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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의 기쁨(시 5:1-12)
시편 5편은 다윗이 자신을 가리켜 쓴 시 같습니다. 1-3절까지는 기도를 들어 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스펄전은 “기도는 그 날의 생활을 여는 열쇠이고, 그 날의 생활을 닫는 자물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열 때 열고, 잠글 때 잠그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혼을 도둑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기도하고’라는 동사는 레위기 1:7절 말씀의 내용과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불붙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심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해 주시나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기도드리는 것으로 끝내고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지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기 어떤 사람이 무슨 소원이 있어서 그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분을 찾아가서 그저 한참 동안 말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 어른의 대답은 들어볼 생각도, 기회도 없이 “안녕히 계셔요”하고 돌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청원의 기도’입니다. 물론 자식이 아버지에게 청원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기도이며 하나님 보시기에도 합당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자세가 이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가 쉽습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간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그만큼 합당한 기도입니다.
다음의 기도는 ‘중재의 기도’입니다 이 수준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은 덜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사람이나 고통, 번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려 고쳐 주시고 그 고통이나 문젯거리를 없애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수준의 기도는 ‘찬양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넘쳐 나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을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식의 기도’입니다. 가장 고차원적인 기도의 방법입니다. 이 대화식의 기도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청원하거나 중재하거나 찬양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님이 또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한 말씀해 주십니다. 인간의 말소리와 세상의 소리를 듣는 머리에 붙은 귀가 아닌 내면의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이 기도를 통해서 평화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에 이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는 능력과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평화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귀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귀를 하나님께 기울이고 있을 때 우리의 생애는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편 94:9절에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성 있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4-6절에는 기도의 근거가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잠언 6:16-19절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미워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교만을 미워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교만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보통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 된 줄로 생각합니다. 물질적인 교만, 지성적인 교만, 사회적인 교만, 신체적인 교만, 심지어 신앙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모두가 따지고 보면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된 혀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빛의 자녀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거짓은 어두움의 일입니다. 마귀의 특성이 거짓입니다. 마귀는 거짓 영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미워하십니다. 우리의 손은 부지런히 일하라고 주신 지체입니다. 그래서 이 손으로 사회와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 글을 쓰고, 수술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긴한 손으로 남을 돕는 데 쓰지 아니하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이사야 1: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펴고 기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까? 아닙니다. 피가 묻는 손을 펴고 기도하는 것은 듣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곧 내 손에 피가 묻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형제에게 노하는 자, 업신여기는 자, 미워하는 자를 살인자로 간주하며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의 마음을 가리켜 “사상의 대장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장간에서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대장간에서는 무슨 기구를 만들어 내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구를 만들어 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기구를 만드십니까?
이제 본문 7-8절은 성도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믿는 사람들은 선이나 빛만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악을 보고 암흑을 보고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의 종말이 무엇이며 어두움의 결과가 무엇임을 보고 자신이 선한 길, 빛 가운데 살기로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할 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주위 환경이 너무도 어두워질 때 낙심하여 한숨짓거나 두려워 떨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입니다. 구약 시대의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였습니다. 성전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 달라고, 그 길을 밝혀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보려고 그처럼 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강한 시선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원수들의 기대가 실패하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더구나 자신을 주님의 길, 구원하시는 의의 길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옵소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려고 그것을 알게 하시고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여기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지적되었습니다. 입에는 신실함이 없으니 거짓말 뿐입니다. 그 마음속이 악하여 썩은 시체와 같아 입만 열면 썩은 냄새가 나옵니다 그 혀는 아첨하여 미끄럽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의 말대로 “입에는 평화를 말하나 마음에는 화살을 품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에는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정죄해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구약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하만이란 사람이 유대인을 다 죽이려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그럴 듯하게 고발을 해서 모르드개 한 사람의 미움이 전 민족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준비를 물 샐 틈 없이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을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해 놓았던 곳에 하만 자신의 목이 매달려 죽어 버리고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은 사망에서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자기 꾀에 빠지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를 배역하는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하나님과 대항해서 이긴 자가 있을까요?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철장으로 그 원수들 쳐부수기를 질그릇 부수듯이 하실 것입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기쁨이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얻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 기쁨이란 육신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육감적 기쁨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자랑, 이생의 자랑입니다.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쁘고, 흐린 날은 슬픕니다. 건강하면 기쁘고, 병이 나면 슬픕니다. 순경에는 기뻐하고, 역경에는 슬퍼합니다. 젊어서는 기뻐하고, 늙어지면 슬퍼합니다. 살 때는 기쁘고 죽을 때는 슬픕니다.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인 기쁨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마치 지는 해와 같아서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이요, 양심의 기쁨이요, 목마른 영혼이 생수를 마시는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환경을 초월하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도 기쁘고 흐린 날도 기쁩니다. 순경에도 기쁘고 역경에도 기쁩니다. 건강해도 기쁘고 병들어도 기쁩니다. 젊어서도 기쁘고 역경에도 기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13-14절에 예수님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영원히 기뻐 외치라”고 했습니다. 외침은 열광적인 표현입니다. 사람은 기쁠 때 소리치는 법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승리할 때의 모습을 보세요. 기뻐 외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기쁘면 소리칩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을 자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껏 기뻐하며 외치십시오.
혹 어떤 분은 예배당에 나와서 여러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서 “아멘”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꾹 참는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아멘”하시고 싶으신 감동과 기쁨이 있을 때 그것을 참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껏 소리치세요. 우리의 열광적인 기쁨의 영광스러운 외침이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의 삶을 고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원한 참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기쁨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11절)
주님께 피함으로,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때 그 기쁨을 말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 대로 보호를 받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요새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속하신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것만큼 군사들을 잘 지켜주지는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 지켜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보살펴 주십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한 것처럼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마 이 자리에도 많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감정입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사랑의 고백을 하는 때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용히 앉아서 아무 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이 또 아무런 말도 없이 다만 우리 영혼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할 때 이것이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영혼 속에서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기쁨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을 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 이런 체험을 하고 계신 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주님께 여러분의 영혼을 기울여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강물같이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넘칠 줄 믿습니다.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 넘치네
내게 바다같은 사랑 내게 바다같은 사랑 내게 바다같은 사랑 넘치네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샘솟는 기쁨 내게 샘솟는 기쁨 넘치네
이 기쁨이 어떻게 넘치게 됩니까?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주께 피하는 모든 자는 다 기뻐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날아 봐도 앉을 곳이 없어 방황 끝에 노아의 방주에 다시 돌아와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일 때 그 비둘기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이 세상에 참된 안식이 없어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여 참된 평화를 맛보게 될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어미 품에 안긴 병아리와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우리의 지체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고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한 번도 믿어 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참 기쁨은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기쁨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절대로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오늘 저녁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죄를 다 해결하고 주님께 피하므로 기뻐하며, 주의 보호를 받아 즐거워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며,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