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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강 - 行由品- 3
祖- 一日은 喚諸門人하사 總來하라 吾向汝說하리라 世人이 生死事大어늘 汝等은 終日只求福田하고 不求出離 生死苦海로다 自性을 若迷하면 福何可求리요 汝等은 各去하야 自看智慧하고 取自本心般若之性하야 各作一偈하야 來呈吾看하라 若悟大意면 付汝衣法하야 爲第六代祖하리니 火急速去하야 不得遲滯라 思量하면 卽不中用하리라 見性之人은 言下에 須見이니 若如此者는 輪刀上陣도 亦得見之니라
衆得處分하고 退而遞相謂曰, 我等衆人은 不須澄心하야 用意作偈하니 將呈和尙인들 有何利益이리오 神秀上座가 現爲敎授師하니 必是他得이라 我輩는 謾作偈頌하야도 枉用心力이라하거늘 諸人이 聞語하고 總皆息心하야 咸言, 我等은 已後에 依止神秀리니 何煩作偈리요하더라
神秀- 思惟호되 諸人이 不呈偈者는 爲我與他로 爲敎授師니 我須作偈하야 將呈和尙하리라 若不呈偈면 和尙이 如何知我心中見解深淺이리요 我呈偈意는 求法卽善이오 覓祖卽惡이니 却同凡心이라 奪其聖位로 奚別이리요 若不呈偈하면 終不得法하리니 大難大難이로다
五祖堂前에 有步廊三間하야 擬請供奉盧珍하야 畵楞加變相과 及五祖血脈圖하야 流轉供養케하려하시더니 神秀- 作偈成己에 數度欲呈하야 行至堂前이나 心中恍惚하야 徧身汗流라 擬呈不得하야 前後經四日에 一十三度를 呈偈不得하고 秀乃思惟호되 不如向廊下書著하야 從他和尙의 看見이니 忽若道好시면 卽出禮拜云, 是秀作이라하고 若道不堪이시면 枉向山中하야 數年을 受人禮拜라 更修何道리요하고
是夜三更에 不使人知하야 自執燈하고 書偈於南廊壁間하야 呈心所見하니 偈曰
身是菩提樹요 心如明鏡臺라 時時勤拂拭하야 勿使惹塵埃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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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조) 一日(일일)은 喚諸門人(환제문인)하야→ 5조스님이 하루는 여러 문인들을 불러 가지고서,
總來(총래)하라→ 모두 오너라.
吾向汝說(오향여설)하리라→ 내가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다.
世人(세인)이→ 세상 사람들이
生死事大(생사사대)라→ 태어나고 죽고 하는 이 일이 참 크다.
생사사가 크거늘,
汝等(여등)은 終日只求福田(종일지구복전)하고→종일토록 다만 복전만 구하고. 복 닦을 것만 구하고.
不求出離(불구출이) 生死苦海(생사고해)로다→ 생사의 고해를. 죽음의 고해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겁니다.
복 닦는 것 좋지요. 그렇지만 어디 불법이란 것이 복 닦는데 거기에 그치느냐? 이겁니다. 정말 생사해탈 하는데 목표를 두고 살아야 된다.
自性(자성)을 若迷(약미)하면→ 자기 자성을 만약에 미혹할 것 같으면
福何可求(복하가구)리요→ 복을 어찌 구할 수 있느냐? 너 자신을 모르고 복을 아무리 쌓아 봐야 그것이 뭐 복이 어디에 쌓이는지, 제대로 복이 되는지 그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복이 되는지, 무슨 죄를 짓는지 알 수도 없고요. 자성을 모르면, 자기의 본래모습. 마음자리 모르면, 복 닦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이 말이지요. 福何可求(복하가구)리요. 복을 어찌 가히 구 하리요.
汝等(여등)은 各去(각거)하야→ 그러니 그대들은 각각 돌아가서
自看智慧(자간지혜)하고→ 스스로 자기 지혜를 잘 살피고,
取自本心般若之性(취자본심반야지성)하야→ 자기의 본심인 반야의 성품을 취해 가지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各作一偈(각작일게)하야→ 각각 한 게송을, 글 한편씩 지어 오너라 이겁니다.
來呈吾看(내정오간)하라→ 가져와서 나에게 바쳐서 내가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
이것이 傳統(전통) 禪家(선가)의 관심사지요. 복 닦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생사해탈의 문제.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자신. 자기의 본래의 마음. 그것은 곧 지혜의 성품이고 반야의 성품이다. 그것을 확연히 사물을 보듯이 보는 일. 그러므로 해서 생사해탈이 그 가운데 있게 된다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 깨달음에 대한 자기의 소견을 하나씩 글로 적어 오너라. “悟道頌(오도송)을 하나씩 적어 오너라.” 이렇게 분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若悟大意(약오대의)면→ 만약에 대의를 깨달았을 것 같으면
付汝衣法(부여의법)하고→ 의법해서
爲第六代祖(위제육대조)하리라→ 만약에 제대로 대의를 깨달았으면 그대들에게 衣法. 옷과 법을 주어서 제 6대 조를 삼으리라.
그러니까 衣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은 그 사람의 어떤 소견을 말이나 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사실 “전한다.”“전한다.”하지만, 전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깨달았으면 그것을 감정해봐서, ‘아 이만하면 소견이 됐다.’ 싶으면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그저.
전해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전한다.”“전한다.”하는 말을 잘 쓰기는 합니다. 그 信標(신표)로써 袈裟(가사)를 같이 전해요. 그리고 또 발우떼 하고. 가사하고 발우떼를 부처님 당시 때부터 전했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도를 깨달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신표가 된다.”해서 “신표”이래요. 가사하고 발우떼 하고요.
付汝衣法(부여의법)하야→ 옷과 법을 그대에게 주어서, 6대의 조사를 삼겠노라.
火急速去(화급속거)하라.→ 화급히 빨리 가거라 이 말입니다.
모두 돌아가서 그렇게 하고,
不得遲滯(부득지체)하라→ 지체하지 말라.
思量(사량)하면 卽不中用(즉불중용)하리라→ 이거는 생각을 짜내 가지고 할 것 같으면, 맞지가 않다 이 말입니다.
즉불중용. 맞게 쓰지 못한다.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사량하면 즉불중용이라. 절대 안 맞지요. 생각으로 짜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직관에 의해서 떠오르는 것이지요.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그 깨달음의 어떤 직관으로 그냥 쑥 나오는 거예요. 이걸 뭐 옛날 스님들은 오도송을 어떻게 썼는가? 참고하고 뒤지고 뭐 어쩌고... 그거는 벌써 거리가 먼 것이지요.
見性之人(견성지인)은 言下(언하)에 須見(수견)이라→ 그랬거든요. 성품을 견성한 사람은, 우리 자성을 재대로 본 사람은 언하에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떠오른다. 이거예요.
어떻게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어요. 오로지 살림살이가 그 모두니까요. 살림살이가 그 모두니까 견성한 사람은 그 성품. 견성의 세계 속에서 사니까 말만 떨어지면 그냥, 견성의 어떤 경지가 그냥 나오는 것이지요.
言下(언하)에 須見(수견)이니→ 모름지기 봄[見]이니,
若如此者는(약여차자)→ 만약 이와 같은 사람이면,
輪刀上陣(윤도상진)도 亦得見之(역득견지)니라.→ 이것은 칼을 휘둘러 싸움터에 나아가다. 륜도. 輪刀는 칼을 휘두르다. 그리고 상진은 진을 쳐 놓은 데[處(처)]지요. 陣에 오르다는 싸움터에 나아간다 이거예요.
그런 급박한 상황. 바로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그런 상황도 또한 그 성품자리를 멸하지 않는다.
역득견지라. 또한 그 성품을 그대로 본다 이겁니다.
아무리 생사가 오고가는 그런 급한 상황에서도 그 견성. 성품을 본 그 상태 속에서 사니까 언제든지 그 때도 얼마든지 표현이 가능하다.
역득견지라. 칼을 휘둘러 싸움터에 나가는 그런 상황에서도 또한 얻어 보게 된다. 볼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궁리가 될 수가 없지요.
궁리로써 짜낸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 하지요. 그러나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오로지 살림살이가 그것뿐이니까 저절로 나올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벌써 머뭇거리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래요.
衆得處分(중득처분)하고→ 대중들이 분부를 받고, 처분을 받고,
退而遞相謂曰(퇴이체상위왈)→ 물러나서 서로서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니,
我等衆人(아등중인)은→ 우리들 여러 사람들은,
不須澄心(불수징심)하야→ 모름지기 마음을 맑혀 가지고서 이 澄자는, 물이 흐려져 있으면, 흔들리는 물을 가만히 가둬서, 고요히 가라앉히는 입장이지요. 가라앉혀서 맑아질 징자예요.
그래서 산란하고 혼돈한 마음을 가만히 가라앉혀 가지고, 뭔가
用意作偈(용의작게)라→ 생각을 짜내서 偈頌(게송)을 짓는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왜냐?
將呈和尙(장정화상)인들→ 그렇게 해가지고서 게송을 지어서 화상.
5조 스님에게 바친들,
有何利益(유하이익)이리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神秀上座(신수상좌)가→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신수상좌가, 敎授師(교수사)로 있었어요. 교수담당. 옛날 叢林(총림)에는, 參禪(참선)도 하지만, 대중들이 경 공부를 병행을 했습니다.
참선과 경전을 꼭 병행을 해서, 거기서 아주 經學(경학)에 밝은 분이 교수사가 돼요. 그래서 총림에는“교수”라고 하는 직책이 있어요.
이 범어사에도 교수사가 있습니다. 그 역할은 안 하지만, 그래도 명칭은 “교수”라고 해놔요.
그런데 신수대사라고 하는 이가 워낙 뛰어나고, 아주 키도 크고 생기기도 잘 생겼고, 또 거기서 늘 많은 제자들을 경학을 가르쳤고...
그런 이가 있어서,
現爲敎授師(현위교수사)하니→ 지금 현재에 교수사가 되어 있으니,
必是他得(필시타득)이라→ 반드시 그 사람이 얻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5조 스님 법은 두 말할 것 없이 그 분이 얻도록 돼 있는데,
我輩(아배)는→ 우리가,
謾作偈頌(만작게송)하야도→ 부질없이 게송을 지어도,
枉用心力(왕용심력)이라→ 그릇되게 심력만 허비 한다 이겁니다.
괜히 수고스럽게 마음 쓸 필요 없다.
지어 봐야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또 알아주지도 않고, 또 설사 제대로 지었다한들 우리 이 會上(회상)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신수대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분이 법을 받을 것인데, 뭐 그럴게 있느냐 이겁니다.
諸人(제인)이 聞語(문어)하고→ 여러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는,
總皆息心(총개식심)하야→ 그만 모두들 게송 지을 마음을 쉬어 버렸다.“아이고 맞다. 그 말이 맞다.”이렇게 하고는,
咸言(함언), 我等(아등)은 已後(이후)에→ 우리가 나중에 의지하자. 누구를?
依止神秀(의지신수)리니 授師(수사)→ 신수대사에게 의지하리니,
何煩作偈(하번작게)리요.→ 어찌 번거롭게 게송을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나중에 신수대사에게 의지 해서 공부 할 텐데, 지금까지도 뭐 그렇게 해 왔고, 그런데 되지도 않을 게송지어봐야 뭐 하겠느냐?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서, 그 이야기가 1000여명 대중에게 다 돌아버렸어요.
神秀-思惟(신수-사유)호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 버리니까 이 신수대사가 책임도 있고, 또 입장이 그렇고 하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諸人(제인)이 不呈偈者(부정게자)는→ 여러 사람들이 게송을 바치지 아니 하는 것은,
爲我與他(위아여타)로 爲敎授師(위교수사)니→ 나는 저 사람들에게 교수사가 되어 있어서 늘 불교를 가르치는 그런 입장인데,
我須作偈(아수작게)하야→ 내가 모름지기 게송을 지어서
將呈和尙(장정화상)하리라→ 장차 5조 스님에게 갖다 바칠 것이다.
이건, 뭐 나는 책임이고, 또 대중들이 모두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모두들 그것이 현재 입장으로 봐선 당연한 것이고, 그리된 것이지요.
若不呈偈(약부정게)면→ 만약에 게송을 바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和尙(화상)이 如何知我心中見解深淺(여하지아심중견해심천)이리요.→ 어떻게 내 심중에 있는 견해의 깊고 얕은 것을 알겠는가?
내 소견을 5조 스님께서 제대로 알릴 수가 없으니까 되는 대로 ‘내 소견을 한 번 피력할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고,
我呈偈意(아정게의)는→ 내가 게송을 바치는 뜻은,
求法卽善(구법즉선)이오.→ 법을 구한다.‘내가 이렇게 게송을 바쳐 가지고 내 소견을 피력해서, 거기에 대해서 5조 스님이 뭐라고. 뭐라고 지시를 해서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覓祖卽惡(멱조즉악)이다. 내가 6조 대사라고 하는 그 대를 잇기 위해서 한다는 것은 그건 나쁜 일이다,’이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却同凡心(각동범심)이라→ 그것은 그대로 범부의 마음하고 똑 같다 이겁니다. 참 점잖은 생각이지요?
奪其聖位(탈기성위)로 奚別(해별)이리요.→ 성인의 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찌 다르겠는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겁니다. 내가 평생 남의 존경을 받는 교수사가 되서, 어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내가 오로지 게송을 바치는 것은, 그 스님에게 한 수 지도 받기 위해서, 법을 지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그런 자세지요.
若不呈偈(약부정게)하면→ 만약에 게송을 바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終不得法(종부득법)하리니→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지요. 이럴 때 한 번씩 자기 소견을 피력을 하고, 거기서 교정을 받고 지도를 받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大難大難(대난대난)이로다→ 아 이것 참 곤란한 일이다. 정말 가만히 생각하니 곤란한 일이지요. 대중들은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분위기가 또 그렇고요. 그러니 ‘할 수 없이 게송을 지어 바칠 수밖에 없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6조 스님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육조단경 이고, 또 南禪(남선). 北禪(북선) 그래요. 남쪽 선과 북쪽 선이 이렇게 나누어지는데, 이 신수대사로 해서 북쪽 선이 발전하게 되고요.
육조스님이신 혜능스님으로 해서 남쪽 선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쪽 선을 “頓悟法(돈오법)이다.” 그렇게 하는 반면에, 북쪽 선은 “漸修(점수)다. 점점 닦는 그런 내용이다.” 그런 표현들을 씁니다.
그래서 이 북쪽 선. 신수대사를 연구하는 분은, 또 이 신수대사가 대단한 그런 분으로 그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이 분은 그 당시 天子(천자)가 세 분이 歸依(귀의)를 했던, 그런 아주 제일 복이 많았던 조사스님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궁중으로부터 비호를 많이 받고, 또 천자가 존경을 많이 했던 그런 스님으로 역사에서 아주 길이 남는 분입니다.
아주 참, 지혜가 출중하고 뛰어나고...
그러나 ‘오조 스님에게서 법의 정맥을 받지는 못했다.’ 남쪽 선에서는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북쪽 선에서는 神秀系派(신수계파)로 한참 내려가기도 하지요. 그래서 역사적인 사실은 분분합니다. 그러나 天下(천하)가 다 육조스님이고...
육조스님 밑에 청운행사하고 남악회양하고 이 거대한 두 산맥이 형성이 되고, 그 두 분 밑에서 크게 견성한 선지식들이 그야말로 ‘깨 쏟아지듯이 쏟아졌다.’이런 표현을 합니다.
후대에 와서 그것이 너무나도 뚜렷한 사실이기 때문에... 어쨌거나 이 신수스님에 대한 사상이라든지, 그 행적이라든지 이런 것이 크게 드러나지를 못 했어요.
그러면서도 간혹. 신수스님의 어록이나 그 분의 사상을 연구해서 발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긴 있어요. 있긴 있는데 육조스님쪽으로 비교를 하면 100분의 1이나 될까 말까하는 그런 정도로, 微微(미미)하다고 밖에 말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 조계종은 이 육조스님이 사시던 조계산을 그 이름을 따서 “육조스님의 정신을 계승한다.” “육조스님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우리 조계종. 한국불교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한국에서는 더 그래요.
五祖堂前(오조당전)에 有步廊三間(유보랑삼간)하야→ 행랑이라는 뜻 이예요. 행랑 세 칸이 있었다.
5조 스님 계시는 집 앞에 그런 것이 있었는데,
擬請供奉盧珍(의청공봉노진)→ 공봉은 노진이라는 사람의 呼(호)인가 봐요. 노진이라는 사람은 화가입니다.
공봉노진 이라는 사람을 청해서 행랑채 벽에다가 그림을 그리려고, 잘 다듬어 놓은 곳이 있었고, 마침 그 사람이 그 그림을 그리려고 와 있었어요.
벽을 깨끗하게 치장을 하고는 그림을 막 그리려고 하던 그런 시기였나 봐요. 그래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가 하니
畵楞加變相(화능가변상)과 及五祖血脈圖(급오조혈맥도)라.→ 능가경의 變相圖(변상도): 능가경의 안에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변상도”그래요.“금강경변상도.”“화엄경변상도.”“법화경변상도.”이런 말이 있어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 그것이 變相圖 인데, 여기에 그리려고 했던 것이 능가경의 변상도예요. 왜? 능가경의 변상도이냐?
달마스님께서는 금강경도 소중히 여겼지마는, 능가경을 가지고 와서 능가경을 전했습니다. 능가경을...
이 능가경은 唯識系統(유식계통)의 경전인데, 아주 까다롭고 심오한. 복잡하고 심오한 그런 경전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능가경을 가지고 와서 가르치고 그것을 전했기 때문에, 그래서 능가경하고 같이 전했다는 것이지요. 이 5조 스님한테까지 그 능가경이 전해 졌어요. 금강경도 소중히 여겼지마는, 역시 능가경도 달마스님의 덕택으로 그렇게 전하게 됐는데, 그 안에 있는 변상도를 그리고
그 다음에 及五祖血脈圖(급오조혈맥도)하야→ 5조 스님이 내려오기까지의 혈맥도.
그러니까 부처님이 계시고, 가섭존자가 있고, 아란존자가 있고, 상낙화수가 있고, 협존자가 있고, 사자존자가 있고, 이런 식으로 쭉~~ 이렇게 내려와서, 5조, 홍인대사에 이르기까지의 혈맥도. 말하자면 쭉~~ 내려온 족보의 그림이지요.
더러 삽三祖師(삽삼조사), 33조사를 한 폭에다 그려놓은 그런 그림이 사찰에 더러 있지요. 그겁니다. 그런 것을 그려서,
流轉供養(유전공양)이라.→ 뒷사람들에게 보여도 주고, 그리고 또 거기에 제사도 지내고, 불공도 하고, 그렇게 하려고 벽을 잘 다듬어 놓은 步廊(보랑). 행랑이지요. 행랑 삼 칸에다가 그렇게 하려고 마침 다듬어 놓은 벽이 있었다.
神秀-作偈成己(신수-작게성기)에 數度欲呈(수도욕정)하야→ 신수스님이 게를 짓고서 몇 번이나 5조 스님께 바치려고 했었다.
行至堂前(행지당전)이나→ 5조 스님계시는 집 앞까지, 문 앞까지 몇 번이나 갔었어요. 그런데 감히 바치지 못하고,
心中恍惚(심중황홀)이라→ 마음속은 그저 두근두근 하고, 이랬다 이거예요.
그리고 徧身汗流(편신한류)라→ 온 몸에서 그냥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아, 이거 바쳐야 옳으냐.’
되든 안 되든 그냥 내 밀면 될 텐데... 어떻게 보면 좀 점잖하신 분이고, 또 소심하기도 하고요.
또, 이 법에 대해서 자신도 사실은 좀 없고요. 그랬던 상황을 이렇게 그리고 있지요.
擬呈不得(의정부득)이라.→ 바치고자 하나 바치지 못해서,
前後經四日(전후경사일)에 一十三度(일십삼도)를→ 4일이나 지나면서 13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이겁니다. 그 집 앞을...
呈偈不得(정게부득)이라.→ 게송을 바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秀乃思惟(수내사유)호되→ 그러다가 신수스님이 사유하되, 생각하되,
不如向廊下書著(불여향낭하서착)하야→ 행랑 거기에다가 그려가지고서,
從他和尙(종타화상)→ 저 화상. 큰스님으로부터
看見(간견)→ 왔다 갔다 하시다가 보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 하다. 그리고는
忽若道好(홀약도호)→ 홀연히 만약에“아 이거 좋은 내용이다.” 라고 그렇게 말씀 하실 것 같으면,
卽出禮拜云, 是秀作(즉출예배운, 시수작)이라하고→ 곧 나가서 예배하고,“이것은 신수가, 제가 지은 것입니다.”하고,
若道不堪(약도불감)이시면→ “아 이건 틀렸어. 이건 뭐 이런 내용이야?”라고 이렇게 만약에 말 하시면,
枉向山中(왕향산중)하야→ 그릇 산중을 향해서,
數年(수년)을 受人禮拜(수인예배)라→ 다른 사람들에게 예배만 받아서,
更修何道(갱수하도)리요.→ 다시 무슨 도를 닦으리요? 이런 생각을 하고는,
是夜三更(시야삼경)에→ 삼경은 子正(자정)이예요. 그러니까 11시에서 1시 사이, 자정을 삼경이라고 합니다. 1시에서 3시 까지가 사경.
3시에서 5시 까지가 오경이라고 합니다.
삼경에 不使人知(불사인지)하고→ 다른 사람으로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自執燈(자집등)하고→ 스스로 등불을 떡 들고는,
書偈於南廊壁間(서게어남낭벽간)하야→ 게송을 남랑벽간에다가 써서 떡 붙여가지고서,
呈心所見(정심소견)하니→ 마음을, 소견을 떡 이렇게 표현 했으니,
偈曰(게왈)→ 게송에 가로되, 유명한 게송이지요.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라.→ 우리 육신 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나무요. 깨달음의 나무.
이 육신을 통해서 어쨌든 깨닫게 되니까요. 중요한 말 이지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라.→ 그럼 마음은 뭐냐? 밝은 거울을 받히는 받침대와 같다. 대자는 받침대지요.
옛날에 거울은, 지금도 제대로 된 거울은 받침대가 다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銅鏡(동경)이기 때문에 나무로 큰 받침대를 해놓고 그 위에다 거울을 닦아서 언제든지 올려놓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또 거기에 녹이 쓸면 내리고 깨끗이 닦아서 다시 올려놓지요.
대라고 하는 말은 받침대지요. 명경의 받침대입니다.
보리수를 받히는 명경대. 그렇게 臺가 되지요. 그러니,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하야,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하라.→ 때때로 부지런. 부지런히 拂拭. 닦아서 물사야진애. 진애가 끼지 않도록, 낄야자 입니다. 진애가 끼지 않도록 하라.
그러니까 마음은 거울이다. 이런 뜻으로 여기서는 생각을 했고, 해석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심여명경대라. 꼭 받침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명경이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밝은 거울에 때가 자꾸 끼면 흐려지잖아요. 그래 시시근불식이라. 시시때때로 부지런 부지런히 그걸 닦아가지고...
동경은, 옛날에는 전부 구리로 만든 거울이니까 한참 있으면 누렇게 때가 끼어요. 그러면 그걸 또 내려서 깨끗이. 기왓장을 갈아가지고 그 가루를 물에 좀 축이고서 닦으면 깨끗이 닦이고. 닦이고 그래요.
요즘엔 약이 좋은 것이 나와서, 한 번만 닦으면 싸악 닦이는 그런 것이 있더라고요.
옛날에 우리 어릴 때 그것, 전부 보름마다 한 번씩. 오래된 기와장이라야 잘 깨지거든요. 새 기와는 안 돼요. 묵은 기와라야 돼요. 묵은 기와를 갈아요. 깨든지 뭐, 깨도 아주 보드랍게 깨가지고 그걸 또 채로 쳐요. 그래 아주 보드랍게 만들어서, 짚을 또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물에 축여서 닦으면 잘 닦여요. 거울을 그런 식으로 닦았어요.
그럼 계속. 계속 닦아야 되어요. 그래 이제 우리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 보통 상식에는 그것이 좋아요. 맞아요. 보통 상식에는...
우리들 마음에 자꾸 때가 끼니까 열심히 기도도 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경도 읽고, 절도 하고, 온갖 것 좋은 것을 자꾸 하면서 마음의 때를 닦는다. 사실은 대개 그런 마음이지요. 거의 그런 상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가 끼지 않도록...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한이 없어요. 계속 때가 끼고 또 닦고, 끼고 또 닦고 또 닦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불법이라는 것이 과연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부처님께서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 뭐 한 번 깨달았으면 끝나야지,
그것을 계속 닦고 계속 닦고 이렇게 하는 건가?
아니면 한 번 깨닫고 마는 건가? 그것이 여기서 하나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지요. 한 번 깨달으며는. 제대로 봐버리며는 그걸로 끝이냐? 아니면 계속 닦아야 되느냐? 그것을 頓(돈)과 漸(점). 그래요.
그것을 南頓北漸(남돈북점). 그런 말을 하는데요. 남쪽은 육조스님을 말하는 것이고, 북쪽은 신수스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그 ‘사상이 갈라진다.’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頓자는 몰록 돈, 한꺼번에 돈. 이런 말입니다.
남쪽 禪(선)은 육조스님이 피력하신 禪法(선법)을 남쪽 선. 남쪽 선은 한꺼번에 된다. 한 번 해버리면 끝이다.
그리고 北漸(북점). 북쪽 선은 신수스님을 지칭 하면서, 이것은 점. 점. 자꾸, 자꾸 닦아간다.
점. 점. 점. 점. 점차적으로 자꾸 닦아가는 그런 공부다. 이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南頓北漸(남돈북점). 이런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기서 선에 대한 사상이 아주 크게 두 길로 나눠지는데, 지금도 심심찮게 간혹 이야기가 되고 있는 내용인데요.
그럼 여기서 북점. 점 점 닦는다. 라고 하는 것이 마치 거울에 때가 묻었으면,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닦고, 또 끼면 또 닦고, 또 끼면 또 닦고, 그러니 “때가 끼지 않도록 계속. 계속 닦아라.”이런 말이고,
육조스님은 뒤에 당신의 대표적인 사상이 나오긴 나옵니다마는, 여기서 우리가 육조스님을 이해할 때, 이 신수스님과 대비를 해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이 게송을 지어가지고는 그 벽에다 썼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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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