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사극에 엑스트라로 등장하던 내시가 드디어 주인공이 되어 월·화요일 저녁 안방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 SBS 사극 ‘왕과 나’ 때문이다. ‘나’는 바로 내시 김처선이라고 한다. 극 중에서는 아직 내시로 입궐하기 전이지만 역사 속의 김처선은 이미 세조 때부터 내시로 입사해 있던 인물이다.
내시 김처선을 감히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의 정인(情人)으로 내세운 것은 대단한 상상력으로 보인다. 김처선에 관한 대목이 조선왕조실록에는 50번이나 나온다. 김처선은 이미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인 편에 속한 인물로 옥에 갇혔다가 석방된다.
그런데 조치겸은 기록상 등장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조치겸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수양대군의 집권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내시 전균(田畇)과 흡사하다. 전균은 판내시부사에 올라 하음군(河陰君)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치겸이 측근무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통해 한명회(韓明澮)와 대립하고 있는 구성군 일파의 계획을 번번이 무산시키는 날렵한 무술 솜씨를 보이는 장면도 문치주의로 일관했던 조선시대의 현실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 왕에 대한 정보 독점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시대 내시는 최고직인 종2품 상선(尙膳: 2명)부터 종9품(尙苑: 5명)까지 총 140명이 ‘내시부(內侍府)’에 속하여 일반 관료들과는 별도로 임명, 관리됐다.
내시들의 교육 역시 내시부에서 맡았으며, 궁궐 내 ‘내반원’ 건물이 교육장이었다. 주교재는 ‘대학연의’로, 중국 왕들을 보필했던 충신들 사례를 소개했다. 드라마와는 달리, 내시들의 교육에 무술 과목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주된 임무는 국왕의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尙膳), 주방을 관리하는 상온(尙?), 기호품인 차를 관리하는 상다(尙茶), 약을 관리하는 상약(尙藥) 등 국왕의 건강과 직결되는 왕실의 음식 총 관리가 주된 임무였으며, 두 번째가 왕명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 있다. 그밖에 궁궐 열쇠 관리, 청소관리, 등불 관리, 궁녀관리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왕실 소유의 전답 관리도 있으나 중국의 환관들처럼 조선시대 내시에게는 인사권과 군사권, 재정권이 없었다.
# 세살이전 고자아이 양자 삼아
내시가 권력을 갖게 되는 배경은 바로 왕명출납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법제상 국왕의 명령을 각 부처에게 전하는 권한은 비서실인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승지에게 전해진 국정현안은 환관내시를 통해 국왕에게 전달되니 이로써 내시는 마음만 먹으면 왕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거나 정보를 와전시킬 수 있는 위치를 점한 셈이다. 이로 인해 국왕의 두 측근 승지와 내시 간의 업무분장은 늘 국왕의 골칫거리의 하나였다.
하지만 국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존재인 만큼 그들이 왕명을 받들어 휴가를 얻거나 지방순찰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이 지나가는 지방의 수령들은 대부분 내시를 위해 연회를 베풀고 각종 뇌물을 주곤 했다.
내시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그들의 거처는 궁궐 밖에 있었다. 단, 국왕이 부르면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주로 창덕궁 앞 봉익동부터 종묘 가는 길에 거주했다. 내시 청사인 내시부는 북부 준수방(北部 俊秀坊)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효자동 부근이라고 보면 된다. 구한말 내시가 살던 집터가 최근까지도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다. 지금은 모 빌딩이 세워져 없어졌지만 한때 내시의 집은 운당여관이라 하여 바둑대회가 열리는 명소였다.
내시들도 엄연히 한 가족의 가장이었으며 부인과 자녀가 있었다. 때로 첩을 두기도 하였다. 내시들의 부인은 일반 사대부 부인들처럼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1품), 정부인(2품) 등 높은 봉작을 받았으며,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자녀는 낳을 수 없었던 까닭에 당연히 양자를 들였다. ‘경국대전’에는 내시의 경우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대개는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내시 훈련을 받고 있던 어린 내시들 가운데 눈여겨 두었다가 양자로 삼는 경우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선발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곧 추석이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선산 벌초와 제사 준비에 바쁠 것이다. 그 옛날 내시들 역시 비록 피를 나눈 부모 사이는 아니지만 조상묘를 돌보며 제사를 모셨다. 내시가 죽으면 내시가 되기 위해 잘라낸 뒤 말려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 두었던 ‘남성’을 함께 묻었다.
# 죽으면 ‘남성’ 함께 묻어줘
내시들에게도 양반(?)으로서 엄연한 족보가 있었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의주까지 피난했다고 하여 호종공신이 된 김계한 집안의 ‘가승(家乘)’과, 고려말 조선초 내시였던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양세계보(養世系譜) 등이 전해지고있다. 1805년 이윤묵이 편찬한 이 양세계보에는 777명의 내시의 자호, 본관, 생몰년, 묘소위치, 배우자의 본관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가문의 내시들이 어떻게 혼맥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시대 정치변동에 따라 이들의 가세가 어떻게 번성하고 몰락했는지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족보의 서문이다. 양자들로 구성된 내시가문의 세계를 적어두는 이유로 “낳은 정 못지않게 길러준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함” (21쪽)이라고 밝히고 있어 가족 사랑에 대해 새롭게 생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