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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재앙
출애굽기 8:20-2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과 애굽 온 땅에 이르니 파리로 말미암아 그 땅이 황폐하였더라
가끔 우리는 이런 문구나 플래카드를 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은 무조건 무엇이든지 다 용서하신다.’ 또는 ‘용서하셔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생각이 맞을까요? 이런 생각이 옳을까요? 무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은 분명히 성경에 표현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표현이든 문맥을 무시하고 그것만 빼어서 생각할 경우, 잘못될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무조건 무엇이든지 다 용서하신다.’라는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는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조건을 무시하거나 빼놓은 채로, 표현만 보고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틀립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조건 무엇이든지 다 용서하신다는 사실 자체는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만 맞습니다. 이 사실에는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기 잘못과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회개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회개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뿐인데, 그렇기에 자기가 시인하고 회개한 데에 대해 어떤 대가를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례하고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런 회개를 보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반면에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노아 때 세상 전체를 홍수로 심판하신 것은 공의이고, 노아와 그 식구들을 구원하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신 것은 공의이고, 그 가운데서 롯과 그 식구들을 건져내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과 그 나라를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신 것은 공의이고,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왕과 그 나라를 심판하신 열 가지 재앙 중 넷째 재앙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재앙의 배경 둘째, 재앙의 과정 셋째, 재앙의 의미입니다.
(1) 첫째, 재앙의 배경
이 넷째 재앙이 있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이 넷째 재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관하여, 애굽 왕의 입장도 고려하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애굽 즉 이집트 왕을, 원문에서는 ‘파라오’라고 하는데,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파라오’, 우리말 성경에서는 ‘바로’라고 표현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자신의 생애에서 이렇게 수모와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체면과 명예가 다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군이라면 어떻게라도 해 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니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여호와께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는 오기로 가득 찬 고집분입니다. 애굽 왕은 다른 신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그 신들도, 고삐를 틀어쥔 주인 앞에서 끌려갈 수밖에 없는 황소처럼,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 앞에서는 옴짝달싹하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낸 첫 번째 재앙은, 이집트에서 가장 힘 있는 신으로 섬기는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물이 고일 수 있는 곳마다. 심지어 집안의 그릇에 있던 물까지도 모두 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애굽 백성들이 강가의 모래를 파서 물을 여과시켜 물을 얻으려 하였지만, 이 피가 사라지고 그 대신 물이 생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물이 전혀 없이, 타는 목마름으로 7일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은 버텼습니다. 첫 번째 재앙에서부터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버티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은 ‘내 백성을 내놓아라.’하는 여호와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인 여호와는 자신의 대리인인 모세를 보내서 다시 요구합니다. ‘내 백성을 내놓아라. 이번에 내놓지 않으면 온 땅에 개구리들이 꽉 차서 애굽 사람들의 모든 집에, 심지어는 부엌까지 밥그릇까지 올라가겠다.’라고 말씀합니다.
애굽 왕은 생각합니다. ‘내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쯤이야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 무수한 개구리들이 나의 궁궐과 내 침실과 침대까지 올라와 머물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순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이 노예들을 다 내보내고 나면 어떻게 될까? 많은 성을 건축하고 자질구레한 모든 일까지 도맡아 하던 노예들이 없어지면 그 불편함은 어찌할까?’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은 차라리 개구리를 택하기로 하고 더 버팁니다. 게다가 애굽에서는 개구리 신도 섬겼는데 그 신이 개구리들을 다 관리하니까 그렇게 쉽게 개구리들이 사방팔방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진 않을 것이라고, 애굽 왕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개구리 신마저 여호와의 말씀에는 꼼짝하지 못하였습니다. 애굽의 개구리 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애굽 왕은 이 두 번째 재앙을 도저히 견뎌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술사들마저 지난번에는 도움이 안 되더니 이번에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요술사들이 개구리들을 퇴치하거나 막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들도 요술을 부려서 개구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그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이 징그러움과 끈적거림, 게다가 침상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서 애굽 왕은 도무지 개구리들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애굽 왕은 모세를 부릅니다. 여호와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약속한 그다음 날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개구리가 감쪽같이 물러갔습니다. 개구리들이 점령했던 점령지에 비록 그것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불쾌했지만, 일단 모든 개구리가 사라졌습니다. 집 안에 있던 개구리들, 마당에 있던 개구리들, 경작하는 밭에 있던 개구리들 모두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가서 죽었습니다.
애굽 백성들이 죽은 개구리들을 무더기로 모아서 쌓아 놓았습니다. 악취가 온 땅에 진동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숨은 틔어서 애굽 왕은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화장실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라는 한국 속담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약속을 깨뜨립니다. ‘재앙이 심하면 얼마나 심한지 끝까지 가보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자신의 약속을 어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제까지는 재앙을 경고한 후에 재앙이 임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재앙이 임했습니다. 세 번째 재앙입니다. 애굽 온 땅의 모든 티끌이 사람과 가축을 무는 해충이 되어버렸습니다. 더럽고 간지럽고 스멀스멀하고 따끔하고, 물려서 붓고, 사람과 가축의 몸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긁고 잡고 할퀴고 거기다가 짐승들까지, 핥고 긁고 깨물고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은 작심한 대로 버텼습니다. 여기까지 넷째 재앙의 배경입니다.
(2) 둘째, 재앙의 과정
애굽 왕은 나일강 강가로 나갔습니다. 아마도 아침 일찍 맑은 물에서 목욕이라도 해 볼까 하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정말 만나기 싫은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 왕이 이렇게 행동하실 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모세에게, ‘아침 일찍이 일어나 물가로 나아가 바로 앞에 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말씀대로 애굽 왕이 올 곳에 미리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굽 왕은 자신의 동선을 먼저 알고 기다리는 모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젠 모세를 보기만 해도 도대체 이번에는 무슨 재앙 보따리를 자신에게 들이댈까 걱정이 됩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모세는 지난번처럼 ‘내 백성을 내놓아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라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서 경고합니다. 이번에는 말을 안 듣고 거절하면 파리 떼를 보낸다고 합니다. 물이 피가 되게 하고, 온 땅에 개구리로 가득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이, 빈대, 벼룩과 같은 해충들로 재앙을 내리더니 이번에는 공중에서 재앙을 일으킬 군사들을 투입하겠답니다.
애굽 왕이 보기에는, 여호와라는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야생적인 것들까지 다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말 귀신이 곡할 능력을 지닌 신과 같았습니다. 자기 나라 애굽의 신들은 여호와에게 감히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엄청난 능력을 갖춘 신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올 ‘파리 떼’라는 것은 단순히 집에서 파리채로 잡을 수 있는 그런 파리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파리’라고 한 것은, 피를 빨아 먹고 물어뜯기까지 하는 온갖 날벌레들을 다 가리킵니다. 애굽 사람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 ‘라아’ 라는 신이 있는데 그 신은 사람 모습에 파리 같은 모양으로 생긴 신입니다.
애굽 왕은 그 ‘라아’ 신에게 도움을 혹시 얻을 수 있다면, 이 끔찍한 파리떼를 막거나 퇴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이번에도 이 신마저 여호와에게 꼼짝없이 복종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막강한 능력을 조절하실 수 있을까요? 바꿔 말하자면, 앞의 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처럼 그렇게 심하게 고통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도 고통을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여 고통당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자들이 똑같이 고통을 당한다면, 어째서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를 섬겨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모세가 애굽 왕에게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니까 방금 위에서 제시한 질문과 같은 생각에 쐐기가 박혔습니다. 22절입니다. ‘그날에는’ 즉 이번 네 번째 재앙이 시작되는 그날에는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해서 그곳에만은 파리떼가 없게 하시겠다.’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땅에서 하늘까지 담을 쌓지 않고서야 어떻게 공중을 나는 파리떼가 그곳을 피해 지나갈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경고의 말씀을 하면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상 중의 여호와’라는 표현은 애굽 땅에서 여호와 인 줄을 알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을 생각하기를, 그저 한 지역을 맡거나 능력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신은 농사만 책임지고 어떤 신은 날씨만 책임진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있었던 재앙을 보고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의 능력은 크지만,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므로 자기 백성과 남의 백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재앙을 쏟는다.’라고 생각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이번 재앙을 통해서 애굽 땅 안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셋째, 넷째 재앙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통해 자신이 어떤 하나님이신 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번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요? 어쨌든 애굽 왕 바로는 ‘내 백성을 내놓아라.’ 하시는 하나님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23절과 24절은,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푸면 이렇습니다.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과 그 신하의 집들과 애굽 전국에 다 있었지만,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 땅에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무 피해도 없었지만, 이외의 모든 애굽 땅은 해를 받더라.’ 여기서 ‘해를 받더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피해를 입었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 땅이 황폐해졌다.’라는 뜻입니다. 황폐해졌다는 것은 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넷째 재앙에서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않게 하시는 신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바꿔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이 넷째 재앙에서 드러난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번 재앙에서 한 번만 자신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살짝 보이시고 그다음에는 힘이 부족해지신 것이 아닙니다. 이 네 번째 재앙부터 열 번째 재앙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는 전혀 해가 없도록 보호하십니다.
한 예를 들면, 다음 재앙인 다섯 번째 재앙입니다. 이것은 ‘악질’이라는 재앙입니다. 악질은 매우 심한 돌림병입니다. 출애굽기 9:1-7에 나오는 재앙입니다. 악질이라는 낱말에 언어유희를 쓰자면, 이 재앙은 애 굽 왕처럼 ‘악질’인 사람에게는 제격인 재앙입니다. 이 ‘악질’ 재앙의 심각함은 이제까지의 재앙들과 달리 죽음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제까지의 재앙들은 한마디로 귀찮고 성가시게 해서 고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재앙인 악질부터는 죽음이 생깁니다. 애굽 사람들의 들판에 있는 모든 가축, 그것이 말이든 약대이든 소나 양이든지 모두 악질이 생겨서 죽어버립니다. 이로써 엄청나게 큰 경제적 타격을 입히고 심리적으로 공포에 이르게 하는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이스라엘의 가축들과 애굽 사람들의 가축들을 구별해서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않겠다.
애굽에 속한 가축들만 즉 애굽 사람의 가축만 다 죽겠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재앙은 돌림병 재앙입니다. 방역하고 담을 쌓지 않고서는 어떻게 돌림병이 전염되지 않겠습니까? 너무도 궁금해서 애굽 왕은 심하게 아프고 고통을 겪는 가운데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은 고센 땅으로 조사위원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서 살펴보니 과연 이스라엘의 가축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철두철미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지어 그 가축까지도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듯이, 세상 모든 사람은 재앙으로 죽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셔서 안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그러면 첫째, 둘째, 셋째 재앙은 어째서 자기 백성들로 당하게 하셨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첫째로,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노릇 하면서 긴 세월을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 하면서 긴 세월을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출애굽기 2장 마지막 부분을 설명해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직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써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우상을 숭배하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심각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애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슬픔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죄의 경향 때문입니다. 죄는, 마치 술의 영향력처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경고마저 계속 가볍게 여겨서 죄 가운데서 버텨보게 만듭니다. 애굽 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정도라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재앙을 겪어봐야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이런 죄와 악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교육하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심판을 겪어봐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내리시는 심판이 어떠한지를 몸소 겪는 것입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네 번째 재앙부터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골고루 사랑하시지만, 자기 백성은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편애하십니다. 편애하는 사람은 인간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편애하시기에, 자기 백성이 당하지 않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상태와 관계없이 그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한 마음 쓰심이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관심, 자기 백성이 모두 잘되기를 바라시는 마음, 모두 하나님의 복을 누리길 바라시고 그렇게 일하시며, 늘 돌아보시며 살피시는 하나님의 편애가 하나님 안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애적인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랑인데, 하나님이 사랑이 얼마나 특별하고 큰지는, 자기 아들을 주셔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이미 매우 확실하게 증거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 하나님이 이러하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을 모르고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나를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우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를 철저히 보호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죄와 이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들을 고치시려고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고통을 받게 하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끄십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이 알고 믿고 배우고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의문과 고통과 억울함으로 점철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죽을 때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 이분이 다름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은 우리와 우리 삶 전체에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우리를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