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일보] 2010. 12. 30일-나는 마실간다
이발소 주변 풍경-부산 동구 초량동 산복도로/강영환(시인)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한가한 시간에 집을 나설 때면 ‘지란지교를 꿈꾸며’ 한 구절이 머리속을 맴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가벼운 차림으로 대문을 나섰다. 츄리닝에 샌달을 끌고 산복도로에 있는 미장원에 가기 위해서다. 젊었을 적에는 머리칼이 눈을 덮어도 그렇게 갑갑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귀찮고 실증이 쉽게 느껴지는 요즘에는 조금만 길어져 이마를 가려도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거울 속에 숨은 덥수룩한 모습은 어쩐지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더 늙어 보이기 때문일까. 산뜻하게 머리를 자르고 나면 한결 젊어진 기분에 마음도 상쾌해지고 세상도 더없이 밝게 보인다. 그래서 젊은 날과는 턱없이 자주 머리를 자르러 간다.
내가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 것은 5년쯤이다. 동네 이발소가 잠간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다른 이발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가 권했다. ‘미장원에 함께 가서 자르지 않을래요. 요즘 젊은 남자들 많이 아서 커트해 가요’ 남자가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 처음엔 매우 쑥스러웠다. 가까운데 이용원이 없고 머리는 자꾸만 길어지고 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터놓은 길에 자주 들락거리다보니 미장원이라는 곳은 그렇게 부담을 가질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발소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짧고 다듬질 시간이 짧아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미장원이 많이 생기고 아이들이나 학생들이 그곳을 이용하면서 동네 이발소는 노인들만 간혹 들락거릴 뿐 손님이 적어 운영이 어려운 탓에 문을 닫았으리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내가 가는 동네 이발소는 산복도로에 있다. 처음에는 철물점 뒤 안 작은 골목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돈을 모았는지 큰 길 가로 나앉은 곳이 지금의 자리다. 나는 그 집에서 이발을 한 게 무려 30여년이 넘었다. 그 이발소는 주인 부부가 한 팀을 이뤄 직접 운영한다. 바깥주인은 삭발을 하고 안주인은 머리를 감겨 주었다. 너무나 정성을 쏟아 이발을 해 주기에 어떤 때는 그 친절이 거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그때 중심가 이용원은 퇴폐 이발소라는 변칙 운영이 유행할 대였다. 면도사 아가씨를 고용하여 면도와 안마와 그 이상의 서비스를 해 주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곳이 있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에는 두터운 커튼이 쳐지고 때로는 밀실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동네는 순수한 이용원이었다. 이발소 그림이 거울 위에 붙어 있고 야한 달력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동네 이발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 보다는 노인들이 많았다. 이용하는 젊은이는 주로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중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손님들이 많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도 다른 이발소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손님이 많아도 이발 과정을 대충 하는 일이 없이 꼼꼼하게 하는 약간 마른 체격의 주인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라는 물음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발사는 예전에 깎았던 흔적을 지금 긴 머리 형태에서 찾아내고는 한 달간 자란 만큼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어 모양새를 내었던 것이다. 그러니 무슨 말이 거기에서 더 필요할까. 손님도 말이 없고 주인도 말이 없다. 단지 기다리는 손님들끼리 주고받는 안부나 잡스런 일에 대한 대화만 있을 뿐이다. 가끔 팔푼이 노인들이 앉아 서울로 간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일이 따뜻한 풍경이 되곤 하였다. 그런 이야기는 몇 번씩 들어도 싫지가 않았다.
이발소 가게와 붙어 있는 살림집을 곁눈으로 흘끔거리곤 했는데 오전 늦게까지 치우지 못한 밥상이 있고 두 아이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스스로 밥을 챙겨 먹는 모습들이 상쾌하게 엿보였다. 그 이발소가 문을 닫았다. 이제 그들은 어디 가서 무엇 해먹으며 살고 있을까. 그 당시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무사히 학교를 마쳤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몇 년 지난 뒤 그 이발소가 문을 다시 열었다. 주인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미장원에 가서 부담감 없이 머리카락을 자른다.

우리 동네 풍경은 그렇다. 제일 높은 굴뚝을 간직한 목욕탕이 있고 그 앞에 철물점이 있고 옆에 약국이 있고 약간 오르막 지는 곳에 이발소가 있고 그 맞은편에 연탄가게가 있고 그 아래쪽에 미장원이 있다. 삼거리에 뒤늦게 빵집이 생겨 호황을 누리고 있다. 수퍼마켙이라 부르는 조그만 구멍가게도 있다. 이 가게들은 서로 상생을 한다. 서로가 물건을 팔아 주며 거대 기업의 마켙이 자리 잡을만한 공간이 없기에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산복도로 주변 유일의 재래시장이었던 구봉시장이 장사가 안 되는 관계로 10년 전에 문을 닫았다. 재래시장이래야 채소가게와 잡화점, 그리고 어물전, 육고기집이 있을 뿐이었는데 그만그만한 수퍼마켓들이 여기저기 생겼다가 사리지고 다시 생기고 그러면서 그마저도 장사가 잘 안되어 문을 닫았기에 산복도로 사람들은 초량 시장까지 걸어 내려가 장을 봐 와야 했다. 외출 중에 택배가 왔을 때 그곳에 맡겼다가 나중에 찾아 오기도 한다.
이발소 옆에는 수선집이 있다. 옷을 수선해 주는 집으로 우리 집에서 자주 이용하는 집이다. 나는 그 집 여주인을 잘 알지 못하지만 주인은 내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집 앞을 지나쳐야 내 직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동태를 살펴놓았다가 집사람에게 일러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이발소 앞 길 건너에는 연탄가게가 있다. 내 대학 시절부터 부부가 배달을 하였다. 주인은 한쪽 발을 약간 저는 절름발이였고 부인은 살이 약간 찐 여인이었다. 이제 노인이 된 지금도 연탄배달을 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외출한 어느 휴일 오후, 갑자기 차창에 빗방울이 튕기기 시작했다. 아내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선희 엄마, 우리 집 옥상에 가서 빨래 좀 걷어 주라! 여긴 빗방울이 드는데…거긴 아직 비가 안 와?”
선희 엄마는 옆집 아주머니다. 평소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이웃이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에는 서로의 급박한 편리를 봐 주기도 한다. 널어놓은 빨래가 비 맞을 걱정 없이 휴일 오후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외출하지 않고 있었던 선희 엄마였다. 그들은 세탁기에서 시작된 불이 집 안을 삼킬 때에도 제일 먼저 달려 와 불을 끈 이웃들이다. 소방차가 물을 뿌리기 전에 불을 다 끄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각자의 집으로 돌아들 갔다. 그들이 있어 안심이 되고 행복해 질 수 있는 삶이다.
일요일 저녁, 외식을 하자는 아들의 말에 어디 멀리 갈 것 있나 우리 동네에 아구찜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구찜에 저녁을 먹기로 하자. 그렇게 하여 다시 츄리닝 바지에 점퍼 하나를 걸치고 샌달을 질질질 끌고서 산복도로 옛 연탄집 건물에 들어선 아구찜 집에 들렀다. 주인은 새마을 청년회 멤버로써 동네 궂은일에 솔선수범을 보였던 아저씨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했던, 그리고 천우신조로 생명을 건진 운 좋은 사나이였다. 그의 딸이 또한 학교에서 내게 배우기도 한 나의 학부형이기도 했다.
나는 가급적이면 우리 동네 가게를 이용한다. 우리 동네 가게에서 팔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조금 비싸고 또한 물건이 시원찮아도 이웃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월급쟁이인 내게 그들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을까만 내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상부상조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는 바로 내게 그런 여유와 자유와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예비군 훈련을 함께 받았던 또래 아저씨들이 이제 노인이 다 되었고, 가끔 손자들을 데리고 산복도로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배운다. 하는 일이 없을 때 빨리 늙는다는 말이 맞을까.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는 그런 모습을 말한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