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신(閔伸) : ∼1453년(단종 1)
조선의 문신, 시호는 충정(忠貞)로서 충정공파의 파조이다. 호는 돈암(遯菴). 문종때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 나라에 갈 때 부사(副使)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하고가지 않았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현릉(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고 있던 중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게 김종서의 일파라 하여 현릉 비석소(顯陵碑石所)에서 역사를 감독하고 계시다가 좌의정 김종서와 같은 날 참살(斬殺) 당했다. 그런데 충정공의 손자인 민중건은 외숙인 김종(金淙)이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숨겨서 키워 성장시켜 해남에 거주케 하였다(해남의 충정공파 참고). 그 분의 휘는 중건이고, 관은 성균성원이다. 이분이 곧 해남 종중의 중시조가 되시는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충정공까지는 약 5백년이 되는데, 당시는 공에 대한 기휘(忌諱)가 엄하여 공의 생년월일 덕업, 행장 및 관직의 이력 등이 전하지 못하였고, 또한 임진왜란을 겪어서 문헌이 없으니 자세한 공의 행적을 알 수 없다. 3상(三相) 6신(六臣)은 이미 열성조(列聖朝)로 올린 것과는 달리 공은 화를 당하신 후 수백년이 지난 정조(正祖) 5년(1781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전남 해남(海南) 서림(瑞林) 미암산(眉岩山) 아래에 충정사(忠貞祠)와 사충문(四忠門이) 있다. 이는 단종(端宗)의 충신 충정공 민신과 그의 아들 보창(甫昌), 보해(甫諧), 보석(甫釋) 삼형제의 충절을 숭앙하는 사당과 정려(旌閭)이다.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肅慕殿)과 장릉(莊陵)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다.
충정공 민신의 후예들 여흥 민씨가 해남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초이다. 계유정란이 일어났던 당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민신(伸)은 절제 김종서와 함께 단종계유정란에 연류돼 다섯 아들인 보창, 보해, 보석, 보흥, 석이와 함께 참형을 당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신의 손자인 중건(仲騫)만이 용케 살아 남아 해남으로 낙남하게 된다. 즉 당시 집안의 종이었던 사람이 7살 먹은 중건을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중건의 외숙인 김종 진도군수에게 내려왔다는 것이다.
옛 진도땅이었던 삼산면(당시 삼촌면)에서 자랐다는 중건은 성장하여 초계정씨와 결혼, 해남읍 핼리로 분가해온다. 그리고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 마산면 양지리(화내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해남지역에서 거주하는 민씨들은 입향조인 중건의 조부 민신을 중시조로 삼고 있으며 여흥민씨의 충정공파에 속하고 있다.
현재 충정공 민신의 후손은 해남전역에 7백호가 살고 있고 타지로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2천여호가 족히 넘는다. 또 민신의 후손으로 일제시대에 의병을 일으킨 민병호(일제와의 투쟁 참고)을 비롯하여 21대까지 (희자 돌림까지)이어지고 있고, 주요거주지는 마산면 중앙을 위시로 마산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또 해남읍 해리, 남송, 계곡면 상면, 산이면 송천, 황산면 연호, 원호 등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민신은 정조왕데 이르러 그의 후손인 민치상이 올린 상소문등으로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민신은 그의 아들 보창, 보해, 보석과 함께 미산서원에 배향되어졌고 아들 셋과 함께 서림공원 사층문에도 모셔져 있다. 그의 제사는 음력 10월 10일 마산면 남계리에서 부조묘 제사로 지내고 있다.
여흥민씨는 고려때부터 명문중 명문집안으로 일컬어졌던 만큼 해남에서도 여흥민씨의 세도는 꽤 컸다. 특히 정조때에 이르러 계유정란의 희생자였던 민신에게 충정공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여흥민씨의 세도도 이지역에서 더욱 높아졌다. 때문에 매일아침 아침재를 넘어 아침문안인사를 해야하는 등 해남으로 내려온 현감들이 시달렸던 얘기며, 지역세도를 꺾기 위해 우슬재와 아침재를 석자 세치씩 깎아내렸다는 얘기등 지역토착세력중 하나이기도 했던 여흥민씨의 세도를 짐작케하는 얘기들은 많이 전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마산지역에서는 원주 이씨, 무안박씨와 함께 여흥민씨는 중심적인 성씨로 자리잡고 있고 얼마전까지만해도 이 세 성씨의 텃새가 마산지역에서 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흥민씨와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한다. 산이면 상공리에 백로와 새우형국을 한 바위가 서 있었는데 그 바위 바로 �쪽에 여흥민씨 선산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서구가 해남군수로 재직시(1782년 2월-1783년 6월)여흥민씨의 세도가 높아 일하는데 불편함을 느껴 백로새우 바위를 파괴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렇게 위새가 당당하던 여흥민씨 백자 돌림들이 한해에 여럿이 죽은 일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또 명문거족답게 여흥민씨와 관련된 초당이 많이 존재했음을 사료등에 나타나고 있다. 귤주공 시가 쓰여있었다는 남곽초당(해남읍 용정리), 해리에 있었다는 삼해정, 동백정, 금강골 부근에 터만 남아있는 금강초당 등이다. 또 민씨 집안에서는 아직까직도 집안에 사당을 모셔놓고 고조부 까지를 모시고 있는 집도 있다. 해남읍 백아리에 거주하는 민정기씨댁과 해남읍 해리 민두삼씨댁이 그 장본인.
한편 여흥민씨 충정공하는 학자들을 두루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민선식씨와 남식, 지식 3형제가 모두 이학박사이고, 그의 조카 다석이 모두 박사학위를 수여할 정도. 또 서울대 사학과 교수인 민두기, 민영규(연대교수 역임), 민방기(전대법대 학장역임)씨등 이외에도 여흥민씨 충정공파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http://my.dreamwiz.com/minbangi/family/min.htm -해남 신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