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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의 현장 철원
지난 2001년 8월엔 전역 25돌을 기념하기 위해 근무지였던 철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면 3년이 지난 2004년 7월 17일의 연휴엔 군 입대 30년의 기림으로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새 제주(2002년)와 부산(2003년)에서 한 차례씩의 모임으로 전우애를 다졌기에 쉬 구파발에 집결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전야 행사는 정범 동지 가족의 몫이었다. 북한산을 바라보면서 별장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맛깔스런 음식에다 곁들여진 한라산물은 최상의 출정식이었다.
이튿날 08:20에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철원으로 출발. 예보에 의하면 의정부를 중심으로 서울 북부 지역엔 200㎜ 이상의 호우가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그칠 것이라는 확신은 금학산신(神)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할 것이라는 것과 제주에서 오름 등정일에 궂은 날씨였다가도 기적처럼 좋아지는 그 기적(?)이 이어지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전방으로 달려가면서 '오름 등정의 기적'을 얘기했는데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운천을 거쳐 관인으로 들어서니 그 기적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차게 내리던 비는 온 데 간 데 없고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제주와는 전연 딴판인 초가을 날씨의 딴 세상이었다. 철원평야의 싱그러움, 먹구름에 싸였던 금학산이 보이자 지금껏 이어지던 세사(世事)는 자연스레 그쳐지고 모두들 숙연해진다.
금학산 약수터는 세월이 흐른 뒤 현재는 장병휴게소로 변함
서울 출발 2시간 여 만에 ‘충정(忠情)의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3년 전의 어리석음(?)을 다시 범하지 않으려고 사전에 부대 사정을 미리 파악해 둔 승무 동지 덕분에 오늘은 지휘관이 직접 마중을 해 주었다. 부대 정문에서 상면한 부대장 최 중령은 ROTC 24기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보다 12기 후배인 셈이다.
부대장의 안내로 영내(營內)를 거닐었다. A포대에서 사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포대장 연택 동지의 회고담을 시작으로 2년 동안의 군 생활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좀처럼 쉴 줄을 몰랐다. 흐른 세월만큼 자연도 인사(人事)도 변모하게 마련이지만 30년 세월을 훌쩍 넘겼어도 지울 수 없는 기억들! 새록새록 솟아나는 당시 대대장을 비롯한 부대원들의 생활상, 훈련 중의 에피소드, BOQ 및 부대 밖에서 삶의 청량제가 되었던 일화 등등.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OP에서의 비화(秘話)는 하이라이트일 수밖에 없다. 실화를 역설했지만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모두 전설(?)처럼 들리는 얘기들….
우리들의 본향(本鄕) 947m의 장엄한 금학산을 바라보는 동지들, 그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들 만감만의 교차…. 30년 세월의 흐름에는 '자연(自然)은 커졌고, 인위(人爲)는 작아졌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민둥산이었던 금학산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였고, 영내의 작달만한 나무들을 거목으로 자라나 시야가 가릴 정도였다. 구철원의 젖줄이라 할 금학산 계곡의 약수터는 군휴양소로 이용되는 ‘청포정(靑砲亭)’으로 변해 있었다. 영내를 흐르는 실개울들은 모두 넓어져 군데군데에 다리가 놓여 졌었고 각 포대의 연병장 또한 예전보다 널따랗게 다져져 있었다.
이에 반하여 인위(人爲)는 어떠한가? 그새 신축되어진 건물들은 거의 없고 당시 건물들을 그대로 활용한다든지 아니면 일부 증축할 정도였다. 30년 전에 그토록 넓고 크게 보였던 BOQ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으며 A포대 내무반에 들렀던 연택 동지의 말을 빌면 30년 전 그 때 그 내무반이라고 한다. 30년 동안 병사들의 체위(體位)가 매우 커졌을 터인데….
병사들을 위한 편익 시설은 예상 이외였다. 연병장을 이용한 축구․배구 경기장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인터넷, 공중전화, 당구장, 노래방기기, 체력단련실 등이 제공되고 있었으며 지급되는 피복들은 예전의 장교 수준이라고 한다.
식사시간! 30년 전에는 노란색의 플라스틱 식판과 숟가락을 들고 정해진 장소에 집합한 후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군가를 부르며 식당까지 걸어간 다음에 대오(隊伍)를 정돈하고 나서 취사병이 담아내는 음식을 먹고 난 후 다시 집합하고 출발점까지 군가를 부르며 되돌아오는 게 일련의 과정이었다.
현재는, 삼삼오오의 대열이긴 하나 군가는 들을 수 없었다. 식판과 수저는 식당에 비치되어 있었고 배식(配食)은 뷔페식이었으며 사병․부사관․장교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30년 후배들과의 점심 식사는 그저 격세지감일 수밖에….
상황실, 보유된 장비는 모두 신형으로서 이름은 물론 다룸에도 전연 생소한 기기들이다. ‘전포대 - 사격지휘 - 관측’으로 이어지는 포술(砲術)이야 변모될 리는 없는 것이고 다만 좌표 산출, 거리 측정, 통신 운용 등에서 현대 기기의 도움이 매우 큰 것 같았다.
청년 장교의 기백과 정열을 마음껏 쏟아냈던 금학산 기슭의 포병 제503대대(제2559부대)! 현재는 다른 곳으로 이설을 해서 그 자리에는 제8260부대가 점령하고 있었지만 전연 낯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이 부대는 당시 제503대대로부터 화력 지원을 받던 부대였기 때문에 제503대대의 연락 장교가 상시 파견되는 형제 같은 관계이므로 당시 장교들끼리는 서로 잘 알고 있었고 상설 OP인 102OP엔 동반 점령하기도 했었다.
이제 부대를 벗어나 OP(observation post ; 전방관측소)로 출동. 30년 전 제503대대는 전방에 101․102․103, 그리고 110OP를 거느리고 있었다. 101OP는 그 유명한 백마고지 자락에, 103OP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현장 월정역에 각각 자리 잡고 있었고 102OP는 101과 103 사이에, 110OP는 이들보다 약 2km 뒤에 위치하여 연락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백마고지전적지에서 상속자와 인증샷 부대장 최 중령의 안내로 한국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노동당사를 거쳐 대마리 소재 ‘백마고지전적지’에 이르렀다. 1952년 10월에 10일 동안 피아(彼我)의 포탄이 30여만 발이나 낙하되고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뀌었다는 백마고지. 그 전승의 선봉장 육탄 3용사 중 한 분이 제주(성산읍 시흥리) 출신 강승우 소위이다. 강 소위의 명패 앞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나서 바라보는 북녘 땅은 우리의 산하와 다름이 없었다.
허허벌판에 원두막 같은 망루(望樓)를 세워두고 ‘때려잡자 김일성’이란 구호를 큼지막하게 걸어놓았던 103OP. 그러나 현재는 5층의 현대식 건물로 곁의 제2땅굴과 더불어 안보관광의 주역인 철의삼각전망대로 변모되었다. 이를 두고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만하다.
불청객들을 위한 OP장의 브리핑이 시작될 즈음에 월정역의 산 증인 인권 동지가 ‘피의능선∼고암산∼봉래호∼평강고원∼낙타고지’ 등을 가리키며 예전의 월정역장의 위용을 과시함은 직분에 충실했다는 좋은 본보기를 후배 장교에게 남겨 주었다.
드넓은 철원평야를 가로질러 아이스크림고지와 필승교회를 뒤로하고 제2땅굴로 향했다. 철원의 겨울, 상상을 초월하는 혹한이다. 전방에 근무하다보면 비상은 부지불식간에 발령되는데 유독 1975년도 연초의 비상은 달포 이상 이어졌다. 훗날에 안 일이지만 철원제2땅굴작전 때문이었다. 작전이 끝나고 군 당국의 배려로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트럭을 타고 긴장 속에 땅굴을 견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전역 후에 두 차례 더 다녀갔지만 오늘의 견학은 제8260부대 1호차의 선도로 중간 중간에 초병들의 우렁찬 구호와 경례를 받으면서 달려가니 군인으로 되돌아간 착각을 하게 된다.
부임한 지 보름이 되었다는 신참 소대장은 불청객들을 위령탑 앞에 집합시켜 땅굴에 대한 제반 사항에 대해 열심히 소개를 하였다. 이 때 어느 동지 왈, “이 곳에서 근무하느라 고생이 많네, 그런데 우리들 모두 1975년도 땅굴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선배들이야.”란 외마디에 소대장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땅굴 안내 소대장은 30기 후배였는데 헤아려보니 땅굴작전은 소대장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상황이 아니던가!
언제 보아도 정겨운 철원 평야! 사통팔달로 시원스레 뚫린 포장도로를 따라 고석정을 지나 승일교 너머에 자리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군 입대 30돌을 기념하여 근무했던 부대 방문 평가 자리인 셈이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얘기에 가끔씩 의사를 개진하던 승희 동지가 고석정 입구에서 재빨리 이 음식점의 명성을 듣고 안내자가 되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쏘가리탕은 별미였다. 또다시 이어지는 얘기는 다시 30년 전으로…. 화제의 초점은 당시 대대장이었고. 이어 몇몇 장교들과 하사관들, 그리고 특이한 신분의 사병들이 대상이었다. 30년이 지났어도 잊지 않고 이어지는 사건 사건들, 만약에 한두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한다면 속된 말로 ‘뻥-’일 수도 있으나 이구동성의 실화는 현장에서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제는 한낮 추억으로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얘기들, 그게 어쩌면 우리들을 설레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초급 장교 신분으로서 최전방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인간 본연의 순수를 갈구했기에 스스럼없이 3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좋았던 시절’이다. 젊음과 꿈, 그리고 충정(忠情)! 설령 실수하는 동지가 있다 하더라고 서로를 위안하고 별미가 있으면 나눠먹던 그 시절. OP에 근무하다 오랜만에 내려오면 밤샘을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사정(?)에 의해 비상에 참여하지 못하면 대신 군장을 드는 동료애.
헤어질 시간, 1진은 부득이 철원의 아쉬움을 다음으로 기약하며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 2진들의 후일담은 예상을 넘어섰다. 부대장 최 중령은 당시 근무했던 한 하사관이 철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분을 통해 당시 대대장과 한 장교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아울러 당시 근무했던 몇몇 하사관들의 생활상도 전해 들었다.
503대대 OP 중 한 곳이었던 열정역에서 - 오른쪽 두 번째는 당시 대대장 최홍엽 중령(ROTC 24기)
철원의 밤, 장소를 옮겨가며 이어진 넋두리는 3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먹고 마시는 음식과 술이 다르기 했지만 분위기만은 예전 그대로였다고 한다. 2년 후, 전역 30돌 기념으로 2006년 5월 5일에 철원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철원의 밤을 깊어만 갔다.
계획 수립에서 실천의 길라잡이 승무, 구파발의 추억을 아로새겨준 정범과 그 가족, 영원한 월정역장 인권, 설렘을 감추지 못한 연택, 아쉬움만 간직한 승희, 추억 여행의 소중함을 간직하게 해준 제8260부대장 모두에게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
부대 정문에 세워진 승리포병탑 노동당사 백마고지전적지 월정리역 철마는 달리고 싶다! 월정역전망대는 현재는 철원두루미관으로 바뀌었고 예전의 필승교회에 철원평화전망대가 세워졌음 철원 제2땅굴 안내 표석 (2004. 0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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