 듣고 계십니까, 전주 여러분! 난 보다시 피 이름도 법명도 없는 철새, 어제 오늘 시작한 신출내기 하발 노름꾼, 아니, 나를 도둑놈이라고 해도 됩니다. 나는 도둑놈입니다.! 하지만 이렇 게 많은 돈을 나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 쓰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돈 으로 수 십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94. 0 여배우 B : 그런데 당신은 언제 등장해?
95. 0 여배우 A : 시끄러워! 좀 더 있다가 나와 …… 부탁드립니다. 오늘밤은 제발 놓아 주십시오. 일이 끝나면 머리를 씻고 다시 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하 발 노름꾼이 이런 말한다고 생각하면 화도 나시겠지만, 농사꾼의 자식들 이 불이 붙은 것 같이 울고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수입, 그저 하루 밤의 껌값에 불과한 수입을 제게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농사꾼의 자 식들한테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오늘밤은 나룰 놓아주십시오. 전주 여러 분! 마카베의(마을 이름) 센타, 여러분 은혜를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저 …… 잠깐만 요, (주변의 살기를 느껴서) 나는 쓸데없는 살생은 하고 싶 지 않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구. 야! 내 말이 안 들려! …… 이때 전주의 부하 다키지로(사람 이름)가 갑자기 뛰어든다.
96. 0 여배우 B : 저.
97. 0 여배우 A : 시끄러워! 센타, 입이 세로로 찢어졌느냐? 죽이고 싶지 않다고? 그러 면 네가 너를 죽여. 자, 내리쳐라 어서.
98. 0 여배우 B : 그게 당신이야?
99. 0 여배우 A : 아냐.
100. 여배우 B : 아직 안 나왔어?
101. 여배우 A : 벌써 나왔어.
102. 여배우 B : 어디?
103. 여배우 A : 여기 있어.
104. 여배우 B : 어디?
105. 여배우 A : 여기 이만치에 …… 이 다키지로하고 같이 뛰어들어왔어. 대본에는 다 키지로, 갑자기 뛰어든다. 동시에 노름꾼 7명도 같이 뛰어든다. 다 이를 악물고 있고 무언이다.
106. 여배우 B : 무언?!
107. 여배우 A : 그래, 다 이를 악물고 …… 나는 센타나 다키지로 대사도 프롬프터 해 줘야 되잖아. 그래서 대본대로는 못 했지.
108. 여배우 B : 그럼, (이를 악물고) 이러구 어떻게 프롬프터 했어?
109. 여배우 A : (이를 악물고) 마카베의 센타, 여러분 은혜를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센타, 입이 세로로 찢어졌느냐? 죽이고 싶지 않다고? (꿈을 꾸는 듯) 이 연극 참 좋았어……오타즈(사람 이름)라든가 오묘(사람 이름) 라든가 예쁜 여자 역도 있었지만 마음에 다가오는 건 역시 잘리는 남 자 센타.
110. 여배우 B : (여배우 A의 얼굴을 뚫어지게 본다) …… 당신, 설마.
111. 여배우 A : 설마, 뭐?
112. 여배우 B : 그 분장.
113. 여배우 A : 분장이 뭐?
114. 여배우 B : 전부터 수수께끼였어.
115. 여배우 A : 뭐가?
116. 여배우 B : 당신의 영원한 배역은 뭐냐.
117. 여배우 A : 그래서?
118. 여배우 B : 잘리는 남자 센타?
119. 여배우 A : 됐어, 나는 여배우야. 역시 여자 역이 좋아 …… 당신의 영원한 배역은 뭐 지?
120. 여배우 B : 비밀이야.
121. 여배우 A : 난 알아.
122. 여배우 B : 몰라.
123. 여배우 A : 니나! 「갈매기」에서 니나, 맞지?
124. 여배우 B : 뭐가 맞아?
125. 여배우 A : 그래, 아까 모자 깔고 앉았지. 심술이라니.
126. 여배우 B : 아니야.
127. 여배우 A : 니나! 오, 내 사랑, 니나 …… 나는 트리고린입니다.
128. 여배우 B : 트리고린?!
129. 여배우 A : 그렇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트리고린입니다.
130. 여배우 B : 그만 해. 으스스해. 남자 역이면 센타가 훨씬 나.
131. 여배우 A : 계속하겠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좀 구식인 점은 용서해주십시오. 그런 데니 나, 실은 뜻밖의 사정으로 전 아무래도 오늘 출발하게 될 것 같습 니다. 당신과 또 언제 만나게 될는지 정말 유감입니다. 전 젊은 아가 씨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하고 말 한 적이 없어서 열 여덟, 아홉 살의 젊은 아가씨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 다.
132. 여배우 B : 그 대사 리얼리티가 있어, 당신이 하니까.
133. 여배우 A : 당신도 영원한 프롬프터였죠. 니나.
134. 여배우 B : 아아, 아름다운 호수 …… 아름다운 숲……아름다운 창공.
135. 여배우 A : 좋아요, 좋습니다. …… 헌데 그런 대사가 있었어?
136. 여배우 B : 됐네요, 내 마음에 든 부분만 하는 거야……아름다운 호수 …… 아름 다 운 숲 …… 아름다운 창공. 저는 이 호숫가에 서면 항상 자연의 웅대 함, 풍부함을 절실하게 느껴요. 하지만 내가 여배우가 될 수 있다면, 여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면 이 자연도 그보다 더한 어떤 것도 단호하게 희생할 거예요.
137. 여배우 A : 어떤 것이라도?
138. 여배우 B : 예, …… 여배우, 그 행복한 신분이 될 수 있다면 난 주위 사람들의 미 움을 받든 가난하든 뭐든지 참고 견디겠어요. 지붕 및 다락방에 살고 검 정 빵만 먹어도 좋아요. 그 대신 나는 요구합니다. 명성을.
139. 여배우 A : 명성을?
140. 여배우 B : 예, 진정한, 떠나갈 듯이 요란한 명성.
141. 여배우 A : 진정한, 떠나갈 듯이 요란한 명성?
142. 여배우 B : 아아, 어지러워……
143. 여배우 A : 자, 정신을 차리고, 니나. 아,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어. 아마 짐을다 챙겼나 봐. 하지만 떠나고 싶지 않군.
144. 여배우 B :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저, 호수 건너편에 집하고 정원이 보이죠?
145. 여배우 A : 어디? 예, 보입니다.
146. 여배우 B : 정말 보여?
147. 여배우 A : (화상으로 진무른 눈을 크게 해서) 아, 보입니다!
148. 여배우 B :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이어어요. 전 저기서 태어났지요.
149. 여배우 A : 이 호수는 정말 멋있어…….(발 밑에 가발이 떨어진다) 뭡니까, 이건?
150. 여배우 B : 갈매기예요. 트레플레프씨가 쏘았어요.
151. 여배우 A : (뭔가 기록하면서) 아름다운 새야.
152. 여배우 B : 뭘 쓰죠?
153. 여배우 A : 아니, 주제가 생각나서. 자그마한 단편의 주젠데.……호숫가에 꼭 당신 같은 젊은 처녀가 어릴 적부터 살고 있습니다. 갈매기처럼 호수를 좋아 하고 갈매기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웠죠. 그런데 우연히 나타난 사나이가 그 처녀를 보자 심심풀이로 처녀를 파멸시키고 말죠....
154. 여배우 B : 어머.
155. 여배우 A : 어때요? 괜찮죠. 실은 흔히 있는 이야기죠. 당신처럼 젊은 여배우한테 ……(심술궂은 시선으로 여배우 B의 목을 보고)오오, 내 사랑, 니나! 그 붕대. 오오, 피가 배오나오고……갈매기처럼 누가 거길 쏘았습니까?
156. 여배우 B : 그만 해.
157. 여배우 A : (그 말을 무시하고 여배우 B의 목의 붕대를 풀며) 어머, 목에 칼로 근 자국이……그러면 당신, 자기 스스로……무서워……모르겠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연극을 위해서? 남잘 위해서? 아니면 양쪽 다?
158. 여배우 B : (여배우 A를 밀친다)
159. 여배우 A :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하지만 니나, 한 마디 충고할께요. 남자가 한 타스 정도 죽어준다면 그건 여배우한텐 훈장이 되겠지만……그 반대는 안 돼. 반대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치욕이 돼요.
160. 여배우 B : 내 가만히 있다고 멋대로 장황하게 말을 맨들어. 그래요, 나 여배우 실 격이에요. 헌데 그러는 당신은 훈장이에요 그거.……무기 공장, 여자정신 대, 공습을……거쳤다고 사람들이 달아준거예요.
161. 여배우 A : 이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162. 여배우 B : 어머, 왜 언성을 높여.
163. 여배우 A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164. 여배우 B : 그저 나는 폭탄으로 당한 상처하고 칼로 그은 상처, 어느 쪽이 좋은지 좀 생각해보려고요.
165. 여배우 A : 흥! 그렇게 거드름 피우면서 말하는게 전후의 리얼리즘?
166. 여배우 B : 그래, 그렇게 음울한 방법으로 말하는게 전전의 리얼리즘?
167. 여배우 A : 시끄러워, 시궁쥐야!
168. 여배우 B : 뭐야, 고슴도치!
서로 화장대 위에 이는 것들을 던진다. 다음 순간, 상대를 무시하고 각자 화장에 열심 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화장이 잘 안 돼서 짜증을 낸다. 긴 사이.
169. 여배우 A : 저.
170. 여배우 B : ……
171. 여배우 A : 나 별일 아닌 것에 집착하는 편인데……고슴도치가 뭐지?
172. 여배우 B : 고슴도치는 고슴도치지.
173. 여배우 A : 그런 게 증말 있어?
174. 여배우 B : 당신 늘 그렇게 말을 배배 틀어요……예 있어요. 존재하십니다. 아마미 오오시마에.
175. 여배우 A : 그래……?
176. 여배우 B : 고구마 밭에 많아요.
177. 여배우 A : 고구마 밭?! 그래, 사는 환경으로 따지면 시궁쥐하고 크게 차이는 없 네. 오히려 수준이 좀 높은 것 같애.
178. 여배우 B : (분한 듯 여배우 A를 본다)
그 때, 여배우 D(다른 여배우들 보다 젊다)가 조용히 들어온다. 왜 그런지 가슴에 큰 베개를 안고 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않는다. 그 자세 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배우 A, B는 여배우 D를 유심히 관찰한다.
179. 여배우 A : 누구지?
180. 여배우 B :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181. 여배우 A :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182. 여배우 B : 글쎄.
183. 여배우 A : 뭐야 저 베개 같은 건.
여배우 B, 일어난다.
184. 여배우 A : 놔 둬.
여배우 B, 여배우 A의 말을 무시하고 여배우 D에 다가가서.
185. 여배우 B : 베개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베개.
186. 여배우 A : 어……
여 배우 C는 분장실 바닥 일정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앉아있다. 여배우 B, 여배우 D 앞에 앉는다.
187. 여배우 B : 뭘 생각하고 있는가봐. 아니면 열이 있나. 부적일까, 이 베개?
188. 여배우 A : 무슨?
189. 여배우 B : 이렇게 안고 있으면 열이 내려가는……
190. 여배우 A : 그런 부적이 어딨어.
191. 여배우 B : (더 가까이 다가간다)
192. 여배우 A : 말어.
여배우 B,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다.
193. 여배우 D : 엄마.
여배우 B,놀라서 멈춘다.
194. 여배우 D : (시선은 계속 바닥을 내려보면서) 엄마, 내 편지 읽으셨어요?
195. 여배우 B : 편지?
여배우 A, B,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196. 여배우 D : ……난 이제 건강해요. 배우한테 재능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건강이 더 소중하죠. 건강에는 잠을 자는 게 제일이구.……나 정말 많이 잤어 요. 유태인들 속담에도 있죠, 좋은 베개는 좋은 잠을 마련해 준다 ……그 말대로 했어요, 좋은 잠에는 좋은 베개……엄마, 나 이젠 괜찮 아.……정말이에요. 나는 건강 그 자체. 그러니까 엄마, 안심하세요.
여배우 A, B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당황하여 화장을 다시 시작한다.
197. 여배우 B : 저.
198. 여배우 A : 응?
199. 여배우 B : 당신이 저 여자 엄마라면 안심하겠어?
200. 여배우 A : 못할거야.
그 때, 무대 뒤에서(무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쪽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 이 음악을 듣고 여배우 D가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마치 무대에 서있는 것처럼 중앙으로 나온다. 분장실도 왠지 갈매기 무대처럼 스포트라이트가 비춰 진다.
201. 여배우 D :……나 가겠어요. 안녕. 제가 유명한 여배우가 되거든 만나러 오세요, 네? 약속하시죠? 밤이 깊었어요. 저 지금 가까스로 서있는 거예요. 너무 지쳐 버렸어.……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아니, 안 돼요. 나오지 마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트리고린을 만나더라고 아무 말 마세요.……난 그이가 좋아요. 전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코스차! 전에는 좋 았었죠. 그 얼마나 밝고 따스하고 기쁘고 깨끗한 생활이었던가요. 정답 고 산뜻한 꽃과 같은 감정……기억하고 계세요?……인간도, 사자도, 독 수리도, 뿔 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다시 말 해서 모든 생물, 생명이 있는 생물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 렸다.……이미 수천세기 동안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저 가련한 달만이 허무한 등불을 켜고 있다. 이제 목장엔 잠에서 깬 학 의 울음소리고 그쳤도다. 보리수 숲에는 딱정벌레마저 찾아오지 않는구 나……
스포트라이트가 암전. 무대 쪽에서 큰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박수 소리가 작아지면서 조명이 이전의 분장실 조명으로 바뀐다. 여배우 C, 무대에서 분장실로 들어온다.
202. 여배우 C : 아, 가려워, 가려워……
가발을 벗고 머리를 긁는다.
203. 여배우 C : 뭐야, 저 바보! 프롬프터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잖아…….기억하고 계세요?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뿔 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바다에 사는 고래도……왜 여기만 가면 까먹지? 바다에 사는 고래가 아니라 불가사 리……아이 놔둬. 틀린 것도 아니지 뭐. 고래도 불가사리도 어쨌든 바다 에 살잖아.
여배우 C, 구석 자리에 베개를 가만히 안고 앉아있는 여배우 D를 발견한다.
204. 여배우 C : 키꼬……
205. 여배우 D : ……(인사한다)
206. 여배우 C : ……언제 왔어, 몸 괜찮아?
207. 여배우 D : 예, 덕분에.
208. 여배우 C : 그래…….(베개를 보고) 뭐, 그거?
209. 여배우 D : 예, 저 이거…… 선물로 드릴려구요.
210. 여배우 C : 선물?
211. 여배우 D : 예.
여배우 C, 얼룩진 베개를 보고.
212. 여배우 C : 고맙지만 괜, 괜찮아, 나도 있어.
213. 여배우 D : 그러지 마시고……..
214. 여배우 C : 아니, 정말 괜찮아. (베개를 밀면서) 잘 됐네, 키꼬가 돌아와서……키꼬 가 병으로 쓰러지고 나서 대신에 작년 입단한 사람한테 프롬프터를 맡 겼는데 타이밍이 영 안 좋아…내일부터 다시 해줄거죠?
215. 여배우 D : 에?
216. 여배우 C : 프롬프터.
217. 여배우 D : ……
218. 여배우 C : 왜, 안 돼?
219. 여배우 D : 저……이제 건강해요.
220. 여배우 C : 그래 그러니까.
221. 여배우 D : 오랫동안 정말 폐를 끼쳤어요.
222. 여배우 C : 됐어,……그런데 해줄꺼죠, 프롬프터.
223. 여배우 D : 프롬프터?
224. 여배우 C : (짜증 내면서) 에, 프롬프터 프롬프터.
225. 여배우 D : (짜증 내면서) 내 말은 그게 아니고……?
226. 여배우 C : 아니고?
227. 여배우 D : 나 정말 건강해요, 그러니까.
228. 여배우 C : 그러니까 뭐!
229. 여배우 D : 돌려주세요.
230. 여배우 C : (여배우 D를 멍하게 본다) 돌려달라니? 뭘?
231. 여배우 D : 어머……(모르는 척하지 말라는 듯 웃는다)
232. 여배우 C : (불안해져서) 내게 뭘 맡겼어?
233. 여배우 D : 그냥 돌려주시면 돼요.
234. 여배우 C : 확실하게 말해요. 도대체 뭘 돌려달라는 거지?
235. 여배우 D : 니나.
236. 여배우 C : 에?
237. 여배우 D : 니나를 돌려달라구요.
여배우 A, B는 놀라서 화장품 팔레트를 떨어뜨린다. 여배우 C놀라서 말을 못한다.
238. 여배우 C : 저, 키꼬……지금 무슨 말하고 있는지 알아.
239. 여배우 D : 예…… 나 정말 건강해요. 보세요, 혈색이 좋아졌죠.
240. 여배우 C : 잘 들어, 본인은 건강해졌다고 하지만…….알죠?
241. 여배우 D : 오랫동안 폐 끼친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있잖아요.
242. 여배우 C : ……(말을 찾는다)
243. 여배우 D : ……(가만히 보고 있다)
244. 여배우 C : 병원에 돌아가요. 아직 회복기에 있나봐. 말도 안 되는 말을.
245. 여배우 D : 왜 말도 안돼요?
246. 여배우 C : 키꼬…….니나는 처음부터 내 역이었어. 그리고 키꼬는 처음부터 내 프 롬프터였구.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키꼬한테 니나 역이 캐스팅 될 거 라고 생각 해?
247. 여배우 D : ……
248. 여배우 C : 알았죠?
249. 여배우 D : …….
250. 여배우 C : 난 약속 있어 나가요.
여배우 C,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여배우 D, 베개안고 움직이지 않는다. 여배우 A, B는 완전히 여배우 C, D에게 넋이 빠진 채 손만 놀리는 바람에 이상한 화장이 이상하게 돼 있다. 여배우 A, B, 화장을 고친다. 여배우 C, 니나 의상을 옷걸이에 건다.
251. 여배우 C : …….(여배우 D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252. 여배우 D : 제가 운이 나빴죠. 니나를 맡자 병에 걸려서…… 저 병원 침대서 편지 를 여러 통 썼어요. 사과의 편지…… 작가 선생님한테 너무 미안해서.
253. 여배우 C : 작가한테 미안해?
254. 여배우 D : 그렇게 멋있는 역을 써주셨는데.
255. 여배우 C : 당신, 작가가 누군지 알어?
256. 여배우 D : 그런……
257. 여배우 C : 죽었어 70년 전에.
258. 여배우 D : 그건 소문이죠.
259. 여배우 C : (깜짝 놀란다) 소문?!
260. 여배우 D : 그저께 ……통화했어요.
261. 여배우 C : 누구랑?
262. 여배우 D : ……
263. 여배우 C : (여배우 D를 바라보고) 그래……확실히 말해봐, 키꼬.
264. 여배우 D : 하지만……
265. 여배우 C : 내가 맞춰볼게. 작가지?
266. 여배우 D : 맞아요.
267. 여배우 C : 좋았겠네, 작가랑 통화해서, 나는 체호프 작품 여러 번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작가하고 얘길 못했어. 앞으로도 아마 영 할 수 없겠지만……그래 무슨 얘기했어?
268. 여배우 D : 여러 가지요.
269. 여배우 C : 그래, 여러 가지.
270. 여배우 D : 그리고 전화 끊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서 무대로 돌아가라고. 무대위에 제 모습 보고 싶다구요.
271. 여배우 C : 그래.
272. 여배우 D : 그러니까 내일부터 니나는 제가…….
273. 여배우 C : 그렇게는 안 돼.
274. 여배우 D : 하지만 작가 선생님이…….
275. 여배우 C : 안 돼.
276. 여배우 D : (말없이 베개를 디민다)
277. 여배우 C : 왜 이래?
278. 여배우 D : (말없이 베개를 디민다)
279. 여배우 C : 필요없다고 했잖아.
280. 여배우 D : 이건 제가 애용하고 있던 거예요. 정말 푹 잠이 들어요. 제 대신에……
281. 여배우 C : 대신에. 뭐야?
282. 여배우 D : ……
283. 여배우 C : 키꼬……베개하고 니나를 교환하지고?
284. 여배우 D : ……
285. 여배우 C : 어디서 그런 기기묘묘한 발상이 나와!
286. 여배우 D : 피곤하시죠?
287. 여배우 C : 피곤하지 않아.
288. 여배우 D : 아녜요, 피곤해 보여요. 수면이 부족해서……
289. 여배우 C : 그만해! 이게 뭐야!
베개를 던진다. 베개가 여배우 A,B쪽으로 날아온다.
290. 여배우 C : 내 이십년 너머 배우하고 있지만 처음이야, 역을 물려달라고 베개 갖 고 육박해온 사람은……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나가.
여배우 C, 거울 마주하고 화장을 지우기 시작한다. 여배우 A,B 는 베개에 관심을 갖게 된다.
291. 여배우 B : (냄새를 맡는다) 땀 냄새.
292. 여배우 A : 집념이 잔뜩 배어 있는 것 같애.
여배우 D, 베개 쪽으로 다가온다. 여배우 A, B, 베개를 놔준다. 여배우 D,베개를 들고 사랑스러운 듯 안는다.
293. 여배우 D : (작은 소리로) 모처럼 병실 예약해 놨는데.
294. 여배우 C : 뭐라고?
295. 여배우 D : 병실 예약해 놨다고요.
296. 여배우 C : 병실?
297. 여배우 D : 예.
298. 여배우 C : (생각이 나서) 나 땜에?
299. 여배우 D : (고개를 끄덕인다)
300. 여배우 C : ……. (말도 못한다)
301. 여배우 D : 독방을 준비하고 싶었는데요. 빈 게 없어서…… 하지만 나이든 분들은 합방이 더 좋데요. …… 텔레비도 있고 말상대도 있고. …… 전에 그러 셨잖아요, 집에 돌아가도 말상대가 없어 너무 쓸쓸하다고. …… 나 절실 히 깨달았어요, 사람한텐 고독이 가장 나쁜 것이 아닐까 하고…….
302. 여배우 C : (화장을 반 정도 지운 상태로 유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
303. 여배우 D : 잘 생각해보면 여배우라는 건 보상받지 못하는 직업이죠. 모든 것들을 희생해서……. 하지만 하루하루 윤기를 잃어가는 육체에 채찍을 휘두르 고, 오로지 바라는 건 허황된 사랑 ……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요. 이런 가혹한 일은 오래 하면 안 돼, 이런 잔혹한 일을 견딜 수 있는 건 젊은 시절만이다 허구요 …….
304. 여배우 C : 당신, 그래서 나를 구제해주려고 왔어.
305. 여배우 D : 구제한다.…… 그런 굉장한 게 아니예요 …… 그냥 그런 마음은 나 만 아니라 내 세대 사람들은 다 갖고 있어요. 다만 말을 하지 않는 것 뿐이죠. 어떻게 말씀드리면 될까? 되도록 빨리 그런 잔혹한 일로부터 해 방시켜줘야죠. …… 특히 니나 역은 힘들죠. 나비처럼 부단히 날개 짓을 해야 되니. 그런데 병에 걸렸다고 무리하게 맡겨놓고……정말 미안해서
306. 여배우 C : 키꼬
307. 여배우 D : 예?
308. 여배우 C : (감정을 억누르고)당신을 이해시키려면 어떻게 말해야 될까. 물론 여배 우라는 직업은 잔혹한거야. 여러 가지 희생해야하고 …… 무엇보다 잔혹 한 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거지. 해마다 육체는 빛 바래가 고 …….
309. 여배우 D : 그렇죠.
310. 여배우 C : 잠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고. 즉 ……그래, 결국 육체만 이 모두가 아니다 이거야. 니나 역도 그냥 젊으면 좋다 그게 아니고 ……어떻게 말하면 될까? 축적이 필요한거야. 여러 경험이 쌓이고 …… 어떤 의미로서는 키꼬가 말한 고독도 축적의 하나야.
311. 여배우 D : 어머, 고독이 축적이에요?
312. 여배우 C : 고독을 말하자는 게 아니고, 고독을 …… 아아, 너무 복잡해 혼란스러 워. 어쨌든 나는 잔혹한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 여배우를 하고 있어, 여 배우라는 일을 선택했어. 선택했으니까 여기에 잔혹한 부분이 태산 같 이 있어도 괜찮다. 그래, 이 잔혹함을 끝까지 내 것으로 할거야. 당신 이 어떻게 말해도 니나 역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앞으로도 백회 아니 야 이백회라도 계속 할 거야. 할머니가 돼서도 할꺼야. 나는 잔혹한 일 에 굶주려 있으니까. 아아, 바보 같애. 아까부터 그냥 종잡을 수 없는 말 만하네. 잔혹함에 굶주려 있다니.
313. 여배우 D : 역시 피곤하시군요.
314. 여배우 C : 에?
315. 여배우 D : 예약해놓았어요, 병실.
316. 여배우 C : 나가!
317. 여배우 D : ……(그냥 바라보고 있다)
318. 여배우 D : 더 이상 나 화가나게 만들지 마. 무서워, 당신하고 이러는 거.……이해 해줘요, 큰 소리 질러서. 내 스스로 비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
319. 여배우 D : …….
320. 여배우 C : (애원하는 듯) 부탁해, 나가요……정말 피곤해졌어, 나 혼자 있게 해줘.
321. 여배우 D : …….(베개를 건넨다)
322. 여배우 C : 그만 해!
여배우 C, 몹시 흥분해서 옆에 있던 맥주병을 들어 여배우 D의 머리를 내리친다. 맥주 병이 깨지고 여배우 D는 쓰러진다.
323. 여배우 C : (정신을 차리고) 키꼬……
여배우 C는 여배우 D를 일으켜 세운다. 여배우 A, B는 노골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두 사람을 엿본다. 여배우 D, 여배우 C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난다.
324. 여배우 C :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니야. 괜찮아요?
여배우 D, 다시 쓰러진다. 여배우 C, 여배우 D를 끌어 안는다.
325. 여배우 C : 정신 차려요.
326. 여배우 D : 나 …… 건강해요.
327. 여배우 C : 그건 알아.
328. 여배우 D : 내 베개.
329. 여배우 C : ……(발 밑에 있던 베개를 여배우 D에게 준다)
여배우 D, 비틀거리면서 문 쪽으로 간다.
330. 여배우 C : 어디 가요?
331. 여배우 D : 피로에는 잠이 제일이에요.
332. 여배우 C : 키꼬.
여배우 D, 베개를 안고 나간다. 여배우 C, 의자에 앉는다. 여배우 A, B 심술궂게 관찰 한다. 사이. 갑자기 여배우 C가 화장대 위에 있던 휴지통을 힘껏 바닥에 내팽개친다. 휴 지통이 여배우 A, B 쪽으로 날아온다. 여배우 A, B 가까스로 피한다. 여배우 C, 화장대 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이나 벽에 내던진다. 여배우 A, B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333. 여배우 C : 야, 돼먹지 않은 소리 마! 기껏 프롬프터 주제에 뭐라고 나보고…… 베 개하고 역을 교환하자고, 내 등뼈가 굴착기 모냥 덜컹거리면서 웃잖아! 흥, 뭐라고? 그 런 잔혹한 직업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고……까불지마
다시 물건을 던진다. 여배우 B가 맞는다.
334. 여배우 B : 어머!
335. 여배우 A : 괜찮아?
336. 여배우 B : 왜 내 쪽으로만 날아와?
337. 여배우 A : 당신 겨냥하고 던지는 거 같애.
여배우 C, 브랜디를 컵에 따라서 들이킨다.
338. 여배우 C : 흥, 저 같은 게 니나를 할 수 이어! 어안렌즈 같은 눈을 해가지고……그 저 반짝반짝 거리기만하고. 그게 젊음이야? 열정이야? 개나 물어가라 …… 몸만 뽀예 가지고 그래선 여배우 모해. 게다가 뭐야? 그 느릿느리한 작, 야, 우에 노 동물원 늘보도 그보다 빨랑빨랑 움직일 거다. 그래가지고 니나? 갈매기? 하하 ……. 웃긴다. (술을 들이킨다) 어머, 나 좀 봐. 미쳤어, 미쳤어.
여배우 C, 거울 앞에 앉아서 가벼운 화장을 시작한다. 문득 거울을 바라본다.
339. 여배우 C : 키꼬, 너 오늘 임자 잘 못 만났어. 베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내 심 장에 수염이 자라고 있어. 그래, 여배우 20년, 멋으로 나이 먹은 게 아니 야……너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어. 이 머리카락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서 서히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나 수십 번이나 그런 쓰라림을 맛봤어……알 리가 없지……머리 전부에서 피가 솟구치는 느낌……상 대를 치느냐 자기가 죽느냐……너 인간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큰 소릴 친다거나 욕한다거나 그 정도가 아니야. 으르렁거리는 거 야……화장실에 틀어박혀서……혼자……밤새 5시간 6시간……그건 인간 이 아냐.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야……그러다가 목이 마르면 변기 물 떠먹고, 으르렁거리고 또 으르렁거리고……덕분에 목소리 더 좋아지 고…… 그래 축적……똥 같은 축적…… (긴 침묵)
여배우 C, 담배 피운다. 화장대 위에 있는 카세트에 손을 댄다. 음악이 흐른다. 여배우 C, 일어나서 가운을 벗는다. 속옷만의 모습.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여러 가지 포즈로 바 꾸면서 바라본다.
340. 여배우 C : ……그래 여러 가지로 희생했어, 하지만 나 자신을 납득시키면서 해왔 어……앞으로도 난 그럴 거야.……싸움을 끝없이, 거울 속에 나의 투사 ……(브랜디 컵을 치켜올리고 휫트먼의 <풀의 잎> 중에서 한 구절) ……황혼 속에 혼자……흔들거리는 벽난로 곁에 앉아 아득한 옛날의 여 러 전쟁 장면을 생각한다. 수도 알 수 없고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매장 되는 병사들 ……. 꿈 같이 짧은 휴전의 한 때 …… 그 사 이에 준엄한 얼굴로 활동하는 매장부대 ……. 참호를 가득 채운 죽은 병사들이 창백 한 얼굴들 …… 그 위에 쏟아지는 탐욕스런 햇빛 ……. 그리고 여기 내 골방의 어두움. 소리도 없는 희미한 불꽃 속에 나는 다시 본다. 딱 벌 어진 병사들이 대열을 짜서 나타나는 모습, 군대의 리드미컬한 군화 소 리 ……(웃는다)
다시 여배우 D가 베개 안고 등장한다. 한켠 구석에 선다. 얼굴은 약간 창백하다.
341. 여배우 A : 봐요.
342. 여배우 B : 어머, 다시 왔어, 베개 여자.
여배우 C, 카세트 덱의 음악을 끈다.
343. 여배우 C : 자 ……
여배우 C, 여배우 D 앞을 지나서 옷을 가져온다.
344. 여배우 D : ……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듯)
여배우 C 눈에는 여배우 D가 보이지 않는다. 여배우 D 바로 옆에서 옷을 갈아입으면 서 니나의 대사를 중얼거린다.
345. 여배우 C : ……당신이 나를 미워할까 봐 몹시 두려웠어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 었어요. 당신이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나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 기 분 알아 주실까 몰라! (이 사이, 여배우 D, 계속 말을 걸려고 하지만 주저한다.) 여기 도착한 그 날부터 난 ……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어요. 이 댁 근처에도 몇 번 왔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자, 우리 앉아 요. (거울 앞 의자에 앉아 옷을 여민다) 앉아서 얘길 해요. 여긴 좋아 요, 따스하고 아늑해서……저 소리는……바람이죠? 투르게네프한테 이런 게 있죠. ‘이런 밤에, 지붕 밑에 있는 자는 행복하다, 새 집 만한 방이라도 가진 자는’ 난 갈매기……아냐, 그게 아냐. (이마에 손을 댄다) 뭘 말하려고 했었지? 참, 투르게네프지 ……(핸드백을 들고 입구에서 분 장실을 뒤돌아본다) 주여, 비가 오니 모든 집 없는 방랑자들을 도와주소 서……
여배우 C, 나간다.
346. 여배우 D : ……
따라가려고 하다가 그냥 보낸다. 긴 사이. 여배우 D, 고개를 돌리고 분장실을 바라본 다. 그런 여배우 D 모습을 여배우 A, B 가 보고 있다. 여배우 D의 시선이 여배우 A, B 쪽으로 향한다. 서로 마주보다가 다음 순간, 여배우 A, B 당황하면서 시선을 돌리고 화 장을 다시 시작한다. 여배우 D, 서서히 여배우 A, B 에게 다가간다.
347. 여배우 D : …… 안녕하세요
여배우 A, B 는 놀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다.
348. 여배우 D : 안녕하세요
349. 여배우 B : 보, 보여요, 우리?
350. 여배우 D : 예.
351. 여배우 A : 그러면 당신도…….
352. 여배우 B : (여배우 A에게) 아까 저, 그거, 저 술병으로 …… 그게 좋지 않았던가 봐 요. 저를 어째.
353. 여배우 D : 저.
354. 여배우 A : 예.
355. 여배우 D : 물어봐도 돼요?
356. 여배우 B : 예.
357. 여배우 A : 어서.
358. 여배우 D : ( 두 사람이 화장하는 모양을 흉내내며) 여기서 매일 그렇게?
359. 여배우 B : 에, 그래요 …… 분장실을 써서 어쩌죠, 미안해요.
360. 여배우 D : 아니예요, 그런 건.
사이.
361. 여배우 D : 저요, 전에 … 평시에도 여기 두 분 있는 거 같았어요.
362. 여배우 A : 예?
363. 여배우 D : 분명하진 않았지만 뭔가 있었어요, 두 분이 여기……
364. 여배우 A : 여기서 냄새가 났어?
365. 여배우 B : 새우젓 독 묻은 것 같았어?
366. 여배우 D :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항상 소리 없는 소리 같은게 들렸어요. 매일 밤, 여기 들어오면.
367. 여배우 A : 소리 없는 소리?
368. 여배우 D : 예, 낮에 소곤소곤.
369. 여배우 B : 그것 봐. 개 버릇 남 주나, 프롬프터가 어디가. 쫑알쫑알, 쫑알쫑알.
사이.
370. 여배우 D : 저 ……. 물어봐도 돼요?
371. 여배우 B : 예.
372. 여배우 D : 오래 되셨어요, 이렇게 지내는 거?
373. 여배우 B : 이렇게 지내?
374. 여배우 D : 그러니까 분장실 점령이라고 할까요.
375. 여배우 B : 나는 요즈음 다니고,…이쪽은 아주 오래 됐어요. 봐요, 이 상처, 전쟁 때 이렇게 됐어요.
376. 여배우 D : 어머, 전쟁이믄 태평양전쟁?
377. 여배우 A : (기분이 상해서) 그러구 보지 마. 골동품인 줄 알어.
378. 여배우 D : 그런데 그 때부터 쭉 여길 ……
379. 여배우 A : 달리 다니는 게 아니예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 그냥.
380. 여배우 D : 피곤하시죠?
381. 여배우 A : 예?
382. 여배우 D : 그래요, 이 분보다 피로가 쌓인 것 같아 뵈요.
383. 여배우 B : 역시.
384. 여배우 A : 뭐가 역시야.
385. 여배우 D : 피로에는 아무래도 잠자는 게 제일이죠. ……. 이거 제가 쓰던 거지만 …… ( 베개를 건넨다.)
386. 여배우 A : (당황해서 피한다) 됐어요, 필요 없어요, 이건.
387. 여배우 D : 베개 싫어요?
388. 여배우 A : 예, 그래요, 왠지 …….
사이.
389. 여배우 D : 어머 …… 오 분 전이네.
390. 여배우 B : 오 분 전?
391. 여배우 D : 서둘러요. 막 올라가…….
여배우 A, B 서로 얼굴을 보고 말이 없다.
392. 여배우 D : 작품은 뭐죠?
여배우 A, B 말이 없다.
393. 여배우 D :작품…….
여배우 A, B 말이 없다.
394. 여배우 D : 저…….
395. 여배우 B : 시끄러워!재잘재잘! 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어머, 속눈썹이 날아갔네.
396. 여배우 D : 미안해요.
사이.
397. 여배우 D : …… 역시 체호프죠?
398. 여배우 B : 체호프?
399. 여배우 A : 그래, 당신 엊그제 체호프하고 통화했지.
400. 여배우 D : 어머, 들으셨어요?
401. 여배우 B : 무슨 작품 한다고 했어?
402. 여배우 D : …… 「세 자매」가 아닐까요?
403. 여배우 A : 두 사람이 어떻게 「세 자매」를 해?
404. 여배우 D : 두 분 밖에 안 계세요?
405. 여배우 B : 보다시피……이 분장실에는……없잖아.
긴 사이.
406. 여배우 D : …… 알았어요.
407. 여배우 A : 응?
408. 여배우 D : 없는 거죠, 작품 같은 건.
여배우 A, B 말이 없다.
409. 여배우 D : 그냥 이러구 매일 밤, 자기 마음대로 배역을 정하고 화장을 하고 등장 을 기다리고. ……. 영원히 오지 않을 등장을 기다리고. ……그랬죠?
여배우 A, B 말이 없다.
410. 여배우 D : 바보 같은 짓 아니에요? 나 못해요, 차라리 병원 침대에 누워있겠어요.
411. 여배우 A : 그러면 병원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 사랑하고 사랑하는 베개 안고 ……. 하지만 이제 병원에도 당신 침대는 없어. ……잠 못 자.
412. 여배우 D : ……(충격을 받고) 정말요?
413. 여배우 A : 가서 확인해 봐
사이.
414. 여배우 B : …… 곧 익숙해질 거예요. 이러구 기다리는 일.
415. 여배우 A : 그래, 우리처럼 될거야.
416. 여배우 B : 우리도 그냥 바보 같이 기다리는 게 아니야. 그런대로 애 쓰고 있 어……. 이것저것 과거에 했던 작품들 들춰보면서.
417. 여배우 A : 아까는 너무 지껄여서 목이 말랐어.
418. 여배우 D : 어떤 작품인데요?
419. 여배우 B : 어떤거냐고? 이것저것…….
사이.
420. 여배우 D : …… 이제 내게도 …… 긴 밤이 오는 거죠.
여배우 A, B 서로 마주본다.
421. 여배우 B : 제 삼자가 보면 빈둥빈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이것대로 일단 순서가 있어. …… 그죠?
여배우 D, 갑자기 일어선다.
422. 여배우 D : 나는 뭔가 해야겠어요.
423. 여배우 B : 우리가 하고 있다니까!
424. 여배우 D :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뭔가 정해서…… 뭐랄까, 앞으로 올 날을 대비해 서 준비한다고 할까.
425. 여배우 B : 올 날?
426. 여배우 D : 예, 갑자기 운이 닿아서 저기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427. 여배우 A : 이 사람(여배우 B)도 예전엔 그런 소리했지. 헌데 ……
428. 여배우 D : …… 당신, 역시 피곤하시군요.
429. 여배우 A : 그만 해!
430. 여배우 D : 아니에요. 아주 피곤하신 거예요. (베개를 가지고 다가간다)
431. 여배우 A : 미쳤어! 이러구 내 역을 뺏으려구. 어림없다, 너. 그 베개 가지고 나가! 나가!
432. 여배우 B : 잠깐.
433. 여배우 A : 왜.
434. 여배우 B : 내 역이라고? 당신 역이 뭐야?
435. 여배우 A : ……(입을 다문다)
긴 사이.
436. 여배우 D : 나는 항상 남의 오해를 받아왔어요. 오해받기 쉬운 점이 도리어 여배 우한테는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어요.……하지만 그 사람이 틀렸어.……천성이 나는 남하고 협조를 못해요. 오해를 받기 쉽 다는 건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하고 같애요.…… 그래요, 난 언제나 혼 자 ……. 여태 그랬고 앞으로도……
437. 여배우 B : 당신, 갑자기 왜 그래? 이봐, 오해받는 것도 힘들지만 그 반대도 힘들 다고. …… 나 말이야, ‘사람이 착하다, 사람이 착하다’ 그런 말 자주 들 었어. 그래, 엉 나는 착한 가보다 그랬지.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났어. 나보고 사람들이 왜 사랑스럽다든지 재능을 높게 인정한다든지 그 런 소리 해주지 않지. 착하다,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 야……그러니까.
438. 여배우 D : (고집스럽게) 이제 됐어요. 마음 정했어요.
439. 여배우 B : 엉?
440. 여배우 D : 앞으로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혼자 해갑니다. 저기 등장할 때를 기다 리면서.…… 제 운명이었어요. 긴 밤을 혼자 지내는 거……(「세 자 매」에서 일리나의 대 사) …… 아아, 불행해.……난 이제 더 못해. 지긋 지긋해. 정말! 전엔 전신국에 다녔고 지금은 시청에 다니고 있지만, 전부 싫어. 일 더 못해.
441. 여배우 B : 전신국……시청……그게 뭐지?
442. 여배우 A : 「세 자매」.……일리나 대사
443. 여배우 B : 아, 벌써 시작했어.
444. 여배우 D : ……난 벌써 스물네 살이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지도 상당히 오래 됐 어. 덕분에 머릿속이 바싹 마르고, 몸은 여위고, 얼굴은 미워지고, 늙어 가고,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만족스런 건 없고. ……시간은 거침없이 흘 러가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기분이야. 점점 깊은 못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듯한 기분……
445. 여배우 A : 잠깐.
446. 여배우 D : 에?
447. 여배우 A : 좀 가만히 있으면 안돼? 자기 맘대로 일리나 역을 빼어가고 말야
448. 여배우 D : 뺏었다구요?!
사이.
449. 여배우 B : …… 앞으로도 밤은 길어.
450. 여배우 A : 그래.……햇빛 쏟아져 내리는 한낮 같은건 없어, 여긴.
451. 여배우 B : 우리 생활을 좀 바꿀까.
452. 여배우 A : 우리 셋이……
여배우 A, B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453. 여배우 A : 당신, 마샤를 해볼래요?
454. 여배우 B : 당신은 올리가?
455. 여배우 A : 내가 여자 역을 한다.
456. 여배우 D : 저……
457. 여배우 B : 그 베개 버리고 당신은 일리나 하구…… 좋죠.
458. 여배우 A : 잠깐, 서둘지 말아요. 시간 충분해요.
여배우 A, 일어나서 여배우 C의 브랜디를 가져온다. 서로 컵을 들고 술 따른다. 건배 를 하려다가 여배우 B가 카세트 덱 쪽으로 간다. 레코드를 골라서 튼다. 음악.
459. 여배우 A : 자 건배! 우리의 긴 긴 밤을 위해서.
460. 여배우 B : 우리의 끝없는 연습을 위해.
461. 여배우 D : 그리고 우리의 잘 수 없는 잠을 위해서.
음악이 바뀐다. 세 사람 서로 다가선다.
462. 여배우 B : (마샤의 대사)……오오, 악대가 연줄하네.……저 사람들 떠나가. 우리만 여기 남아서 다시 우리의 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살아가야 해……. 살아 가야 해……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세 사람의 모습은 죽은 자들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463. 여배우 D : (일리나의 대사) 이제 때가 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있었는지 모두 알게 될 거야. 하지만 그 동안 이렇게 살아가야지.……일을 해야지.……그저 일만 해야지……이제 곧 겨울이 와서 눈이 쌓이더라 도 난 일하겠어, 일하겠어…….
여배우 A, 여배우 B와 D를 끌어안고.
464. 여배우 A : (올리가의 대사) 저 소리를 들으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 세월 이 흐르면 우리도 영원히 이 세상 작별하고 잊혀지겠지. 우리의 얼굴도 목소리도 세 자매였다는 것도. (세 사람의 모습은 어두움 속에 사라진 다) 이봐들, 우리 아직 끝나지 않았어. 굳세게 살아가자. 저 즐겁고 기쁜 악대의 연주 소리, 저 소리를 들으니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무엇 때 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아.……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것만 알 수 있다면 ……
제 4 장
분장실은 어두움 속에 잠긴다. 희미한 달 빛 속에 초원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초원 속 에 묘비처럼 일어서는 수많은 거울들. 그 거울들이 소곤거린다.
<화려한 거리 …… 가난한 도시 …… 얽매인 마음 …… 우아한 모습 …… 우아한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