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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 좀 열어주세요. 싫어요.
불이라도 켜줘요. 안돼요.
“오늘은 뭐 했어요?”
기분 대신 스케줄 파는 데도 익숙해졌다.
“풀강이었어서. 너무 바빴어.”
말하는 입에서 시럽 향 풀풀 풍긴다. 아아메에 바닐라 추가해달라 해. 주문하러 가는 내 뒤통수에 그랬었다.
“스트레스 받았겠네요?”
“완전.”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아아. 이젠 괜찮아.”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에 눈길 준다. 몇 분 전까지 온전했던 티라미슈 절반이 사라졌다. 그럴싸하지만 너무 남겼다. 빨대 쭙 빨며 출력해온 자료 들추길래 그 앞에 손 내밀었다.
“왜 또.”
내민 손 두어 번 튕겼다.
"……짱이다 너."
딱히 더 부인 않고 가방 뒤적거린다. 그리고 손 위에 턱. 아주…… 아주 핑크색인 엠씨엠 카드홀더. 이런 건 곤란하다. 설명하라고 쳐다봤다. 자긴 볼장 다 봤단 듯 눈치 안 보고 할 거마저 한다. 내일 쪽지시험 준비해야 한댔다. 이재현은 학점에 관심이 많았다. 학습 쪽엔 그다지. 그냥 우수한 맛이 좋은 거다. 여물린 지갑 틈에 한 장 있는 카드를 꺼냈다. 학부생 전용 인쇄 카드. 신분증 없는 걸 보니 꾸밈용 보조지갑이다. 대신 증명사진 들어있다……. 아. 미쳤어, 미쳤어. 왜 하필!
“어디에서 그랬어요.”
“응? 이공팔 들어가면서.”
“왜 이렇게 급했어요. 누가 봤으면 어떡하게!”
“코트 주머니에 줄 다 빼놓고 있었는데? 당기고 서 있으면 그냥 내 건 줄 알지.”
“말이 되는 소리에요? 누가 봐도 여성용이잖아.”
“요즘 그런 게 어디 있어. 나 핑크 잘 받아.”
말이 안 통하는데 더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숨 쉬며 카톡 뒤적거렸다. 최근 대화엔 있지도 않다. 뭘 보내본 적이 있어야지.
(학)안슬기
오빠! 축제 기간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좋은 꿈꾸시고 학교에서 봬요ㅎㅎ
하아……. 받은 적은 있구나.
해야 돼, 말아야 돼. 속 끓이며 고뇌하는데 어느새 지갑 목에 걸고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 확인한다. 어울리지 않아? 요망한 꼴 짜증 나서 그냥 전화 걸어버렸다. 바로 후회했는데 부재중 남기는 쪽이 더 문제 되겠다. 신호가 길게 간다. 내 양심은 다 타들어 짧아지는데.
- 여보세요?
“음. 슬기야. 나 주연인데.”
- 네! ……알죠, 알죠.
“혹시 지금 전화 돼?”
- 음…… 네. 괜찮아요.
전화 상대 목소리 들렸는지 바로 고개 든다. 그리곤 턱 괴어 빤히 지켜본다. 불구경 났어? 완전 어이가 없다.
“지금 어디야?”
- 네?
“학교야?”
- 아… 아뇨. 저 내일 공강이라 집 가는 중인데…….
“아이고. 그래? 음… 너 아까 학실 들렸었지?”
- 네. 툭하면 거기 있잖아요, 저.
완전 다행.
“뭐 잃어버린 거 없고?”
- 잃어버린 거요? 없는 거 같은… 아!
“그치? 근데 지갑이라 여기 계속 놔두긴 좀…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게?”
- 감사해요! 어쩌지… 제가 밥이라도 사드려야 되는데. 혹시,
“아니야! 괜찮아. 그냥 주운 거고, 어…….”
얼굴 뚫릴 것 같다.
“일단 나 옆에 누가 있어서… 끊을게. 다음에 보자?”
- 아… 넵! 감사해요. 들어가세요.
겨우 끊고 손에 고인 땀 바지에 닦아냈다. 대충, 대충이라도 해결했으니 됐다. 이재현은 뻔뻔하게도 빈정 상했단 얼굴 하고 있다. 저 인간 내일 시험 망했으면 좋겠다. 아니. 근데 망하면 망했다고 또 뭔 일낼 거 아냐.
“뭘 잘했다고 그렇게 봐요? 설렐 뻔.” 일단 달래자.
“너 밖에선 되게 친절하다?” 끄떡없다.
“밖? 그럼 형은 제 안이에요?” 컨셉을 바꿔봤다.
“뭔 개소리야. 그 반대겠지.” 또라이라 지 객관화가 부족하다.
걔 뭐야?
“……지갑 주인이요.”
“그러니까. 왜 너랑 알아?”
“우리 과 사람 걸 건드렸는데 제가 알겠죠, 당연히……. 그리고 몰랐으면 큰일 났거든요?”
그래도 표정은 풀릴 생각을 안 한다. 설마 후회? 아니. 그냥 짜증이다. 우리 일단 공부합시다. 각자 테이블로 시선 옮겼다. 뒷수습하느라 고생한 건 난데 진땀은 나만 흘리고. 저쪽은 자기 멋대로다. 그냥 나도 할 거 해야지. 과제 때문에 챙겨온 평가 검사지 박스 열었다. 수검자와 당장 내일 만나기로 했다.
자. 집중! 머리로 각본 써 보자.
당신은 생각을 표현할 때 글과 말 중 어떤 방식이 더 편한가요?
말도 좋아하긴 하지만… 글이 더 편합니다.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지는 편인가요?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인가요?
딱히 낯가리지 않습니다. 따지자면 빨리 친해지는 편입니다.
평소에 본인 방이나 물건을 잘 정리하는 편인가요?
되도록 깨끗하게 해놓는 편이에요.
‘사과’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뭐죠?
음, 백설 공주?
강의실에서 열 번도 넘게 대답했다. 그러니 어떤 질문을 해도 떠오르는 값은 고정이다. 연습 안 된다. 그렇다면 맞은편에 앉아 에이포에 ‘성격 장애 유형은 총 세 가지로 나눌 수 있’ 까지 적는 사람을 보자. 이상 심리는 쪽지시험도 징그럽게 논술로 본다.
당신은 생각을 표현할 때 글과 말 중 어떤 방식이 더 편한가요?
둘 다 싫어.
둘 중에 더 싫은 쪽은요?
글?
그래서 제 카톡 읽씹 하시는 거구나.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지는 편인가요? 아니면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인가요?
남들이랑 친해져야 돼?
... 제가 당신과 더 깊어지려면 시간을 좀 길게 잡아야 하나요? 아니면 금세 마음을 열어줄 건가요?
넌 너 혼자 들이대면 끝인 줄 알지. 내가 그렇게 쉬워 보여?
아뇨. 절대로… 안 쉬워요. 평소에 본인 방이나 물건을 잘 정리하는 편인가요?
직접 봤잖아.
‘사과’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뭐죠?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구나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짜악…….
“형. 사과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뭐에요?”
“빨강.”
객관화 부족한 또라이는 나였다.
“형이 맞았어요.”
“뭐가?”
“저는 뭐든 발산하는 쪽에 가깝거든요.”
“뭐 하는데?”
“아, 이건 엠비티아이요. 내일 이것도 한다고 해서.”
“근데 내가 뭐가 맞아?”
“남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한데… 형은 아마 수렴형이에요.”
“응? ……아. 그거 봐.”
알아듣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친다. 그것도 웃음이니 보기에 예쁘다만 난 다시 진땀 흘렸다. 이재현이 내 틀에 들어차는 일은 없겠구나. 진짜 그 반대가 되겠구나. 어렴풋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아아. 과학은 감히 거스를 수 없는데.
*
시간표는 널널했는데 그 덕에 좀 바빴다. 얼마 전 교수님 연구실에서 들었던 '조만간 밖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가 오늘인 바람에. 연구실에 학생회까지. 총학까진 절대 신경 못 쓰고 학회장도 웃기는 소리다. 어쨌든 좀 먼 거리에 있는 중학교까지 출장 알바 다녀왔다. 요즘 우리 교수님은 발달 이상에 관심이 많다. 올해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설문인지 모르겠다. 가방에 넣으면 구겨질까 품에 안고 온 서류봉투 책상에 올렸다. 특히나 묵직했다. 코딩할 게 꽤 많다. 노트북 절전 모드 풀고, 엑셀 켰다.
1번에 2. 2번에 1. 3번에 4. 4번에 1. 4, 2, 1, 1, 2, 3, 4, 3, 2, 1, 1, 1, 1, 1, 1, 1, 1, 1… 이게 문제야.
애들은 귀찮아지면 바로 줄 세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렬로 그어놓은 1번들도 해석에 들어간다. 답변의 신뢰도 또한 통계에 영향을 주므로. 다음 장 넘기니 문 열렸다. 아, 오셨어요?
“어머, 벌써 왔어? 멀리까지 너무너무 수고했어.”
“아니에요. 오랜만에 바깥세상도 좀 보고… 전 좋았어요.”
“그랬어? 학교에만 있으면 좀 삭막하지?”
“그래도 교수님 연구실은 산뜻해요. 화분을 많이 기르시잖아요.”
그러니? 반 톤 올라간 목소리가 옥구슬 같다. 이거 먹으면서 해. 항상 꽉꽉 채워져 있는 냉장고에서 주스랑 조각 케이크를 꺼낸다. 저런 건 누가 다 가져오는 걸까? 직접 사온다기엔 출근 루트에 없는 것들인데. 감사합니다. 그래도 일단 뚜껑 딴다. 저 위치면 이만큼 받는 게 맞는 거지. 일회용 포크도 꺼내 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이 주는 건 받고 보는 게 좋다. 언젠가 필요해진다.
“좀 많을 건데. 일이삼 학년 다 있어서 그래.”
“앗. 최대한 빨리 끝내볼게요.”
“재촉한 적 없다, 나는.”
그러면서 바쁘게 책상 앞에 자리한다. 애초에 교수님도 품에 뭔가 들고 오긴 했다. 아. 쪽지시험. 물을까 말까 하다가 케이크 한 입 떠먹었다. 으, 달아.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렇다면 물을 수 있다.
“교수님.”
“응?”
“그거…… 이상 시험지에요?”
“어어. 아네? 오늘 1학년 쪽지 시험 봤거든.”
저 중에 이재현 것도 있겠지. 입장이 바뀌었다면 바로 뒤졌겠지만, 난 그보다 억제 영역이 발달됐으니 참아보겠다. 대신 주스 한 모금 마시겠다.
“주제 저희 때랑 똑같아요?”
“너네 뭐 였더라……. 올해는 쪼오금 바뀌었어.”
“뭔데요?”
“자신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격 장애 유형을 에이 비 씨군 중에 택 1하여 서술하시오.”
그래서 첫 문장이 그랬구나.
“누구 게 궁금한데.”
“네?”
뭔갈 캤다는 듯. 목소리가 다시 반 톤 올라갔다.
“짝녀 시험지가 여기 있어?”
그러면서 안경을 고쳐 쓴다. 교수님은 퀴즈를 좋아한다. 맞추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앗. 아니요. 친구요. 음. 아는 사람이요.”
“완전 아니구만.”
시험지 뒤적거리는 손을 말렸다. 아뇨, 교수님. 진짜 아니에요.
“빨랑 불어.”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구요. 그냥 요즘 관심 생긴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안 찾아냈으면 좋겠어?”
“네. 제발요.”
“좋아.”
훑어지던 시험지는 다시 각 잡혀 정리됐지만. 내가 끌어올린 궁금증은 책임져야 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도 해설이 필요하다.
“걔는 사과하면 빨강이래요. 저는 백설 공주거든요.”
“음.”
“교수님이 그랬잖아요. *S와 *N은 맞을 수가 없다고.”
*(S:감각형, 에너지를 수렴 - 재현, N:직관형, 에너지를 발산 - 주연)
“보통 그렇지?”
“그러니까… 아마 병적 수준으로… 충동을 못 참아요. 절제가 안 되니까 가끔 나쁜 짓도 해요. 이런 건 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문제는요. 따지면 약점은 제가 쥐고 있는데 본인이 더 당당하니까 이길 수가 없어요. 자기 잘못엔 관대하거든요.”
“음.”
“……저는 걔한테 관대하고요.”
“음.”
“아마 전 걜 교정해주고 싶은 것 같은데.”
“음?”
“그 친구가 좀 평범해졌으면 좋겠거든요.”
“음.”
“……사실 교정이고 치료고 뭐고.”
“음.”
“잘 지내고……. 교수님, 저 더 못 하겠는데요.”
교수님은 깔깔 웃었다. 네가 말하면서도 이상하지? 주스 한 병 더 꺼내 먹어. 그래요. 필요합니다. 당이 필요합니다. 곧바로 사양 않고 냉장고 문 열었다. 알로에, 그 옆에 있는 사과 땄다. 목으로 넘어가는 음료는 보리차 색이다. 하나도 안 빨간데 왜 빨갛다고 말해서 사람을……. 교수님은 내 뇌간 각성을 기다려주다 하나 던졌다.
“걔 *B군이구나?”
*(성격장애 유형 중 하나. 경계선적, 자기애적, 반사회성, 연극성 장애 등이 여기 속한다. 글에서 말하는 n군은 성격의 유형을 의미.)
“네?”
“B군 맞잖아. 변덕적이고 불안정하고… 감정 기복 심하니? 거짓말 밥 먹듯이 하고, 집착도 하고, 욕심 많고, 내로남불 심하고. 외모 꾸미는 거 좋아해? 좀 예쁘장하겠네?”
“많이요.”
“그래, 많이 예쁘시겠지. 홀딱 반했다는데.”
“홀딱이요? 그것까진…….”
“어휴. 공부 왜 하니 너?”
“진짜 아니에요…….”
1번에 3, 2번에 3, 3번에 1, 4번에 2……. 탁탁탁 키보드 두들기면서 나름 반항이라고 하니 그저 웃는다. 내가 교수님이어도 웃을 것 같다. 너무 깠다. 너무 까버렸어.
“넌 걔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걔가 *C군이었으면 좋겠어요.”
*(성격장애 유형 중 하나. 강박성, 회피성, 의존성 장애 등이 여기 속한다.)
“어디서 나온 정복욕이야, 그건? 걜 막 휘두르고 싶어?”
“……그렇게 못된 마음은 아니구요.”
“앞에만 서면 관대해지는데 기싸움에서 이기고는 싶다? 욕심인 거 알지? 그 친구가 그 꼴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절대 아니요.”
“너 같은 애들이 원래 사랑할 땐 좀 힘들어. 공상력이 너무 높고, 음…….”
교수님 결론에선 사랑이 나온다.
“의심도 많고. 아주 전형적인 형사야. 그냥. 아주 좋아. 넌 경행으로 갔었어야 해. 거기엔 *A군 네 동지들밖에 없어.”
*(성격장애 유형 중 하나. 편집성, 분열성, 분열형 장애 등이 여기 속한다.)
“글쎄요. 이젠 도덕성도 바닥이에요…….”
“원래 그래. 의도치 않게 전이되는 거야.”
어떻게 돼도 비밀로 할 거지, 넌? 교수님은 안경을 고쳐 썼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20번에 2, 21번에 3, 22번에 3…….
“말 안 해도 아실 거잖아요.”
“난 신이 아니야.”
23번에 1, 24번에 3, 25번에 2, 3, 2, 1, 4, 4, 3, 2…….
***
한 시간짜리 수업 끝나자마자 1층 내려왔다. 학실에 슬기가 있을 것 같아서. 가방 깊숙한 곳에 챙겨둔 핑크색 카드지갑이 무겁다. 너무 무거워서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어쨌든 나에게 있으니까 내가 훔친 거다. 여차하면 그냥 그렇다고 하자. 복도 맨 끝 우리 과 학실로 가는 도중 일공일에서 이재현 나온다. 조금 늦게 끝내줬구나. 그래도 오늘 수업 다 끝난 건데 표정이 좋지 않다. 조급해서 일단 불렀다. 형!
"……."
대답은 생략됐는데 상관없었다. 어련히 내 쪽으로 오니까.
"이상 글 잘 썼어요?"
"몰라."
"꽉 채워 썼어요?"
"모자라서 한 장 더 받았어."
그 주제를? 이재현이?
"앗. 그럼 만점이에요."
"……너 어디 가?"
"학실이요."
"또? 왜?"
이재현이 서 있으면 서 있는 이재현을 보는 사람이 있고, 이재현이 걸어가면 걷는 이재현을 보는 사람이 있다. 노력 안 해도 미가 넘치니 이곳엔 주목이 따른다. 축복받은 B군이라 할 수 있겠다. B군은 관심을 좋아하니까. 괜히 주변 살폈다. 나라면 살피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할 것 같다. 그리곤 귀 가까이에 소근거렸다.
"지갑이요."
으. 질린다는 듯 신음한다. 그런 태도라면 얼척이 없어진다.
"같이 가."
"네? 안되죠."
"네가 뭔데 안 된다야."
"미쳤냐. 겁대가리 없이."
자극을 줘야 집중한다. 그래서 계속 말 안 놓는다.
"얼굴 보고 사과 한번 해보게."
"진짜 미쳤냐?!"
큭큭 웃는다. 약 올리는데 도가 텄다. 계속 여기 있으라 사정하는데도 결국 학실까지 따라왔다. 그럼 지금 안 줄래요, 하니 정색한다. 긴장해서 답지 않게 노크까지 했다. 아차 하고 비번 찍으려니 안쪽에서 더 빨랐다.
"엥? 형 안녕하세요……. 비번 잊으셨어요?"
"아니. 얘가 모르고 두드렸어."
이재현은 졸지에 얘가 됐다. 그리고 핑곗거리도 됐다. 문 너머엔 당연히 슬기가 있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들어가려고 하니 이재현이 뒤에서 내 허리춤 꽉 쥐었다. 그래서 슬기가 나왔다. 이 조합 미친 듯이 싫다.
"안녕. 음… 나한테 받을 거 있지?"
"넵. 오빠 진짜 감사해요."
"아냐."
뒤에서 가방 지퍼 열린다. 뒤적거린다. 다시 닫힌다. 분홍색 줄이 어깨 너머로 넘어온다. 어이없다. 그대로 당겼다. 그 어깨 쓰다듬으며 다시 옆에 서는 사람 때문에 정신 혼미하다. 아, 이대로 서 있으면 내 건 줄 알겠다. 나도 핑크 잘 받을 수도 있다. 슬기는 알아서 가져갔다. 우와 오랜만이다. 발랄하게 굴수록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만 가볼게?" 그럼 도망쳐야겠다.
"어. 바로 가시게요?"
"응. 얘랑 과제 하러."
"그럼 잠시만요!"
후닥 들어가더니 냉장고 문 연다. 설마. 두 눈 뜨고 못 보겠다. 한번 꽉 감았다. 떴다. 케이크 상자 든 슬기가 앞에 서 있다. 설마는 늘 역시로 끝난다. 어차피 매일 보는데 이 정도는 심했잖아. 감사 이외의 것이 섞였다. 그냥 완전…….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그러면 사라질까 싶어서.
"슬기야…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친구분이랑 나눠 드세요. 지갑 찾아주면 원래 사례해야 한댔어요."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 모두가 날 감시하는 것 같다.
"진짜 괜찮아! 우리끼리 무슨 사례야……."
"이래야 다신 안 잃어버린다잖아요."
빨리요. 하는 통에 받아 들었다. 고마워, 소리 차마 안 나와서 "연락해……. 밥 사줄게." 했다. 옆얼굴 뚫리고 있다. 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슬기는 꾸벅. 진범에게도 인사했다. 맙소사.
"아아. 안녕하세요." 나한테 생략하던 답장 여기선 잘했다.
슬기에겐 기대 없던 반응이었는지 더 말 붙여왔다.
"저 오빠 알아요. 철학과 이재현 오빠 맞죠?"
"네. 어떻게 알았어요?"
"모르는 사람 없을걸요? 오빠 유명하잖아요."
"하하… 글쎄요."
웃어? 대화가 되고 있어서 무서웠다. 옆구리에 감겨 있던 손 잡고 당겼다. 사람들 기다려.
"아. 조 과제에요?"
"으응. 너무 늦었어."
"헉. 빨리 가세요. 여튼 진짜 고마워요 오빠!"
"그래. 잘 먹을게."
대답 듣지 않고 건물 밖으로 끌고 나왔다. 마음이 급했다. 어느 정도 따라오더니 잡힌 손 툭 털어낸다. 뼈마디끼리 투박하게 부딪혔다. 아픔은 느낄 새 없었다.
"뭐? 연락해 밥 사줄게? 지금 쟤 꼬시냐?"
"닥쳐라, 진짜."
같잖게 굴길래 멱살 잡고 갈까 하다가 팔뚝으로 합의 봤다. 질질 끌려온다. 아니. 질질 끌려 준다. 고분고분한 게 맥락에 어긋난다. 돌아보니 깔깔댄다.
"야야. 너 지금 빡친 거야?"
"닥치라고 좀!"
"존나 웃겨 진짜."
숨넘어갈 듯 웃는데 난 울고 싶었다. 이재현을 당장 어떻게 해버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지금 우리 어디 가?
사람 없는 곳이요.
"그게 내 방이야?"
인문대 쪽문 막 지났다.
"네."
눈치껏 신호도 바로 바뀐다. 5분 거리가 3분 거리 됐다. 그 뒤론 발 빨리 놀렸다. 머리 터질 것 같았다. 지갑보다 더 무거웠다. 손에 든 파바 케이크가. 그 케이크보다 더 무거웠다. 어느새 잡혀 있는 이재현의 손이. 사슴 다리 같다 생각했던 손가락이.
커피 속 바닐라 시럽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귀에 꽂히는 웃음소리가.
급해서 틀리는 도어락 소리가.
각자의 손으로 벗긴 옷가지 떨어지는 소리가.
현관 앞의 신발 어지러워지는 소리가.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섞이는 침 소리가.
케이크 상자 여는 소리가.
목을 깨물자 터지는 탄성 소리가
이빨에 피어싱 부딪히는 소리가.
입에 넘기지 못한 빵 덩어리 떨어지는 소리가.
생크림과 섞인 체액 목 너머로 삼켜지는 소리가.
엇박으로 몸 찧어지는 소리가.
"아, 그냥, 흐으… 이불 빨래하세요."
"아, 아, 왜… 싫어!"
"하라면 그냥, 좀 말 좀 들어!"
" 이 미친, 놈이, 싸가지 없, 아!" 하는 소리가.
맨바닥에 살 쓸려 화상 입을 것 같은 소리가.
크림투성이 몸 침대에 던져지는 소리가.
"아. 주연아, 빼지 마." 하는 소리가.
"아! 아, 으응, 이렇게… 응, 내가, 빼라고 할 때까지, 아! 빼지 마… 응? 알겠지……. 그냥 가면 죽일 거야." 하는 소리가.
죄책에 목 졸려 있는 것보다 더. 더. 더더더더. 더. 더더더. 더 숨통 트였다. 무서울 정도로. 어쩌면 든든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