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골봉과 사시골
장골봉은 금정산성의 고당봉에서 서남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의 저만치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미륵봉을 지나 장골봉까지 이어지는 길은 호젓하게 늘어진 숲속길로 오른쪽으로는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왼편으로는 사시골의 깊고 긴 계곡과 함께 금곡동까지 한없이 길게 이어진다. 골짜기가 길어서 장골봉(長谷峰)이라 이름한 이 봉우리 능선 길은 숲으로 가려져 있어 풍광은 열리지 못했지만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길 옆에 자리 잡고 있어 산행을 즐겁게 해 준다.
미륵봉을 지나 금정산성 돌축대를 따라 가면 제2금샘과 알바위를 만난다. 자료를 찾던 중에 제2금샘을 두고 인위적으로 사람이 판 구멍이며, 역사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 내용을 보았는데, 이는 그렇지가 않다. 1993년 7월 29일자 부산일보에 제2금샘과 관련된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제2금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이에 따르면 돌샘친목산악회의 한영동 부회장이 발견하였으며, 금정산 서쪽 능선 상에 봉화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크기는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15m 정도로 고당봉 금샘보다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전기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정산을 두고 “산의 동쪽과 서쪽 3장 거리에 금빛 나는 샘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금정산에 금샘이 두 개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제2금샘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예부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음이 확인되는 셈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나타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샘을 과장되게 신성시하거나 억지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은 칼럼 글에서 바위 위에 파인 물구덩이는 원시인들이 신앙숭배의 대상으로 구멍을 파고 물을 가두어 기도를 올렸던 기도처라 말하고, 바위샘들의 자연생성을 부인하고 있다.
금샘이 고대 원시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던, 자연생성적인 것이던, 그것이 생겨난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오래 전부터 그것들은 그 자리에 있었고,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해 온 일종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할 것이다.
인공적인 것이라서 의미가 없다면 고대인들이 만든 고인돌이나 입석 또한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될 뿐이다. 실제로 금정산에는 샘이 있는 바위가 많이 있다.
이 모든 바위샘을 모두 고대인들이 만들었는지는 연구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바위샘을 우리 조상들이 다 신성시한 것은 아니다. 고당봉의 금샘처럼 의상대사로 하여금 범어사를 짓게 하고, 왜구를 막아내기 위한 호국신앙의 대상이 되어 역사적 의미를 지니 것에만 신성함을 부여하고 있다.
제2금샘에는 역사적 사실과 연관되어 전해지는 기록이나 전설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그러나 애써 무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는 것이 다른 수많은 바위샘과는 달리 옛 문헌에 나타나 있고, 특히 알바위라 부르는 여성의 생식기를 닮은 바위와 함께 있으므로 해서 단지 풍수적 의미로만 한번 밝혀보고 싶을 뿐이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금곡동 율리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대우자동차 옆으로 금정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나온다. 벽산아파트 뒤各막?돌아가면 산길이 시작되는데 이곳을 따라 20분쯤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더미와 함께 수직으로 솟아오른 남근석을 만난다. 하늘을 향해 불끈 솟아오른 듯 생긴 이 바위는 영락없이 남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에서는 이렇게 생긴 바위는 거의가 신성시하여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며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네들에게는 소중한 기도처로 이용되기도 한다. 특히 남해 다랭이 마을에 있는 남근석과 충북 제천에 있는 남근석, 그리고 경주 여근곡 등은 모두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전혀 그런 흔적이 없고, 등산로 옆에 무심히 내버려진 듯 외로이 서 있다. 남근석이 있으면 양기가 강하고 여근석이 있으면 음기가 강하다고 본다. 그래서 이들 가까이는 반드시 짝을 이루는 상대가 있어야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길한 것으로 본다. 그렇지 못하고 하나만 있으면 음양의 기운이 한 쪽으로만 몰려, 부녀자가 음란해진다든지 하여 마을의 풍습이 문란해진다 하여 나쁘게 보며 이를 비보(裨補)하기 위한 여러 방편들이 행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제2금샘 앞에 놓인 바위를 보면 저 아래 남근석과 짝을 이루기에 더 없이 잘 맞는 모습이다. 여성의 생식기를 닮은 기이하게 생긴 이 바위를 사람들은 알바위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남근석을 의식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더구나 묘하게 생긴 바위틈의 바로 위에 제2금샘이 있어 물을 가득 담고 있으니 음기가 넘치는 알바위가 만일 남근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넘치는 음욕을 주체하지 못해 산아래 마을의 처녀들은 모두 바람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짝을 만나 음양의 조화를 이룬 이 바위와 제2금샘의 덕으로 인해 금곡동 아랫마을은 오히려 다산의 상징이 되어 기가 막힌 발복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을 따라 수없이 세워놓은 아파트 단지는 몇 년 전에 겪었던 IMF 금융혼란기가 닥치자 주민들이 대거 이사해 들어와 이제는 화명동과 함께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여 부산 북부의 새로운 신도시를 형성해 놓았다. 고당봉 금샘에 이어 제2금샘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부산 발복임이 틀림없다.
장골봉 조금 못 미쳐 전망대로 불리는 바위위에서 금곡동 마을을 내려다보면 고당봉에서 출맥한 금정산의 서쪽 능선이 지맥을 모아 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산 바로 아래 있는 아파트 단지 중에서 오직 한 동(棟)으로만 정기를 넣어주고 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같은 단지 내에서도 이 동에 사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금정산의 풍부한 지기를 받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남근석과 알바위가 이루는 음양의 조화된 기운이 많은 생산을 이루어내고 있으니 적어도 자식걱정과 먹고사는 걱정은 없으리라 여긴다. 다만 알바위가 남근석보다 위에 있으므로 해서 부인네의 입김이 좀 세어질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제2금샘에 고인 물은 여성의 잉태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이다. 이곳에 물이 마르면 금샘의 발복효험은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곳 사람들은 샘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고당봉 금샘의 물을 신성하게 여겨 그 물을 떠가는 사람이 생기자 범어사에서 크게 걱정한 적이 있다. 금샘의 정기가 범어사 발복의 원천인데 물이 없으면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가 더 이상 살 수가 없으므로 범어사의 정기가 끊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 물은 알고 보면 빗물이다. 더구나 돌에서 녹은 잡성분과 바람에 날려 온 흙먼지가 섞여 있어 마시면 배탈 나기 십상이다. 산의 기운은 정기로써 이어받는 것이지 마신다고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쓸데없는 짓 하는 무지랭이들이 많다.
음양의 조화에 탄복하며 호젓한 산길을 좀 더 내려오면 산성을 드나드는 첫 번째 암문을 만난다. 어째서 이 문이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을 드나들던 비상구쯤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더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금정산성이 직각으로 꺾이어 부산시 학생수련원 쪽을 향해 내려가는 성벽의 끝자락에 또 하나의 암문이 있다. 애초에는 금정산 제6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던 곳인데 모두 허물어져 없어지고 석문만 남아 옛날의 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석문을 통과하면 이제 금정산성을 벗어난다. 다시금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어느새 너럭바위하나를 만나는데 여기서 바라보는 사시골의 전경과 산성마을을 향하는 경치가 일품이다. 봉우리를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갑자기 눈앞이 확 열리며 낙동강과 김해벌판이 시원스레 다가오는 곳이 있다. 이곳이 장골봉(장곡봉, 497m)이다.
낙동강 줄기와 김해평야 그리고 양산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동편으로 난 산길을 걸어 나오면 장골봉 아래 북문에서 펼쳐져 내리는 넓은 분지에 황금색 억새밭이 뒤덮고 있는 골짜기가 있다. 이 넓은 골짜기 속에 금정산이 여태껏 속살처럼 드러내기 부끄러워 감추고 있는 비경 사시골이 있다. 큰 계곡이 없는 금정산에 유일하게 사철 넘치듯 물이 흐르는 깊고 깊은 골짜기이다. 산성마을의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물이기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탓에 부산에 살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곳이다.
금정산 고당봉 아래 북문 앞의 늪지가 발원지인 사시골은 산 속 깊숙히 들어오는 등산객들만 볼 수 있는 곳인지라 아직도 오염 안 된 원시의 청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시골의 계곡물은 모두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골짜기 마다 맑은 물과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빚어내는 모습은 금정산의 속살답게 신비경 그 자체다. 장골봉 가는 능선을 따라 흐르는 계곡 줄기 아래쪽에는 그 옛날에 마을 주민을 위해 목숨을 버린 어느 스님의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사시골 아래에는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천년 묵은 이무기가 나타나 처녀 백명을 잡아먹어야 하늘로 올라가 용이 될수 있으므로 마을사람들에게 매년 처녀 한명씩을 바치도록 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새 마을에는 이제 바칠 처녀가 남아있지 않았다. 한숨만 쉬고 있던 마을 주민들 앞에 한 노스님이 나타나 나는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으므로 내가 이무기와 함께 죽어 마을의 재앙을 없애주겠다고 하였다. 이무기 앞에 제물로 바쳐진 스님은 독약을 품고 이무기의 먹이가 되었는데 이로써 이무기는 하늘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사시골은 광활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분지 아래쪽에 넓은 공터는 옛날 왜구들을 무찌르던 승병들이 기거한 호국사찰 해월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절은 없고 터만 남아 나라를 위해 왜구를 무찔렀던 장엄한 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그 바로 위에 집을 짓고 40년을 넘게 살아온 유씨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큰 아들과 며느리가 지난해부터 들어와 등산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다.
해월사가 왜 없어졌느냐고 물으니 말해 주는 그 사연이 재미있다. 옛날 한 땡중이 여신도 한명과 동거를 하였는데, 또 다른 여신도를 만나 바람을 피우게 되자 동거하던 여신도가 질투심에 절에다 비리를 한 바가지를 뿌렸다고 한다. 비리가 뭐냐고 물으니 빈대보다 조금 작은 벌레로써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데, 절간에 비리가 끓으면 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으며, 이로써 해월사는 망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해월사는 신라말기에 왜구들을 무찌르는 승병들이 기거했던 절이라 한다. 그렇게 숭고한 호국사찰이었던 해월사가 그렇게 전설 같은 연유로 망했는지는 믿기 아리송하지만 어쨌던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해월사터 바로 아래에는 부산시학생수련원과 공무원 연수원이 있다. 이곳을 풍수적으로 감결해 보면 사시골이 금정산의 명당임을 알 수가 있다. 북문에서 넓고 완만하게 뻗어내린 사시골의 분지는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물줄기의 가운데로 고당봉에서 뻗어내린 용맥하나가 뚜렷하게 보인다. 사시골의 물줄기들은 수련원 바로 아래에서 만나 산성마을에서 내려오는 대천천(화명천)과 합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런 곳을 풍수에서는 배가 나아가는 행주형(行舟形)명당이라 한다.
고당봉에서 갈라진 산맥은 오른 쪽으로 장골봉 능선까지 이어져 백호(白虎)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원효봉과 의상봉을 솟구쳐 청룡(靑龍)을 이루어 주산(主山)인 고당봉과 함께 완벽한 장풍(藏風)을 이루고 있다. 수련원의 안산은 건너편 파리봉 아래 늘어선 얕으막한 수성체의 봉우리이며, 조산은 상계봉과 파리봉이다. 이 곳은 고당봉의 거센 기운이 곧바로 내려오는 곳으로 개인이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살면 험한 살기를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마치 전구에 불을 켜기 위해 고압선에다 바로 연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수련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곳에는 거대한 공장에 동력이 많을수록 좋듯이, 아무리 강한 지기라도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
수련원 운동장에는 오늘도 부산의 내일과 대한민국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 청년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메아리친다. 천 년 전 이 땅에서 신라의 화랑들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호연지기를 키웠던 금정산과 승병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구들을 무찔렀던 호국사찰 해월사가 있었던 사시골 평원은 천년을 넘는 세월동안 호국성지로 전통을 이어왔으며, 해월사지 바로 앞에 자리잡은 학생수련원은 이처럼 장엄한 호국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의 미래를 지고나갈 대한의 젊은 건아들이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애국애족의 산실이 된 것이다.
거대한 배 모양의 행주형 명당에 자리한 학생수련원은 젊은 학생들을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 세계로 실어 보내는 항공모함이며, 운동장에서 함성지르는 청년들은 항공모함의 선원이 되는 것이다.
수련원을 감싼 사시골의 물줄기는 고당봉의 기운을 전달하고는 수련원 바로 앞에서 한데 모인다. 이어 상계봉에서 발원하여 산성마을을 거쳐 내려온 대천천을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여름이면 부산시민들이 피서지로 즐겨 찾는 대천천은 금정산의 맑은 물이 그대로 흘러내려 깨끗하기가 거울 같다. 천개의 거북과 만개의 자라가 있어 천구만별이라 불리는 금정산의 별칭은 여기까지 내려와 계곡마다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널려 장관을 연출한다.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체육공원 조금 못 미쳐 큰 바위 아래 깊은 웅덩이가 하나 있는데, 여기가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애기소이다.
옛날 아기를 낳지 못한 젊은 부부가 이곳에서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는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아이가 태어나서 3살이 되면 하늘에 바쳐야 되는데 그래도 아기를 갖겠느냐고 하길래 아기를 갖고 싶은 욕심에 부부는 그만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드디어 꿈에도 고대하던 아기가 태어났고, 3살이 되던 해에 부인은 아기를 안고 이곳 애기소에 놀러와서는 황홀한 경치에 도취되어 아기를 바위위에 올려놓고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한 참을 놀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가 없어진게 아닌가. 당황한 부인은 아이를 찾아 헤매고 다녔는데, 그 때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3년전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니 아기는 포기하고 더 이상 찾지말라 정 보고 싶으면 밤마다 이곳에서 나와 아기가 목욕을 할 것이니 그 때 와서 보라”는 한 마디 뿐이었다. 그로 인해 이곳은 애기소로 불리게 된 것이다.
애기소의 넓고 깊었던 소(沼)는 사라호 태풍 때 호우로 인해 바위와 모래로 덮여 지금은 얕고 좁아져 있다. 그러나 주위의 경치는 옛 모습 그대로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지금도 달뜨는 밤이면 선녀가 아기를 안고 내려와 목욕을 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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