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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정화를 이루는 용서와 화해
- 보리 김종필 뽈리 까르포 수사 신부님 / 화순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열면서 /
요즈음 새벽을 여는 닭울음소리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깨어 일어납니다. 밤이면 영롱하게 쏟아지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볼 수 있고, 아침이면 사방으로 자욱하게 펼쳐지는 물안개나 운무雲霧 속을 거닐 수 있고, 밤낮없이 파도 소리처럼 쉼 없이 밀려오는 풀벌레들의 소리에 다시 깨어나는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더위가 기성을 부리던 지난 팔월 하순의 어느 날에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 휘돌아 흐르는 지석천에 인접한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분원)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 수도원 주변에는 운주사와 고인돌유적지가 있고, 보성의 차밭이나 무안의 초의선사 탄생지나 고창의 선운사도 별로 멀지 않습니다. 호남지방의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들이나 명소들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들을 소리 없는 메시지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심장의 박동처럼 춘하추동 이어지는 시간전례기도(성무일도)와 더불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작은 공동체의 여정으로, 기억의 정화를 이루는 용서와 화해의 일상으로 오늘 추석 명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추석 명절 /
오늘은 우리 전통에 따라 땅의 소출에 감사하고 조상을 기리며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대명절입니다. 추석秋夕 명절은 단군기원 2365년(신라 3대 유리왕 9년)까지 거술러 올라가는 우리의 뿌리 깊은 민속 명절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조상들의 음덕을 기려 섬기는 기제사忌祭祀에 따르는 명절제사와 살아 있는 후손들이 화합하여 즐기는 미풍양속이 합쳐진 아름다운 문화입니다. 송편, 인절미, 토란국 등등의 음식이 등장하고, 줄다리기, 씨름, 강강술래 등등의 놀이로 즐기며 조상들을 섬기던 풍속들이 떠오릅니다.
조선 후기 문인 유만공은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누렇게 익은 들녘 풍장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로 나고 맛난 것들일세. 다만 원컨대, 한 해 먹을 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과 같은 한가위만 같아라." 더 없이 소중한 홀로 이면서 더불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잠시나마 존재의 자리로 깊이 서로를 바라보게 하는 기묘한 어울림의 때입니다. 고운 정이나 미운 정을 넘어 생명 있는 모든 존재의 밑뿌리를 비쳐보게 하는 절기의 추석명절입니다.
삶의 굴레 /
이 시간 다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작가 박경리의 유고시집에 실린 <한恨>이란 시詩가 떠오릅니다. 육신의 아픈 기억은 / 쉽게 지워진다 / 그러나 / 마음의 상처는 / 덧나기 일쑤이다 /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 마음의 상처는 /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 그것을 한恨이라 하는가./
무엇을 하느라고 여지껏 흘러왔는지 구도자의 사십 여년이 다 헤아려지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여유롭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스스로의 삶의 굴레를 살펴봅니다.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甘味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베네딕도 수도규칙 '머리말' 중에서)라고 하신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 앞에 부끄러움만 가득한 오늘입니다.
그리움의 원형 /
지금 이 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이겠는가?"란 어느 현자의 물음과 그분 스스로 "좋은 추억이라네."라고 한 화답이 생각납니다. 잠재된 그리움으로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 중에 하나는 좋은 추억입니다. 좋은 추억의 보고寶庫에는 그리움의 원천인 고향이 있습니다. 그리움은 차고 기우는 달과 같이 순례합니다. 그리움은 별처럼 마음의 창공에 뜨고 집니다. 모정母情이나 부정父情은 그리움의 원형입니다. 그리움으로 향하게 하는 고향과 부모는 모든 시작을 새삼 가능하게 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원천입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자리에는 잊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밝은 면으로든 어두운 면으로든 그 기억의 자리에는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한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위해서 그 기억의 자리에 꼭 필요한 것은 정화淨化의 과정입니다. 특정한 때에 특별한 이끌림으로 함께 하는 순간마다 기억의 정화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개인이나 가정, 공동체나 사회는 건강하게 회복되고 활력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함게하는 공동체 문화인 명절의 의미가 의식*무의식적으로 용서와 화해의 마당이 된다면 우리 개개인이나 가정, 공동체나 사회는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성장하고 성숙할 것입니다. 기억의 정화를 이루는 용서와 화해는 순례자인 인생길에 새로운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 없는 사랑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화 <안드레이 루볼로프> /
러시아인 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제작한 영화 <안드레이 루블로프>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성전聖殿에서 러시아인 이콘icon 화가 루블로프는 환시 중에 이미 오래 전에 고인故人이 된 선배 화가인 희랍인 테오파네스를 만납니다. 대화 중에 루블로프는 테오파네스에게 전쟁 중에 침략자로부터 백치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저지른 자신의 살인행위에 대하여 고백하게 됩니다. 다 듣고 난 테오파네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루블로프를 위로해 줍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실 걸세. 하지만 스스로 용서하지는 말게. 앞으로 하느님의 용서와 자네 자신의 고뇌 사이에서 살게. 자네 죄에 관해서는 ***** 이 성경 말씀을 상기하게.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라. *******'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같이 희어지리라.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얼씨구, 내가 이걸 다 외우고 있군 그래. 이게 자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네."
그때 루블로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알아요,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또 용서하시겠죠. 주님께 침묵의 서원을 바치겠어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이렇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에 테오파네스는 "내가 자네에게 조언할 권리는 없지."라고 하는 반응으로 그 장면은 마무리되어 사라집니다.
용서와 화해 /
오늘 우리네 현실을 생각해봅니다. 부모에게 화난 아이들, 자식에게 실망한 부모, 불화를 겪고 있는 부부, 해묵은 불목이나 앙금으로 단절된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들,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가 잘못을 했고,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거나 아예 모든 관계를 단절해 버리려는 행위들 말입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앞서 가지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신神늠 우리가 잘못을 할 때도 우리를 사랑합니다. 우리 또한 자신의 실수나 상처가 깊고 문제가 많다고 해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그/그녀를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뭔가 크게 잘못했어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부모가 올바른 부모입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추억'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나갈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나아가,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더 높이는 삶으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도록 지산의 사명/소명을 받았습니다. 그 길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가 선결조건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기억의 정화를 계혹해나가기 이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좋은 인간관계를 오염시키는 탐진치貪瞋痴/1)으로부터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모든 관계에 자유와 해방의 길을 열어줍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게 하는 동반자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삶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수용하고 상대방에게 부과된 모든 고뇌와 부담을 줄여 줄 때 용서와 화해가 향기로운 꽃처럼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용서란 /
책임감 있는 친밀한 정서는 너와 나의 관계에 상처나 분노가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용석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분노나 상처가 있을 때는 용서하기 보다는 공격하기 위하여 자신이 받은 상처에 매달리거나 상처를 더 키우고 부풀리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에서 스스로의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기 위하여 분노나 비꼼을 계속하려는 유혹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용서란 나와 너의 상호관계에, 서로가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무너가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을 용납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입니다. 용서는 모욕이나 상처가 남아 있어서, 상대방에게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지만 참고 상대방에게 미소 띤 침묵의 사랑을 보낼 수 있는 겸허한 용기입니다. 그런 용서는 단순히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 하는 분멸 있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용서란 상대방을 수용할 수 있겠다는 조건에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용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먼저 다가서려는 용서는 자유롭고도 주도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는 바로 용서하려는 그 사람도 매일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가 있다는 예리한 깨달음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과 자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이기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떤 완전한 보상이나 복구에 대한 보장이 없어도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서로의 욕구를 인정하여 나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한 관계의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대방의 수용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호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 앞에서 각자 모든 짐을 덜고 자기정당화의 한계와 잘못을 인정하여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곱 번의 일흔 배로'라도 서로 용서해야ㅑ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란 더 이상 상처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용서란 더 이상 주고받은 경이로운 선물이나 기억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란 더 이상 우리가 상처받은 대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되갚아 주려는 생각조차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란 다시는 공격이나 보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용서란 지속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용서란 자기 자신이 다시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스스로를 또다시 개방하는 것입니다.
앙갚음과 용서 /
고통스러운 과거에 집착하여 앙갚음하려는 것이 잘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던 상처로 인해 반복하여 스스로를 비관하고 구박하는 태도가 사람으로서 할 짓이겠습니까? 앙갚음은 스스로의 영혼에 지울 수 없게 새겨진 음울한 비디오테이프(DVD, USB 등등)를 가지는 격입니다. 이로써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통스러운 장면이 계속 반복 재연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꾸만 재연되도록 스스로를 노예처럼 묶어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재연될 때마다 당신은 그 고통스런 파열음으로 점점 더 만신창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앙갚음이 당신을 사로잡고 거듭 당신 자신을 조종하도록 방치하겠습니까?
당신의 기억에서 좋지 않은 고통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차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의 비디오테이프(DVD, USB 등등)를 지울 수 있게 합니다. 용서는 당신을 해방시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었던 그 무엇이 더 이상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당신은 자유스럽게 됩니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자유스러워집니다. 용서는 스스로와 서로의 상처를 넘어서 다 함께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용서는 그저 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엇인가에 대하여 너무 쉽게 잊는다는 것은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잊기 이전에 그 문제(사건, 상황, 사람)에 대하여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정서)이 재상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용서의 길에 매우 중요합니다. 용서란 성경의 파스카의 사건처럼 -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으로 -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용서는 사랑스러운 관계 안에서 계속 생활할 수 있도록 스스로와 서로에게 새로운 운명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신뢰의 투자 /
부부 관계에 있어서 용서는 당신이 배우자를 용서하기 전에 배우자가 먼저 변화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신의 배우자가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배우자를 향한 당신의 용서를 그 보다 더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용서는 신뢰의 투자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준 <주님의 기도> 중에 한 구절을 생각해 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오 복음 6장 12절)라는 기도의 의미는 우리는 용서한 대로 스스로가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용서에 대한 깨우침은 이렇습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소서 4장 32절)
진정 이제부터 새로운 다짐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할까?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루카복음서 15장 참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자유스런 선택으로, 진심으로 관대하게, 자발적으로 간절하게, 진정함과 정성스러움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자렛 예수님처럼 가시관을 쓰거나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에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로카복음서 23장 34절)라고.
'미안합니다'와 '용서해 주시겠습니까?'에 대하여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좀처럼 용서를 청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유감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비켜지나가기도 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때, 내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미안함을 느낀다는 것으로서, 상대방으로부터의 응답을 요구하지 않고 나의 송구함이나 죄책감을 해소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나는 실제로 겸허하고 용기 있게 용서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응답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인 부담이 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나의 요청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든지, 선택의 힘을 그(그녀)가 가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드는 꼴입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용서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상대방을 조종하거나 이용하려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길을 찾고 있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 저지른 불의한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자인한다면, 그 사람은 용서의 여부에 대한 선택의 힘을 상대방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용서를 청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이 기꺼이 자기를 용서할 준비와 결심을 하도록 상대방의 의지의 결단에 기댈 것입니다. 대로는 용서에 대한 스스로의 요청에 따라 상대방이 대답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순순히 그렇게 응하여 기다릴 것입니다.
용서로서의 치유 /
용서로서의 치유는 여정입니다. 용서가 개방적일 수 있을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용서로서의 치유는 앞서가는 물리적인 노력입니다. 서로에 대한 경이와 외경의 순간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사건(그 어떤 문제나 상처) 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게 되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용서로서의 치유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스스로의 태도와 우월감에 대하여 성찰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먼저 변화시키려고 할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더 이상 "나는 화낼 권리가 있다"는 태도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필요성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진정으로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용서로서의 치유는 대화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치유를 갈망하는 진솔한 대화는 스스로와 서로를 향해서 부드러워지고 취약해지는데 필요합니다. 그 때의 대화는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지속적으로 서로의 존재에 깊은 고나심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설사 문제 해결은 더디더라고 서로를 향한 관심과 좋은 정서가 먼저 회복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로서의 치유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어떠한 불화나 불일치의 상황일지라도 기도하는 삶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 신神(절대자, 초월자 등)에게 전폭적으로 의탁하는 태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신 하느님을 자신의 사람에 초대하여 주님 치유의 은총이 작용하도록 간청할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지겠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치유는 과정입니다. 거룩함이 도착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데에 있듯이 말입니다. 비록 용서로서의 치유의 과정에 있어서, 어쩌면 우리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고통으로 이미 많은 시간을 놓쳐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성공적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때면 그 모든 고뇌와 고통은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구원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복음서 9장 23절)
사랑할 능력 /
도스토예프스키는 "'존재하는 유일한 지옥은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사랑받를 수 있고, 사랑할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와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스러운 것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는 내적인 힘을 남에게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전염됩니다. 사랑으로 소중한 뭔가를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사랑받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며, 조만간에 그 복된 사랑이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는 이치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적인 힘을 증폭시킵니다.
닫으면서 /
오늘 밤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날 <선운사.의 상사화나 산야의 구절초 꽃 잎마다 내릴 보름달빛으로 저마다의 가슴에 두둥실 보름달이 떠올랐으면 합니다. 옛 사람의 지혜는 스스로 사람다워지려는 자기관리를 수기修己라 하고 남과 어울려 함께 사는 대인관계를 치인治人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함과 정성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더불어 공경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일상을 살아내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차茶생활로 인연된 소중한 한분 한 분께서 기억의 정화를 이루는 용서와 화해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삶에로 성큼 나아가실 수 있으시길 염원합니다. / 보리는 뽈리까르보, 김종필 수사신부의 아호로, 보리와 밀의 보리입니다. 신부님은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원장이며, 한국가톨릭문화연구소의 '聖母茶山茶會'의 지도신부입니다. / 계간 차생활 제8권 3호 통권 32호 / 2013년 가을호 /
/1) 불가佛家에서는 탐진치貪瞋痴를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탐하고 욕심내는 마음, 증오하고 미워하는 마음, 사리事理를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 등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고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