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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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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의 시조 우경(宇經)의 자(字)는 경천(擎天)이며 호(號)는 송계(松溪)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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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쓰다 신라에서 서거(逝去)하니 향년 73세였다. 공의 묘(墓)는 옥산(玉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인근 주민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묘를 백정승묘라고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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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성의 근원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 |
기해대동보 서문은 시조 송계공과 백낙천(白樂天)의 관계에 언급하고 있다. 즉 『향산문공년보(香山文公年譜) 자서문(自序文)에 기록하기를 시집(詩集) 5권중 한권은 신라에 거주하는 족인(族人)이라 함은 당시의 송계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 확고한 문적(文籍)이 없고 소연(昭然)한 계통이 전해 오지 않았으니 고증할 곳이 없음에 매우 유감이로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향산은 백낙천(백거이)의 호이며 시집 5권이란 백낙천의 시집을 가리킨다. 현재에도 송계공은 백계반의 후손이 아니라 아들이며, 따라서 송계공은 백낙천과 사촌간이라고 주장하는 종인(宗人)도 있었다. 그러나 송계공이 중국의 시성(詩聖) 백낙천과 사촌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
◎ 제왕전승성원도(帝王傳承姓源圖 : 백낙천시집에서)
황제(皇帝)-창의(昌意)-后 전욱( 頊)-后 축융(祝融)-后 계연(季連)-后 약오(若敖)-后 소 오(宵敖)-后 평왕(平王)-태자건(太子建)-백공승(白公勝)-后 백을병(白乙丙)-기강(己降)- 后 기(起)-중(仲)-23世孫 건(建)-사통(士通)-지선(志善)-온(溫 : 조산대부(朝散大夫) 검교도관(檢校都官)) 백거이(白居易) : 자는 낙천(樂天)이요, 호는 향산(香山)이다. 서기 772년 1월 20일생, 서기846년에 졸하시다. 백우경(白宇經) : 자는 경천(擎天)이요, 호는 송계(松溪)다. 서기780년에 입국, 73세에 서거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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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의 세수(世數)는 시조 송계공(松溪公)으로부터 연계하여 기산(起算)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사대동보, 갑자대동보, 기해대동보, 임술대동보가 모두 중시조(中始祖) 창직(昌稷)으로부터 세수를 기산하고 있다. 이번 정축(丁丑)대동보도 이 선례에 따라 중랑장공 (中郞將公)으로부터 세수를 연계하기로 했다. 송계공으로부터 중랑장공까지 연계할 고증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 |
연대는 서기 826년에 해당한다. 이 연대는 송계공이 신라 에 입국한 연대(서기 780년)와 비교하면 46년에 불과하다. 이 46년 사이에 송계공의 현손 우잠공이 장성(長城)을 쌓은 사실도 수긍하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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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족(姓族)을 상징하는 지명(地名)을 관향(貫鄕), 본(本) 또는 본관(本貫)이라고 한다. 시조 또는 중시조의 고향이나 그 성족과의 깊은 연고지(緣故地)를 관향으로 삼는 것이 통례(通例)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향은 성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 |
수원지방을 봉토(封土)로 받았다고 한다. 또 중랑장공의 8세손인 정당문학공 천장(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이부상서의 벼슬을 지내고 고려조 충선왕(서기 1309~1314년)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니 충선왕은 그를 수원백(水原伯)으로 봉했다 한다. 이와 같이 수원은 진사공이나 정당문학공과 깊은 연고를 맺은 지방이므로 우리 백씨는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역사적 추리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