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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eve Reich(1936- )의 Phase Music
이번엔 phase music에 대하여 알아보고 Audacity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곡 하나를 같이 만들어 보겠습니다. 일단 phase music 이 뭔지 밑의 링크를 클릭하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Phase Music의 예: '둘 하나 둘' (클릭)
주의: 이 예는 스테레오 파일입니다. 스피커 하나로는 곡의 효과를 느낄 수 없습니다.
위의 곡을 들어보면 30초 동안 '둘 하나 둘'이란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처음엔 목소리가 하나로 들리다 곡이 진행되면서 점점 두개의 목소리가 따로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 하나 둘'이라는 말이 '하나 둘 둘' 또는 '하나 둘 하나'라는 식으로 들리는 등 여러 가지 패턴의 바뀜이 들리고 소리가 공간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도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phase music은 간단한 소리의 반복에 최소의 변형을 주어서 소리변형의 여러 가지 단계, 즉 phase(주기, 변하는 것의 상相, 면, 양상)를 들려주는 음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의 변형'은 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를 다른 쪽에서 나는 소리보다 아주 약간 빠르거나 느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세한 타이밍의 차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귀가 두개인 우리들에게 패턴의 혼돈과 인식을 반복하게 만듭니다(이와 비슷한 소리의 '착시현상'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면 전에 적었던 Psychoacoustics 글도 읽어 보십시오). Phase music을 들을 때 관중의 귀는 곡이 시작한 몇 초, 또는 몇 분후 이 스타일에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멜로디나 화음 이외의 다른 특징, 즉 리듬, 음색, 그리고 패턴의 변화과정에서 음악성을 찾게 됩니다. 곡의 멜로디와 화음의 흐름, 또는 가사에 귀를 기울인다면 이러한 음악은 형편없는 곡이 될 수 있으나 그 외의 소리의 요소들에 귀를 열면 새롭고 특이한 경험을 하실 수 있게 됩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간단한 소리 속에서 새로움을 찾게하는 phase music은 미니멀리즘(minimalism;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는 위에 설명한 phase 현상을 1960년대에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당시 라이히는 두 대의 테이프 플레이어에 같은 소리를 틀어 놓으려고 했는데 한 테이프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보다 약간 빠르게 돌아가게 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그의 귀는 새로운 곡의 가능성을 찾았고 두 대의 플레이어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재생하여 'Come Out'(나타나다.), 'It's Gonna Rain'(비 올거야.)등의 역사적인 phase music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스티브 라이히는 비슷한 컨셉을 전자기타(Patrick Bruce Metheny, 1954년 8월 12일 - ), 현악사중주(Kronos Quartet), 타악기에도 적용하여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의 곡 Different Trains는 그래미상을 수상한 현악사중주곡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Electric Counterpoint라는 곡은 재즈 기타리스트 Pat Metheny(팻 메시니)가 연주한 곡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번 6월에 한국에 스티브 라이히의 공연이 있습니다. naver.com에서 Steve Reich를 검색하시면 그의 사진과 동영상 및 공연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티브 라이히는 최근 빌리지 보이스지로부터 “미국의 현존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일컬어진바 있다. 초기 녹음 연설인 It's Gonna Rain(1965)과 Come Out(1966) 로부터 비디오 아티스트인 베릴 코롯(Beryl Korot; 스티브 라이히의 부인)의 디지털 비디오 오페라인 Three Tales(2002)에 이르기까지, 라이히의 작품세계는 서구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비서구 및 미국 토착음악, 특히 재즈의 하모니와 리듬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런던의 가디언지는 “정통 음악사의 조류를 바꾸는 현존 작곡가는 불과 몇 명에 불과하다. 스티브 라이히는 그들 중의 하나다.”라고 라이히를 평가한 바 있다.
서구음악의 뿌리깊은 전통을 전면 거부하는 미니멀리즘의 선구자로 대변되는 스티브 라이히는 코넬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작곡으로 선회하여 줄리어드 학교, 밀스 컬리지에서 작곡을, 그리고 아프리카의 가나대학에서 타악기를 공부하였다. 이후 라이히는 자신의 앙상블 을 구성하여 뉴욕의 카네기홀 및 뮤지엄과 갤러리 등에서 독특한 연주활동을 펼치며 포스트모더니즘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를 쌓아왔다.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작품인 작은 봉고 드럼, 마림바, 글로켄슈필(Glockenspiel 또는 종금은 금속제 (오늘 날에는 주로 강철제)의 반음계적으로 조율된 음판을 발음체로 하여 나무, 고무, 실꾸리 뭉치, 금속 등의 머리가 붙은 채로 두들겨 연주), 2가지 음성, 휘파람, 피콜로를 등장하는 Drumming(1971)을 비롯하여, Music for 18 Musicians (1976)은 현대음악으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만한 2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이전까지 라이히를 바라보던 음악계의 시선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그래미상 최우수 소규모 앙상블 부문 수상)
연설을 음악적 재료로 사용하여 ‘경이적인 독창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Different Trains(그래미상 최우수 현대음악 작곡부문), 성서이야기를 고찰하는 21세기형 오페라라 일컬어진 비디오 음악극인 The Cave, 20세기 테크놀로지 발전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윤리적, 종교적, 문제와 역사적 사건을 다룬 화면과 연주자들의 연주와 토론으로 풀어낸 최신작 Three Tales까지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은 그 독창성과 진보정신에서 동시대 작곡가의 음악 가운데 선두 열에 서 있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니멀리즘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고 있는 스티브 라이히는 뿌리깊은 서구 클래식음악의 전통뿐 아니라, 1950~60년대의 엘리트 지향의 새로운 음악 경향을 전면 거부하여, 강하고 규칙적인 박자(pulse)와 극도로 단순한 리듬 패턴 및 멜로디를 끊임없이 반복 진행시키며 음악의 가장 원초적인 재료들을 파고들었다. 또한, 그는 미국 토착음악, 특히 재즈의 하모니와 리듬을 비롯하여,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등 제 3세계의 음악을 모두 섭렵하며 일반인에게도 접근이 용이한 새로운 현대음을 제시한 인물이다.
현재 라이히의 음악은 뉴욕 필, 크로노스 콰르텟, BBC심포니, 앙상블 모던 등 손꼽히는 연주자 및 앙상블에 의해 연주되고 있으며,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Anne Teresa De Keersmaeker), 지리 킬리안(Jiri Kylian ), 로라 딘(Laura Dean) 등 저명 안무가들이 라이히에게 음악을 위촉하고 있다. 나아가,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시니가 라이히의 Electric Counterpoint를 연주했으며, 영국의 테크노 그룹 오브(The Orb)가 라이히의 음악을 샘플링하여 사용하였고, 콜드 컷, 디제이 스푸키 등 19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라이히의 음악을 리믹스하는 등 라이히가 끼친 영향력은 실로 광범위하다.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적 특징은 미세한 변화를 동반하는 반복의 음악이 특징이다. 반복은 서양음악의 기본이다. 그러나 반복만 있을 경우 이는 그 기본을 전복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라이히 스스로는 자신의 음악은 지속적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너무 작아 일반인들은 급격한 변화 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쉽다.
뉴욕주(州) 뉴욕에서 변호사와 가수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뉴욕 필하모닉의 팀파니 연주자로부터 드럼을 배웠다. 그 후 코넬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1953∼1957) 줄리아드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한 후 1963년 밀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밀스대학에서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와 안젤로 L.베리오(Angelo L. Berio) 등에게 배웠다.
건반악기와 타악기도 연주했으며 자신의 합주단을 조직한 1966년에 이를 즈음 이미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20세기 중엽 고전음악의 화성과 음조의 특징적인 복잡성을 배제하고 하나의 코드, 짧은 모티프, 가벼운 감탄 등 최소한의 소재가 반복되면서 아주 느리게 조금씩 변주되는 대규모 작품들이었고, 경우에 따라 녹음된 연주와 실제 연주자의 연주가 결합되기도 했다.
그는 소수민족과 고대음악으로부터 영감을 얻기 시작하여 가나에서 아프리카의 북 연주(1970)를, 시애틀에서 발리의 가믈란 음악(1973)을, 예루살렘에서 중동 지방의 노래(1977)를 배웠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에 4대의 전자오르간과 마라카스를 위한 《4대의 오르간 Four Organ》(1970), 작은 동조 드럼, 마림바, 글로켄슈필(Glockenspiel 또는 종금은 금속제 (오늘날에는 주로 강철제)의 반음계적으로 조율된 음판을 발음체로 하여 나무, 고무, 실꾸리 뭉치, 금속 등의 머리가 붙은 채로 두들겨 연주하는 타악기이다.), 2가지 음성, 휘파람, 피콜로를 위한 《드럼 연주 Drumming》(1971), 두 사람의 박수로 연주하는 《박수 음악 Clapping Music》(1972), 윌리엄 C.윌리엄스(William C. Williams)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106인이 연주하게 되어 있는 《사막의 음악 The Desert Music》(1984) 등이 있다.
단순한 모티프와 화음의 반복과 조합을 바탕으로 하는 미니멀리즘 양식의 대표적인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8년 작인 ‘서로 다른 기차들(Different Trains)’에서도 끔찍한 사고를 겪은 이들의 음성을 재료로, 그들의 음성에 첼로와 비올라를 얹어 음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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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출처:http://ayaysir.mireene.com 참조
2. 원조 미니멀리스트 : 스티브 라이히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원조 아귀찜이나 원조 갈비처럼 음악사에서도 원조 논쟁이 가능할까요? 비슷한 상황이 1960년대 미국 음악계에서 벌어집니다. 이전 호에서 다룬 필립 글래스와 오늘 소개할 스티브 라이히 간에 일어난 일종의 미니멀리즘 원조 논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에는 정작 미니멀리즘이라는 명칭 자체는 당사자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고 하니 이 점이 흥미롭습니다.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와 필립 글래스는 1962년까지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입니다. 라이히는 미국풍의 조성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고답적인 학풍에 일찍부터 넌더리냈던 반면, 글래스는 ‘나는 A플러스 학생이었다. 스승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작곡을 배웠다’고 고백할 만큼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 둘 사이에 활발한 교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이히는 “글래스와 나 사이는 언제나 화학적으로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는 예전에 그의 여자 친구였고, 우리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고 말했습니다. 악연이라면 무척 질긴 악연이지요. 하지만 5년 뒤인 1967년 뉴욕 갤러리에서 열린 라이히의 콘서트를 글래스가 참관하면서, 둘은 의기투합합니다. 둘은 이삿짐센터인 ‘첼시 라이트 무빙(Chelsea Light Moving)'을 함께 운영했고, 글래스는 라이히의 밴드에서 연주하며 차례로 자작곡을 발표해갑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생깁니다.
“1967년 당시에는 내가 제공자였고, 수혜자가 글래스였다. 그런데도 반응은 전적으로 부정직했다”고 라이히는 공격합니다. 테리 라일리와 라 몬테 영이 창안하고 자신이 발전시킨‘미니멀리즘’을 글래스는 전수받는 처지였지만, 정작 대중적 성공은 독식해갔다는 섭섭함의 표현이겠지요. 반면 훗날 글래스는 “내가 뉴욕에 돌아왔을 당시, 굉장히 유사한 스타일로 작업하던 작곡가가 대략 30여 명에 이르렀다”고 넌지시 반박합니다. 일종의 ‘미니멀리즘 원조 논쟁’이 벌어진 셈이지만, 정작 미니멀리즘이라는 명칭 자체는 당사자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라이히 역시 미 서부 시절에 테리 라일리의 작품 ‘C장조로(in C)’를 도용했다는 비난을 산 적이 있지요. 이렇듯 공격과 수비가 뒤바뀌는 일은 삶에서 허다합니다.
유대인 변호사인 아버지와 작사가이자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히는 생후 한 살 때 부모가 결별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히트곡이 ‘사랑은 단순한 것(Love Is a Simple Thing)'이었으니, 결혼은 사랑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았나 봅니다. 라이히는 아버지의 권유로 7세부터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관심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라이히는 “아버지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순전히 교육 받은 중산층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강요된 것이었다. 나는 피아노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지녔고, 10세쯤 그만 두었다”고 냉소적 시선으로 돌아봅니다.
대신 라이히가 관심을 쏟은 악기는 드럼이었습니다. 뉴욕 필하모닉의 팀파니 수석을 사사하는가 하면, 직접 재즈 밴드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찰리 파커와 존 콜트레인(색소폰), 케니 클라크(드럼)와 마일스 데이비스 (트럼펫) 같은 재즈 음악인들은 당시 라이히의 영웅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음악 궤적은 전후의 미국 작곡가들이 동시대 유럽 작곡가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라이히는 두 대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스톡하우젠, 베리오와 불레즈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폭격으로 얼룩진 대륙에서 작곡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극히 정직한 언어로 묘사했다. 하지만 척 베리와 수백만 개의 햄버거가 팔려나가는 전후 미국의 음악가들이 빈의 음울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음악적으로도 거짓말이었다.” 해체하거나 딛고 일어서야 할 음악적 전통 자체가 부재한 미국은 거꾸로 기회의 땅이자 신천지였던 것입니다. 실제 라이히는“믿거나 말거나 나는 하이든부터 바그너 사이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대신 그에게는 바흐와 스트라빈스키, 재즈의 비밥(Bebop)이 있었던 것입니다.
글래스와의 관계가 악연이라고 했지만, 재즈에 대한 관심 외에도 실제 둘 사이엔 공통점이 적지 않았습니다. 글래스가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수학한 뒤 줄리어드로 건너갔던 것처럼, 라이히 역시 16세에 코넬 대학에 입학해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공한 뒤 줄리어드로 향합니다. 하지만 라이히는 보수적 음악 풍토에 실망하고 졸업장도 받지 않은 채, 이탈리아 작곡가 루치아노 베리오가 재직하고 있던 오클랜드의 밀스 컬리지로 건너갑니다.
한때 베베른과 베리오의 총렬 음악에 경도됐지만, 그를 더욱 사로잡은 것은 1960년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에서 갓 일어나기 시작한 히피 운동의 열기였습니다. 라이히는 "1950~80년대 미국을 에워싸고 있던 음악은 재즈와 록이었다. 정련한다거나 거르거나 거부하거나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는 있었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라이히는 12음 기법을 반복하는 작품을 베리오에게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스승은 "조성 음악을 쓰고 싶다면 차라리 쓰지 그러느냐"고 말합니다. 조소 섞인 반응이었지만, 거꾸로 제자는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정서적으로 나를 움직였던 것은 언제나 조성적 중심을 지닌 음악이었다"고 말합니다.
라이히는 글래스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택시를 운전하거나 우체국과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훗날 록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의 건반 연주자가 되는 톰 콘스탄틴과 필립 글래스 앙상블에서 활동하는 색소폰 주자 존 깁슨도 당시 멤버였습니다. 택시 안에서 녹음한 온갖 소리와 손님들의 말소리를 일종의 콜라주 기법으로 붙인 테이프 음악 '생계(Livelihood)'도 이 시기의 작품입니다.
1966년은 라이히의 음악 세계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온 해입니다. 라이히는 기존의 테이프를 이용한 작곡에서 벗어나 실연(實演)을 도입하기 시작합니다. 작곡가는 "1966년은 무척 울적한 해였다. 나 자신이 점차 연구실에 갇힌 미친 과학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러 소리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복하거나 가속을 시켜 엇갈리는 효과를 빚어내는 페이즈 프로세스(phase process)의 방법론은 같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테이프에서 기존 선율 악기의 라이브 연주로 달라진 것입니다.
1968년 라이히는 '점진적 과정으로서의 음악(Music as a Gradual Process)'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미니멀리즘 방법론을 정식화합니다. 일단 작품이 시작되고 나면 작곡가가 개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시기 작품들은 구조적 접근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라이히는 "비록 나 자신도 음악의 진행 과정을 발견하면서 여기에 함께 진행되는 음악 소재를 작곡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만, 일단 이 과정은 한번 정립되고 실행되면 저절로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1977년 마이클 니먼(Michael Nyman)과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10년 전만큼 구조를 확립하는데 관심이 많지 않다. 오히려 내 음악의 전체 사운드는 훨씬 풍부해졌지만, 구조에 대한 관념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럴 수 있었다"며 한층 유연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이 10년은 라이히에게 일종의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이행하는 기간이었습니다.
1973년 1월에는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요청으로 '네 개의 오르간(Four Organs)'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초연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틸슨 토마스의 증언에 따르면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프로그램 넘기는 소리, 과장된 큰 기침, 일부러 의자를 끄는 소리, 적대적인 신음 소리와 외침이 점점 불협화음을 이뤘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제발 음악을 멈추라며 신발로 무대 바닥을 두드리기까지 했습니다. 미니멀리즘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뉴욕 타임스의 헤럴드 숀버그는 "음악을 멈추라는 고함과 함께 작품을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는 박수가 들렸다. 결국 커다란 야유로 끝났다"고 씁니다.
유년부터 타악기와 재즈에 천착했던 그가 약동하는 아프리카 리듬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입니다. 1970년 가나에서 5주간 음악 교육을 받지만, "두 발에 모기에게 50번씩은 물리는 바람"에 말라리아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기도 합니다.
곧이어 1973년에는 인도네시아 가믈란 음악 세미나에 참석해서 공부합니다. 당시 라이히는 "가믈란 음악은 발리 사회에서 후기 베토벤 4중주와도 같았다"는 말로 충격을 표현합니다. 말 그대로 '많은 리듬'을 뜻하는 '폴리리듬(polyrythms)'을 도입하면서 라이히는 비(非)서구 음악에 대한 모방이나 조악한 차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드러밍(Drumming)'입니다. 서로 다른 음악적 토양에서도 "뿌리를 찾아 나섰던" 그는 클래식 음악계 최초의 월드뮤직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긴 여정을 통해 결국 라이히는 1980년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데까지 이릅니다. "서아프리카와 발리 음악에 대한 연구가 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웠다는 것은 역설적이었다."는 고백은 메테를링크(Count Maurice Polydore Marie Bernard Maeterlinck 1862년 8월 29일 - 1949년 5월 6일)백작은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 수필가이다. 그는 191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의 주된 주제는 죽음과 삶의 의미이다. 그는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침묵과 죽음 및 불안의 극작가로 불리기도 한다.)의 '파랑새'와도 닮아있습니다.
기존 공연장보다는 미술관에 친숙했던 미니멀리즘 음악가들이 주류 무대에 부상한 건 1976년 즈음입니다. '18명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Music for 18 Musicians)'이 그 해 뉴욕의 타운 홀에서 초연된 뒤, 음반 출시와 동시에 1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 것입니다. 글래스의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초연된 것도 같은 해입니다.
1980년대 들어 글래스와 마찬가지로, 라이히 역시 숱한 오케스트라 작품을 위촉 받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관현악 풍토에 편안하게 안착한 글래스와는 달리, 라이히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갈 때마다 검투사가 전장에 가는 듯했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냅니다. 부족한 리허설 시간이나 단원들의 반응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는 내가 택할 만한 수단이 아닌 것 같았다"며 관현악 자체에 작별을 고합니다. 반골 기질은 라이히가 더욱 뚜렷했던 것입니다. 라이히는 이렇게 말합니다."몇몇 나의 동료들은 구식(old-fashioned) 작품들을 쓰는데 만족한다. 그리고 그런 작품이 필요한 곳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작곡가가 아니다. 내 최고의 작품들은 언제나 관습에 의문을 던진다." 여기서 동료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었을까요.
3. 월간 바자 인터뷰] 스티브 라이히는 누구인가?
작성일 : 2005-05-24 오후 5:16:19조회 : 6748
[출처:Bazaar 6월호]
Who is Steve Reich?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을 듣고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고 고백한 미술작가 양혜규. 오는 6월, 라이히의 서울 초연을 앞두고 양혜규가 그를 인터뷰했다. 에디터/박루니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란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양혜규로부터였다. 이미 [바자]에 여러 번 소개된 주목받는 현대 미술작가 양혜규는 예술 전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를 각성시킨다. 한번은 자신에게 가장 충격을 준 음악으로 스티브 라이히의 ‘드러밍’을 꼽았다. 과연 어떤 음악이길래? 7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그 음악은 지금 들어도 깜짝 놀랄만했다. 타악기 연주에 휘파람, 박수소리 등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알고 보니 스티브 라이히는 존 케이지, 필립 글래스와 더불어 현대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였다. 대형 음반매장에 가면 그의 음반을 한두 장쯤 찾아볼 수 있더라. 특히 줄리어드 음악원의 동창이기도 한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로 불린다. 필립 글래스가 영화음악에 참여하며 대중들에게 알려진 반면, 라이히는 리듬을 위주로 한 순수음악 작곡에 열중하는 쪽이었다. 철학, 음악을 고루 공부한 그는 월드뮤직, 비디오 아트를 적용하는 실험 등을 해왔다고. 꽤 난해한 전위음악 같지만, 팻 메스니나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될 만큼 대중적이기도 하다.
얼마 전, 6월14일 LG아트센터에서 그의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터뷰 요청에 야박하기로 소문난 스티브 라이히는 자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한국 작가와의 인터뷰에 흔쾌히 오케이했다. 그리하여 뉴욕에 있는 스티브 라이히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양혜규와의 전화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일흔을 바라보는 스티브 라이히는 여전히 자신감과 시니컬한 유머감각이 넘치는 뉴요커였다고 한다.
양혜규(이하 양):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신의 최근작인 ‘세 개의 신화(Three Tales/2003)’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비디오 영상이 함께 곁들여지는 비디오 오페라를 시도하셨는지요?
스티브 라이히(이하 라이히): 그 비디오 작업은 이스라엘의 여성 작가 베릴 코롯(스티브 라이히의 부인이기도 하다.)의 것입니다. 1993년 최초의 비디오 오페라인 ‘동굴(The Cave)’ 이후 두 번째 공동 작업이죠. 세 개의 신화는 20세기 테크놀로지 역사에서 중요한 세 가지 사건, 즉 힌덴부르크 비행선 추락, 비키니 산호섬에서의 핵실험, 복제양 돌리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며 테크놀로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작품입니다.
양:사회적 배경이 작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9.11 사태가 일어난 뉴욕이라는 곳에 살고 계시잖아요.
라이히:9.11은 저에게 정치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생명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로 그라운드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도 친척들이 살았거든요. 불행하게도 위험은 여전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양:초기 샘플링 작업인 ‘비가 내릴 것이다.(It’s gonna rain)’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죠? 기술이 열악했던 60년대에 같은 구절을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를 실천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라이히: 네,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이라 당시 누구의 집에나 있던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했습니다. It’s gonna rain이라는 한 문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복해서 말하며 녹음했죠. 문장(speech)도 멜로디와 리듬이 될 수 있어요. 1998년 작인 ‘서로 다른 기차들(Different Trains)’에서도 끔찍한 사고를 겪은 이들의 음성을 재료로, 그들의 음성에 첼로와 비올라를 얹어 음악으로 만들었죠.
양: 스피치는 멜로디와 리듬이 될 수 있지만, 심리상태를 전달하기도 하죠.
라이히: 예, 정확한 지적입니다. 문장은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비가 내릴 것이다’는 ‘세상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이 문장은 노아의 홍수를 설명하는 성경 구절에도 나오는데, 이 곡을 작곡한 건 쿠바 미사일 사건을 비롯해 원폭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높았을 때였죠. 60년대 중반의 이 두려움, 한순간에 우리가 먼지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노아의 홍수에 비유했습니다.
양: 에릭 사티의 ‘벡세이션(vexation)’에서 영향을 받았나요? 동일한 악구를 840번이나 반복해서 연주하라는 그의 악보를 실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지만, 1963년 존 케이지에 의해 처음으로 연주되었죠.
라이히: 사실 에릭 사티의 작업 중에 제가 가장 아끼는 ‘짐노페디’를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합니다. 고백하자면, ‘벡세이션’은 단 한번밖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혀 변화없이 반복되더군요. 마찬가지로 반복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 작업과는 아주 다릅니다. 예컨대, ‘드러밍’에서 연주가들에게 주는 지시사항 중에는 스스로 변화를 주라는 항목도 있죠. 그런데, 우리의 얘기가 마치 제가 1971년 죽은 음악가인 것처럼 초기 작업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요.
양: 미니멀 음악의 선구자로서 미니멀 음악과 관련한 수많은 질문이 지긋지긋할 만도 하겠군요.
라이히: 미니멀이라는 용어는 음악 비평가와 음악사가들이 개인의 작업을 한꺼번에 언급하기 위해 만든 용어입니다. 즉, 음악가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프랑스에 함께 가서 드뷔시의 무덤을 열고 그에게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인상주의자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내 생각에 그는 “오, 망할”이라고 소리치며 다시 누워버릴 겁니다.
양: 하지만 초기작들은 지금도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죠. 몇 년 전 벨기에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가 당신의 ‘드러밍’을 무용에 사용하기도 했잖아요?
라이히: 케이르스마커는 정말 훌륭한 안무가이지요. 그녀는 ‘드러밍’ 외에도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에 맞추어 ‘레인’을 공연했지요. 현재 ‘8개의 줄(eight lines)’이라는 무용을 준비 중인데, 아마 내년쯤 공개될 거 에요.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제 작업이 무용과 잘 어울립니다. 제 웹싸이트(www.stevereich.com)에 가시면 많은 안무가가 제 음악에 맞추어 작업한 공연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양: 전문 무용수들 뿐 아니라, 일반들도 당신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DJ스푸키 등 유명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당신의 작품을 새롭게 리믹스한 앨범(라이히 리믹스)를 내기도 했죠. 그들과 공동 작업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라이히: 사실 전 누구와의 공동 작업에도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 새로운 음악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막 로스앤젤레스에서 녹음을 마쳤습니다. 올 8월 혹은 9월에 출반할 예정이지요. 물론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지만, 이제까지의 어떤 곡보다 흥미로울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양: 와! 정말 기대됩니다. 첫 만남이지만 라이히씨는 매우 열린 작곡가로서 공연에서는 작업에 대한 설명과 교환을 아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안티 아카데믹’한 태도를 가진 음악가라는 명성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이히: 어릴 적에 저는 교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다수의 음악가들이 학교에서 가르치지요. 하지만 저에게 학교라는 환경은 창의적 활동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에너지를 뺏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체국에서 일했고, 택시운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들의 작업을 꼼꼼히 살펴보는 위치에 서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제 시간과 에너지는 나만의 작업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청중과 학생은 다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청중과의 접촉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양: 한국에서의 공연은 처음이지요?
라이히: 예,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제 앙상블에는 엘리자베스 임이라는 한국 출신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고, 저는 한국 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일본음악을 들으면 그 안에서 한국 음악의 영향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죠.
양: 이번 한국 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연주하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라이히: 드러밍이라는 1시간 남짓 되는 작품과 Music for Pieces of Wood를 한국 타악 전문 그룹인 포플러스와 협주할 예정입니다. 또 다른 레퍼토리인 ‘Triple Quartet’은 크로노스 콰르텟이 연주한 녹음 테이프에 한국의 현악 연주단인 TIMF가 현악 라이브 파트를 더하는 형식입니다.
양: 수많은 작품 중에 유독 이 세곡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라이히: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보여줄 겁니다. 제 초기작인 드러밍은 드럼, 마림바 등 타악기를 이용한 복합적인 리듬의 변화만이 있습니다. 멜로디로 가득 찬 99년 Triple Quartet에 이르면 최근 작업들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미니멀 음악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는 인상을 받을 겁니다.
기타 참고문헌
알렉스 로스(2007) 김병화역, 나머지는 소음이다. 경기 파주: 21세기북스. 707-710.
그라우트 외(2006) 오지희 외 역,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하). 서울: 이앤비플러스. 406-407.
3월 2번째 화요일에 이사한 저의 집에서 감상 모임을 가졌습니다. 완쾌 중이신 고문님만 참석치 못하시고 모두 모이셨습니다. 제가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에 91년 부터 매료되어 오랫동안 애청해 왔던 'Six Marimbas(1973-86)'와 너무도 이론적인 'Come out(1966)', 'It's gonna rain(1965)', 'Clapping music(1972)'을 함께 들었습니다. 이어서, Charlie Haden과 Pat Metheny가 함께 연주했으며 Steve Reich의 방법론이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Spritual'로 마쳤습니다. 즐거운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함께 존재했음을 기록하기 위하여 몇 장 남깁니다.
다행히 권원장님이 건강해 지셨습니다. 아직 약주는 못하시지만 다시 '돌아온 장고'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 분들이 우리 모임의 여러분이십니다. 아직 촬영에 익숙치 않으셔서 준비시간 중입니다. 보시면 시종일관 촬영할 때 마다 눈을 감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자, 이제 좀 익숙해지는 순간입니다. 아직도 주무시는 분이 계시지요. 모 사장님. 그리고 모원장님.
아! 그냥 자유시간이군요. 마지막으로 전체 사진을 한 번 더 촬영하겠습니다. 찰칵. 야! 이제는 경제에서 많이 자유로워 지셨습니다.
여기까지 전체 촬영을 하였구요. 이제 프레임을 좀 더 좁혔습니다.몇 장 더 보시지요.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를 부르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저 분은 아마 초등학교 소풍간 사진보면 항상 주무실 겁니다.
한 사장님은 방금 잠에서 깨셨습니다.
이제는 촬영 위치를 바꾸겠습니다. 포커스 핀이 어떤 인물에 맞추어지는지 한 번 보세요.
먼저, 장총무님.
이젠, 박후봉님.
박후봉님과 장총무님. 장총무님과 박후봉님. 두 분은 친하시지요. 물론 가끔 다투시기도 하십니다. 사진도 함께 묶었습니다. 우정이 계속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원하셨던 마지막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