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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왕검의 탄생
한동안 제국의 변경을 넘나들며 소란을 떨던 부여족들이 패퇴하여 흥안령의 서쪽에 머물며 자리를 잡자 오래간만에 전쟁이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 웅녀황비는 커붉단 한웅의 황손을 잉태하는 경사를 맞아 나라의 안팎이 즐거움으로 충만하였다.
산월(産月)이 다가오자 웅녀황비는 차가운 날씨의 신시 아사달을 떠나 친정어머니가 계신 백두산 아래 감족의 땅으로 돌아갔다.
백두산(白頭山)은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산의 정상 양달에는 하늘 못인 천지(天池)가 있고 산중 깊숙이 응달에는 천지(하늘 못)와 감지(지상 못)의 걸침 역할을 하는 작은 하늘못(小天池)이 있다.
성산(白頭山)의 아랫녘 친정에 자리 잡은 황비는 매일같이 소천지에 들어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못에 올라 뱃속의 황손을 위한 축원(祝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신시 아사달의 커붉단 한웅은 잠시 정무를 접어두고 황비의 측근(側近)에 행궁(行宮)을 마련한 후 황비의 축원행사에 동참한다.
개천(開天) 1528년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 : 오전 3~5시), 웅녀황비는 백두산의 소천지옆 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한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는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생산하였다. 단군은 커붉단한웅의 셋째 아들이고 웅녀황비의 첫 아들이다.
아기 단군이 무사히 첫돌을 맞았을 때 아버지인 커붉단 한웅과 어머니 웅녀황비는 아기단군을 데리고 백두성산의 하늘못(天池)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의 백성인 하늘민족(天孫族)을 이끌어줄 단군을 내려주심에 감사함을 고(告)하였다.
단군의 성장
나라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여족들의 뛰어난 전투력에 위협을 느낀 커붉단 한웅은 황태자 지명문제보다 감족과 쥬신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시켜 나라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은 단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커붉단 한웅의 제 1,2 황자들은 태자의 자리에 앉지 못하였고, 후에 이복 동생인 단군에게 배달한국 천황위를 내주어야 했다.
어떻게 제 3황자였던 단군이 혈통을 중시하는 배달한국의 풍습을 거스르고 천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그 이유는 어머니 웅녀황비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배달한국과 동시대에 있던 다른 나라의 통치자 선발제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그 나라의 최강자나 최강 세력가문 출신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하지만 배달한국은타국과는 달리 나라 최고의 통치자에게 수준 높은 학식을 요구하는 특이한 점을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단군제도(檀君制度)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支柱) 단군은, 단군에 오르는 순간 천자(天子)로 신분이 격상되면서 인신(人神)으로 대접 받게 된다. 단군에게는 국난에 대처하여 자유롭게 병력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사안에 대한 결정도 중신들의 동의없이 내릴수 있다.
단군에게는 그에게 주어진 무소불위의 권력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과 임무도 따르게 된다. 단군은 하늘과 지상을 잇는 천자로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손수 축문(祝文)을 짓고 하늘에 올리는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일에서부터, 전란이나 역병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연재해(自然災害)까지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지닌 단군에 오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와 함께 상당한 무예와 학식이 필요했고, 이러한 것들이 배달한국의 독특한 통치자 선발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명한 웅녀황비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거기다 중신들의 지지를 받는 단군의 이복형제인 제 1,2황자와 경쟁해야 하는 불리한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상황이 불리한 만큼 이에 대처하는 웅녀황비의 움직임도 재빠르고 주도면밀 했다. 그녀는 심복들을 부여족의 땅으로 보내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종 전투 장비들을 구입해 들였다. 특히 청동 화살촉과 살상력이 높은 날이 굽은 장단검(長短劒), 그리고 치명적인 투창(投槍), 가볍고 효과적인 방패(防牌) 등은 모두 전투를 수행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있어서 이러한 무기를 사용하게 될 앞으로의 전쟁은 대량 살상을 피할 수 없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웅녀황비는 어린단군에게 이러한 전투용 신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도록 하였고, 웅녀황비의 노력에 힘입어 어린 단군의 무예실력은 갈수록 일취월장 했다.
소년 단군이 13세에 이르자 소년답지 않은 건장한 체격을 과시했고, 그동안에 갈고 닦은 무예실력을 천하에 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던 두 황자들은 긴장하게 되었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며 무예와 학업 정진에만 몰두했던 소년 단군은 이제 세상이 잊고 있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백성들의 민심을 자신에게 모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때 소년단군은 몇 가지 돌출행동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데 그중의 한 가지를 살펴보면 신시의 백악산에 혼자 들어가 3일 밤낮을 잠복한 끝에 그 동안 산에 오른 약초꾼들을 공격했던 악명 높은 곰을 잡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소년단군이 14세가 되던 해 웅녀황비는 단군을 친정으로 보내 감국(熊國)의 부왕(副王)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웅녀황비가 이와 같은 결단을 한 이유는 단군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두 황자측에서 어린 단군에게 해를 입힐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년단군을 안전하게 피신시킨다는 의미와 함께 감족의 부왕으로서 실무 경험도 쌓도록 한다는 절묘한 수순이기도 했다.
소년 단군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홀로 감국(熊國)의 수도가 있는 백두산 아사달(阿斯達)로 떠나갔다. 그곳은 소년 단군이 태어난 고향땅이기도 했다.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출처 - 다물넷) 웅녀황비와 어린 단군
단군조선[檀君朝鮮] 1세 단군 왕검 재위 93년
단군(檀君) :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규원사화
고기에 말하기를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오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이다.
신묘(辛卯)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나이 14살에 웅씨의 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뽑아 올려 비왕(裨王)을 삼고 대읍(大邑)의 국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개천(開天 - 戊辰 4865(BC 2333년)) 1565년 10월 3일에 이르러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단목(檀木)있는 곳에 왔다.
천제의 화신으로 제(帝)라 하니 이분이 단군 왕검 (檀君王儉)이다.
신시(神市)의 옛 법을 다시 회복하며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단군이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해설)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래이(萊夷), 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 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검성(壬儉城)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50년(丁巳)에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이 쉴 수가 없으므로 임금은 풍백(風伯) 팽우에게 치수를 명하여 큰 산과 물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였다.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51년에 임금이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제천단을 마리산(摩離山)에 쌓게 하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이것이다. 67년 임금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사공(虞司空)과 도산(塗山)에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로 하여금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전하게 하였으며, 나라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유주(幽州)·영주(營州) 두 고을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회대(淮垈)의 제후를 정하여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천하의 땅을 구획(區劃)하여 삼한(三韓)과 더불어 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한(辰韓)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다.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이었다.
이 해 3월 15일에 임금이 봉정(蓬亭)에서 세상을 뜨니 교외 10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태자 부루(扶婁)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은지 24년,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93년이니 수는 130세이다.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웅녀의 존재는 곰〔熊〕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중심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지역과 연결시켜 고려할 때 고아시아족(paleo asiatic)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다.
고아시아족의 시조신화가 곰숭배사상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고아시아족은 곰숭배와 함께 샤머니즘이라는 종교적 요소를 보유하고 있는데,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과의 관련성 및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系木)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어,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아시아족과 연결시켜 파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
첫해(辛丑 - 4958)에 임금이 군사를 내어 유주(幽州)·영주(營州) 고을을 치고 그 우두머리를 쫓아버리고 동무(東武)·도라(道羅)등의 공로를 표하였다.
2년 임금이 소련(少連)·대련(大連)을 불러 나라 다스리는 도를 물었다.
3년 9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은 머리를 땋아 머리를 덮으며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10년 4월 구정(邱井)을 정리하여 밭의 대장을 만들어 세금을 내게 하여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이 없게 하였다.
12년 신지(神誌)의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5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이날 일식이 있었고, 만백성은 몹시 슬퍼하였다. 태자 가륵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
기해 원년(BC 2182) 5월,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신(神)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뜻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되고자 하는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 , 7 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뭉쳐서 깊고 묘한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이라 하며 구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경자 2년 아직 풍속이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해도 열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글은 다음과 같았다.
신축 3년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 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의 차이가 있게 하였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계미 45년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
단군조선[檀君朝鮮]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
첫해(甲申-5061-BC2137)에 임금의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
혹 말하기를 지금의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행차하였다가 태백산으로 돌아와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이것을 인삼(人蔘)이라 하고 또는 선약이라고도 한다.
5년에 둥글고 구멍 뚫린 패전(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 하(夏)나라 사람이 화서 방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 가지고 갔다.
10월에 조야(朝野)의 별기(別記)를 돌에 써서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
7년에 조선소(造船所)를 살수(薩水) 상류에 세웠다.
19년에 하나라 왕 상(相)이 덕을 잃어 임금이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藍)·진(眞)·변(弁), 세 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니 천하가 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다. 38년 6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양가(羊加)의 구을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
첫해(壬戌-5099-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2년 5월에 황충(蝗蟲)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다. 4년에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8년에 신독인(身毒人)이 표류하여 동해의 해변에 이르었다.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다.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이 뽑혀서 대통을 이어 들어왔다.
단군조선[檀君朝鮮]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
첫해는 무인(戊寅-5115-BC2083)년이다.
35년에 여러 제후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신지(神誌)의 발리(發理)에게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이 때에 맹세를 맺고 폐백을 바친 자는 큰 나라가 둘이며 작은 나라가 20, 부락이 3624였다.
36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양가(羊加) 한율이 왕위에 올랐다.
7세 단군 한율 54년 재위
첫해가 갑인(甲寅-5151-BC2047)년이다.
54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서한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
첫해(戊申-5205-BC1993)에 20에 1일 받는 세법을 정하고, 널리 있고 없음을 가려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2년 풍년이 들어 한줄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났다.
4년 임금이 남이 알아 볼 수 없게 옷을 갈아 입고 몰래 국경을 넘어 하(夏)나라의 실정을살펴 보고 돌아와 크게 관제(官制)를 고쳤다.
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아술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
첫해(丙辰-5213-BC1985) 임금이 어진 덕이 있어 백성들 가운데 법으로 금한 것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땅이 똥으로 더러워질 때도 있으나 비와 이슬이 내려 씻어버리는 때도 있다."하며 내버려 두고 말하지 않았다.
2년 청해(靑海)의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임금이 상춘(常春)으로 피하여 새 궁을 구월산 남쪽 기슭에 세우고 우지(于支)·우속(于粟) 등을 보내어 이를 쳐서 베인 뒤 삼년만에 도읍으로 돌아왔다.
35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의 노을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
첫해(辛卯-5248-BC1950) 처음으로 큰 동산을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을 길렀다.
2년 친히 부락에 나아가 백성들의 안부를 묻고 야외에서 수레를 멈추니 현자들이 많이와서 귀의(歸依)하였다.
5년 궁문 밖에 신원목(申寃木)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들으니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16년 동문밖 10리 되는 곳에 연꽃이 나고 불함산(不咸山)에 누웠던 돌이 저절로 일어나고 천하(天河)의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림이 윷판과 같았다.
발해(渤海)의 연안에 금덩어리가 노출되었는데 그 수량이 13석(石)이나 되었다.
35년에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59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도해가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
첫해(庚寅-5307-BC1891)에 임금이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서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박달나무를 많이 둘러심고 제일 큰 나무를 골라서 환웅의 상을 삼아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28년에 장소를 만들어 각 고장의 산물을 모아 진기한 것들을 보게 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물건을 가져왔는데 벌여 놓은 것이 산과 같았다.
38년에 백성들 중에 장정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고 그 가운데서 20여명을 추려 하나라 서울에 보내어 처음으로 국훈(國訓)을 전하니 위성(威聲)을 보였다.
46년에 송화강(松花江)가에 작청(作廳)을 설치하니 배와 기물이 널리 쓰여졌다.
57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만 백성이 슬퍼하여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여겨 3년 동안 상제가 되고 온세상이 노래와 춤을 그쳤다.
우가(牛加) 아한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
첫해가 정해(丁亥-5364-BC1834)년이다.
2년 여름 4월에 뿔 하나가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 변방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임금이 나라 안을 순수(巡狩)하다가 요하(遼河) 왼쪽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우고 역대 임금의 이름과 호(號)를 새겨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자(金石文字) 로는 최초이다. 29년 명을 내리기를 청아(菁我)의 욕살(褥薩) 비신(丕信)과 서옥조(西沃阻)의 욕살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의 욕살 돌개(突蓋)를 봉(封)하여 열한(列汗)을 삼았다.
52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 흘달이 왕위에 올랐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기묘 원년(BC 1782)
갑오 16년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이 해 겨울에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무술 20년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다.
무진 50년 오성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후 우가인 고불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
경진 원년(BC 1721)
을유 6년 이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수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 9월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게 하니 총계 1억 8천만인이었다.
기묘 60년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 51년
경진 원년(BC 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과 수밀이국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경오 5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가 위나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신미 원년(BC 1610)
무술 28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여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환인 환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 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의 노래를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환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지금으로치면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무신 5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1552)
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찰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 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19세 구모소 단군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번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C 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께서 상소도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
기유 59년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
기묘 원년(BC 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계미 65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두밀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7세 단군 두밀 26년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기유 26년 단제 붕어하시니 해모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
경술 원년(BC 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경신 11년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불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축 28년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병술 3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이 즉위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 31세 단군 등올 재위 30년
정해 원년(BC 874)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신해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임자 원년(BC 849)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신사 4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이 즉위하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
임오 원년(BC 819)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맹세하여 올린글이 있으니,'삼성의 존귀하심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시오며 삼신의 덕은 성인에 의해 더욱 크시어라. 빈 것과 큰 것은 한 몸이라 하겠고, 하나는 또 모두와 한가지로 같음이라.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힌다면 참 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이 오래 갈 것은 보이는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 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가나 끝 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을사 24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 원년(BC 795) 이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나라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이 즉위하다.
단군조선[檀君朝鮮]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772)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 원년(BC 704)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 5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이 즉위하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 원년(BC 646)
경오 56년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이 즉위하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 원년(BC 590)
을묘 4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이 즉위하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 원년(BC 545)
신묘 3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이 즉위하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 원년(BC 509)
기유 18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 즉위하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 즉위하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 원년(BC 471)
10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물리가 왕위에 올랐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 원년(BC 461)
을묘 36년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 해에 백민성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 원년(BC 425) 3월 큰 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단제께서는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는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을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이 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 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을 개축하도록 하여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 2년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번째 절에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번째 절에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째절에 아홉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의 대례라고 한다.
임신 17년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갑신 2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정사 33년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헌이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 47년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고 이를 도와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 54년 상곡의 싸움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 55년 여름 크게 가물었다.
죄 없이 옥에 갖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이 즉위하였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 원년(BC 341) 12월 번조선왕 해인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가 다투어 일어났다.무술 19년 정월 읍차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매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다.
정사 38년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고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서울로 돌아오셔서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 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으매, 고열가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진 원년(BC 295)
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기유 44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인사를 올려왔다. 이해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 때부터 원망하며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니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이틑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 하였다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의 천조후 12년 계묘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이 점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ㆍ백제ㆍ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 베이징)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
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한 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이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 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얼마나 많은 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을까.
단군조선은 부여(扶餘)ㆍ고구려(高句麗)ㆍ고죽(孤竹)ㆍ예(濊)ㆍ맥(貊)ㆍ추(追)ㆍ진번(眞番)ㆍ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 현도ㆍ숙신(肅愼)ㆍ청구(靑丘)ㆍ양이(良夷)ㆍ양주(楊州)ㆍ발(發)ㆍ유(兪)ㆍ옥저(沃沮)ㆍ기자조선(箕子朝鮮)ㆍ 진(辰)ㆍ비류(沸流)ㆍ행인(荇人)ㆍ해두(海頭)ㆍ개마(蓋馬)ㆍ구다(句茶)ㆍ조나(藻那)ㆍ주나(朱那)ㆍ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부여ㆍ고구려ㆍ고죽ㆍ예ㆍ맥ㆍ추ㆍ진번ㆍ낙랑ㆍ임둔ㆍ현도ㆍ숙신ㆍ청구ㆍ양이ㆍ양주ㆍ발ㆍ유ㆍ옥저ㆍ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ㆍ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ㆍ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알아보자.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한,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동북3성(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 말기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다.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ㆍ상(商, 은(殷))ㆍ서주(西周)ㆍ춘추(春秋)ㆍ전국(戰國)ㆍ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다.
단군조선의 국력은 어떠했을까.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단군' 한 사람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을까.
'단군'은 군주(君主)를 뜻하는 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십명의 단군이 있었으며,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다.
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던 것이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한 다른 칭호였다.
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중국과 맞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며, 그 중심지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북경 동쪽이었다.
----漢四郡 ''임둔'' 유물 中 요서에서 출토
[세계일보] 2002-04-12 (사회) 뉴스 29면 40판 605자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108년 설치했다는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지역에서 출토됐다. 이로써 한사군이 설치됐던 장소, 즉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요동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았다는 학계 통설이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됐다.
그동안 한국상고사의 최대 논쟁거리였던 한사군 위치 문제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로 대표되는 만주설과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 및 해방 이후 남한-일본학계의 평양중심설이 팽팽히 맞서다가 최근에는 적어도 강단사학계 만큼은 평양 중심설로 완전히 굳어진 형국이었다.
중국 지린대(吉林大)에서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에서 문제의 봉니 출토사실을 소개했다.
봉니란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있다./편완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