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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문명의 중심부에서 생명의 길을 여는 시인
- 석화의 연작시 <연변>을 중심으로
송용구
(시인. 한국 고려대학교 교수)
석화 시인은 연변의 조선족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문단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자연철학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해왔다. 물론 그의 시에 나타난 문학적 경향이 비단 이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물신주의에 대한 반감(反感),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 이상향을 향한 동경 등 다양한 현대적 테마들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테마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진지한 성찰을 통해 우러나온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석화 시인은 1989년 시집 『나의 고백』, 1993년 시집 『꽃의 의미』, 1998년 시집 『세월의 귀』를 거쳐 최근에 발표한 연작시 「연변」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에서 인간이 갖는 존재의 의미와, 문명에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회복해야 할 실존의 의미를 동시에 모색해 왔다.
20세기 중엽 이후 동양의 세계마저도 서구의 문명세계로 변해가고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본래의 자연성을 잃어버렸다. 경제적 이익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의 가치로 환산하고 자연의 생명마저도 물질의 기능으로 전락시켰다. 인간의 영혼과 인격을 기계부품처럼 획일화시키는 기형적 발전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좀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각자의 개성을 저당 잡혔다. 현대인들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경계를 짓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의 내면 속에서 자연의 숨결을 느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직면해있다. 인간은 개인적 이익, 집단의 이익, 국가의 이익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어느새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 대립적 경계를 그어 놓았다, 이러한 “경계 긋기”는 사람 간의 차별의식, 사회 및 국가 간의 차등의식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자연을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까닭도 이러한 “경계 긋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 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 연작시「연변 2」중에서
위의 시 제1연에서 볼 수 있듯이 석화 시인은 현대의 인간들이 일종의 “경계 긋기”를 통해 차별의식과 차등의식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확산시키는 병리현상을 진단하면서 독자의 비판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제2연에서 시인은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자연세계를 초청하고 있다. 문명사회 속에서 점점 더 분할되고 파편화 되어가는 인간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주고 그 병리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시인은 인간의 ‘경계’ 바깥에 있는 자연을 다시 ‘경계’ 안으로 불러들인다. 위의 시 제2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의 총아(寵兒)인 ‘새’는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를 허물거나 초월하면서 대립적 공간 속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새들’의 ‘노래’는 ‘한족’과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첩첩이 쌓여있는 감정의 벽과 차별의 담장을 훌쩍 뛰어 넘는다.
그러므로 ‘새’는 편견과 이익에 따라 “경계 긋기”에 혈안이 된 현대인들에게 시인의 반성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전령사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각자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촘촘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단절과 막힘이 없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시인은 ‘새’의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새’는 시인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석화 시인이 인간과 자연의 고유한 속성을 각각 개별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의 언어 속에서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경계를 허물어버렸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욕심과 편견 때문에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인간관계가 뒤틀려서 불신, 반목, 대립의 관계로 변질된다면 사람은 자연에 대해서도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석화 시인은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이 훼손되어 더럽혀지는 것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있다. 그는 자연성(自然性)을 숭상하면서도 아울러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이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아주머니의 준말이다
아주머니는 아와 주머니의 합성어이다라는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언어학자 렴광호박사와 물어보면 알겠지만
아줌마는 어쩔 수 없이 아줌마다
옛날에 앞뒤가 구별 안 되는 《몸뻬》바지와 코신에 그리고
요즘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머리에 쓰고 있지만
대체로 앞으로 보나 옆으로 보나 비슷하게 평평한 립방체로
절반 하늘이 아닌 옹근 하늘을 든든히 받치고 서있는
아줌마는 어쨌든 아줌마다
해와 달이 뜨고
음과 양으로 나뉘는 이원적인 세상에서
《-》도《+》도 아닌 존재로 인류 속에 나타나
수많은 과학자들의 머리카락을 새하얗게 한다는
아줌마는 역시 아줌마다
아줌마 아줌마 중에 《연변표》아줌마는
이 세상 아줌마 중에서도 희귀품이라 한다.
- 「연변 3」전문
도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아줌마’는 흔히 중년 여자를 비하하는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평평하다’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여성의 매력을 잃어버리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정쩡한 몰개성(沒個性)의 존재를 상징하는 말로 흔히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아줌마’라는 호칭에는 왠지 모르게 다정함이 느껴진다. 조선 토종의 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아줌마의 ‘몸빼’ 바지는 뚝배기 된장처럼 구수한 인정을 떠올리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아줌마는 어쩔 수 없이 아줌마다’라는 표현은 외관상으로는 ‘아줌마’를 비하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의 전통적 정서에 맞추어‘아줌마’의 꾸밈없는 인정을 그리워하고 있는 시인의 역설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인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며‘아줌마’라고 부르는 현대인들의 편견이다. 특히 시인의 고향인 연변 지역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건너온 여인에게 ‘희귀품’의 목록처럼‘연변표 아줌마’라는 꼬리표를 붙일 정도로 서울의 도시인들은 차별적 시각으로 연변 여인을 바라본다.
필자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연변에서 온 여인을 바라보는 서울 사람들의 시각은 매우 이중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첫 번째 시각은 연변에서 온 여인을 여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성차별(性差別)의 유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시각은 같은‘아줌마’라고 할지라도 연변에서 온 ‘아줌마’를 한국의 ‘아줌마’ 또는 서울의 ‘아줌마’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시각 모두 왜곡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연변의 중년 여인을 바라보는 첫 번째 시각은 여성을 ‘외모’라는 외적 조건만으로 바라볼 뿐, 그녀의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여성의 기질과 성향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왜곡되어 있다. 두 번째 시각은 특정 지역에 대한 선입관을 통해 한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여성세계 안에서의 새로운 성차별과 함께 지역적 차별의식까지 조장한다. 왜곡된 시각은 더욱 뒤틀리게 된다.
석화 시인은 성(性)과 지역에 대한 이중의 집단적 편견을 비판하면서 사람에 대한 보편적 인간애를 요청하고 있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공정한 사람이다. 흙 속에 파묻힌 진실을 햇빛 속에 드러내는 일이라면 신문 기자보다도 더욱 예민한 필봉을 휘두르는 존재가 시인이 아닌가? 시인은 현대 도시인들의 편견을 질타하면서도 뚝배기 된장 같이 구수한 인정의 맛이 ‘연변 아줌마’와 연변 사람들에게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쓰끼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려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료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 「연변 4」중에서
시 「연변 4」에서 암시하듯이 예전에는 ‘연변’이라는 이름이 보편적 인간애의 상징이자 인정의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돈과 황금에 눈이 멀어 ‘가짜 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물로 전락해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시인은 슬퍼하고 있다. 같은 민족의 구성원인 한국 사람조차도 연변에서 온 사람을 차별하게 된 이유들 중 한 가지를 연변 사람이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화 시인은 특정한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철저하게 중립적인 시각을 통해 지역 이기주의를 초월하고 있다. 사람다운 사람의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시인의 본능이요 그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석화 시인의 문학적 기반이라는 것은 그의 시 「연변 6」에서 또다시 확인되고 있다.
랭장고든 전자렌지든
TV 또는 오디오든
괜찮은 물건들에는 다 있다
사람의 그것처럼
은근히 부끄럼 타는 그것은
물건들의 뒷부분 엉덩이 쪽에 숨어있다
구석진 곳에 코 박혀 숨이 칵칵 막혀도
빛 한줄기 못보고 먼지만 쌓여가도
처절한 《살신성인》
단 한순간의 사명을 위하여 인내하는
전류든 전압이든 과부하가 걸릴 때
제가 먼저 새카맣게 타서 끊어져 버리는
퓨즈는 가전제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랭장고가 다시 찬바람 내고
TV가 다시 꿈같은 오색의 세계 펼쳐주고
제 몫을 다한 그것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때
예민한 센스 때문에 제 몸 먼저 태우는
퓨즈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닌 줄 안다.
- 「연변 6」
석화 시인은 기술문명의 중심부에 서서 인간관계의 병리현상을 통해 사람과 자연 간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진단한다. ‘제 몫을 다한’ 냉장고, 전자렌지, TV, 오디오 등의 물건이 폐기물 처리장으로 실려 가듯이 오늘날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국 땅에서도 사람은 어느덧 효용성과 기능성의 잣대로 저울질을 당한다. 인격과 존엄성을 갖고 있는 개인이 상품 또는 물건처럼 전락하고 있는 것은 중국 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석화 시인은 그의 시 「연변 6」에서 효용과 기능이 소진되면 사람도 ‘퓨즈가 끊어진’ 기계처럼 폐기물 취급을 당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람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며, 사람을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해나가는 땅에서는 반드시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이것은 곧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 일으킨다. 1964년 사회생태주의(社會生態主義)를 창시한 철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에서 기인한다”라고 진단하면서 오늘날 몸살을 앓고 있는 ‘생태문제는 곧 사회문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람과 사람 간의 사회적 관계가 뒤틀리고 왜곡되면 사람과 자연 간의 생태적 관계도 파행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 「연변 6」은 이것을 암시하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람을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고 고귀한 목적 그 자체로 바라보면서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의 생명까지도 존중하게 된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자연을 향한 자애(慈愛)를 낳아 생태계를 보호하는 길을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과 자연 사이에 이어져 있는 생명의 연결고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으며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생태주의’라고 부른다면, 사람과 자연을 바라보는 석화 시인의 두 줄기 시선은 ‘생태주의’관점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물론 모든 시인의 작품 속에는 크든 작든 ‘생태주의’ 경향이 녹아있게 마련이지만 석화 시인의 작품에서는 이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기술문명이 우리에게 안겨준 각종 병리현상들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시대의 파수꾼처럼 지속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과 자연, 이 양자에게 닥쳐온 실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대안(代案)을 등단 이후 지금까지 중단 없이 제시해왔다. 석화 시인이 시적 언어로 제시해왔던 정신적 대안과 가장 잘 어울리는 패러다임의 이름은 ‘생태주의’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병민의 견해는 이러한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시인 석화는 생명시학에 대한 진지한 추구로부터 인간을 자연속의 생명체로 관찰하였다. 하기에 그는 자연의 모든 생명에서 인간생명의 연속과 참뜻을 확인하였는 바 푸르른 하늘과 출렁이는 바다와 강물, 무성한 숲과 한 그루의 꽃과 나무,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돌, 나는 새와 바람과 구름 등등 모든 자연의 물상들을 인간과 함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보았고 그 속에서 인간생명의 의의를 확인하였다.” - 김병민의 평론 「‘버림’의 시학」중에서
문학평론가 김병민이 언급하고 있는 ‘생명시학’과 필자가 제시한‘생태주의’는 동질적인 개념이다. 두 가지 개념 모두 석화 시인의 문학세계를 대변하는 이름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유년 시절부터 고향인 연변 지역에서 만났던 자연은 시인의 가족과 다름없다. 그가 사람과 자연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획일적 평등의식에서 벗어나 있다. 사람의 역할과 자연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되, ‘생명’의 고귀한 이름 아래 사람과 자연의 동등한 수평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백두산 산줄기 줄기져 내리다가
모아산이란 이름으로 우뚝 멈춰 서버린 곳
그 기슭을 따라서 둘레둘레에
만무라 과원이 펼쳐지었거니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 땅의 기름기 한껏 빨아올려서
이 하늘의 해살을 가닥가닥 부여잡고서
봄에는 화사하게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푸름 넘쳐 내더니
9월,
해란강 물결처럼 황금이삭 설렐 때
사과도 아닌 것이
배도 아닌 것이
한 알의 과일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
우리만의 《식물도감》에
우리만의 이름으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 《연변사과배》
- 「연변 7」중에서
연변 지역의 향토색이 물씬 풍겨나오는 고유한 과일 ‘사과배’는 연변의 자연을 대표한다. ‘사과’와 ‘배’의 결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조화의 세계를 지향하는 동양정신의 상징을 ‘사과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전혀 화합할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별개의 대상으로 동떨어져 있던 ‘사과’와 ‘배’가 ‘한 알’의 몸을 이루게 되듯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이 각자 고유한 영역을 지키면서도 서로 간의 경계를 넘나들어 조화를 엮어낼 수 있음을 시인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자연철학은 연변이라는 특정한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우주 전체로 확대되어 사람과 자연이 함께 추구해야 할 상생(相生)의 당위성을 낳고 있다.
석화 시인이 지향하는 사람과 자연의 생태적 하모니(harmony)는 사회적 현실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의 시를 피상적으로 바라본다면, 사회적 현실의 병폐를 견디지 못하고 자연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낭만주의자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쯤으로 그의 문학을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화 시인은 자연을 인간의 사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사람의 거울이자 사회의 거울이 되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자연은 민족적 한(恨)을 대변해주는 동반자이자 공동체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위로자가 되고 있다. 그가 초청하는 자연은 기술문명의 파괴적 행위에 대해 경고하고 생명을 향한 사랑을 촉구하는 선지자의 역할까지도 감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석화의 문학 속에서 자연은 “시인의 대리자”이며 “또다른 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조선족 시인들 가운데 석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통합적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 ‘꿈’은 낭만주의자의 현실도피적 몽상이 아니라 ‘생태사회’또는 ‘생명공동체’를 지상에 구현하려는 리얼리스트의 이상(理想)이 아니겠는가? 석화의 시는 이러한 감동적인 이상(理想)을 향하여 머나먼 여행길에 오른 모든 사람들에게 충실한 길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