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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속의 혼잣말 / 이순훈
분명히 핸들을 잡고 있었어. 한 순간 휘황한 불꽃이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충격의 폭발음이 들렸던 것도 기억나.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망각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갔던 걸 거야. 그럼 지금 나라는 존재는 생명일까 아니면 영혼일까. 어느 세계, 어디만큼 들어와 한 줄기 의식의 끈에 매달려있는 거지? 만일 여기가 저승이라면 지금 내가 칠흑 같은 암흑의 세계 속에 갇혀있다는 걸까.
아, 아니지. 언젠가 동화처럼 들려주던 엄마의 저승 체험기에 의하면 이승을 떠난 영혼은 누구든지 저승검문소의 대기소를 거쳐야만 한다고 했어. 관목과 교목이 어우러지고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 있는 정원 한가운데 자리잡은 그 영혼대기소에서는 각지에서 모여든 영혼을 심사하는 일을 맡고 있더라고 했지. 또 엄마가 거기서 만난 심사관은 영혼을 압송해오는 무서운 저승사자와는 달리 아주 자비로운 신선의 모습 같더라고 그랬어. 보여지는 외모와 나이·성별을 확인한 다음, 미리 입수한 사주팔자 원본과 정밀하게 대조하여 입소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주도면밀하기도 했겠지. 다행히 그 과정에서 엄마의 저승행이 저승사자의 사무착오임이 판명되었고, 그것을 밝혀낸 자비로운 심사관이 그 즉시 엄마를 귀환조치 시켜준 거라고 설명했었어.
그런데 나는 이게 뭐지? 영혼대기소의 자비로운 심사관은커녕 무시무시하게 생겼다는 저승사자도 만나보지 못했잖아. 한 줄기 별빛도 비치지 않는 적막한 암흑 속에서 이렇게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박혀 있으니, 엄마가 말해주던 그 세상보다 더 형편없는 나락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승으로부터 아주 질 나쁜 중범으로 잡혀와 영혼대기소의 심사절차도 생략하고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못된 내 죄명은 무어지? 스물 일곱 살의 처녀 교사로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고자 노력하며 살아온 나날이었어. 다른 동료들보다 빼어나게 모범적·합리적인 인간이었다고 내세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나만의 순수의지에 의한 덕 쌓는 일에 게으름 피우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근하며 살아온 거야.
따라서 나태한 학습지도를 했다 하여 교사로서의 자질에 관한 어떤 지탄을 받은 적도 없고, 갈수록 무성해져만 가던 동료 교사나 학부모들과의 관계도 슬기롭게 잘 헤쳐 나오고 있었어. 더구나 얼마 살아내지 않은 이 젊은 나이에 무슨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질 여유가 있었겠냐 말이야. 그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주어진 권리와 책임의 균형을 조심스레 살펴가면서, 내 꿈 또한 소홀함 없이 가꾸고 살아보려던 최소한의 자기방어의지가 그렇게 큰 죄라는 거야?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니 내게 문제가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는 개념을 포괄하고, 그 과정에 대한 평가는 억울하게도 타자의 눈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잖아. 비록 내가 의도했던 바는 그렇지 않다 해도 어쩌다보니 나에겐 새침떼기라는 별명이 따라붙어 있었어. 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서면서 더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벽을 느끼게 된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 둘 모아져 만들어진 걸 거야. 알게된 지 오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그 이야길 처음 듣게 되었을 때, 난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었지. "벽"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간상의 괴리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 거야. 나조차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오던 그것을 다른 사람이 그렇게 쉽게 찾아내었다는 사실이 잠깐 동안 내 생각의 시간을 멈추게 만들었던 거지. 그러나 서글프게도 그 생각의 끝에서 내가 도출해 낸 결론은 스스로 새침떼기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였어. 그 벽이 언제부터 내 안에 들어섰는지 모르지만, 다양한 사람들 사이로 휘돌다 지치게되면 으레 그 속으로 숨어들어 다! 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비축하곤 해왔던 것 같았으니까.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미성숙한 내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오래 반복되어온 습성으로 인해 그곳에 쉽게 안주해 버리려는 나의 무의식 때문인지, 그 후로도 나는 얇긴 하지만 제법 단단한 알껍데기 같은 그 벽을 허물지 못하고 살아왔어. 그러다 보니 외모에서 느껴지는 비교적 편안해 보임에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다가,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가시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며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모르긴 해도 그 중에는 나와 마음의 키를 맞추며 달콤한 미래를 꿈꾸었음직한 청년들도 있었을 테고, 이윽고 그 호감은 애증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상처로 변해 고통으로 남겨져있다면, 또 그 감정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청년들의 묵시적 합의에 근거한 소송 후의 단죄라면,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 내게는 없어. 그 벽은 너무나 얇아서 마음먹기 따라서는 언제라도 쉽게 허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행동도 보여주지 않은 나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걸까?
"위이- 쿵, 쿵, 쿵, 위- 쿵……."
저게 무슨 소리지? 빛도 소리도 깜깜하던 적막한 이 곳에 들려오는 저 음향은 무얼까? 그러고 보니 내 영혼이 실려있는 몸이 어느 곳으론가 운반되어 가는 야릇한 느낌도 드네.
"…… 쿵, 쿵, 쿵 …… 위- 위- 쿵, 쿵, 쿵 ……."
아, 저 소리는 틀림없이 희망의 소리일 거야. 결코 유쾌한 음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닫혔던 내 영혼의 귀가 뚫리고 있다는 이야기니 희망인 걸 거야. 비록 아직은 어둠의 세상이지만, 저 소리를 인식할 만큼 내 청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것은 머지않아 현란한 빛도 느낄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다시 또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막막한 어둠 속이지만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위-쿵,쿵,쿵……" 하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이제는 긴 터널 같은 데를 빠져 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이런 상태로 그 터널을 통과하며 자비스런 얼굴을 한 심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있는 걸까. 내 몸에서 무언가 싸악 빠져나가는 공허감이 느껴지면서 갑자기 무중력 상태의 허공으로 들어올려지는 것 같기도 해.
"오늘밤이 고비야. 자주자주 심전도 체크하고, 산소마스크 확인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간병은 보호자에게……."
"무슨 소리. 중환자실로 옮겨가는 중인데."
무슨 소리지? 중환자실로 옮기는 중이라면 내가 영혼검사소의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잖아. 그리고 심사관의 말처럼 오늘밤이 고비라면 지금 내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는 중이란 말이지. 그런데 왜 자꾸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지 모르겠네. 그리고 빠진 그 만큼 허공에 떠있는 내 몸의 크기도 줄어들고 있어. 안 되는데, 더 작아지면 안 되는데…….
여긴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의 세상인데 이제 내 몸은 겨우 영혼만을 지탱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씨앗으로 남고 말았어. 그 만큼 작게 느껴져. 하지만 절망하여 포기하고 앉았을 수만은 없어. 오늘밤이 고비라고 하잖아. 이 고비를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해. 지금 내 모습이 영혼만을 가진 한 톨의 씨앗이라면 어떻게든 싹을 틔워 씩씩한 나무로라도 우뚝 서고 말 거야. 이럴 때 엄마는 기도했다고 했어. 갑자기 떠나온 자신으로 하여 슬픔에 젖어있는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지. 나도 그럴 거야.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지.
"하나님, 당신은 제가 누군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까지 다 알고 계시죠? 제 앞에 놓여 있는 이 상황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어온 죄의 값으로 받아들이고 아무 불평 안 해요. 하지만, 여기가 고비라면, 마음먹기 따라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위치라면 희망을 버리지 않게 도와주세요. 이대로 그냥 사라지게 된다면 제 나이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부모님의 오직 한 가지 소원인 믿음직한 사위보기, 아직 제대로 정리해두지 못한 제자들의 성적처리, 그거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아, 지금 제 몸은 그저 작은 한 톨의 씨앗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있는 영혼의 힘을 옹글게 끌어올려 튼튼한 나무로라도 자라고 싶어요. 묵묵히 한 자리에 서있는 나무로라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요.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게요. 도와주세요."
내 간절한 기도가 전해졌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몸이 점점 뚱뚱해져 간다는 것이 느껴져. 꼼짝하지 못하게 나를 끼고 있던 흙들도 조금씩 헐렁하게 나를 풀어놓았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맞는 거였어.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하고 있던 흙이 이렇게 나를 풀어주게 된 건 정성을 다해 올린 내 기도 때문이었을 거니까.
그런데 배꼽 근처가 왜 이렇게 가렵지? 아, 꼼지락 꼼지락 동생이 나오느라고 그랬구나. 나를 위로 밀어주는 동생 때문에 이제 내 몸이 훨씬 가벼워졌어.
"동생아, 만나서 반가워. 그리고 도와줘서 고맙기도 하고."
"우린 형제가 아니라 한 몸이야."
"한 몸이라고? 나는 오래 전부터 이 곳에 있었고, 너는 이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한 몸일 수 있니?"
"잘 봐. 우린 서로 떨어질 수 없어. 그러니 한 몸인 거야."
정말 형제가 아니라 한 몸일까? 하지만 조그만 내 몸 속에 어떻게 이렇게 긴 또 하나의 내가 들어있을 수가 있는 거지? 나와 분리되도록 한번 밀쳐내 보자.
"하하…… 아무리 힘을 써서 나를 떼어내려고 해도 소용없어. 넌 몸이고, 난 뿌리야. 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튼튼한 뿌리가 필요하거든. 난 네 몸 속에 숨어 있다가 몸이 커지는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온 거야. 그러니까 내가 더 고마운 거지. 네가 만약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여 주저앉아만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없었을 거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는 기도가 마구 쏟아져 나와. 이제 정말 나무로 자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걸.
그런데 그 기도 소리도 하늘에 닿았나봐. 기도를 막 끝내고 기지개를 펴려는데 갑자기 환한 눈부심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잖아. 어,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 동안 입고 있던 옷이 머리 위에 붙어 있어. 그리고 여기저기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들과 파란 하늘, 밝은 햇살, 시원한 바람…… 소원처럼 이제 내가 나무로 자라난 걸까?
"하나님, 나무 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
"허 참, 야 임마! 까불지 마. 넌 아직 나무가 아니야. 우리의 바람막이로 더 커야하는 새싹일 뿐인 게 건방지게……"
"아, 몰랐어요. 건방떨어서 죄송해요. 오빠들, 아저씨들, 할아버지들."
"그럼 그렇게 인사부터 해야지. 그리고 내가 미리 말해두는데, 앞으로 우리들 때문에 하늘이 잘 안 보인다고 불평하면 혼날 줄 알어. 우리가 너보다 하늘이랑 더 가깝다는 걸 인정하라구"
캄캄한 땅 속에서도 견뎌왔는데, 이런 것쯤 문제 될 거 없지. 더구나 저 나무들은 나보다 훨씬 키가 크고, 이미 팔랑거리는 초록 날개들도 많이 달고 있는 걸.
그런데 하늘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 아, 비가 오는구나. 바람도 부네. 춥고, 떨리고, 이러다가 어디론가 떠내려가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도 참아야지. 옆에 있는 오빠들이나, 아저씨,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 보이잖아.
"왜 그렇게 힘들게 물길을 막고 있어요? 그냥 가고 싶은 데로 흘러가게 보내주세요."
"이 바보야. 네가 떠내려가게 될까봐 이렇게 물을 막고있는 거야. 너 없는 쪽으로 흘러가도록 방향을 바꿔주는 건데 눈으로 보고도 그걸 못 느낀단 말이니?"
키만 크다고 오빠들인 게 아니었어. 심술궂은 거 같지만 저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 하늘에서는 지금 이 상황도 다 보고 있겠지? 틀림없이 저 오빠들, 아저씨들, 할아버지들에게 그 이상의 보상을 해줄 거야.
그 마음들을 본받아서 나도 더 배려하며 살아야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동안 난 그렇게 착하게 살아오지 못했던 거 같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라며 아무도 모르는 벽을 내 안에 세워 놓고, 진짜 속마음의 문을 닫아 오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 가슴이 너무 아파질까 저어하여 내 이웃의 굶주림과 폭력들과 그로 하여 소외된 아이들에게 너무 서둘러 외면해왔던 것은 아닌지…….
"손가락을 움직이는군. 깨어나고 있어. 심전도 확인 해."
"영주야, 영주야. 눈 떠, 눈을 떠보라고. 나 보이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살았어. 살아났어. 이 나쁜 기집애. 이렇게 살아날 거면서…… 이렇게 다시 살아나 줄 거면서……"
엄마다! 틀림없이 엄마 목소리야. 그럼 내가 다시 사람이 된 건가? 나무새싹이 아니라 원래의 나? 그럼 그 동안 난 심장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다는 말이지? 내가 머물고 있던 그 캄캄한 영혼의 끝자리는 꿈도, 저승도 아니었단 말이지? 이제 눈을 뜨기만 하면 정말 엄마를 볼 수 있단 말이지........?
이순훈 소설가
현역약사로 활동하면서 단편소설 <아킬레스건>이 「포스트모던」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이후 단편소설<아름다운 사람들> <주말여행> <배양(培養)> <영혼의 끝자리>, 동화<새해 새 약속><차력사 준영이>, 꽁트<내 탓이 아니라오> 등을 발표하였으며, 장편소설 <길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로 제10회 한국문학예술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