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성경도 아카데미 BIBLIST ACADEMY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현대신학비판 스크랩 존 윔버 목사의 정체성
한산 추천 0 조회 121 11.11.23 15: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미국 아주사 거리의 오순절 기도운동, 60년대 카리스마틱 운동에 이어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을 '20세기에 일어난 3번째 성령의 물결' 즉 '제3의 물결'로 명명했다.

이때 설립된 교회의 이름이 빈야드였기 때문에 '빈야드 운동'으로 불린다.

전 세계에 빈야드교회는 약 1500개가 있으며 이중 600여개가 미국에 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힐송 유나이티드' 같은 찬양 운동도 빈야드교회에서 시작됐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337745&cp=du

 

 

 

피터 와그너 박사는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쳤다.

80년대엔 같은 학교에서 빈야드 운동의 지도자인 존 윔버와 함께 치유기도, 영적 전쟁을 다뤘다.

이 과정에서 이 시대 성령의 역사를 ‘제3의 물결’이라는 용어로 표현해 관심을 받았다.

http://news.nate.com/view/20101019n21064

 

 

신사도개혁운동, 알파코스, 내적치유, 열린예배 등은 빈야드 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는 존 윔버 목사이므로

존 윔버 목사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대구 동신교회 권성수 목사는 존 윔버의 능력전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3물결은 존 윔버를 주축으로 해 피터 와그너, 폴 케인 및 캔자스 예언자들 등이 전개해왔는데,

한국교회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능력전도운동은 복음교리보다 체험과 실용주의와 위로 등을 더 강조한 점이 문제다.

복음의 핵심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초점이 표적과 기사에 있다.

존 윔버의 빈야드 집회에서는 십자가를 찾기 힘들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52712

 

 

 

행크 해너그라프가 쓴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부흥과개혁사)의 책 소개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있습니다. 


이 책은 존 윔버, 베니 힌, 존 아놋, 밥 존스, 마이크 빅클, 릭 조이너 등

거짓 부흥 운동 지도자들의 비성경적인 주장과 행동을 통해,

성령 운동의 3의 물결이라 불리는 빈야드 운동과 최근 신사도 운동 등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기독교 왜곡 현상을 보여 준다.

이 책은 진리의 깃발 아래 몸을 숨긴 채, 우리를 신비한 경험으로 유혹하고, 영적으로 기만하며, 거짓 경험을 부추기는 많은 자가당착적인 행위들을 낱낱이 파헤친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부흥 운동이 수많은 교회에 끼친 악영향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사탄은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의 우두머리다.

사탄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계몽’이라는 천사의 탈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사탄을 만날 때,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이런 사탄의 속임수가 바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이다.

 

 

톰 스타이프 덴버 십자로 교회 목사는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을 다음과 같이

추천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리에서 그렇게 멀리 벗어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늘 빈야드 교회 연합회(AVC) 지도부에서 일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예언에만 치중한 나머지 점점 성경에는 무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보다는 그저 ‘직통 계시’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노회의 교회들은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가 신비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양 떼를 늑대한테서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빈야드 교회 연합 지도자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주관성에 의존한 것은 목회자로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 시대에도 바울의 사역을 막으려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교도들과 율법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잘못된 교리를 심어 놓으려 애썼다.

몇 달씩 집을 떠나, 열기와 먼지 속에서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먼 거리를 여행하고,

또 힘들여 성경을 하나하나 베껴 쓰는 일을 한 것은 바로 거짓 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은 이상하게도 거짓 교리가 너무나 철저하고 신속하게 파고든다.

성경적으로 바로잡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때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가짜 부흥 운동이 출몰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그런 시대라면『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 이 책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진정한 영적 은사를 사모하고,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들려진다면 좋은 도구가 될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가짜 부흥 운동에 현혹되었던 사람들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되돌아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회는 진정한 개혁을 경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부흥을 맛볼 것이다.

 

http://www.rnrbook.com/

 

 

 

 

 

합동신학교 오덕교 교수는 빈야드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 교회를 강타한 대표적인 신학적인 흐름을 든다면

'제 3의 물결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의 물결운동'은 1977년 존 윔버(John Wimber)에 의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어

캐나다, 영국, 중남미 전역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1. 빈야드 운동과 한국 교회


'제 3의 물결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91년 존 윔버(John Wimber)의 [능력치유]가

이재범목사에 의하여, [능력 표적]이 도서 출판 나단에 의해 번역되면서 부터이다.

이러한 은사운동의 보급은 치유 목회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었다.

  
(1) 빈야드 운동에 대한 신학자들의 진단 

이재범 박사는 빈야드 운동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하면서 빈야드 운동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당면한 침체의 늪에서 나올 수 있는 "출애굽"운동이라고 극찬하였고(64),
  
한신대학교의 예영수교수는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토론토 축복'은 성 프란시스(St. Francis), 존 웨슬레(John Wesley),

캐더린 쿨만(Catherine Kuhlman), 멜 태리(Mel Tari)와 같은 인물들이 체험한 바 있는

교회사적인 사건이므로(71) 이를 성급하게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74). 
   
 
(2) 빈야드 운동의 확산
이와 같은 한국 신학자들의 무비판적인 평가 또는 찬양 가운데 수천명의 목회자들이

빈야드 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로스앤젤레스의 빈야드 교회나

캐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에어포트 빈야드 교회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많은 영향을 한국 교회에 끼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빈야드식으로 바꾸어 순서없이 진행하는가 하면

다른 교회는 예배를 치유 집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3) 빈야드주의자들의 개혁주의 신학 비판 
빈야드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학을 그들의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빈야드주의자들은 19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를

중심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매도하면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2. 존 윔버와 빈야드 운동의 신학적 기초


윔버의 신학은 사도행전의 은사들이 역사 속에서 연속된다는 신학적 전제에 기초한다. 
  
(1) 퀘이커의 신령주의적 신학적 배경


윔버의 신학은 첫째로 퀘이커 교회의 신령주의적 신학에 기초한다.

윔버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퀘이커교도를 통해서였고,

목사 안수를 받은 단체도 바로 퀘이커 교회인 프렌즈 교단(Friends)이었다.

  
윔버는 이러한 신령주의적 퀘이커 사상에 기초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했다.

  
윔버는 주관적인 직관을 신학의 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내적인 빛'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감, 꿈, 환상, 성경 귀절이 있다고 하였다(능력치유 323). 
   
윔버에게 내적인 인상이나 투시는 최고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퀘이커의 직관이나 윔버의 투시 현상은 기독교인의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한 현상들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도 하늘에서 불이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 말한다(계 13:13).

그러므로 직관과 투시는 사탄의 전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명저 [신앙과 정서]에서 말하기를, "마귀는 자신의 본 얼굴을 숨긴다.

그리고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서 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경배하도록 만든다.

사단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그런 모든 기만을 형성한다.

그래서 거짓된 종교와 가짜 은혜와 가짜 정서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야말로 이 방법은 마귀가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마귀는 어리석고 기만당하는 심령에 보금자리를 튼다"고 하였다.
  
많은 거짓 종교는 이러한 직관과 상상력에 기초한다.

    
(2) 체험중심적 신학 사상

둘째로 윔버의 신학은 인간의 체험에 기초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과 그의 사역인 이적과 기사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윔버는 성경(text)을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context)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윔버는 이러한 퀘이커의 직관 신학에 기초하여 치유 신학을 세워 나갔다. 
  
(3) 치유 신학의 혼합주의적 배경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사상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이단 운동의 초보가 된다.

더구나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신학을 전개한다면

그러한 신학은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윔버의 신학이다.

 

우리는 윔버의 치유 신학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며,

성경을 교재(text)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참고서(reference)로 사용하여 발전시킨

인위적 사상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윔버는 이러한 인위적 배경에서 그의 신학을 세워가기 위해 루터와 칼빈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신학보다는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

  
로마 천주교도들은 이와 같은 성물이나 성상을 숭배하며 그것들을 통한 기적을 기대하며

성자나 성상을 순례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미신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로마 천주교회의 이적 신앙을 배척하여 왔다. 그러나 빈야드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달리 모든 이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인정하면서

로마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이적 신앙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상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개혁주의 교회의 은사 이해


윔버는 이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개혁주의자들을 비판했다.

 

(1) 계시의 종료 사상
그러나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주의를 반대하였다.
신비나 이적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와 이적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고린도전서 13장 해석인 [사랑의 열매]에서 방언과 이적과 예언의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 은사들이 원시시대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 시대에 주어졌던 것이다.

특히 그 시대에 주어진 그러한 특이한 은사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건설키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정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완전히 성립되었을 때 그 특이한 은사는 멈추어졌다." 
  
 
(2) 특별은사의 제한성
개혁주의자들이 은사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은사가 신앙의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적을 체험한다거나 이적을 행하는 은사를 소유함이 구원의 표시가 될 수 없다.

 

 

마태복음 7:22-23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빈야드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요건으로 강조하는 특이한 은사를 가지고도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갈 자들이 많은 것이다.

  
4. 빈야드의 영적 현상에 대한 개혁주의적 평가


빈야드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의 일반 은사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 또는 육체적인 신앙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능력 치유 351).

성령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육체적인 체험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빈야드의 소위 '영적 체험 현상'
첫째는 몸의 진동과 떨림이다.   
둘째는 고꾸라지는 현상이 있다. 
셋째로 술 취한 듯한 행동이 있다.

넷째로 몸부림치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런 현상에는 뛰어 오르내리거나 손발을 움츠리면서

개발처럼 만들거나 얼굴을 찌푸리거나 몸이 경직되는 등의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주로 성적인 범죄로 인한 내적인 갈등이 표출되는 경우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다섯째로 웃거나 흐느껴 우는 현상이 있다.   
마지막으로 장시간에 걸쳐 열렬하게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행위가 있다. 
  
(2) 빈야드의 영적 체험 비판
그러나 우리는 윔버가 주장하는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윔버의 영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곧 진동의 경우 평온한 진동은 목회의 소명과 관련된 것이며 격렬한 진동은 악령과 대치하는 경우라고

하였고, 고꾸라져 머리를 땅에 찧는 현상을 체험하면 새로운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배경도 없는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에 근거한 것들이다.
  
셋째로 은사를 가진 인간을 신격화하고 있는 점이다. 
  
 
(3) 영적인 체험에 대한 개혁주의적 진단
윔버의 신비주의적 은사 운동은 18세기 중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이후

조나단 에드워즈가 체험한 미국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곧 신앙적인 판단 기준이 흐려지면서 은사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은사주의자에 반대하여 합리주의자가 등장하여 교회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서 에드워즈는 은사주의 운동을 교회 몰락의 징조로 간주하였고,

이러한 은사주의로 인한 신앙적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1744년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몸의 떨림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고꾸라지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또한 에드워즈는 찬송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 간주하는 윔버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찬송을 즐겨 부른다고 해도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맺는 말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주의자들은 내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이나 투시,

또는 직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여 신앙을 주관화하고, 진동이나 넘어짐,

낄낄대며 하루 종일 웃어대는 웃음,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육체에 나타나는 현상을 영적인 체험으로

간주하여 체험만이 신앙의 기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적인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주관화하거나 체험주의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체험이 신앙적인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면,

기독교는 더 이상 계시의 종교가 될 수 없으며 모든 판단의 기준이

인간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험을 강조하는 주관주의는 부패한 죄성의 영향을 받는 자율주의로 나가게 되고

자율주의는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있다.

  

    
(월간<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평택대학교 이광희 교수는 빈야드 운동에 대하여 실천신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본론: 빈야드운동의 목회상황적 특징
  
A. 거룩한 무질서


빈야드운동은 기존해 있는 종교적 모든 형식과 전통을 벗어버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특별히 예배의식의 변화로 특징 되어진다.

빈야드교회의 예배에는 주보가 없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작시간은 있으나 끝나는 시간이 없다.

왜냐하면 예배를 예배순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에 맞추기 때문이다.

성가대 역시 기존교회와 같은 형태의 구성은 없고 7-8명의 전문 찬양인도자가

기타아, 키보드, 드럼 등의 악기를 가지고 회중앞에서 찬양을 이끈다.
  
예배드리는 모습도, 복장도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가 체험 되는대로 자유스럽다.

모든 교인들과 예배순서자들의 복장은 한결같이 티셔츠에 블루진차림의 복장이다.

 찬양은 약 30여분간 율동과 온갖종류의 제스쳐와 함께 드려지고 역시 케쥬얼복장의 목사가 나와서

광고한 후에 헌금순서가 있다.

헌금순서 후에는 15분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1시간이 넘는 설교가 있고,

설교 후에는 10여명씩 그룹을 지어서 그 중에 한사람이 앞에 있는 테이블에 있는

빵과 포도즙을 가져와 조금씩 떼어서 큰 컵 하나에 담긴 포도즙에 찍어 먹는다. 
       
무엇보다도 이와같은 무질서한 자유함 속에서의 질서를 주장하는

이들의 출발점(Starting Point)은 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것들(Text)"이라기 보다는 저들의 목회상황속에서

자연스럽게 수립된 목회철학(Context)으로서 기존의 종교적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또 하나의 무질서한 종교적 형식주의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본 발표자는 빈야드운동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탈 질서주의적 태도(탈 법주의)는

이 운동의 지도자인 존 윔버의 신학적 성장배경인 퀘이커교의 영향과

이 운동의 발생지인 남부 켈리포니아의 문화적, 기후적 영향에 의한 상황적산물임을 지적하고 싶다.

특별히 빈야드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은 제 2차세계대전 이후에 출생한

 베이비부머들(Baby Boomers, 1946-1964년 사이에 출생)인데, 

 Robert Redman에 의하면 그들은 뿌리없음, 외로움, 자기성취, 초자연주의, 종교성, 세계주의,

그리고 전체적 통일성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한주간 동안 직장에서 정장을 하고 시달렸는데 교회가는날 좀더 편하게 갈 수 없겠는가 하면서

전통적으로 나들이 옷으로 인정되던 주일정장을 벗어버리고 진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교회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빈야드의 종교적 형식으로 부터의 탈피는 그 자체가 상황의 산물이지

모든 상황을 초월한 절대적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런데 빈야드세미나에 다녀온 목회자들 중에는 성급하게 예배스타일을 빈야드화함으로

교회가 시험에 들게 되고 교인들이 떠나게 되는 부작용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예배형식은 비성경적이고 반성령적이며 빈야드의 예배형태를 도입해야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리라고 고수하는 것도 본문과 상황의 상관관계를 혼돈한 가운데

상황을 위해 본문을 이데올로기화시키는 위험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B. 하나님나라의 말씀 (능력사역)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신 갈보리와 부활의 사건 이후에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는 구원의 소식을 교회에 위임하셨으니,

빈야드교회는 예수의 이름과 권세로

사탄을 멸하고 모든 문화와 족속에게 하나님나라를 회복하도록 사역할 비젼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빈야드운동은 기성교회가 천국복음을 가르치기만 하고 실제로 능력사역을 통해

천국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소극적이거나 실패한 것으로 보아 언제 어디서나 말씀사역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그 말씀사역과 관계된 능력사역이 뒤따라야 된다고 주장한다. 
    
  
C. 확장된 목회개념(만인 제사장설)


빈야드교회가 일반교회와 표면적으로 다른점은 교역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뚜렷이 없다는 점과

교회와 교단의 조직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목회사역의 목회자의 설교  중심적인 관점에서 탈피해

평신도들도 목회사역에 참여한다는 입장이다.

  
  
종합적 평가 
  
1. 느슨한 교리


빈야드는 법보다도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신앙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교리조차도 단순하고 간단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같은 결과로 이들의 교리가 표면상으로는 보수신학과 다를바 없이 보이나

사실은 중대한 오류와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존 윔버의 신앙성장 배경이 경건주의나 신비주의신학의 주관주의적 영향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은사주의적인 영적 교만의 위험

 
전반적으로 한국교회가 침체되어 있는 국면을 돌파해 보려는 시도로 목회자들이 앞다투어

아나하임이나 토론토의 빈야드교회에 다녀오고 어떤 목회자는 토론토에 가서

비로소 복음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안양대학교 김성봉 교수는 빈야드 운동에 대해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1. 빈야드 운동
(1) 그들의 문제 제기
이 운동에서의 중심되는 표어는 "능력전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 현장에서 당면하는 현실 특히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당면하는 현실을

"능력대결"이란 말로 표현하고, 능력대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을 가리켜 능력전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2) 해결 방식
이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이 운동은 능력대결의 현장을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능력전도를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성과  
능력전도를 함으로 전도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그동안 중단되거나 마이너스로 떨어졌던 교회성장의

곡선을 다시금 상승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2. 빈야드 운동에 대한 이의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도 신중하고자 한다.
  
(1) 문제 제기에 대하여 
  
마치 하나님의 능력은 초자연적인 데서만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저들의 편협한 종교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2) 해결방식에 대하여


이들은 능력대결의 현장을 제시하고 그 해결방식으로 능력시위를 통한 능력전도를 말한다.

그런데 과연 능력시위를 통한 "능력전도"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능력시위와 관계해서 어떤 주술적인 방식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의 문화전반에 걸친 문제를 치유에 국한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그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단지 치유와 회복을 위한 기도 정도로

제한시키는 경향으로도 보인다.

 

  
(3) 성과에 대하여


종교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견제되어 온 움직임들이

단지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아래 마치 제동장치가 풀린채 언덕에 세워놓은 차처럼 이렇게 굴러가도록

해도 좋은지 심히 의문스럽다.

지난 16세기 이래로 가르쳐져 온 대부분의 건전한 가르침들이 최근까지 그 건전성이

의심되었던 가르침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말았다.

    
3. 빈야드 운동의 배경과 조직신학적 입장에서의 평가 
  
(1) 퀘이커교적 배경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존 윔버의 신앙과 신학의 배경은 퀘이커교적이다.

  
  
개혁신학자 바빙크는 종교적 개인주의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종교적 개인주의의 절정을 퀘이커교에서 보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든 객관적인 것 즉 성경, 그리스도, 교회, 직임, 성례는 도외시되었다고 한다.

               
 
  
(2) 성경관

 
성경이 갖는 계시적인 성격을 간과한채

단순히 그 가운데 기록된 내용의 현재적 반복에 치중한다는 것은

웬지 성경의 의미를 단순화 내지 미신화하는 감이 없지 아니하다. 
  


  
(3) 성령관

 

 칼빈은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윔버나 그의 동료들은 성령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의 전체적인 진술에 그다지 매이지 않는듯이 보이며 그들이 간증하는 수많은 내용들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그 말씀으로 제대로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영적인 현상들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자신들을 노출시켰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각양 영적 현상들로 보여진다.

  
우리로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대로의 내용을 믿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대로 재현되게 될 것을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4) 성과나 성취 위주의 실용주의적 정신 
   
성과나 성취 위주로 그의 삶을 가늠할 수 없다.

참된 능력이란, 외적 조건에서 우세를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적 조건에서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변함없이 꿋꿋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5) 신앙내용이나 생활에 있어서 중심의 이동


이 운동은 "능력대결"과 "능력전도"라는 기치 아래 균형을 상실한채

한쪽으로 치우친 감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의 대화의 중심을 이적과 기사에만 두게 될 때, 우리로서는 문제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성령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령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에는 문제를 느낀다.

성령의 존재와 활동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도 안된다.

 
  
4.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대안
  
(1) 보다 근본적인 문제 
  
복음주의자들이 '참으로' 복음주의자들이 되려면 결코 성경관에 있어서 타협을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복음주의가 외형적으로 점점 더 커진다 할지라도,

복음주의자들의 상당부분이 성경관에 있어서 동시에 타협적이 되어 버린다면

외형적 증거는 무의미하다.

 

빈야드 운동이 영적 종교적 관심을 부추겨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운동에 동원된다 하더라도,

더 이상의 영적 분별력은 지니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오늘날은 '선교'라는 이름아래 더이상 출신교단을 따지지 않게 되었다.

피선교지에서 무엇을 가르치는가는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예수 - 구원' 식의 극히 단순화된 복음만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같은 분위기에서는 종교개혁 신앙의 전통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번거로운 것에 불과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리는 분열의 위험이 있는 것으로 지목된다.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풀러(Fuller)에서의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에 의한

초교파적인 선교에 대한 강조와 성장에 대한 일방적인 관심 가운데서만

오늘날과 같은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현상이란 전혀 다른 전통의 것이 복음주의란 이름 아래 개혁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을 가리킨다.    
  
(2) 그에 대한 대안


개혁신학의 전통을 제대로 전수하여 우리의 신앙적 분별력을 높여야 하겠다.

개혁신학의 전통을 힘써 발굴하여 우리가 이어가야 할 바 건전한 가르침에 견고히 서서

영적 분별력을 확보해 나가야 하겠다.

  
또한 복음전도 또는 선교란 이름아래 무분별하게(신앙고백을 개의치 아니하고) 통용되는

초교파적 분위기에 대하여서도 그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고도의 신앙유산을 전수해 온 교파일수록 그 손실이 클 것이며,

전반적으로 질적저하 현상을 낳게 되고 말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6년 3월호)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