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의 유래
한국의 정씨(나라鄭)는 서산(瑞山) 낭야 정씨를 제외 하고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의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新羅 육촌중 취산진지촌의 촌장 지백호가 서기32년(신라 유리왕9년)에 본피부로 개칭 되면서 정씨의 성을 하사받아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정씨의 본관은 조선씨족 통보에는 247본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35본 등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존하는 본관은 30본미만이다.
참고로
서산 (瑞山)정씨는 중국 절강(浙江)성 출신의 정신보 (鄭臣保)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송(宋)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으로 있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망명하여 서산에 정착 세거함으로 서산을 본관으로 하였고 그의 아들 인경(仁卿)이 고려 충렬왕때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定策安社功臣)에 올라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있다.
낭야 정씨는 시조가 정선갑(鄭先甲)이고 자는 시인(始仁)으로 명나라의 진사를 지냈으며 중국 낭야에서 출생했다.
정선갑은 명나라 세종 때 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를 지낸 정문겸(鄭文謙)의 증손자로 1617년 산동성(山東省) 낭야에서 출생하여 진사(進士)로 있다가 1644년 명(明)나라가 청(淸)에 멸망되자 나라를 구하려 의거(義擧)를 하려다가 청군(淸軍)에게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끌려갔다.
수용중인 그 심양에서 풍삼사(馮三仕), 황 공(黃功), 왕이문(王以文) 등 9의사(九義士)와 함께 동지(同志)로 결합(結合)하였는데, 이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의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 일행을 만나 함께 힘을 합칠것을 약속하였다.
이듬해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조양루(朝陽樓) 남쪽 황조인촌(皇朝人村 :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 1번지 부근)에 살면서 효종(孝宗 : 봉림대군)과 비밀리에 북벌할 계획을 추진중 1659년(효종 10년) 왕(王)의 급서(急逝)로 북벌 계획이 좌절되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조선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은 150여 년간 황조인촌에 집단거주하면서 조정에서 베푸는 특별 후대(厚待)를 받아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준 명(明)나라 신종(신宗)의 은의(恩義)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肅宗)이 비원(秘苑)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배향할 때
시조 정선갑을 포함한 9의사(九義士)를 함께 배향하는 은전(恩典)이 내렸고, 그후 후손들은 선갑의 출생지 낭야를 본관으로 하고 세거하고 있다.
정씨의 본관 가계도
컴퓨터상으로 없는글자가 있어 아래 글자는 옥편기준으로 설명을 부연합니다.
18세군공 공의 공字(마음급할 공)
23세보 공의 보字(임금 왕변의 넓을 보)
28세즙 공의 즙字(모을 즙)
글쓴이 금파 정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