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마사다는 굳이 포스팅하지 않아도 좋을만큼 많이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기왕 다녀왔으니 차분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마사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천혜의 요새'입니다. 감히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지형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천연요새를 가장 잘 다듬은 인물은 뜻밖에도 헤롯대왕입니다. 예수님탄생후 베들레헴의 2세 미만 아이들을 몰사시켰던 인물입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골치아픈 문제적 인물'이 헤롯대왕이라서 가계도 하나 인용합니다.
(출처:http://blog.naver.com/bioj56/100175852177)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맨 위 헤롯대왕이 예수님 탄생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한 그 헤롯입니다. 헤롯대왕으로 불리는데 그는 주전 4년에 죽습니다. 그 후 아들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이들을 '분봉왕'이라고 성경은 부릅니다. '마케루스 편'에서 헤롯 안티파스가 이복형제의 부인인 살로메를 취하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국민일보 2014년도 자료사진에서 인용했는데요, 가운데 사진은 마케루스 포스팅할 때 저도 인용했던 자료사진입니다. 여기서 설명할 것은 맨 위 '헤로디온 요새'입니다. 저희는 이번 순례 일정에서 헤로디온 요새는 못가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올린 이유는 헤롯왕이 재임 중에 '여차하면' 피신하기 위한 비밀 아지트로 세 곳의 천연요새를 축성해 두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세 곳이 헤로디온, 그리고 마케루스와 마사다입니다.(지도 참조) 이런 역사적 비사를 간직하고 '마사다'로 향합니다.

'텔 브엘세바'를 거쳐 '텔 아라드'를 거쳐 마사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잡은 바깥풍경입니다. 저 너머에 사해가 있습니다. 아참, 헤롯대왕은 생전에 세 곳에 요새를 구축해 두었으나 그곳으로 피신할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이 세 요새가 나중에 요긴하게 쓰입니다.

마사다가 오른 편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희는 마사다 동편의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서쪽에서 접근하여 마사다 아픔인 '토담 경사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서편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 옆에는 로마군대가 마사다를 공격할 때 썼을 것을 추정하여 만든 공성퇴 모형입니다. 세 요새를 헤롯이 축성했는데, 당시는 쓰임이 없다가 헤롯 대왕 사후 70여년이 흐른 서기 66년에 1차 유대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와의 분쟁이 전쟁으로 번집니다.

사진 왼편으로 사해가 보이고 오른편 암벽이 마사다 북편입니다.
유대인이 로마에 덤볐는데 결과야 명약관화합니다. 당시 최고의 대 제국인 로마를 어찌 이스라엘이 해 보겠습니까? 로마 장군 티투스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타버린 해가 서기 70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멸망했는데, 유대인들중의 열심당원들은 끝까지 항쟁합니다. 그들이 세 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세 요새가 마케루스, 헤로디온, 마사다입니다. 80여년 전에 헤롯대왕이 자기 은신처로 만든 요새가 로마에 항전하는 유대인 열혈투사들의 옥쇄 장소가 됩니다. ~ 헐

마케루스, 헤로디온으로 숨어든 열심당원들은 비교적 쉽게 제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사다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곳에 숨어든 열혈독립단원들은 960여명이었습니다. 마사다 정상에 먼저 도착한 순례객들이 보입니다.

이 사진은 마사다에 오르는 도중에 아래를 보고 찍었습니다. 네모로 표시된 곳이 당시 로마 10군단이 마사다 공격을 위해 진을 쳤던 지역입니다. 이렇게 표시된 곳이 빙 둘러가면서 드문드문 있습니다. 완전 포위되어 요새 위로는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차단됐습니다. 그럼에도 3년을 버텼으니 대단합니다.

저희가 오르고 있는 길을 유심히 보면, 원래의 천연요새에 흙을 퍼다가 경사로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군이 도저히 요새를 공략할 수 없으니까 흙을 퍼다가 경사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공략할 수 있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토담 경사로를 쌓는 노역에 유대인 포로를 동원함으로써 위에서 쳐다보고 동족들을 향해 아래로 돌을 굴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그 길로 오릅니다.

토담경사로를 지나 마사다 정상을 향합니다. 저 위에서 3년을 버티던 유대인 960여명의 지도자는 '엘리아살 벤 야일'이라는 인물입니다.

오르는 암벽 계단 틈새에서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문이 비잔틴 문이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아래를 향해 찍었습니다. 가운데 솟은 자그만한 동산이 마사다에서 전사한 유대인들의 기념묘입니다. 그 오른 편으로 직사각형 둘이 나란히 붙어있는데, 이것은 야간에 마사다를 향해 조명을 쏘아올리는 시설입니다. 저희 버스가 저 히끗하게 정지된 버스 주차장에 있어야 하는데, 운전기사 '아브라함'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안 보입니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이 로마 10군단이 공성퇴로 쏘아올린 대포알입니다. 직선거리로 400미터가 넘는다고 하는데, 2천년 전의 기술이 야무집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대인들이 아래로 굴러내리기 위해서 마련해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데, 발굴자들이 공성퇴 대포알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겠습니다.

마사다 정상에 설치된 안내 모형입니다. 동서로 250미터 남북으로 600미터, 꽤 넓습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천여명이 생활할 수 있었겠지요. 1960년대에 마사다의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그때 발굴단장이 '야딘(Yadin)'입니다. 야딘은 사해사본을 세상에 처음 알리는데 공헌한 인물인데 이곳의 발굴에도 기여합니다.

발굴작업 시 이곳에는 곡식창고, 지하 물탱크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식수 창고 뿐만이 아니라 목욕탕 비슷한 시설도 있었는데, 이곳은 정결예식을 하던 곳으로 추정합니다.

공중목욕탕도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온돌 시설입니다. 작은 돌 기둥 사이로 열이 통과하도록 하는 온돌이 한국의 전통적 온돌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마사다 요새! 천여 명의 사람들이 3년을 지냈으니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이곳은 회당입니다.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여 토라를 읽었다는 흔적입니다. 이곳에서 가이드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들의 공로로 구약 말씀이 수천년의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었다. 이 점은 누구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야딘'의 주도로 유적을 발굴할 때 14개의 구약성경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회당 왼편에 두루마리 보관소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AD73년 5월 우리가 올라온 토담 경사로가 드디어 완공되어 로마군인들이 마사다 성문을 부수고 침공했습니다. 그날은 너무 늦은 탓에, 일단 후퇴를 하고 다시 내려갑니다. 그 날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물 저장소에는 아직 물이 충분하고, 곡식 창고에도 곡식이 넉넉합니다. 그러나 이미 적의 침투로는 뚫리고 말았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그날 밤 하루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유대인 지도자 벤 야일은 960명을 다 모았습니다. '로마군에게 비굴하게 투항할 것이냐? 아니면 로마인의 칼에 죽을 것이냐?'

마사다에서 바라본 유대광야입니다.
마사다의 960명 유대인들의 선택은 둘 다 아니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택하는 길로서 서로가 서로를 살상한 다음 최후에 남은 자는 '칼에 엎드러지는' 방식을 택합니다. 다음 날 새벽 로마 10군단이 득달같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역사는 흘러가고 유적만 남았습니다.
모두 전멸했다면 이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이 수색할 때 지하 토굴 안에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2명의 여자와 다섯명의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자기 가족을 먼저 죽이고 모이기로 했는데, 차마 죽이지 못하고 간 탓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곳의 자세한 사정이 역사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상에서 본 10군단 주둔지입니다. 계곡 건너에 있습니다.

마사다 정상 북단에서 아래를 향해 찍었는데요, 우리가 내려갈 수는 없었지만 저곳이 헤롯 대왕이 이곳을 요새화하면서 유사시 자기만이 피할 수 있는 비밀 아지트라고 합니다. 2중 요새인 셈입니다. 최고의 세속 권좌에 앉아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지, 이렇게 까지 목숨을 부지할 방책을 마련해야 했을까요? 그런데 그 장소에서 유대인 960명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역사 현장의 역설이자 아이러니입니다. 헐~~

사진 왼편 절벽 외곽선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위에서 찍은 헤롯의 비밀 아지트가 있습니다. 저곳으로 진입하는 길은 유적 보존 차원에서 차단되어 있어서 볼 수 없습니다.

마사다 정상에서 사해를 배경으로 모두 모였습니다. 이곳에 함께 했던 여정의 추억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은혜로 오래오래 간직되기를 기도합니다.

물 저장소입니다.
야딘이 주도하는 유적 발굴작업시 이곳에서 그들이 신던 슬리퍼도 나오고 11개의 토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에 '벤 야일'이라는 글씨도 발견되었는데요, 야딘은 이 토기가 아마도 누가 누구를 죽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제비 뽑는 데 사용되었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 슬픈 역사의 현장은 이스라엘 군대 군사 훈련의 최종 코스라고 합니다. 이곳에 와서 피끓는 목소리로,
"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Masaa Never Again!" 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사진 자료를 첨부합니다. (출처:http://cafe.daum.net/gkseleo79/dOlF/17?q=%B8%B6%BB%E7%B4%D9&re=1) 로마군이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쌓은 토담경사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헤롯 대왕의 2중 비밀 아지트도 보입니다. 왼편으로는 케이블카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위 3장의 사진 출처:http://cafe.daum.net/gkseleo79/dOlF/17?q=%B8%B6%BB%E7%B4%D9&re=1
막상 가 보면 숲은 안 보이고 나무만 보입니다. 그래서 이왕 포스팅하는 김에 인터넷을 뒤져서 출처를 밝히면서 몇 장의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이렇게 제1차 유대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로마 장군 티투스입니다. 그는 마사다를 정복할 때는 이미 황제가 되어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마사다 항쟁을 진두지휘 했습니다. 로마에는 유대전쟁 승전을 기념하는 티투스 개선문이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입니다. (사진출처: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obusan&logNo=220527985920) 유대전쟁 승전 개선문으로 티투스 후대 황제들이 세웠습니다. 이 개선문에는 이런 부조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하고 메노라 등 성전 집기를 전리품으로 얻었음을 기념하는 부조입니다.
마사다를 정리하면서, 헤롯 대왕의 좌불안석, 팔레스타인 땅의 천혜 요새, 유대인들의 토라 사랑과 항전, 로마의 개선문으로 상징되는 축제와 향연! 이런 역사의 질곡과 영화 속에서 나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할까?
마사다에 왔네
사해곁에 있네
다들지나 갔네
마사다를 돌아나오면서 지은 삼행시입니다.
즐감해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정정토록 하겠습니다!
샬롬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