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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心賦註 註心賦 7page 중간입니다.
常為諸佛之師하야 能含眾妙하고
거기서부텁니다. 마음이 항상 여러 부처님의 스승이 되어서 온갖 묘함을 能히 포함하고 衆妙란 말은 노자 [도덕경]에 나온 그 말을 여기서 두 글자를 갖다 쓴 겁니다.
마음 그 자체가 여러 부처님의 스승이 된다. 부처님도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중생도 마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여러 부처님의 스승이 되어서 온갖 묘함을 온갖 우주만유 만법의 묘한 진리를 妙한 道理를 能히 다 包含하고 있다 그말이죠.
그 다음에 인자 주석에서는,
諸佛이 以法로 為師라
모든 부처님이 法으로써 스승을 삼는다.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一心法입니다. 마음을 법이라고도 합니다. 어제 [기신론]에서 마음에 法과 義가 있다라고 했죠? 바로 여기 法字는 心法 일심법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삼보에서도 佛寶 法寶 僧寶하는데, 일반적으로 순서는 불보가 먼저고 법보가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이 승본데, 그런식으로 보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문을 법보로 본 겁니다. 그리고 그 법을 법문을 수행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그러한 수행자를 스님이라고 한 거고, 그렇게 순서를 정할 때는 불보 법보 승보 佛法僧 三寶지만 그러나 法性이나 法身으로 보는 그러한 순서로 본다면 법이 불보와 승보의 스승이 또 되는 겁니다. 그래서 法은 두가지로 말 할 수가 있지요.
부처님이 설법하신 법도 法이고 부처님의 본래 마음자리, 부처님이 본래 깨달으신 진리도 佛法도 法이니까 여기서는 부처님 본래의 마음자리를 法이라고 말한겁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이 법으로써 스승을 삼음이라.
起信論에 云 所言法者는 眾生心이 是라하시니라
[대승기신론]에서 말씀하시기를, 말한 바 法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衆生心이라는 그 말을, 다른 경전에는 흔히 쓰지를 않는 그말씀을 가지고 중생심이라고 하셨죠? 중생심이 바로 법입니다.
부처님도 중생심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신거죠. 여래장이라고도 하고 여래장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중생심이라고도 했어요. 衆生心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의 탐진치 三毒같은 그러한 중생의 心意識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고 여기는 衆生의 本心을 중생심이라고 말한 겁니다. 여래장과 같은 뜻으로 말한 거죠.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할 때는 부처님을 위주로 해서 말을 했기 때문에 이 佛性, 불성이니 불심이니 그리고 또 如來藏이라고도 하지요. 그 마음자리를
이건 어디까지나 부처님에 관해서 불성이나 불심이나 여래장이나, 그건 중생하고는 중생의 명칭은 여기에 없죠?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는 衆生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 가장 특이하면서 친절감이 있죠. 불성이니 불심이니 여래장이니 이 말은 다 부처님에 해당이 되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하고 조금 어떻게 생각하면 거리감이 있죠? 우리 衆生하고는, 중생이라는 말을 안했기 때문에 혹시 모르는 사람은 衆生하고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대승기신론]에서는 바로 중생마음이라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친절한 말씀이죠.
중생마음이니까 중생마음이 바로 여래장이고 불성이고 부처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말은 중생심이라고 했지만 부처님 마음이요. 부처님도 중생심에 의해서 成佛을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상당히 용어가 특이하면서 우리 중생한테는 둘도없이 친절한 그러헌 명사를 [대승기신론]에서 사용하신거요.
그런데 뭐 보통사람들은 우리가 뭐 중생이니까 중생심에서 그럴 수 있겠지, 그런 말은 중생심을 안 좋게 보는 거죠? 分別心 思量心 아직까지 道를 깨닫지 못한 범부의 차원에서 중생심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말은 범부를 지칭하는 말이고, 여기서 衆生心이라고 할 경우는 범부와 성인과 중생과 부처를 모두 통 틀어서 중생심이라고 한 거요. 그래서 이름을 붙인 의미가 좀 다릅니다.
又知之一字는 眾妙之門이니
또 知의 한 글자, 知라고 하는 안다고 하는 어제 공적영지라고 말했죠? 空寂靈知 靈知라고 하는 그 知字요. 안다고 하는 한 글자는 온갖 妙의 法門이 된다. 문호가 된다 그말요. 온갖 妙의 門이니 知之一字 眾妙之門이라는 말은 하택신회선사가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규봉스님의 스승의 스승, 스승 한 증조나 되지요? 증존가 고존가 그렇게 됩니다. 육조스님의 제자가 하택신회선사, 하택신회선사가 이 말씀을 하신거요. 하택신회다음에는 자주법려 자주법려 다음에 또 어... 누군가 형남유충선사있고 형남유충의 제자가 수주도원선사고 도원선사의 제자가 규봉스님아뇨? 규봉종밀 [선원제전집]이나 [도서]에나 [절요]에 [원각경]소초에 나오신 그 규봉종밀. 그러니까 하택은 규봉의 증존가 고존가 되지요. 엥? 아들이 자주법려 손자가 어.. 형남유충 어.. 증손자가 수주도원, 규봉스님은 고손자네. 엥? 4대째니깐, 고손자.
知之一字 眾妙之門이라. 가령 물, 물이라고 하면은 마음을 인자 비유로 물이라고 했다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명칭입니다. 그러나 물의 본성은 어떤거냐? 습성이라요. 액체 濕이 물의 본성이라요. 그렇다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명칭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떤게 물의 습과 같은거냐? 知가 마음의 본 핵심이라요. 그러기 때문에 知之一字가 眾妙之門이라, 안다고 하는 이 知라고 하는 것은 어제말한 靈知 [화엄경] 문명품(?)에 智(?)하고 요 知하고 다르다 그랬죠? 智와 知가 달라요.
이 智(?)는 道를 깨달은 성인한테 해당되는 지로 [화엄경] 문명품에서 설명했고, 이 知는 모든 道를 깨닫기 전 모든 중생에게 가지고 있는 靈知자 그걸 知라고 하지요. 그래서 요 지에 지를 깨달으면 바로 지혜가 되는 성인과 부처가 되고 이 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생들이죠. 그러나 이것이 마음의 본체라 그말요. 그래서 知之一字가 중국말로, 안다고 하는 지적 능력을 가진 知의 한글자가 온갖 妙의 우주만법의 가장 제일 핵심 門이 된다. 衆妙之門이라.
중묘지문이란 말은 노자 [도덕경] 제일장에「玄之又玄에 衆妙之門」이라고 노자가 처음 말했던거죠? 온갖 묘한 문이다. 그러면 물이라고 하는 그것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고 그렇다면 물은 명칭인데 물의 본성은 물의 본래의 성질은, 습성은 뭐냐? 젖는거다. 그러면 사람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명칭인데 그렇다면 마음의 본체는 뭐냐? 아는 靈知다. 그래서 영지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空寂 마음을 공적하다라고 말하죠? 공적 또는 영지. 공적은 마음의 心의 본체입니다. 마음의 본체를 공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지는 뭐냐? 마음의 本用이라. 本來의 妙用. 본용을 즉 知라고 靈字빼고 그냥 知라고도 하고 그렇다면 마음의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이걸 自性本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본래 청정하고 때가 묻지 않는, 부처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똑같은 그 자리를 自性의 本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用이 本用만 있는게 아니라 분별이 있죠? 분별은 마음의 수련응용이라. 밑에도 설명이 나갑니다. 지금 알면 쉬우니까 지금 내가 써논거죠. 뒤에서 보이니까 저 뒤에서도.
수련응용이라 因緣따라서 應하는 作用. 수련응용은 분별심을 가리킨 거죠. 범부들은 여기 분별에서만 헤메는 거죠. 자성본용과 수련응용이 있는데, 知는 자성본용이니까 순수한 오염이 되지 않고 분별이나 여러 가지 알음알이를 작용을 하지않는 알음알이하고 상관없는 마음의 본체와 같이 마음의 본래 묘용자리를 본용을 靈知라고 합니다. 영자빼고 지라고도 하고.
그런데 중생들이 범부들이 온갖 알음알이 온갖 사량 대교 복탑같은 것은 분별에 속해요. 분별에 떨어지는 것이 보통 일반 범부들이죠. 그것을 수련응용이라고 합니다. 인연따라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맛을 보거나 色性香味觸法에 따라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작용을 일으키는 그것을 수련응용이라 해요. 因緣따라서 應하는 作用.
비유컨데 마음 거울이 있는데, 거울을 마음에다 비유한거요. 거울은 본래 거울 자체가 있죠? 유리로 만들었으면 유리가 거울 자체고 동으로 거울을 만들었으면 거울이 자체가 거울이 동경이죠. 그런데 거울은 그 자체가 있는 동시에 밝어서 비치는 능력을 가졌죠? 바쳐 밝아서 비치는 능력이 여기서 말하는 자성본용 靈知자리요.
空寂은 거울자체 마음의 본체, 그렇다면 분별은 뭐와 같으냐면은 거울이 밝아서 비치기 때문에 거울에 온갖 물상이 나타납니다. 사람얼굴도 나타나고 고양이도 나타나고 빨갱이도 나타나고 검정도 나타나고 비치는 데로 나타나죠? 비치는 데로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 영상이 분별과 같고 수련응용이니라 그게바로. 그렇게 비유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거울이라고 하는 마음의 본체는 항상 비고 고요한거요. 생각을 일으키니까 뭐가 있는것 같고 뭐 쓰레기통에다가 쓰레기를 잔뜩 담아노니까 빈 쓰레기 그릇이, 쓰레기통 그릇이 있는것처럼 보일 뿐이지 본래 그릇은 깨끗한거요. 쓰레기통 만들때 처음 나왔을때는 깨끗한거 아뇨? 거기다 지저분한 오염된 그야말로 악취가 나는 그런 쓰레기를 그 통에다 그릇에다 넣으니까 있는 것 같을 뿐이지, 본래 쓰레기통도 청정하고 아무것도 없는거요. 비고 고요한 거요.
고요하다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는 고요한거요. 생각을 일으키면 복잡해서 뭐가 시끌싸끌 시끄러운 그러헌 노동하는 것이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은, 본래는 그런게 없다해서 그 자리를 마음의 본체 空寂이라고 하고 마음은 텅 비고 고요하지만은 그러나 마음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죠? 허공은 텅 비어서 아무 작용을 못하죠. 허공이 아는 지적능력은 없잖아요. 마음은 허공과 달라서 비고 고요한 것은 비슷하지만 지적능력이 있어요. 아는 것 있다 그말이요.
그래서 마음은 木石 나무나 돌이나 허공과는 달라요. 妙~한 자리죠. 그 자리가 신비스럽게 신령스럽게 안다해서 靈知라고 하는데 그게 마음의 본래 작용이다. 쉽게 말하면 거울이 밝아서 비출수 있는 능력과 같고 쓰레기통안에 쓰레기가 본래 있는게 아니고 쓰레기 담는 그릇도 굉장히 아름답고 예쁘고 보기좋은 그러한 하나의 그릇인것처럼, 마음의 본래의 작용, 본래의 묘용을 영지라 하고 거울이 밝다보니까 거울에 검은것도 보이고 울굿불굿한 것도 보이고 이상 얄구잘 저저 귀신같은것도 거울에 비치면은 다 나타나죠. 그게 인연따라서 나타나는 응용이라 그게 우리 분별심이요.
우리 분별심은 쓸데없는 그야말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 육각작용을 일으키는데 빛깔 소리 냄새따위를 보고 듣고 상대할 때 그러한 분별을 내는데 그 분별은 잠시 있다가 또 잠시 사라져요. 生滅하죠. 虛妄하죠. 영구적으로 항상 있는 것은 아니요. 쓰레기통에 쓰레기도 잠깐 있다가 또 비우면 없는것 아뇨? 항상 그 쓰레기가 있으면은 뭐 못 쓰는 거지. 비우고 또 다른 쓰레기를 담기도 하고 하는거와 같이, 마음속에 그 여러 가지 마음 그릇에다가 온갖 생각 온갖 분별 온갖 그 사유 그 억측 판단 인식 그런것을 거기다 작용을 하는 것을 수련응용이라 해요.
그런데 지지일자라고 하는 知는 본래 순수한 자성의 본용이라요. 분별심이 아네요. 분별로 아는것이 아뇨. 應無所住 응당 집착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昭昭靈靈한 본래의 주인공을 知라고 했어요.
안다고 하니까 뭐 지식적인 그런 아는것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요. 지식이나 학식은 여기서 말한 분별심에서 분별심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거기서 익히고 배우고 해서 만들어진거요. 分別惑이죠 그건, 혹도 俱生惑이 있고 분별혹이 있죠? 분별혹은 바로 분별심으로 만들어진 것을 분별혹이라 해요.
우리 중생들의 번뇌를 두 가지로 집약하며는, 하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함께 생긴, 함께생긴 번뇌 번뇌를 惑이라고 해요. 바로 전생부터 익혀서 타고난 날적부터 같이 생긴 그 번뇌를 구생혹이라고 하고, 후천적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나쁜 스승이나 나쁜 버릇이나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해서 익혀진 그 번뇌는 분별혹이라 해요. 이건 선천적인거고 이건 후천적으로 익혀진 후천성이요. 그걸 분별혹이라. 분별혹이 바로 여기서 말한 분별심으로 이루어진 번뇌란 말이요.
혹이라는 말은 迷惑했다는 거지요? 우리가 잘못하면 魅惑, 매혹을 당하던지 眩惑을 당하던지 誘惑을 당하던지 그게 다 유혹한거요.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을 혹이라고도 하고 또한 번뇌라고도 하고 또는 진로라고도 하고 문명이라고도 해요. 그것을 선천적으로 같이 태어날적부터 같이 생긴 번뇌는 구생혹이고 후천적으로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여러 가지 薰習해서 생긴 그 번뇌는 나쁜 버릇 그것은 분별혹이라 해요. 분별혹이 바로 분별심으로 만들어진거죠.
그러면은 분별혹은 여기서 말한 영지하고는 달라요. 靈知는 순수한 거지만 分別은 오염되가지고 순수하지 못하고 범부의 나쁜 그러한 악업을 만드는 그런 장본인이 되는거죠. 惡業을 만드는 하나의 모체가 되는거요.
禪源集에 云
[선원제전집]은 규봉스님이 말씀하신 그 [선원제전집]이라고 하는 책이 100권인데, 100권에 한 책으로 서문을 만든 것이 [도서]요. 강원 교재 사집과에 [도서]가 있죠? 그런데 거기에서 말씀 한 내용이라요.
夫言心者는 是心之名이요 言知者는 是心之體라하시니라
[선원제전집 도서]에서 지금 말한거요 이 말은 규봉스님의. 대저 마음이라고 말한 것은 이 마음의 명칭이고 知之一字라고 하는 그 知라고 말한 것은 이 마음의 본체라고 했다.
아까 내가 말했던 말이 여기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알음알이를 가지고 知라고 한 것은 아네요. 여기서는 本知 靈知 본래 순수하게 아는 佛性을 가르킨 거요. 불성자리.
개를 보고 불성이 없다고 하니까 개가 좋아할 리가 없지. 그러니까 없다고 말했던 스님들만 보면 더 유난히 잘짖어 왜 내가 불성이 없냐고, 개도 아는게 있으니까 불성이 없다고 조주스님이 스님이 그런 말씀을 했는데, 스님은 쫌 유별나거든 그러니까 스님만 보면은 어떻게 개들이 어떻게 짖는지
나는 고부 두승산에 가가지고 처음으로 나 개한테 여기에 물렸어. (허허...) 뒷다리를 물렸는데 내가 산으로 등산하는데 그놈의 개가 남의집 개가 나를 따라오는데, 나는 그까이것 뭐 보통으로 여기는데 그때 겨울철이라 다행이지. 그런데 그때 겨울철이라 뚜거운 옷을 입었잖아요. 겹옷이고 속에다 내복을 입었고 하니까 그런데 여기를 물어뜯으니 겹옷 그 거저 옛날 데토론 그러니까 벌써 한 40년 전 이야기에요. 대두릉 두겹 세겹이 다 와장창 날라가버렸어요. 그래도 발을 안 무느라고 다행이요, 불행중 다행으로 살은 물지 못하고 그놈의 것을 물어가지고 그래서 내가 으웩! 해서 호통을 치고 작대기 들고간걸로 작대기로 이렇게 휘젓으니까 막 도망치데 인자 물어놓고는, 그것도 다 개도 佛性이 있는거요. (하하...) 응? 없는게 아네요.
그래서 처음에 조주스님이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까 처음엔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또 그 스님이 또 묻기를 개가 또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까 없다. 그래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없다고 하는 말은 이해가 안되거든 그래서 화두 공안이 되었다 이말요.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느냐?」因甚도 無오 어째서 개, 부처님의 말씀에는 一切衆生이 다 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옛날 부처님이나 같은 분인데 고불인데 因甚도 無오 산삼은 아니고 인삼이라요 인삼도 무오. 발음은 삼 그럽니다 삼 무엇 甚字. 이자는 말할 도자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인해서 조주스님이 개는 불성이 없다라고 無佛性 무불성을 조주스님이 이 말씀 했죠. 개는 불성이 없다. 狗子 無佛性 개를 보고 狗子라고 해요. 개새끼가 아니라 그냥 개보고, 개는 구자 구자 무불성.
그렇게 해서 화두를 삼아서 참구를 하는거요. 「어째서 없다고 했느냐!」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했는데 왜 조주스님은 개를 보고 불성이 없다고 했느냐, 왜 없다고 했느냐 그냥 왜 없다고 했느냐 이렇게 하지? 왜 없다고 했는가 왜 없다고 했는가 왜 없다고 했는가 자꾸 되풀이하면 그건 옴마니반메홈이나 나무아미타불 부른것보다 나을 것도 없어. 그렇잖아요? 한번 딱 의심을 하고 딴 생각 붙지 않고 의심만 가지고 계속 나가, 왜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一念萬年去라. 한 생각이 만년가도록, 아침부터 저녁 새벽에까지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그것이 계속 가야되.
어째서 없다 했나 또 어째서 없다 했는가 또 어째서 없다 했는가 그렇게 하는 건 화두들줄 모른 사람들이요. 화두가 잘 안들리니까 망각을 하니까 잊어버리니까 부득이 또 들추고 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몇 번을, 하루에도 24시간 하면 수백번 들어야 되겠죠? 어째서 없다 했는가 어째서 없다 했는가 꼭 저 무슨 하늘天 따地 읽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은 제대로 된것이 아뇨. 공부하는 비법이「어째서 없다고 했는가?」 그것 question mark 쾌스천마크가 계속 쾌스천마크 뿐이라. 뭐 개가 불성이 뭐 있고 없고를 따질것 없이「어째서 없다고 했는가?」그렇게 일념만년거라 한 생각이 만년동안 가야되.
석상스님 칠겁법문처럼, 한 번 의심을 두고 의단을 두고 참구를 했으면 두 번 세 번 자꾸 똑똑똑똑똑 이렇게 하지말고 그냥 요렇게 가야되요. 어? 똑똑똑똑 점 찍으면 안 된다 그말요. 이렇게 인자 쭉 나가야되요. 표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어요? 요렇게 한것은 잘못한거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어째서 없다 했는고!!!」그대로 인자 딱 박혀부러. 어째서 없다고 하는 그 의심덩어리가 바로 순식간에 찰나에 그냥 그 생각이 계속 하는거지 일념만년으로 하는거지, 그렇게 없다했는가 또 없다했는가 또 또 또 또 시계가 똑딱똑딱하는 것처럼 하면은 공부 잘 못하는 거요. 시계가 똑딱똑딱똑딱 자꾸 초가 자꾸 가면은 분이 되고 분이 또 흐르면 시간이 되죠? 그런식으로 하면은 생멸심이라. 그래서 공부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그말요. 그렇게라도 계속만 하면은 안 한것보다는 낫지.
어떤 백운수좌는 無~ 無~ 無~ 늘 무무를 허다가 삼년을 해가지고 온몸이 다 없어진 그러한 경지를 체험한거요. 그래서 산에도 걸리지도 않고 이런 석벽에도 걸리지 않고 걸리는게 없어. 무라 그대로 가 無~만 늘 했는데 옴 옴 옴 주문하듯이 그래가지고 자기 공부한 것을 말하니까 그 스님들이 법주사에 가면 큰 쇠독이 있죠? 쇠로된 장독, 그 속에 들어가 봐라 정말 걸림이 없는가. 들어가보니까 쇠 뚜껑 뚜겅으로 이렇게 덮어놓고 돌로 또 무거운 돌 덮어놓고 사람이 몇사람 그위에 딱 서서, 그럼 나와봐라 그말요. 어? 정말 산하껍데기(?) 그 쇠독도 눌러놨어도 그 밖으로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대번 휙 하더니 뭐 저쪽으로 나와있어. 솥뚜껑 그대로 놔 두고. 그랬다고 인자 그러죠.
그런데 선지식을 잘 못만나 가지고 나중에는 인자 그 절에 어떤 분이 말을 해주기를 無~無~까지도 지워버려야 된다라고 그렇게 가르켰어. 지우는 시간도 칠판에도 글씨를 써놓고 글씨를 지우는 것처럼 인자 무무 한것을, 무무가 항상 들리니까 그것을 지울라고 또 노력하는 것이 한 일년 했다는 거요.
그 다음에는 맹탕이라. 산하껍데기(?)에 걸림이 없는 것도 없어지고 처음에 공부안할 때와 똑 같다 그말이요. 그러니까 좋은 선지식을 잘 만나야 되. 그래서 선지식은 눈 밝은 사람 법을 사뭇쳐 아는 분이라야 근기에 알맞도록 설법을 해 줄수 있는데, 說法을 잘 해주기가 참 어려운거요. 나는 새삼 그런걸 많이 느껴요. 뭐 아는 지식만 가지고 부처님 말씀만 가지고 전달하기야 뭐 그렇게 뭐 어려울 것도 없겠지만은, 정말 그 분의 根機에 알맞은 법을 어떻게 일러주는냐가 참 가장 올바로 제대로 사무쳐 알아야 되겠죠.
그러니까 說法이 不投機하면 설법하는 것이 근기에 맞지를 않으면,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왔는데 설법하는것이 근기에 맞지를, 투하면 의기투합한다는 投合 투합하지 못하면 어.. 뭐냐 내가 그냥 모르니까 말뜻과 비슷하게 내가 만들겠어요. (하하...) 말 뜻은 이런 뜻인데 내가 지금 잊어먹었어. 잊어먹었으니까 보충해야지 꼭 남의 글만 딸게 아니라. 설법이 근기에 투합하지를 못하면 도로 범문설(?)이라. 한갓 입술 나불나불 혀를 움직이고 입술 움직이는 것 뿐이다 그말요. 그냥 거시기 저 공염불 하듯이 횡설수설 지껄이는 것 뿐이다 그말요. 괜히 쓸데없는 말 하다가 이렇게 시간 많이 갔네.
知라고 말한 것은 바로 마음의 體다 그말요. 그 지자는 불성과 같은 말이여. 분별지는 아닌 것으로 알아 두셔야 되요.
能含眾妙者는 一心杳冥之內에 眾妙가 存焉이니
能含衆妙라고 하는 것은 一心이 한 마음자리가, 一心杳冥이라는 그 말도 노자 [도덕경]에 있는 말이요. 한 마음이 아득하고 어두운 그 안에 온갖 묘함이 있다 그말이요. 온갖 묘한 도리가 컴컴한 마음 內에 마음 안에 그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전에 탄허스님께서는 늘 법문하실 때, 그놈의 새카만 자리를 알아야 된다고 늘 그 말씀을 강조하셨는데 그 자리가 여기서 말한 杳冥 묘 묘명 두 글자가 컴컴한 자리죠? 노자 [도덕경]에는 杳解明解라고 나오죠? 어둡고 어둔 그 자리에 그야말로 알수없는 신비로운 그 정기가 그 안에 있다라고 했어요.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은 노자도 제팔식의 번외를 완전히 깨우치지를 못했어. 그러기 때문에 노자가 서술한 것이, 노자나 장자나 나 장자 [남화경]에도 보면은 꿈을 묵묵이라고 이렇게 썼거든 혼혼묵묵이라. 이것도 장자 [남화경]에 어둔 자리를 밝힌 거죠? 컴컴한 자리 혼혼묵묵 어둡고 묵묵한 자리.
그런데 관산대사 같은이, 내가 봐도 그래. 아직까지 팔식의 어두컴컴한 無明을 根本無明을 완전히 타파못한거요. 그러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어두컴컴한 그 자리를 여기서 말한거요. 그러나 요 영명연수대사도 노자 말을 하다보니까 노자 말을 갖다논거지 영명연수대사가 그걸 모르고 하신것도 아니고 탄허큰스님도 그걸 모르고 쓰신것은 아네요.
노자가 그런 말을 했고 장자가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인자 하는겁니다. 무명의 자리가 컴컴하거든 그 자리는, 무명의 반대말은 묘명이라 여기도 아마 묘명스님이 있을거요 묘하고 밝은 자리. 묘명은 본래 깨달은 자리가 묘명이거든, 깨닫기 전에는 무명이 미륵보살도 무명이 조금은 남아 있는거요 근본무명이.
그래서 그 자리를 가르켜서 어둡다라고 한거요. 그러니까 어두운 자리는 모든 중생들에게 컴컴한 자리 있죠? 눈감고 보는거나 같어! 컴컴한 자리. 에? 눈감고도 보이기는 보이지만은 컴컴한 게 있죠? 그와같이 마음이 태양보다 더 밝은 그걸 묘명을 깨닫기 전에는 그 자리가 어두운 자리요. 그것을 지금 말합니다.
杳冥의 안에 온갖 妙가 존재함이니,
清淨法界는 杳杳冥冥하야 以為能含이요
淸淨한 法界는 杳杳하고 아득하고 어둡고 어두워서 써 能含이 되고, 能含이란 말은 우주만법을 능히 포함하는 것 능히 포괄해서 우주만법을 컴컴한 그 마음자리다가 간직해 둔다 그말요.
恒沙妙德과 微妙相大는
항하 항하를 恒沙라고 항하모래를 그러니까 강가 갠지스강 간지스강 모래를 항하라고 그래요. 항하모래수와 같이 많은 묘한 德과 微妙한 相大는 미묘한 온갖 법상은 팔만사천공덕 팔만사천법문 팔만사천 여러가지 덕상은
以為所含이라
써 그 안에 포함된 바가 됨이라. 포함할 바
마음자리는 能含이 되고, 마음안에 갖추어져있는 모든 공덕과 모든 법은 소함이죠 所含. 에? 사람이 저 농에다가 옷을 두었다면 농은 인자 能含이 되고 농 안에 옷들은 所含이 되죠? 책장안에 책장은 능함이 되고 그렇죠? 책장안에 책들은 소함이 되요. 그와같이 佛敎에서는 능함 소함 이렇게 말합니다.
相依乎性하며 性無不包 새 故稱為含이니라
相은 性에 依하고 性은 포함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포함함이 된다라고, 그러니까 能含衆妙라고 하는 능함 두글자 되새기죠. 잉? 그래서 能含이 된다라고 말했다.
마음자리는 세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죠? 마음은 相과 空과 性. 그래서 여기에다 法字를 가한것도 如法이다. 법이 바로 마음자리요 사실상. 法자 쓰기전에는 상과 공과 성 세가지요. 相이라는 말은 거죽으로 나타난 형상이죠? 상태, 마음도 형상이 있어. 그리고 마음의 본체는 텅 빈 자리요 空寂 공적하면서 본래의 佛性 心性 本性이 있다 그말이요. 그래서 법의 상이라고 법상종 있죠? 불교의 법상종 법공종 법성종 여기다 宗字만 붙이면 무슨 종 다 되죠 잉.
부처님의 49년 설법이 이 세가지를 설명하신 거요.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에 모든 相을 말씀하신 인천교나 소승교 같은것 또 대승 법상종에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라고 [도서]에 나오죠? 상을 말씀하였다.
그 다음에 가서는 반야의 사상 空을 말씀 했죠? 팔공조(?) 팔공조를 팔공조란 말을 안쓰죠? 파상교라고 쓰지요. 규봉스님은 상을 쳐부수는, 相을 쳐부순단 그말은 相이 空에서 아공 법공 구공(?) 모든 삼공 이십공을 말허잖아요?
그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는 팔성교요. 팔성교를 규봉스님은 현성교라고 그렇게 말했죠? 성을 갈키는 교라고. 그러나 다 설자로 봐도 상관없어 49년 설법이 마음의 상태와 마음의 공한 그러한 진리와 마음의 본성 그렇게 말씀하신거요.
[화엄경][법화경][열반경]은 법성종에 해당되죠? 법공종이라는 말은 없지만은 내가 알기쉽게 말한거요. 법공종은 무엇이냐면은,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대반야경]은 法이 空한 도리를 주로 많이 말씀을 하신거라. 거기도 性도 말했고 相도 말했지만은 많은 쪽으로 이렇게 분류를 한다면 법상종 법공종 법성종, 이렇게 법이라는 것은 내나 우주만법도 법이고 마음심법도 법인데 법의상태를 말한 그 종은 법상종이고 법의 공한 이치를 말한 그 종은 법공종이고 법의 성품을 말한 것은 법성종이요.
오교구산에도 무슨 오교에도 저런게 나오죠. 법성종 법상종. 법공종이라는 말은 잘 안써요. 내가 쓴 거요. 내가 써도 망발은 아니잖아요. 에? 그래서 파상교를 팔공조(?)라고 내나 한거요.
그렇듯이 여기도 상에, 상과 성을 알면은 알기가 쉬워요. 물이 거품이 생기고 파도가 생기는 것은 상이고 물의 축축한 액체 습성은 성이고 또 물도 사실은 空한거요. 어? 지수화풍이 있는 것으로만 아는 것이 범부들의 소견이지, 지수화풍이 본래 공했다라고 그런 말이 다 나오죠?
[반야심경]에도 오온개공할 때 오온에서 색이 색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이거든, 지수화풍도 다 공한거요. 그러니까 법상 법공 법성 이 세가지를 부처님이 49년동안 설법하셨는데 우리의 마음자리를 공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마음의 본성 진공 묘유의 도리, 묘유의 도리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진공의 도리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마음이 여러 가지 팔식의 상으로 나타나죠? 탐진치 삼독이나 오욕칠정이나 그런 팔식이나 그것들은 상에 해당되요.
물도 얼음이 되고 거품이 파도가 생기는 것은 상이라요.
相依乎性하며 性無不包 새 故稱為含이니라
相은 性에 依하고 性은 포함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能含 능함중묘라고 능함이 된다고 含이 포함함이 된다라고 했다.
又云 妄念이 本寂하고 塵境本空하니
또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이 바로 저저 [선원제전집]에 나온 말씀이라요. [선원제전집]에서 허망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육진경계 육진의 허망한 경계는 본래 空하니,
空寂之心이 靈知不昧하니
空寂한 마음이 그래서 空寂靈知 밑에 나오잖아요. 신령스럽게 알아서 어둡지 않다. 소소영영한 밝은 자리를 영지라고 해요.
即此空寂之知가
곧 이 空寂한 知가 바로 공적영지 그 자리를
是前達磨의
達磨대사께서 전하신 법입니다 그말요. 이 옛날, 前字는 옛날을 말한거죠. 前에 달마께서
所傳清淨心也라
전하신 바 淸淨한 마음이라 말이요. 청정한 마음이 바로 空寂靈知 空寂知 간단히 하면 적지라고 하죠 寂知. 그런데 그 청정한 마음 아까말한 능함중묘하는 그 적지가 어떻게 되느냐?
任迷任悟하야
迷를 따르고 悟를 따라서 범부도 그게 만들어졌지요. 범부적에는 迷하고 성인이 되면 깨달으니까, 범부 迷함을 따르기도 하고 성인의 깨달음을 따른다. 따를 任字로 봐요. 맡을 任字 거기에 따라서 인연따라 인연법으로 되는 것처럼...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
一念萬年去... 끊이지 않고 계속이어지는 화두가 되어야 한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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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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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寂之心이 靈知不昧하니...화풍정 님! 수고하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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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杳冥의 안에 온갖 妙가 존재함이니 ...화풍정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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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렴픗이 알아 들을 것도 같긴하나,,, 참, 어렵군요,,,!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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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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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친절하게 지도해 주시다니!
자상하시기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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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스님 ..감사드립니다.,
허풍정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