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으로 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왔습니다. 친구들을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 했고, 정이 많았고 생각이 많았던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항상 웃고 즐거워 보였던 친구지만, 혼자 괴로워하고 돌아서서 고통을 인내하면서 지낸 시간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더 친구들을 그리워했고 술을 좋아했고,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고민하고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대용이는 1월 7일(일요일) 밤 11시 넘어서 병원(아산 한국병원)에 도착했고 담당의사는 11시 40분경에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으로 진단했다고 합니다. 연로하신 어머님과 병중에 있는 동생을 뒷바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겠으나, 최근에는 좋아하던 술도 끊고 등산도 하면서 매우 적극적이고 의욕적으로 생활했던 것 같았습니다.
1월 8일 친구들(남대희, 문석호, 박정규, 정민영)과 함께 문상을 했습니다. 흐느끼며 비통해 하시는 누님들과 몇몇 고향 친구들, 모두들 멍하니 고인이 된 친구 사진만을 뚤어 보았습니다. 동기회에서 보낸 하나뿐인 조화가 더욱 쓸쓸하게 했습니다. 다음 날 박재하, 박정규, 문석호 학형들이 조화를 보냈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두 딸을 기다리기 위해 5일장을 치루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1월 11일)은 발인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집을 나서는 데 박정규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다. 대용이 잘 보내고 오라고.‘
캐나다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란 두 딸을 앞세우고, 시신은 병원에서 홍성 화장장으로 옮겨졌습니다. 두 딸은 장례행사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담담하게 고모들의 지시에 따라 행사를 잘 진행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항공 동기 친구 둘, 그리고 칠팔 명의 고향 친구들이 동행 했습니다.
13시 30분에 예약이 되어 있었으나 국적이 한국이 아니므로 캐나다 대사관의 동의가 없이는 화장을 할 수 없다고 해서 2시간 쯤 지체 되었습니다. 시신이 화로에 투입되어 한 시간쯤 뒤에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나왔습니다. 20여 년 전에 다른 친구(백남기)의 시신이 화로에 던져지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납골단지는 예산 추모공원 납골당 1-3897호에 안치 되었습니다. 혹시 지나칠 기회가 있으면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나하고는 지난 1월 1일 통화를 했습니다. 목소리가 밝고 좋았습니다. 서로 덕담도 나누고 새해인사를 즐겁게 했습니다. 말미에 '야,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 20일(고병천 큰아들 결혼식 날)에 보자'고 답했습니다. 전화를 하면서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묘한 여훈이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