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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가 洛陽의 망산에 묻힌 이유는 - 정용석 님의 저서에서
중국의 강소성 남경박물관에 가면, 백제의 풍달(風達) 장군이었던 흑치상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지명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부자의 묘지명은 민국18년(1929년) 10월 어느 날, 하남성 낙양에 있는 북망산 묘역에서 합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낙양의 북망산(北邙山)에서 발견된 백제 장군의 부자 묘지명이 왜 남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7년 간격을 두고 망산에 묻힌 상지(常之 699년)는 ‘41행 1,604자’의 묘지명을, 아들인 준(俊:706년)은 ‘26행 642자’의 묘지명을 남겨놓고 있다. 형식과 내용은 1920년에 망산에서 발견된 부여융을 비롯한 여타 묘지명들과 다를 것이 없다.
묘지명에 의하면 백제의 흑치부 출신으로 풍달장군을 지냈던 상지는 ‘연국공(燕
國公)이자 흑치부의 왕(王:君)이란 신분으로 낙양지역에서 죽었다’고 쓰여 있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세습했던 아들도 ‘흑치부의 왕’으로 죽어 낙양의 망산에 묻혔다고 했다. 흑치상지의 族出에 대해서는 ‘그는 백제 사람으로 부여씨(夫餘氏 : 東夷)의 분가 세력으로서, 흑치부의 군장을 지냈다’고 했으며, 성씨인 흑치(黑齒)는 ‘봉해진 지역의 명칭에 의해(부여:흑치)’ 얻은 것이라 했다. 그는 또 백제에서 선조 대대로 세습된 달솔(達率)이란 관등의 토호였으며, 또한 아들인 흑치준은 상지의 백제가 멸망한 지 13년째 되는 (672년) 상지의 나이 47살에 당의 흑치부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흑치상지를 정사서들의 기록과 묘지명을 종합해 추적해보면, 그는 백제에서 풍달 지역(철원, 부여, 창성, 송화, 금릉, 영일)의 장군으로 있다가, 백제 멸망 후 용삭년간(661~663년) 사이에 唐으로 잡혀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과 함께 만년현(萬年縣:섬서성) 임동의 북쪽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상지는 그의 임금인 부여융이 ‘웅진도독 겸 백제군공, 웅진도총관, 마한도안무대사, 대방군왕’이란 관직을 중원의 옛 본국(百濟)에서 수행할 때, 자신도 고국으로 돌아와 ‘절충도위, 웅진성대장군, 대방주장사, 웅진도독부사마, 부양군개국공(浮陽郡開國公)’을 역임했다. 또 당에서 태어난 아들인 흑치준의 묘지명에 상지는 ‘연국공 겸 좌무위대장군’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워 ‘무산하(茂山河 : 신라의 경주이자 고구려의 평양, 웅진과 부여)’ 지역을 식읍지로 받았다고 했다. 이곳(무산 : 연국)은 옛날 서주의 소공석(邵公奭)의 봉지였던 ‘연국(燕國) 지역’이다.
낙양의 망산에서 출토된 묘지명에서 상지의 존손혈계 이름과 관직을 살펴보면,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文大), 조부의 이름은 덕현(德顯), 아버지의 이름은 사차(沙次)로 쓰고 있으며, 자신이 묻힌 곳이자 낙양의 풍달인 백제(동국:조선, 풍달)에서 대를 이은 세습의 달솔 명문가(토호0로 쓰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상지의 아들인 준(俊)의 묘지명을 보면, 자신의 증조부의 이름을 가해(加亥)로 쓰면서, 자신이 태어나 죽은 곳인 중원의 백제(웅진도, 마한도, 대방군, 부양군, 풍달군, 흑치부, 연국 지역) 지역에서 임본향자사를 세습했다고 한다. 또 준의 고조부의 이름은 사자(沙子)였는데, 대를 이어 낙양의 임본향 지역엣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것으로 쓰고 있어 7년 간격을 두고 죽어 한 곳에 묻힌 부자간의 존속혈계 상황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더하여 준의 할아버지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의 백제 지역인 ‘형산(荊山)과 울포(蔚浦)’ 지역에서 무관을 지냈고, 일역(日域 : 조선․백제․왜․동국)의 요금의장군(耀錦衣將軍)으로서 자신의 관할 지역을 좋은 풍속으로 넓게 교화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은 천하를 덮게 했다고 했다. 따라서 한반도 백제의 흑치부 장군(풍달부)으로 주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지 한반도의 고대 정사서라고 강제한 것을 주입시키고, 암기한 지식 세계에서만 한반도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와 그의 가문이 있을 뿐이다.
흑치란 성씨도 한반도가 아닌 동중국(서중국을 합쳐 중원)의 흑치부(연국)이자 서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얻었던 것이다. 억지춘향으로 만든 한반도 충남의 부여 궁남지(宮南池)란 곳에 출토되었다는 목간(木簡)의 글자 중, ‘서부후항(西部後巷)’이란 글자가 쓰여 있다고 해서 이것을 7세기 중후반 백제의 흑치상지와 그 가문의 실존 여부와 관련이 있다고 억지 짜깁기를 할 필요도 없다. 상지의 관작인 ‘연국공흑치부’란 것을 제대로 해설하면, 흑치부 지역이 곧 燕國이란 뜻이 된다. 이곳은 서주의 소공석 봉지이자 위만(魏滿)의 거점지였고, 중원의 백제(요동, 하동, 산동, 하남, 남해)에서 ‘진천(鎭川), 동평(東平), 연기, 경원, 정산(정해), 문의, 온양’이란 역사 지명이 자리했던 중원의 요충지였다. 또한 흑수말갈(말갈의 흑수부)이란 세력들이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해왕국(北海王國 : 소해의 북쪽, 소중화의 북지) 지역인 흑수부의 별칭이 ‘연국, 연지(燕地)’였다는 것과 상통한다. 즉 흑수말갈의 흑수부 지역이 곧 요동 백제(풍달)의 흑치부(연국)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제비를 뜻하기도 하는 燕이란 글자는 五行의 ‘검은색(黑)’을 뜻하며, 5방향의 北方을 표시했던 글자였다. 따라서 북방의 부여씨(夫餘氏)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가 흑치(黑齒)가 됨은 자연스럽고, 본 거점지인 흑치부가 ‘연국, 부여’와 상통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고의 지리지라는 『산해경』에 백제가 요수(황하) 건너의 ‘북해왕국’ 지역에 있었다는 기사도 상지의 ‘흑치부 및 연국’의 총괄 지적이며, 고구려의 ‘유주(幽州), 현토, 북부여(북해왕국의 부여)’란 표현과 잘 어울린다.
한반도의 흑치부 출신으로 백제 장군인 흑치상지가 당의 포로가 되어 당엣 내려준 여러 직책을 수행하다가 당에서 죽었으면, 한반도 백제의 흑치부와 관련된 관직명인 ‘흑치부군(연국공)’이란 표현이 그의 묘지명 제문(題文)에 쓰여질 이유가 없다.
더하여 중원의 당에서 태어나 당에서 죽어 낙양의 망산에 묻힌 아들 준의 경우도 한반도 백제의 흑치부 자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묘지명 제문에 한반도 백제의 ‘흑치부 군주’란 표현이 쓰여질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백제에만 쓰여져야 할 관직명이 이들 부자의 낙양 출토의 묘지에 가감 없이 나란히 쓰여질 수 있었던 것도, 대대로 낙양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당시의 고관대작들만 묻힐 수 있었던 망산에 묻혔다는 기사도, 흑치부(연국)와 백제(풍달군)를 중원의 동중국 지역에서 거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지의 묘지에는 그의 존속혈계의 세습 관직을 ‘달솔’이라고 간단히 썼다. 그러나 그의 아들로서 중원의 당이자 백제에서 태어난 후 옛 백제의 ‘흑치부군장’을 세습했고, 택국의 왕까지 했었다는 준의 묘지명의 주요 내용을 상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준의 증조부와 조부는 자신이 태어나 죽었던 중원의 그 자리에서 代를 이은 유력자로서, 흑치부의 군장 자리를 아버지에 이어 자신에게 세습했던 혈계존속이었음을 밝혔다.
준이 관직을 수행했던 흑치부 지역에서 준의 증조부는 ‘임본향자사’를, 조부는 ‘임본향호부상서’를, 부는 ‘흑치부군주 및 연국공’을 지냈다고 했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소해와 발해(소해) 남쪽이자 대해(중원)의 북쪽에 있었다는 , 중원 백제의 흑치부이자 연국(택국) 지역에 대한 별칭이 ‘임본(任本)’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 지명에서 임본향의 임본(任本)이란 ‘임주(任州)와 본주(本州)’가 합쳐진 곳이란 뜻이다. 임주의 임(任)에는 ‘북지(北地 : 北州)의 북해왕국’이란 뜻이 담긴 10간(干)의 임(壬)의 뜻이 포함되어 있고, 본주(本州)에는 ‘근본이 되는 중심 고을’이란 뜻이 들어가 있다. 따라서 임본향이란 고을 명칭에는 동방의 북해왕국 지역에 있었다는 ‘百濟의 흑치부(북지의 연국)’에 대한 의미도 합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곳은 중국사에서 ‘기주광평군(冀州廣平郡) 또는 사주광주군(司州廣州郡)’으로 불렸던 곳으로, 황하 유역 내 하동(조선의 요동)인 ‘동관(潼關 : 옛 함곡관) 지역에서 산동성 東平’에 이르는 동서 지역을 말한다. 광주(광평), 기주(冀州), 사주(司州 : 隸州, 直豫州, 豫州)의 중심은 지금의 ‘낙양, 정주, 개봉’ 일대가 된다. 이곳에서 百濟의 임본향(흑치부)과 함께 했던 한국사의 지명은, ‘대흥, 예산, 서산, 임천, 신안, 부여, 천안, 함안, 광양, 성주, 광주, 경주, 평양, 한주, 안주’ 등을 들 수가 있다. 이곳에는 허황옥의 가야국이자 조선의 김해(金海 : 金州, 盆城, 伽倻)로 배정한 지역이자, 왜가 세웠다고 강제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도 있었다. 임나의 나(那)는 조선의 ‘주(州)나 성(城)’인 성읍(城邑)이란 뜻이 있고, 日本 또는 日本府에는 ‘해뜨는 동방(동국)의 중심(중앙)’이란 막연한 상징 이외에는 없다. 즉 ‘북해왕국인 백제의 도성, 흑치부 지역의 백제 도성(중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일본이 발명한 ‘임나일본부’의 얼굴이다.
지금의 일본이 지금처럼 ‘동방의 중심’이란 국명인 ‘日本’이 된것도, 동방의 경도(京都) 지역이란 뜻을 지닌 ‘동경’이란 지명을 가지게 된 것의 진실도, 그들이 서양 지향의 근대화와 함께 온 억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시작인 명치유신(1867년) 이후에나 생각해낼 수 있었던 단어였다. 이때 일본인들은 팽창 이데올로기와 동조하는 ‘만세일가의 천황사’를 보필하는 점령지(한반도를 겨냥)에서 역사적 합리성(타당성0을 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김해일대에 ‘임나일본부’를 배정한 후 한반도 남부 경영이라는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유이다.
그런 후 고대 한국이 북해왕국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지금의 대한해협과 쓰시마 해협을 북해(北海)의 또 다른 표현인 ‘현해(玄海)’로 명명했다. 이러한 명칭이 만들어지게 된 기준도 열도의 큐슈(九州)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왜(일본)와 동경의 열도도 경남의 남부 지역(김해)에 있었다고 역사적 함정을 파놓았다.
한편 흑치준의 묘지명에 의하면, 준의 할아버지는 한반도의 백제(흑치부)에서 벼슬을 했던 적이 없다. 기존의 한반도 백제 해설에 의한다면 바늗시 한반도 백제의 관직명과 관할지에 대한 기사가 있어야 함에도 중원 백제의 관직명과 통치 지역만 묘지명에 거론되고 있음은 거듭해서 한반도 百濟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상지의 성씨인 흑치를 ‘검은 이빨을 가진 사람, 또는 물들인 사람’으로 오해하여 오늘날의 ‘필리핀’ 출신으로 해설하는 내용도 난감한 경우가 되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倭人(日本人)’으로 말하는 것도 터무니없다. 상지의 성씨인 흑치는 이빨의 검은색과는 관련이 없으며, 북해왕국(연국) 지역의 흑치부(흑수부)란 지명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튼 준의 조부는 ‘형산(荊山), 울포(蔚浦)’ 지역에서도 무관직을 수행했다. 이곳은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 荊山)과 위씨현(尉氏縣)’에 해당되는 곳이며, 일역(日域)이란 ‘동녘(東域)’ 동국, 동주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중원백제의 형산과 울포(위포) 지역은 중원의 조선에서 ‘청도(淸道 : 道州, 伊山, 大城, 馬岳), 동래, 울산, 울진, 부여, 공주’ 등과 함께 있었던 요충지였다.
이곳은 왜사의 원초적 지역인 나라(奈良)도 있었고, ‘야마토 정권(大和正權)’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사의 ‘야마토’ 조정이란 본래 중원의 百濟 내에 있던 산동(山東 : 大和) 정권의 표기에 대한 이전이다. 중원의 화산(華山 : 中山) 동쪽에 있었던 여러 권력부 중에 야마토 명칭을 쓰던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라는 왜사의 표현도 중원의 고구려 중심 지역이던 ‘국내(國內, 국양(國壤)’과 다르지 않고, 조선의 ‘영주(내령), 경주(내림), 영월(내생), 봉화(내성), 제천(내토), 남해(내포), 안성(내해홀)’이란 지명의 뜻과 다르지 않다.
상지의 연국공 지역 중심은 ‘낙양과 개봉 일대’를 , 준의 택국(澤國) 지역은 강릉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동방육해 지역인 진주(晋州 : 晋城)와 강릉의 뜻을 지닌 지역 명칭이다. 또한 무산하(茂山河) 역시 하동이자 조선의 요동에 있었다. 요동이란 지명에는 조선과 일본(왜)의 이면이 포함되어 있다. 상지가 개국공(開國公)을 역임했었던 부양군(浮陽郡)이란 곳도 중원백제의 ‘발해군(渤海郡), 부여군, 풍달군(風達郡)’ 지역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고구려 고씨들이 창건했던 중원의 북제(北齊 : 齊)가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중원에 백제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 멸망 후 백제 영토가 ‘발해와 말갈 세력’들에게도 분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 영토 분할과 관련된 기사도 한반도에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중국사의 齊나라란 뜻도 ‘중심(배꼽), 중토’란 의미를 지닌 동중국의 뜻으로 소중화의 백제와 다르지 않다. 장안의 만년현 지역에서 부여융과 함께 노예 생활을 했다는 상지가 융보다 늦게(664년) 본국인 백제로 돌아와 ‘웅진도독부대장군과 대방주장사’를 지냈다는 그곳 역시 한반도와는 무관하다. 또한 그의 벼슬인 ‘웅진도독부사마, 사반주(沙伴州 : 公州, 靈光)자사, 연연도(燕然道)부총관, 신무도(神武道)와 회원군(懷遠軍)의 경략대사’란 직책의 적용 지역도 중원의 동중국(백제) 지역인 하동남로(河東南路)에서 적당함을 보인다. 이곳의 옛지명은 ‘기주발해군(冀州渤海郡0, 또는 창주부양군(滄州浮陽郡)’으로 불렸고, 연국의 중심은 하남성의 연진(延津 : 燕津)쯤이 될 것이다.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달솔이란 직책으로 역임했다는 풍달장군(풍달군)이란 뜻도 ‘박달(朴達) 또는 온달(溫達)’과 다르지 않다. 다시 정리하면 지명으로서 풍달(박달, 온달)의 뜻은 ‘동주(東州), 동국(東國), 동성(東城)’의 이두식 표기였다. 풍달의 상징 및 뜻을 함유했던 지명은 ‘경주, 사천, 금산, 광양, 천안, 남원, 동래, 함주, 강릉, 공주, 전의, 신풍, 덕원, 울산, 평산, 황주, 평양, 영일, 광주, 정선, 철원, 서흥, 장단, 종성, 안변’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반주자사가 될 때 받은 기임공(己任公)이란 직책의 적용지도 지금의 하남성 ‘섭현(涉縣)’ 지역에 해당된다. 기임의 기(己)도 10간(干)의 방향으로 중앙에 해당되며,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과 신안(新安)’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의 사서인 『수서(隨書)』에 쓰여진 백제국호의 기원 내용인 ‘백가제해(百家濟海)’에 대한 해석도 한반도 백제와는 무관하다. 이 문장을 ‘100여 집(戶)이 바다(海)를 건너왔다’로 해석하고 해설하면 정말 곤란하다. 역사에서 제후가 봉(封)해진 곳을 국(國)이라 하고, 대부(大夫)가 봉해진 곳을 家라고 한다는 데서 새롭게 출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백제의 건국 기원과 관련된 ‘백가제해’의 본뜻은 ‘백 명의(여러 명의) 대부들이 연합해 제주(濟州 : 中央) 지역인 중원의 해주(海州 : 內米忽, 首陽, 孤竹)’에 나라를 세웠다는 뜻을 지녔으며, ‘바다를 건너왔다’의 뜻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다. 이곳은 환공(桓公 : 小白)에 의해 중흥했던 제나라 지역으로, 해동의 영제(永濟)와 제원(濟源)을 근거지로 한다. 백제의 齊 지역으로의 이동과 창국 성격도 흑치상지가 중원에서 소공석의 봉지였던 燕國 지역을 다스려 燕國公이란 관작을 받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고구려의 천남생(泉南生)도 백제의 부여융과 흑치상지처럼 洛陽의 邙山에 묻혀 묘지명을 남겼으며, 중원에서 조선군공을 지냈던 고구려의 보장왕이 장안(섬서)에 있는 이근행(말갈장군)의 묘 근처에 묻혔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고대 삼국(가야와 탐라 포함, 삼한)의 그림자를 黃河 유역 중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