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호 淸州韓氏報2005년 3월 15일(화요일) 【3】
익산 왕릉(益山 王陵)은 마한(馬韓)의 무강왕릉(武康王陵)
익산시의 철물철거, 홰손은 언어도단
�기자(箕子)
기자는 원래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15세손인 태정(太丁)의 아우 리(理)의 아들이며, 제을(帝乙·태정의 아들) 17년(丙武·BC1155)에 은나라에서 탄생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1년(乙酉)에 은나라가 주나라 무왕부에망하자 동해의 조선으로 나와 무왕으로부터 나라를 봉해 받고 평양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후조선이라 했다. 주나라 소왕(昭王)30년(武午·BC1183)에 재위 40년만에 93세로 서거했다.
1. 후조선과 우산국(于山國·송(松)과 중(仲)의 형제)
태조 문성왕(文聖王) 기자는 후조선을 세우고, 2대 장혜왕(壯惠王·이름 松)은 주나라 성왕(聖王)34년에 즉위하여 아우를 아산국(牙山國)에 봉하여 나라를 세웠다. 기자의 후손으로 조선과 우산국의 이름을 합쳐 선우(鮮于)라고했다.
3세 경로왕(敬老王)에 이어 41세 애왕(哀王·이름 準)에 이르러 후조선은 위만(衛滿)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남천(南遷)하여 애왕은 한(漢)나라 혜제 1년 정미(丁未)에 마한을 세우고 도읍을 금마군(金馬郡)에 옮긴 후, 그해에 서거했다. 후조선은 기자로부터 41대 애왕까지 929년만에 끝났다.
금마군은 지금의 전북 익산이며 미륵산이 마한의 도읍지이다. 지금도 용화산에는 궁터와 석탑이남아있다.
�마한(馬韓)
강왕(康王)은 마한의 초대왕이며 그 후 8대를 내려오며 나라를누린지 203년, 준왕이 BC17년 백제 온조왕(溫祚王)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마한은 끝난다. 강왕 무신으로부터 이때까지 177년이다.
마한 말년에 원왕(元王)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자 ①우평은 고구려에 귀의(歸依)하여 유리왕(琉璃王)을 섬겨 북원(北原)선우씨(鮮于氏)가 되었고 ②우량은 신라에 귀의하여 탈해왕(脫解王)을 섬겨상당(上黨)한씨(청주한씨)가 되었으며 ③우성은 백제에 귀의하여 온조왕을 섬겨 덕양(德陽)기씨(奇氏)가 되었다.
이렇게 성원(姓源)을 가지게 된 청주한씨는 대대로 내려온 계통이 마한에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씨는 기자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우량 이후 시조란(蘭) 태위공(太尉公)에 이르기까지 32세인데, 계대(系代)만 전해올 뿐 기타 사적(史蹟)에 대해서는 고증을 찾을 길이 없다.
2. 정사(正史)로 본 익산쌍릉 (사적 제87호)
▲쌍릉(雙陵)이란 우리 역사상 하나 밖에 없는 쌍릉이다. 높이 3.1m, 주위 약 0.5km
인 익산쌍릉(전북 익산시 팔봉면석왕리)은 마한의 무강왕과 그 후비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속칭 백제 무왕(武王) 및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도 전한다.
1917년 학술적인 발굴조사 결과능의 구조가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의 왕릉 등과 같은형식에 속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석랑(石廊)안에서 비교적 완존한 목관(木棺)이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1950년 6.25동란 당시 파손되었다.
익산쌍릉의 주인공은 마한의 무강왕 또는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라고 주장이 갈리는데, 사적(史的)으로 고찰한다면 마한의 시조인 무강왕과 그의 비(妃)이다. 왜냐하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卷)24, 충숙왕(忠肅王)16년조에,
三月盜金馬郡馬韓祖虎康王陵
捕擊典法司及賊逸政丞鄭方吉欲
劾典法官의 贊成事林仲沇沮止曰
“賊擊獄二年無贓而死者多矣方吉
曰告知發塚人多林仲沇慙志”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직역(直譯)하면 다음과 같다. 3월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 조상 호강왕의 능을 파헤쳤으므로 이를 잡아 전법사에 넘겼는데 달아나 버렸다. 정승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고자 하니 찬성사 임중연이 막으면서“도적이 독에 갇힌지 2년에 드러난 장물은 없고 죽은 자가 많습니다”하였다. 정방길이“무덤을 판 사람이 금이 많은 것을 본시 알았다”하니 임중연
이 부끄러워하고 성내었다 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마한의 무강왕이 주인공임이 틀림없는 정사(正史)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建置沿革)>
本馬韓國(본마한국) 後朝鮮王箕準子四十一代孫地避
衛滿之亂浮海而南至韓地開國仍號 馬韓
至百濟始祖溫祚王幷之自後號金 馬渚新羅神文王改金馬郡至高麗屬
全州忠惠王後五年以元順帝皇后奇氏外鄕陞爲益州本朝
<군명(郡名)> 마한 익주(馬韓益州)
<불자(佛字)> 미륵사 (彌勒寺)
在龍華山世傳武康王旣得人心 立國馬韓一曰王與鮮花夫人欲幸獅
子寺至山下大池邊三彌勒出現池 中夫人謂王曰願建伽藍於此地王許
之詣知命法師問塡池術師以神力一 夜頹山塡池乃創佛殿又作三彌勒像
新羅眞平王遣百工助之有石塔極大 高數大東方石塔之最
�權近詩窓外靑山似削成愁時擧目轉分明秋風日日吹巾杖欲上高岑望玉京
<고적(古跡)> 쌍릉 (雙陵)
在五金寺峯西數百步高麗史云後朝鮮武康王及妃陵也俗號末
通大王陵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末通卽薯之轉
금마산 (金馬山)
甄萱云昔馬韓先起赫世勃興辰卞從之而興於是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고려사절요의 중요성
총 35권으로 고려의 편년사(編年史), 춘추관 편찬, 1452년(문종2년)에 완성, 고려사의 요약이 아니라 ‘고려사’와 같은 시기에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다. 고려사만큼 상세하지는 않지만 거기에없는 자료가 많이 들어있다.
고려사절요에서 분명하게 마한 조상 호강왕이라 했으니 고려사보다 더 확실한 정사로 인정할 수있다. 마한의 무강왕을 호강왕(虎康王) 또는 강왕(康王)이라고도하니 익산쌍릉의 주인공은 마한의시조 무강왕이 확실하다.
3. 일본의 우리 역사 말살정책
�국사에 단군왕검 만 있을 뿐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시대를없애버렸다.
�김해에 있는 구지본능선을 잘랐다.
�전국의 산맥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
�명당이라는 유명인들의 묘소마다 쇠말뚝을 박았다.
�산을 잘라 없애버렸다.
�익산쌍릉 왕릉의 발굴을 하면서 치아 1점만 증거품으로 남겼다.
4.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역사성 시비
조선조 후기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문예미학을 다룬 책에서“비슷한 것은 가짜”라고 말한 바 있다. ‘관세음응험기’는 우리 역사에는 없다. 정사가 아니기에 내세우지를 안했다. 중국문헌이라고도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백제말 익산 천도설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부식(金富植·1076~1151):고려 인종 때 명신, 사학자로1145년 편찬을 끝낸 50권의‘삼국사기’에서도 익산천도가 언급되지않은 것을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연(一然·1206~1286):고려 후기의 고승(高僧), ‘삼국유사’의 저자 김견명(金見明)으로 후에일연으로 고쳤다. 78세에 국사(國師)가 되고‘삼국유사’9권을 썼으나 익산천도에 대해서는 한구절도 언급한 흔적이 없다.
김부식, 일연이 중국사나 일본사를 모를리가 없는데 ‘관세음응험기’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고있는 것이다. 이러한‘관세음응험기’를 내세워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설을 주장해온 여러 교수들도“삼국사기에 기록이 없어 인정을받지못하고 있다”고 한결 같이 논문에서 시인하는 결론을 내리고있다. 국립박물관과 전북도청에 소장된 논문으로 자가당착의 우를범했다.
‘관세음응험기’를 고찰해 보면 ‘삼국사기’를 무시하고‘일본사를 위한 역사 만들기’와 중국화는 곧세계화라는 노골적인 역사 만들기이며 풍수지리설로 꾸며져 있다.
5. 백제무왕의 익산천도는 사실(史實)이 아니다.
▲한국사 고대민족의 성장 2권(국사편찬위·1984.1.30),
삼국사기 무왕조에 백제본기 제5권,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제2에는 무
왕이 익산에 천도했다는 사실이 한자도 없다.
특히 미륵사는 국사에서 왕흥사라 했고, 부여군 규암면에 있던 절이다. 또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에 있던 절로 지금의 미륵산 사자암이다. 이는 삼국유사 주(註)에 의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참고논문 및 문서에서 이남석, 임영진, 최완규 교수등은 가정과 추정으로 명확한 정설을 내세우지 못했다.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논문들
① 백제고분과 익산쌍릉 (이남석 공주대 교수)
② 백제고분과익산쌍릉에 대한 토론문 (임영진전남대 교수)
③ 익산지역의 백제고분과 무왕릉 (최완규 원광대 교수)
④ 백제고분과 익산쌍릉에 대한 토론문 (서오선 국립부여박물관장 문제 제기) 이상의 논문내용으로는 아직은‘익산천도설’을 주장할 수 없으며‘익산쌍릉’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단적으로 말한다면‘고려사절요’권 제24, 충숙왕 16년조에 마한왕 즉 마한조 호강왕릉으로 명시되어 있고, ‘고려사’권 제57, 지권 11, 지리지 02에서 후조선 무강왕과 그 비의 능이라 했으며, 무강왕의 세보에서 청주한씨, 북원선우씨, 행주기씨의 시조가 분명하다.
6. 익산시의 무강왕릉 석물 철거·훼손은 언어도단
삼한갑족(三韓甲族)인 이들의 마한원왕(馬韓元王)이 기자의 후손인 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익산시는 마한시조 무강왕릉 앞에 있는 혼유석과 비석 등 석물(石物)을 없애버린 것은 언어도단이다. 익산시의 불법폭거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삼한갑족의 대의명분에 따라 조용히 원상복구를 요구했으나 비웃듯이 2005년1월6일 오후 7시30분부터 8시18분까지 KBS1-TV FM를통해“익산은 백제무왕의 도읍지였다”는 특집방송까지 서슴치 않았다.
원광대 마백(馬百)문화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총 18명이 출연하여 ‘타이틀’대로 주장을 폈으나 전북대 김상옥교수는 마한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고고학적 고증을 주장했다. 원광대 최완규교수는 익산쌍릉의 목관에 사용된 목재료 고야진(高野·こうやまき=삼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높은 산에서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출토되어 일본 남부지방에만 분포되고있는 수령 300년 이상의 금송(金松)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백제 전대(前代)의 왕실에서 장례전통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마한 시조 무강왕 시대에도 이미 일본과 교역이 있었고, 제주에서도 2004년 아주 훌륭한 금송이 발견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육성한다는 관계기관의 발표까지 있어, 이 목재가 무왕과 무왕 주변왕들만 사용한 목재가 아니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국가공인기관 등의 익산쌍릉에 관한 답변들
�2004.10.11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은 문화재청과 박물관에 문의하라고 답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004.11.2 제87호 익산쌍릉 관련자료는 출토유물목록 일부와 최근 익산쌍릉과 백제고분의 제 문제 참고자료만있을 뿐 이라고 답변.
� 국 립 전 주 박 물 관 장 은 2004.10.21 정보공개청구에 출토된유물과 관련된 역사적고증자료 없다고 회신.
�문화관광부장관으로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것으로 공문회신을 함으로써 익산쌍릉은 연고자인 한씨, 선우씨, 기씨들의 주장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6. 청주한씨는 마한시조 무강왕의 후손
▲보학적(譜學的) 고찰
기자조선(한씨조선)을 거쳐 광무 10년 병오년 단군기원 1210년
부터 200년간 왕족으로 마한을 지배한 삼한갑족이다.
우리 민족의 족보 유래를 보더라도 고려 중엽 이후 1047~1082년 고려 제11대 문종조에 성씨가 없어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못할때, 문헌에 의하면 이미 국가고시에 응시한 씨족으로, 족보를 체계화한 왕족가문이며 한국 대성의 일족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고찰과 한씨문중의 주장으로 볼 때 익산쌍릉은 아무도 이의나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엄연한 무강왕과 그 왕후의 묘이다.
▲기록학적 고찰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은 이미 1910년도 문서취급세칙과 훈령, 취급규정 등 특히 관보를 통해, 1915년3월9일 부터는 제777호로 공포하여 제반 보고를 접수하고 있었다.
1917년 쌍릉 발굴을 한 조사보고서는 발굴 개시일부터 종결시까지의 일시, 장소, 동원된 장비. 인원, 유물유적에 관한 세밀한 건수, 개수, 실물에 대한 내용, 보관, 운반 등 업무일지가 그대로 조선총독부 사서함에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에 대한 심층적인 확인도 없이 간단히 피상적이고 부분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유적이나 유물인양 다른 왕릉과 비교 추정하는 것은 올바른 학문적 자세라고 할 수 없다.
〈청주한씨 중앙종친회〉
(�중앙종친회에 자료를 제공한 韓相權(전북 익산)일가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다가 뜻한 바 있어 공직을 떠나 자영업을 해왔다. 지난 70년부터 현재까지 30여년간 자비를 들여가며 무강왕 제례를 올려왔으며 종친회를 조직, 무강왕릉 보존사업을 주도한 공로가 지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