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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수필작가
최원현
『한국수필』 천료 등단․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클럽한국본부 심의위원. 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상임이사 겸 『강남문학』 주간. 『한국수필』 『수필세계』 『문예춘추』 『문학나무』 편집위원․제5회 허균문학상(1997), 제1회 서울문예상(1998),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2002), 제20회 동포(東圃)문학상 대상(2005),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 수상․시집 『아름다울 수』(1989. 문학아카데미). 수필집 『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1990. 대림기획) 『날마다 좋은 날』(1995. 도서출판 유정) 『살아 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2001. 도서출판 내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1 우수문학작품)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2002 범우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2 우수문학도서) 『서서 흐르는 강』(2004. 선우미디어). 수필선집 『숨어 있는 향기』(2003. 교음사)
│대표 작품│
숨어 있는 향기 외 4 편
야, 살았구나! 드디어 새 촉이 나왔구나.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2년쯤 된 것 같다. 직장 동료들 몇이서 전라도 어딘가로 난을 캐러 간다고 하더니 춘란 몇 촉을 내게 주었다. 나는 원래 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까다롭다고 하는 난 기르기에 선뜻 나서고 싶지도 않아 어느 집이건 한두 분(盆)쯤은 있기 마련인 난 분 하나 갖추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난이라고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아무리 야생란이라고는 해도 내가 평소에 보아 왔던 그런 난의 품위도 찾아볼 수 없었고,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잎은 과연 내가 이것을 살려낼 수 있을까 싶게 자신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에다 이 나이의 내 방에 난 분 하나 없다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의 집에 갔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난의 신비롭던 꽃 모습이며, 은은하게 풍겨나던 난향이 생각나 이 기회에 나도 한 번 시작해 볼까 하는 호기도 생겼다.
꽃집에 들러 화분과 흙을 사고 그 곳에서 일러준 대로 정성스레 심었다.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던 것이었는데 화분에 심어 놓으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게 해서 내 방에 난이 놓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를 놓고 보니 너무 외로워 보인다. 정을 붙이고 뿌리를 내릴 엄두조차 못 낼 것만 같다. 해서 평소 난을 좋아하시는 숙모님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더니 난을 나눠 주시겠단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내친걸음에 숙모님 댁에서 난 분 하나를 얻어다 함께 놔 주었다.
한결 좋아 보인다. 갑자기 방안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고, 나도 제법 운치깨나 아는 선비 같아 보인다.
나는 그때부터 난에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 헌데 숙모님 댁에서 가져 온 난은 이내 새 촉이 올라오고 잘 자라는데 야생 춘란은 늘 그대로다. 혹시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뿌리를 확인해 보면 뿌리가 메말라 있기도 했고, 어떤 땐 뿌리가 거의 다 썩어 있기도 해서 이게 어떻게 살아나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그 난에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아닌가. 아내는 자기보다 난을 더 생각한다며 자기는 난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투정을 해댔지만 나는 그 난이 죽게 되면 정말로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내가 마음을 주면 줄수록 난은 더 몸살을 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얼핏 보면 이미 죽은 것처럼 보여 식구들에게도 당부를 해 놓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밖에 내다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까지 겹쳐 나도 함께 앓기 시작했다.
그런 난이 죽지 않고 끈질기게 나와 함께 목숨 지키기를 하더니 오늘 이렇게 산을 들어올리는 감격으로 새 촉을 틔워 올린 것이다.
그 동안 몇 개의 난 분이 늘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춘란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얼마 전 난을 파는 곳에서 우리 집의 난 이야기를 했더니 난의 생김새를 묻고는 그런 난은 일이천 원이면 한줌씩 준다면서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애지중지 마음을 써 주었던 난이 그토록 값싸고 흔한 것이며,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정성을 쏟았구나 하는 후회와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속이 상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잘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만일에 내가 처음부터 난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면 그런 난을 준다고 받기나 했겠으며, 설혹 받았다고 해도 그토록 정성을 쏟을 수 있었겠는가. 결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함께 앓으며 목숨을 지켜 줄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좋아 보이면 우선 얼마짜리냐고 묻는 요즘 사회이지만 생명엔 귀천이 있을 수 없는 것, 비록 한 포기 난일지라도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섭리와 은총이 내려진 생물체요, 어쩌면 인간보다도 하나님 보시기엔 더 아름다운 피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그때 앞으로 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것이 좋고 귀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나도 필시 그 좋은 것, 일반적으로 누구나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 쪽으로만 눈을 돌리고 그렇지 않은 것에선 자연스럽게 발을 돌릴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것이다.
물론 난은 꽃을 보기 위함이니 나중에 내가 그처럼 정성을 쏟았던 난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이 없어서 몹시 속이 상할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꽃조차 피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해가 넘는 동안의 내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인내하며 참으로 힘겹게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드디어는 하늘 문을 여는 감격으로 장하게 촉을 틔워 살아 있음의 의미를 내게 보여 준 난에게서 고마움과 안쓰러움과 감동을 함께 안는다. 거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자 난의 감격, 환호, 기쁨, 보람이 정말 하늘에 닿는 충만함으로 내게 향해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집안 어른 한 분의 별명이 ‘섰다’였다. 별명이 하도 이상하여 왜 ‘섰다’라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로 얼굴들을 쳐다보며 기다렸다는 듯 배를 움켜쥐곤 웃어댄다.
얘기인즉, 그 할아버지가 일곱 살 때까지 일어서지를 못했단다. 그래서 영영 서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방안에서 ‘섰다’ 하는 소리가 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바라보니 일곱 살짜리가 열린 방문 고리를 붙잡고 일어서서 다리를 덜덜 떨며 저 혼자서 일어섰다고 환성을 지르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다리에 힘이 오르기 시작하여 곧 걷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별명이 그날 이후로 ‘섰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 들었던 그 ‘섰다 할아버지’의 감격이 어쩌면 저 춘란의 감격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저 난도 섰다 할아버지처럼 다른 난에 뒤지지 않고 쑥쑥 자라 오를 것 같고, 뿌리도 화분에 가득하도록 튼실하게 차 오를 것 같다.
지금 당장 성과가 없다고,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게 없다고 쉽게 자포자기 해버리고, 또 쉽게 저버리고 마는 이 시대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신선하고 맑게 들려 오는 한 소리인가.
난 분을 여리게 볕이 들 수 있는 쪽으로 옮겨 주며 ‘어느 난도 가지지 못할 너만의 꽃을 피워 다오’ 가만히 속삭여 본다.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제껏 맡아 보지 못했던 솔향기, 풀내음들이 몰려와 춘란을 감싸고, 방안엔 때 아니게 피지 않은 난에서 나는 난향이 가득 차는 것 같다.
향기는 꼭 꽃에서만 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사람에게서도 품향이 나타나듯 어쩌면 가장 향기로운 것은 꽃을 속으로 머금고 있을 때의 숭고한 정성스러움에서 나는 것은 아닐까.
(1994)
어떤 선물
남에게 주어 버리는 것임에도 한없이 기쁘고, 내가 받으면 더없이 행복해지는 것이 선물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물을 해 보지 않은 사람 없을 테고, 선물 한 번 받아 보지 않은 사람 또한 없으리라. 주는 사람 우선이 아니라 받을 사람 우선으로 정해지는 것이 선물이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정성으로 마련하여 건네는 것이 선물이다.
이 나이 이르도록 나는 몇 번의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은 바 있다. 값이 비싼 선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보나 내가 누구에게 선물을 받을 만한 존재도 못 되는데 그런 내게 가없는 사랑을 선물로 보내 주는 마음과 손길들이 있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선물이 있다. 그러니까 수해 전 가을이었다. 오랜 서울살이를 벗어나 충북 음성에서 과수원을 시작하신 수필가 ㅂ 선생님이 사과 한 상자를 보내 오셨다. 아니 내외분이 친히 오토바이에 싣고 내 사무실까지 가져 오셨다.
사과 한 상자, 선물로 흔히 오갈 수도 있는 물건이다. 허나 내게 보내진 사과 선물은 그런 흔히 있을 수 있는 선물이 아니었다. 사실 그냥 인편에 보내 주시는 것으로만 해도 고맙고 송구스러울 일이건만 일부러 친히 가져 오신 것인지라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두 내외분 말씀이 더욱 나를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몇 해를 고생하여 금년에 첫 수확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 수확은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외분이 의견일치를 보게 되었고 그렇게 선물을 하기로 하셨단다. 그런 중에 나를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내외분이 사과밭을 두루 다니며 가장 크고 탐스럽게 잘 익은 사과들을 골라 따서 그득 한 상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손수 음성에서 서울까지 가져 오셨다는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수줍듯 탐스런 자태를 자랑하며 보란 듯 결실의 여왕으로 익어 간 사과, 그 사과들 중 유독 튼실해 보이고 잘생긴 것으로만 따서 한 개, 두 개 망태기에 담는 두 분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두 분 사이엔 기쁨도 두 배, 보람도 두 배, 희망도 두 배로 넘쳐나는 것 같다. 그것은 나누는 기쁨을 맘껏 누리고 있는 천사의 모습이고도 남았다.
나는 그 사과를 받아 놓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과나무에 손을 뻗쳐 사과를 따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그분들의 사랑은 이해되면서도 그런 수고가 마음에 걸려 좀처럼 사과를 맛있게 먹을 용기가 생겨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식구 수에 맞춰 사과 네 개를 씻고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받은 사과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사과를 깎아 나눠 먹었다.
사과 맛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분의 일 년간, 아니 수해 동안 애씀의 정성으로 알이 굵어지고 맛이 든 사과요, 거기에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게 보내 주신 사랑은 또 얼마나 큰가. 내가 사과 맛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과 맛이 아닌 그분들 사랑의 맛이 더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나는 나머지 사과들을 두세 개씩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그분들의 사랑을 내가 받은 만큼 나도 나누고 싶었음이다. 아니 감히 나 혼자만 먹을 수 있는 배짱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지난해였던 것 같다. 내가 병원에 근무하는 덕택에 그분들에게 약간의 편의를 제공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실 큰 도움이랄 수도 없는, 병원에 오는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런 보통의 편의 제공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게 되면 평소의 침착함은 간곳없고 크게 당황하기 마련이듯 나의 작은 도움이 그분들에겐 그토록 고마웠었던가 보다.
ㅂ 선생님은 일찍부터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 문인이시고,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든 그 정도는 해 드렸을 일인데 너무나 황망한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나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게 내 작은 도움은 칠흑의 어둠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처럼 반갑고 큰 고마움으로 기억되셨었던 것 같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맨 먼저 생각났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삶이 고달프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그분들이 보내 주셨던 사과 선물을 생각하곤 한다. 당신들이 몇 년을 고생하여 이룩한 과수원에서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지난날의 고마웠던 일을 갚고 싶으셨던 마음, 연세도 지긋하신 두 분이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는, 튼실해 보이는 잘생긴 사과 하나를 발견해 내고 맞이하던 감격과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의 열매에 손을 뻗어 사과를 잡았을 때 손안 가득 넘쳐 났을 충만한 과육의 감촉, 그런가 하면 손에 따 든 사과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과 햇살을 받아 빛나는 빛 부신 사과를 생각해 보시라. 어찌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을 것인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내 사랑하는 마음, 내 고마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ㅂ 선생님은 수필 작품을 통해서도 많은 감동을 주곤 하시더니 이처럼 선물로도 수필보다 더한 감동을 주고 있지 않은가. 글이 곧 사람이라고 했는데 ㅂ 선생님이야말로 그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삶과 글이 아름다운 감동으로 넘쳐나는 사람, 나는 이날껏 살아오면서 내게 귀한 사랑의 베풂을 주셨던 그 많은 분들에게 얼마큼이나 고마움을 표하고 살아왔을까.
과연 나도 몇 년을 고생하여 얻어낸 소중한 결실을 맨 먼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 적이 있을까. 내가 급할 때만 아쉬움이고, 그때만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삶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인정해 버리고서 내가 먼저 그런 삶의 사람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오늘은 편지라도 써야겠다. 날씨가 더운데, 햇볕이 뜨거운데, 어쩌면 ㅂ 선생님은 이처럼 뜨거운 햇볕을 주셔서 사과가 잘 익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번 가을에도 탐스런 사과들을 따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아름다운 선물을 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나눌 때 마음도 세상도 맑아지고 밝아진다고 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뜨거운 태양 빛을 하늘의 은총인 양 함뿍 받으면서 사과나무 사이에 서 있는 ㅂ 선생 내외분의 모습이 밀레의 ‘만종’을 보는 것 마냥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번 가을엔 나도 그렇게 가슴 가득 감동과 기쁨으로 남게 할 그런 아름다운 선물을 하나쯤은 꼭 하고 싶다.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던 말이 사과 맛보다도 더 싱그럽게 입맛으로 돈다.
(1999)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하늘과 바다가 반가운 포옹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그 품안에서 빠져 나온 푸른 숲, 그리고 하얀 옷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건물들이 쪽빛 바다에 내리다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여유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과 색이 수줍은 듯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내게 통영은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리움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통제영(統制營)이라는 크고 엄숙한 느낌보다도 바다와 섬 그리고 섬만한 산과 항구가 마치 모태 속 여덟 달 아기의 방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대개의 어항이 주는 음습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렴 고결한 선비 같은 품위를 자아내는 도시, 그래서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미항으로 불려 왔나 보다.
통영에 올 때마다 남망산엘 올라 보고 싶었다. 중턱에 서 있다는 청마의 시비도 보고 싶고, 저 한산대첩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을 충무공상 앞에서 나도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삶에도 어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역사는 말이 없다지만 아니었다. 통영에 오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수많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피안의 모랫벌처럼 밀려들게도 하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 이 땅에서 살다 간 이들의 애환이 몽실몽실 솜구름처럼 피어 오르기도 했다.
미명의 아침이었다. 바다의 일출을 보고자 했는데 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아니 섬 뒤로 부끄러운 듯 사알짝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둥실 몸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누리의 바다가 온통 황금빛이 되어 버린다. 통영의 일출은 망망한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장엄하지 않으면서도 긴 여운의 감동을 오래도록 가슴에 남게 하는 그런 해 떠오름이었다.
남망산(南望山)에 올랐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바다와 섬과 도시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꼭 어울리는 키와 덩치로 자리한 산, 얼핏 고래의 등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산은 살아 있었다. 수필 작가인 이곳 K 시장의 사랑과 꿈과 열정이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 피어 오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숨결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이곳 남망산인 것 같다. 시민회관이 그렇고, 작은 오솔길 하나에서도 정성스런 마음씀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남망산 조각공원은 국내작가 5명에 외국작가 1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랑블루(Grand Blue)라는 통영의 자연환경에 맞는 주제로 자신의 작품이 설치될 수 있도록 직접 설치될 장소와 주변환경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는 작품의 내용과 크기와 재료를 결정하는 심포지엄 형식을 통해 이 일을 추진했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쪽빛 바다와 군데군데 떠 있는 섬들의 어울림은 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흥겨움, 그리고 명상적 태도의 통일된 공감대로 승화시켜 내고자 함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브론즈와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한 ‘허공의 중심’이란 제목의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이었다. 나신(裸身)의 남성상을 다섯 단계로 설치하였는데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등 이원론적 사고(思考)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해 내고자 하는 인간의 고귀한 염원을 나타낸 인체조각이었다. 강한 이미지의 나신 남성상(男性像)에서는 태초의 에덴과 같은 원초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생명력은 생겨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았으며, 특히 삶에서 죽음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인간이 신 앞에서 생명에 대해선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인정케 하고 있었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랑스 작가의 나무와 고무와 모터를 소재로 한 ‘잃어버린 조화’라는 작품이었다. 움직인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단순한 반복 동작은 주제도 없는 수동적이고 무의미한 움직임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곧 인간의 삶은 이런 무의미한 반복 동작일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한 것으로 모터의 동력에 의해 연결된 여러 토막의 통나무가 움직임으로 인간 행위와 삶의 의미를 곰곰 새겨 보게 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분재, 시간과 공간을 체험케 하는 입방체의 공간, 인체라는 소우주를 통해 초자연적인 우주의 원리와 생명력 및 영원의 활력을 표상하고 있는 ‘출산’, 음(-)과 양(+)의 균형 속에서 바라보이는 것들을 통해 명상할 수 있게 하는 ‘망산’ 등은 삶과 죽음이란 대주제를 자연적 지리적 환경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크게는 남망산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 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의 초점은 역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자리였다. 가만히 보면 통영은 우리 나라 모형의 축소판이다. 수군통제사가 수군을 통제 훈련하던 것처럼 삼면의 바다가 통영으로 모이고 통영에서 다시 나래를 편 물결은 태평양을 향해 더 힘차게 퍼져 나가듯 통영은 세계로 세계로 한국을 빛내 갈 힘의 발원지였다.
그래서일까. 통영이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 박경리는 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시작에서 자신의 고향 통영을 이렇게 그려 놓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다 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내려오는 길에 청마(靑馬)의 시비 앞에 섰다. 그의 시 「깃발」이 바다를 등에 업고 새겨져 있다. 통영에는 청마가 살면서 거닐었던 거리와 그리움의 편지를 쓰고 보내던 우체국이며, 호심커피숍 등 추억이 깃든 곳들이 많다. 물론 지금엔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지만 그 자리엔 가지 못하더라도 통영에 오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결,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시비 앞에 서니 더욱 그가 그립다. 새로 세운 청마문학관에 가면 그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큼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청마는 그랬다.
“여기엘 오면 나도 어부가 되고 싶다 / 그리하여 저 대해(大海)의 심산유곡으로 헤치고 나아가 / 억센 그들과 맞싸우며 그들을 모조리 잡아 비끌어 오고 싶다”(청마의 시 「어시장에서」)고…….
사람들이 통영에 오면 그리움의 사람이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언젠가 젖먹이 아이와 한참을 놀아 주고 나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런데 차를 타고 얼마 동안을 간 곳이었는데 내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고 놀았던 사이에 아기 냄새가 몸에 배었나 보다.
통영은 예향이다. 그것은 산자수려함뿐 아니라 그 곳을 빛내 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곳을 통해 맑고 깨끗한 성정에 젖었고 또 그렇게 청명한 사람이 되어 그의 주위까지도 청정하게 만들었다. 겨우내 얼어 있다 봄이 가까워지면 얼음장 밑으로 녹아 흐르는 산골 물 같은 맑고 시원함이 너른 바다에서도 느껴지는 곳. 비록 통영에 머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시 안아 주었던 아기에게서 배어나던 아기 냄새처럼, 내게서도 분명 통영 냄새가 솔솔 풍겨 날 것 같다.
함께 있어도 그리운 곳, 하물며 떠나가면 오죽 더하랴. 고향도 아니면서 이만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건 아름다운 풍정만은 아닐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다음 번에 오게 될 때는 나도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올까 보다. 그럼 더욱 정감이 넘치지 않을까. 마지막 둘러보기인 해저터널을 빠져 나오자 남망산 위에 머물던 낮 해가 통영을 둘러본 느낌이 어떠냐는 듯 환한 웃음 가득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2001)
저녁노을
도시 생활에 젖어 버린 내게 저녁노을은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 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신다.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 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 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다가 보여라도 주겠다며 다음해 내가 내려갔을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묻어 있고, 역겨운 신 냄새까지 났다. 그러나 그런 냄새까지도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로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걸려 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 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가 된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2002)
잡초 뽑기
요즘 들어 나는 때아닌 잡초 뽑기에 시달리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여기저기에 자리잡아 버린 잡초들이다. 이 놈들은 싹터서 자라는 기간조차 없이 어딘가로부터 불쑥 날아 들어와 터를 잡아 버린 놈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문학 사이트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오는 광고물들인데 어찌나 교묘한 방법을 쓰는지 막아낼 길이 없다. 내 역량으로는 오로지 하나씩 열어서 제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소홀하면 제목만으로도 낯뜨거운 음란 광고물들로 게시판이 온통 도배가 되어 버린다. 주인 모르게 침입하여 나 몰라라 자리를 잡아 버리는 아주 고약한 놈들로 도저히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분들께 큰 실례를 하게 될 일이다.
나는 제대로 농사를 지어 보지 못해서인지 잡초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땅에게는 잡초가 있을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잡초라 하는 것이지 그게 만일 어느 땐가 요긴하게 소용되면 특별재배라도 해야 될 테고 잡초란 이름 대신 분명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붙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것들만으로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든 이도 보았다. 그러나 아침이고 저녁이고 틈만 나면 들어가 없애야 하는 내 문학의 방 온갖 광고물들은 정말 미운 잡초라 조금의 동정도 주고 싶지 않다.
우리네 논에 흔하던 물피, 물달개비, 쇠털골, 밭뚝외풀, 방동사니, 바람하늘지기, 마디꽃, 그런가 하면 밭에 성하던 바랭이, 뚝새풀, 돌피, 강아지풀, 쇠비름, 반하, 갈퀴덩굴, 명아주 등은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초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쓸모 없다 해서 무심히 넘겨서 그렇지 조금만 정을 담고 눈여겨보면 그 아름다움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언젠가 미시령 휴게소 뒷산 능선을 오른 적이 있다. 그 곳에 피어 있던 아름다운 야생화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을 누가 잡초라 하랴. 그러나 그들이 우리들 밭에 있다면 그걸 아름답다며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잡초가 산이나 들에 있다면 아무도 그들을 잡초라 하며 나무라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분위기에 따라 칭찬도 받고 시인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시로 노래하기도 하리라. 그런데 사람이 자기 영역에 특별히 무언가를 기르려 터잡아 놓은 곳에서 불청객이 피어 오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건 풀꽃이건 제자리서 제 할 일을 할 때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 아니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곧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잡초란 이름은 참으로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표현이요 그 한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말인 것 같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면 바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 지나침과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듯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잡초로부터 배운다.
전에 꽃씨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화분에 직접 심었는데 싹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주 작은 싹이 하나 올라왔다. 한데 조금 자라고 보니 그건 잡초였다. 꽃씨는 안 나고 섞여 있던 잡초 씨만 발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뽑아 버리지 않고 두었더니 거기서도 꽃이 피었다. 나는 잡초로가 아니라 화초로 자라게 해 주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하얀 아주 작은 꽃을 오랫동안 피워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잡초라면 끈질긴 생명력부터 연상된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농사일을 별로 해 보질 못했다. 중학교를 마치자 바로 서울로 올라와 버린 때문도 있겠지만 약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억척스럽지도 못했고, 또 특별히 그런 일을 해야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고작 아이들과 함께 땔나무를 하러 가거나 학교에서 숙제로 내준 퇴비감을 준비하는 정도였지만 그나마도 시원스레 해내지 못해 그 또한 늘 남의 도움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데 팔자에 없는 잡초 뽑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사이트에 큰 문제가 생겨 거금을 들여 게시판 13개를 몽땅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이러니 아무래도 다시 기술자의 신세를 져야 할 모양이다. 어릴 때도 땔나무나 퇴비 숙제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 하곤 했는데 지금에도 그래야 할 모양이다.
문득 게으른 농사꾼네 밭에 잡초가 무성하다는 말이 생각나 또 한 번 나를 부끄럽게 한다. 결국 내가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속이 상한다고 해서 하루만 걸러도 다음날에 몇 배로 더 힘이 드는 작업을 해야만 할 테니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입장을 바꿔서도 생각을 해 본다. 저들은 이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저들의 생존 방법일까? 그렇다면 내가 너무 심한 것일까? 하지만 둘이 함께 살 수는 없잖은가. 그게 운명 아닌가. 그런데도 삶의 현장은 여전히 잡초와 곡식의 함께 삶터이다. 곡식에겐 잘 자라게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잡초는 제거를 기본으로 한다. 그래도 모두 없애지는 못하니 결국은 공존하는 셈이 된다.
다시 컴퓨터를 켠다. 잡초 뽑기를 해야 한다. 그나마 손을 안 대고 놔두고 있으면 필시 저들은 대단히 힘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저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저희들 일을 하고 말리라. 그렇다면 그것이 지는 것이든 그냥 포용하는 것이든 차라리 저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까. 세상이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공존의 장임을 어쩌랴.
(2004)
│최원현 작품론│
추억의 공간 속에 켜진 불꽃, 그 향훈
서 익 환
수필은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수필가 자신이 삶의 공간 속에서 체험한 수많은 내용들이 순수한 영혼에 용해되어 미학적 세계로 변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작품들은 독자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가 그들의 삶에 감명을 주는 동시에 그들의 영혼에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수필가 최원현의 수필에 다가가면 그가 창조한 추억의 공간 속에 켜진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게 된다. 그리움과 사랑과 고독의 불꽃, 그리고 거기서 풍겨 나오는 향훈을 호흡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목소리이고 영혼 깊은 곳으로 저며 오는 그리움의 숨소리이다. 동시에 오랜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잊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바람소리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환상에 빠져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최원현이 이처럼 독자들을 그리움의 환상 속으로 유혹하는 마술적인 힘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파트리스 뒤뺑은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물을 너에게 가져다 준다. 나를 원천에까지 뒤따라와 너의 비밀을 찾아내라.”라고 말한다. 뒤뺑의 말처럼 최원현의 수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기억 속에 사라진 물, 비밀’을 천착해 내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작업은 그의 수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근원적 모티프가 다분히 그의 잠재적 유년시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족 콤플렉스, 곧 외로움, 그리움, 사랑과 정(情)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원현 수필가는 현대 한국수필 문단을 꽃피울 수필가로서 현재요 미래라고 평가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독선일까? 물론 수필가들 중에는 탄탄한 문장, 나무랄 데 없는 구성, 날카로운 리얼리티에 바탕 한 주제의식 등을 보여 주고 있는 훌륭한 수필가들이 손꼽을 만큼 있다는 전제하에 언급한 것이다.
수필집 『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1990년)를 시작으로『서서 흐르는 강』(2004년)을 세상에 내보낼 때까지 최원현은 한국수필이 당면 과제로 안고 있는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위해 열정적이며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온 중견 수필가이다.
수필가 최원현은 자신이 구축해 놓은 수필세계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수필집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2002) 서문 「그리움과 사랑」에서 그는 자신의 수필을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침향(沈香)의 세계라고 술회했고, 『서서 흐르는 강』(2004)의 서문 「행복한 만남」에서는 그것을 고향, 짝사랑, 또 하나의 사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 그가 밝히고 있는 그의 전기적 이력을 보면 그는 두세 살 때 양친과 형을 여의는 비극적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하는 남다른 역경을 체험해야만 했다. 그의 유소년 시절의 성장과정이 그를 가족 콤플렉스적 자아의 세계를 형성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고, 그와 같은 잠재적 유년시절은 그의 수필세계의 모티프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환언하면 그가 체험한 유년시절의 잠재의식은 그의 수필적 자아와 결합하여 확고한 작가정신을 확립하게 해 준다.
그러면 이제 그와 같은 정신적 근간에 기초한 수필가 최원현이 구축한 수필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 보자.
최원현의 수필 「숨어 있는 향기」(1994)는 작가 자신이 자신의 문학적 자아로서의 확고한 신념, 곧 흔한 춘란처럼 그러나 근접하기 쉽지 않은 난으로서 그윽한 숨어 있는 향훈을 풍기는 것처럼 그 자신도 범인으로서 문향(文香)을 가지고 독자들의 영혼에 울림을 주는 수필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다는 신념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난은 꽃을 보기 위함이니 나중에 내가 그처럼 정성을 쏟았던 난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이 없어서 몹시 속이 상할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꽃조차 피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해가 넘는 동안의 내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인내하며 참으로 힘겹게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드디어는 하늘 문을 여는 감격으로 장하게 촉을 틔워 살아 있음의 의미를 내게 보여 준 난에게서 고마움과 안쓰러움과 감동을 함께 안는다. 거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자 난의 감격, 환호, 기쁨, 보람이 정말 하늘에 닿는 충만함으로 내게 향해진다.
「숨어 있는 향기」 중에서
한 문인으로서, 또 평범한 범인(凡人)으로서 난에 쏟는 정성은 수필가 최원현의 인간 됨됨이를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가 된다. 세상의 여러 부류의 인간들 모습, 명리와 부귀와 온갖 부정의 부끄러움을 망각하고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세속적인 모습들을 대하며 그는 난과 같은 품향을 가진 인간으로 살고 싶음을 소박한 목소리로 진술한다. 아마도 이와 같은 그의 목소리는 추억 속에 내재한 고독과 그리움에서 발원한 것이리라.
그가 들려주는 진실한 영혼의 목소리는 때로는 정(情)을 담은, 때로는 감사하는 사랑을 품은 진실한 메아리이다. 「어떤 선물」(1999)은 이러한 최원현의 가식 없는 순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수필이다. 여기서 그의 목소리는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정과 감사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은 평소에 존경하는 수필가 ㅂ 선생 내외분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사과 한 상자에 얽힌 이야기를 소박한 목소리로 들려준 수필이다.
나는 그 사과를 받아 놓고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사과나무에 손을 뻗어 사과를 따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그분들의 사랑은 이해되면서도 그런 수고가 마음에 걸려 좀처럼 사과를 맛있게 먹을 용기가 생겨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식구 수에 맞춰 사과 네 개를 씻고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받은 사과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사과를 깎아 나눠 먹었다.
사과 맛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두 분의 일 년간, 아니 수해 동안 애씀의 정성으로 알이 굵어지고 맛이 든 사과요, 거기에 나를 기억해 주시고 내게 보내 주신 사랑은 또 얼마나 큰가. 내가 사과 맛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사과 맛이 아닌 그분들 사랑의 맛이 더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선물」 중에서
여기서 수필가 최원현은 사과 맛과 사랑의 맛을 대응시켜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의식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시켜 준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의 맛, 그 훈훈한 향기가 담긴 사랑의 맛임을 강조한다. 그는 또 다른 구절에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내 사랑하는 마음, 내 고마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이지 않을까.”라고 영혼에 울림을 주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이 수필가 최원현의 삶의 모습이다. 수필 「어떤 선물」은 이런 의미에서 탄탄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최원현 수필가가 창조한 수필세계가 문학성이 뛰어나고 심오한 정신세계를 보여 주고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思惟)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앞에서 논의했듯이 그의 유년시절에 타의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잠재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론가이며 수필가인 박양근은 『에세이 문학』(2005 봄호) 「평범하여 비범한, 낯익어 낯선」에서 “최원현의 수필을 분석하면 흥미로운 특징이 드러난다. 그것은 있어야 할 연결고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고리는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다.”라고 언급하면서 그 빠진 연결고리를 연결해 주는 존재가 ‘외할머니’라고 지적한다. 박양근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적절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외할머니의 존재는 최원현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니마(anima. 내적 개성, 영혼)적 원형이다. 이 외할머니를 어머니의 존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최원현은 외할머니로부터 보상받는다. 이와 같은 잠재적 유년시절의 의식세계가 그에게 커다란 흔적을, 실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G. 바슐라르는 “현재의 고독은 최초의 고독으로 우리를 보낸다. 이 최초의 고독(유년시절), 어린이의 고독은 어떤(인간의) 넋에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몽상의 詩學)라고 언급하고 있다. 수필가 최원현의 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흔적이 바로 유년시절에 형성된 그리움과 고독의 흔적이다. 수필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2001) 「섬이 되어」(2000) 「하얀 고무신」(2001) 「우요일(雨曜日)」(2002) 「저녁노을」(2002) 「사진 찍기」(2003)들은 그의 잠재적 흔적들인 외로움과 그리움, 사랑과 정, 향수(鄕愁)들이다.
그는 그의 문학적 삶을 존재하게 하는 수필적 몽상 속에서 이와 같은 흔적들을 중요한 오브제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형상화시킨다. 고독함과 그리움의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그의 글샘을 자극하고 충동질한다.
이러한 자극과 충동이 역동적으로 심화되어 나타난 결과물의 하나가 「저녁노을」이다. 이 작품의 오브제는 외할머니를 그리워하고 회상하는 과거적 공간에 근원한다.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걸려 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 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 ……<중략>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
「저녁노을」 중에서
우리는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착각에 빠져든다. 밤차와 해으름녘, 노을빛과 홍시, 그리고 할머니와 ‘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구조는 유기적으로 탄탄하게 연결되어 아름다운 수채화를 감상하는 환상의 세계로 유혹한다. 동시에 이러한 견고한 이미지의 구조가 수필가 최원현의 문학성을 몇 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그의 잠재적 유소년 시절이 저녁노을이라는 대상을 통해 역동적 상상력으로 재생된다. 환언하면 그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기억이 값비싼 추억의 골동품이 되어 그를 자극하고 충동질한다. 30여 년이 지난 현재적 시간은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그리움과 잠재적 고독이 저녁노을과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그를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내적인 삶의 매력 있는 대상인 저녁노을과 인생의 황혼은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를 추억의 공간으로 끌어 들인다. 따라서 「저녁노을」은 최원현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니고 있는 원초적 외로움과 그리움의 아픔이 미학적인 예술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수필 「섬이 되어」(2000)와 「하얀 고무신」(2001), 「허 서방의 대금소리」(2002), 「우요일(雨曜日)」(2002)들도 수필 「저녁노을」처럼 수필적 오브제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섬이 되어」는 섬과 내 가슴속의 집과 문 하나를 동일한 이미지 선상에 놓고, 마치 혼자서 타고 혼자서 꿈꾸는 촛불(G. 바슐라르의 「초의 불꽃」)처럼 고독한 먼 추억의 피안, 곧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최원현의 외로움과 그리움에서 발병한 정서적이고 정신적 몸앓이는 그의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나는 내 가슴속에 섬 하나, 문 하나를 담고 산다. 그 곳은 내 신성하고 비밀한 곳이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아침 햇빛이 시나브로 하루를 여는 어느 날, 할머니가 빗장을 풀며 문을 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할머니는 어느새 내 외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문을 열면 쏟아져 나올 향기로움과 별빛 달빛,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던 평화요, 감격이요, 기쁨이 아니겠는가. 북적대는 삶 속에서도 문득 외로움을 느끼는 군중 속의 이방인, 비단 나뿐이 아니라 현대인들은 그런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그리움을 앓고 살 수밖에 없나 보다.
내 가슴속의 집은 그런 내 삶 속에 숨통을 내줄 비상구이다. 아니 우리 모두는 그렇게 언젠가는 열어야 할 문 하나씩을 갖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파랑새 같은 문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섬이 되어」 중에서
수필가 최원현은 「섬이 되어」에서 ‘외로움이 그리움’이라고 자신이 내면 속에 간직하고 있는 고독의 먼 피안을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고독과 그리움은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 그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 그것들이다. 그의 가슴속에 내재하는 섬은 ‘집’이고 ‘문’이다. 그는 말한다. 그것은 ‘신성하고 비밀한 곳’이라고. 또한 그것은 ‘나만의 공간’이라고.
이와 같은 그의 고백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세계가 그의 존재적 자아에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가를 입증하는 좋은 예가 된다. 인간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하고 신성한 공간, 곧 섬(또는 城)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자아로서 군중 속의 이방인을 의미한다. 그의 고독과 그리움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극복하고 있고,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희망의 파랑새 같은 문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산다.”라는 그의 고백으로 표출된다. 최원현의 삶과 문학을 존재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수필 「섬이 되어」는 결국 최원현의 잠재적 욕망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얀 고무신」에 접근하면 최원현의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현재라는 앵글과 과거라는 앵글을 고무신이라는 대상에 포커스를 맞춰 그리움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수필가 최원현은 “고무신 하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고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이 때의 고무신은 그의 것이 아닌 할머니의 고무신인 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과거에 앵글이 맞춰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그런 아픔의 세월을 다 잊기라도 한 듯 운치 운운하며 고무신을 신으란다. 그때처럼 흙을 딛고 다닐 수 있는 땅도 없고, 그렇게 오래 걸을 일도 없어진 세상에서 다시 내게 돌아온 고무신, 아니 나를 찾아온 고무신, 나는 마치 그리던 어머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얀 고무신」 중에서
최원현은 이 작품에서 고무신을 가지고 상상한다. 그에게는 아픔의 세월로 기억되는 과거를 회상하며 ‘세상에서 다시 내게 돌아온 고무신, 아니 나를 다시 찾아온 고무신’을 바라보며 ‘그리던 어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고 술회한다. 따라서 「하얀 고무신」은 고독이고 그리움을 소박하게 그린 작품이다.
고향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 중 하나이다. 수필가 최원현에게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이고 테마가 된다. 따라서 수필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는 수필가 최원현이 통영을 또 다른 하나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그 그리움을 구상화시킨 작품이다.
(1) 하늘과 바다가 반가운 포옹을 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처럼 그 품안에서 빠져 나온 푸른 숲, 그리고 하얀 옷에 오렌지색 모자를 쓴 건물들이 쪽빛 바다에 내리다 반사되는 햇살을 받아 여유롭게 빛나고 있었다. 빛과 색이 수줍은 듯 어우러지며 이뤄내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2) 통영에 올 때마다 남망산엘 올라 보고 싶었다. 중턱에 서 있다는 청마의 시비도 보고 싶고, 저 한산대첩의 현장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 있을 충무공상 앞에서 나도 그렇게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삶에도 어떤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 같았다.
역사는 말이 없다지만 아니었다. 통영에 오면 무수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수많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아련한 그리움이 피안의 모랫벌처럼 밀려들게도 하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보면 이 땅에서 살다 간 이들의 애환이 몽실몽실 솜구름처럼 피어 오르기도 했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중에서
1)에서 우리는 소설의 발단부 한 장면을 읽고 있는 환상에 젖게 된다. 그가 대상을 인식하고 마치 그것을 스케치하듯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사실묘사를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표현력이나 문장 구성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내게 통영은 이상스러우리 만큼 그리움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최원현은 통영을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과 추억 속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그리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의 몽상 속에 환기된 고향 이미지는 자궁회귀라는 원형상징으로 발전한다. 그의 그리움은 역동적 상상력을 통해 ‘통제영은 크고 엄숙한 느낌보다는 바다와 섬, 그리고 섬만한 산과 항구가 마치 모태 속 여덟 달 아기의 방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라는 이미지로 확대된다. 여기서 아기의 방 같은 모태 속은 인간의 원초적 고향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이다. 자궁회귀의 이미지로서 그것은 최원현이 몽상하는 상상력의 질료이다.
또한 (2)에서 보듯이 그에게 통영은 역사의식이나 문화의식을 지각(知覺)하게 해 주는 어떤 신선한 정서적 공간이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통영은 귀로 듣는 말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무수한 목소리들이 있기에 아련한 그리움을 영혼 속에 간직할 수 있는 고향이라고 강한 어조로 진술한다. 따라서 수필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는 최원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작품이다.
수필 「잡초 뽑기」(2004)를 대하게 되면 앞에서 분석한 최원현의 모습과는 다른 수필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함축과 상징, 역설과 아이러니, 유머와 위트 등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맛보게 된다.
잡초가 산이나 들에 있다면 아무도 그들을 잡초라 하며 나무라지 않을 것이요, 오히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 분위기에 따라 칭찬도 받고 시인이라면 그 아름다움을 한껏 시로 노래하기도 하리라. 그런데 사람이 자기 영역에 특별히 무언가를 기르려 터잡아 놓은 곳에서 불청객이 피어 오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건 풀꽃이건 제자리서 제 할 일을 할 때 아름답다고 하는 것 같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 아니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곧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잡초란 이름은 참으로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표현이요, 그 한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말인 것 같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면 바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 지나침과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듯 자기 자리가 아니면 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잡초로부터 배운다.
「잡초 뽑기」 중에서
이 작품에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우리가 인간으로서 준수해야만 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이 있음을 수필가 최원현은 강한 어조로 언급한다. 인간은 자기 분수, 곧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잡초철학(?)을 익살스럽게, 그리고 희화적으로 강조한다. 잡초도 제자리를 찾아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다면 잡초가 아닌 풀꽃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묘사한다.
“다시 컴퓨터를 켠다. 잡초 뽑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손을 안 대고 놔두고 있으면 필시 저들은 대단히 힘있는 존재들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는 잡초들을 ‘대단히 힘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역설적으로 진술한다. 그의 인식의 폭은 현실 속으로 확산된다. 현실이 안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체념적이고 부정적인 그의 인식은 ‘세상이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의 공존의 장임을 어찌하랴.’라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수필 「잡초 뽑기」는 예리한 현실비판적인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나는 『수필세계』에 게재된 수필가 최원현의 수필들을 천착하고 분석했다. 그 결과 몇 가지 특징 내지는 성격들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하나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한 삶의 흔적들, 곧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오브제가 된 외로움과 그리움, 사랑과 고독들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문학적 자아를 지탱케 해 주는 근원으로 가족 콤플렉스와 원형회귀의 정신세계를 향수로 표현한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다만 흠을 들추어낸다면 문장호흡이 너무 길다는 점이다. 생략과 압축이 주는 미적인 멋은 주제를 선명하게 하는 요체임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적 자전│
울음을 웃는 새
최 원 현
어린 날의 친구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끝이었다. 시커멓게 어두워졌던 하늘이 언제 그랬느냐 싶게 벗겨지면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그사이 마당가엔 작은 실개천이 생겨났다. 흙탕물이지만 갑자기 생겨난 실물줄들이 합해져 제법 굵은 물줄의 내[川]를 이루어 논배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서 부리나케 종이배를 접었다. 그리고는 금방 생겨난 작디작은 강에 배를 띄웠다. 혼자서 노는 여름날의 오후, 이 순간의 종이배는 내 가장 믿을 만한, 그리고 든든한 친구였다. 종이배는 그런 내 어린 한 날을 싣고 알았다는 듯 까딱까딱 잘도 떠내려갔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커다랗고 동그마니 위치해 있던 우리 집에서 나는 작고 작은 존재였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내가 다시 그 ‘고작’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내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는 ‘고작’의 내 짓거리들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세인들의 눈에는 썩 괜찮은 것으로 보이는 건 아닐까. 몇 번의 큰 상을 받으면서 더욱 그렇게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선지 요즘 들어 가위눌린 꿈을 꾸듯 한 편의 글쓰기 앞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곤 한다.
종이배를 떠나 보내고 일어서려는데 풀숲에 붙어 있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나는 가만히 달팽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녀석은 햇볕이 따가운지 부셔서인지 풀잎 뒤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미물이라도 살아가는 방법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너도 심심하니?” 나는 달팽이가 붙은 풀잎을 따서 툇마루로 가 그걸 댓돌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달팽이가 어찌하나를 다시 살펴보았다. 녀석은 처음엔 죽은 듯 있더니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풀잎으로부터 벗어나 댓돌 위를 기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국이 댓돌 위에 남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이내 말라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 그렇게 지나간 자국이 금방 없어져 버리는 것이 몹시도 안타까웠다. 녀석을 다시 풀잎에 얹어 있던 자리에 보내 주었다. 헌데 그 어린 날의 종이배와 달팽이의 기억이 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왜 불쑥 떠오른 것일까.
사람은 지난 것은 잊는다. 아니 잊혀진다. 그러나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다음에도 신기하게 새록새록 다시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겨울을 지낸 봄 어느 날,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사람의 기억도 더러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새록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때가 바로 한 삶의 한숨을 돌리는 때(나이)인 것 같다.
목표를 향해서 그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는데 어느 땐가부터 달리는 것마저 힘에 부친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뛰어야 하나,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회의도 생긴다. 삶이란 젊었을 때는 그저 앞으로 뛰어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숨이 가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릴 즈음에야 잠깐씩 속도를 줄이며 한숨을 돌리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뒤에 오고 있는 사람도 돌아보게 되고 좌우로도 눈이 간다.
어느덧 속도 줄이기, 숨 고르기, 위치 파악하기의 때 곧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렀음이다. 그러다 보니 어린 날의 종이배와 달팽이도 새롭게 기억이 난 것 같다. 하찮은 것, 그래서 아주 쉽게 잊어버렸던 것들이 소중하게 기억된다는 것,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리라. 그것은 잠재해 있던 작은 기억들이 다른 부문이 약해진 틈을 타서 슬며시 고개를 쳐들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여전히 종이배이고 달팽이다. 작은 실개천에도 과분해 하는 종이배이고, 조금 따가운 햇볕에도 겁을 내며 피해 갈 수밖에 없는 달팽이다. 그러니 이만큼의 내 삶이란 은혜 아닌 것이 없다. 주어지고 허락되어진 하나하나가 내게는 과분할 만큼의 사랑이고 축복이다. 그래서 내 문학은 그런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읊조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나만의 사랑법이다. 50년 전의 종이배가 아직도 여전히 내 시야에서 까딱까딱 떠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삶 그리고 문학
쇠똥구리를 보았다. TV화면에서였는데 내 손가락 마디 하나 겨우 넘을 만한 크기의 작은 쇠똥구리였다. 어린 날 운동회 때의 지구 굴리기를 연상시키며 제 몸보다 두 배도 더 큰 쇠똥덩이를 굴려가고 있었다. 아주 여린 풀줄기, 떨어진 작은 나뭇가지조차 쇠똥구리의 길엔 큰 장애물이어서 자칫하면 애써 굴려온 것이 저 아래로 굴러가 버리지만 그때마다 저만치 굴러가 버린 쇠똥을 쫓아가 다시 굴려오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이 날 만큼 엄숙하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차하면 도중에 포기할 만도 한데, 아니 사람 같으면 다른 방법을 찾는다고도 하련만 그는 미련스러울 만큼 그 한 방법만 쓰고 있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굴려간 쇠똥을 땅을 파고 묻더니 흙으로 감쪽같이 덮어 숨겼다. 그렇게 숨겨 놓은 쇠똥에 그가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은 그 쇠똥으로부터 영양을 취하며 튼실하게 어른 쇠똥구리로 자란다는 것이다.
나도 쇠똥구리 같은 줄 알았다. 내 딴에도 그렇게 열심히 삶에 몰두하며 최선을 다했노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나는 쇠똥구리가 흘리는 수많은 땀과 눈물을 보았다. 그러면서 우직하고도 묵묵히 자신의 일과 길을 붙들고 있는 그를 통해 ‘삶’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것 자체가 사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던 것일까.
쇠똥구리처럼 최소한 자기 몸보다도 큰 것을 굴려가는 의욕과 열정은 있어야겠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면 꿋꿋이 제 몫을 해내야 했던 것 아닐까. 알을 까는 일, 그리고 새끼들이 충분히 살 수 있게 해 주는 일은 숙명적인 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수필은 무엇이었을까. 내게도 수필을 쓰는 것이 삶이고, 사는 것이 곧 수필쓰기였을까. 나도 숙명처럼 수필이란 알을 낳아 새 생명을 일으키고 새로운 그 생명들이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었던가. 어쩌면 수필의 삶이기보다 수필은 내 삶의 한 부분에 붙어 있던 한갓 장식 같은 것은 아녔을까.
쇠똥구리를 보며 부끄러움으로 낯이 붉어진다. 쇠똥구리처럼 알을 낳을, 그래서 튼실히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영양 보급창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준비도 없이 영양이 부족한 수필들을 낳아 버린 무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부끄러운 마음으로 내 삶을 향해 전력질주 했다고 생각되던 날들을 돌아보면서 또한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생각해 본다. 나에겐 열정은 있으되 그만한 희생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밖에 되질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묵묵히 제 몸보다 훨씬 큰 쇠똥덩이를 굴려가는 쇠똥구리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는 내가 보라는 듯 지구를 혼자서 굴려가는 만큼 호기롭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소망 그리고 순명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스럽다.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뭣이 있나 싶어서다. 누구는 나더러 바쁘게만 살 뿐 참으로 세상을 재미없이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맞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는 술도 담배도 안 한다. 골프도 칠 줄 모른다. 남들 다 한다는 주식도 안 한다. 심지어 로또복권 같은 것도 안 산다. 춤도 출 줄 모른다. 누가 봐도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런 나를 보면 한심할 만도 하다. 거기다 그림을 그릴 줄 아나, 노래를 잘 부르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그 주제에 무슨 글은 쓴다고 하느냐 하면 또한 할말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술 담배는 내가 크리스천이어서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다. 골프는 그걸 칠 시간도 능력도 안 되니 맘도 안 먹는다. 주식이나 복권은 내게 그런 행운도 오지 않겠지만 설혹 그리 되어 내가 웃으면 필시 다른 누군가가 울 것이라는 생각이기에 안 한다. 어디 가면 분위기에 맞춰 잘들 놀기도 하던데 나는 한 발짝 스텝도 밟지 못한다. 그림은 고사하고 오고 가는 길의 약도 하나 변변히 그려낼 줄 모른다. 노래 또한 간신히 몇 곡으로 자리 땜을 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엇을 바꿔 볼 생각은 전혀 없다. 그저 나는 나대로, 생긴 대로 살 따름이다. 이런 나에 오히려 감사한다. 내가 뭘 더 잘한다고 했으면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닌, 더 어울리지 않을 전혀 다른 모습일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수필의 삶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수필은 내 자존심이다.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내게 내려진 신의 특별한 은총이요 축복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날과도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어린 날엔 어린 날대로 살았고, 지금은 지금대로 살 따름이다. 나이와 체구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렇고 보면 어린 날의 종이배와 달팽이는 여전히 내 삶과 내 문학 속에서 사는 것 같다. 너무 일찍 알아 버린 외로움, 슬픔, 안타까움을 종이배로 접고 그걸 물에 띄우던 마음, 작은 물줄에 종이배로 기도를 실어 보내고, 달팽이가 지나간 흔적이 없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마음도 지금 생각하니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또 하나의 삶, 내 문학에의 눈뜸이었을 것 같다. 어른이건 아이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걸 표현한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창조의 힘 일부를 부여받는, 곧 하늘의 창, 희망을 여는 일이다.
나는 또 하나의 소망으로 다시 희망을 연다. 어린 날로 돌아가 또 다른 시작을 해 보겠다. 이제는 직접 땅을 파 개천을 만들고 거기에 조금 더 큰 종이배를 띄우리라. 그리고 풀잎에 달팽이가 달려 있으면 그냥 보고만 있으리라. 이제 함께 살아가야 할 것들이다. 내 문학의 성향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쇠똥구리는 내게 큰 격려와 촉구의 채찍이었다. 충격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지는 않을 지금에 내가 해야 할 몫이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소명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가 흘리는 땀과 눈물을 이미 나는 보았고, 그건 내가 흘려야 할 땀과 눈물의 분량임도 깨달았다.
내게 수필은 소명이다. 나는 신기루가 아닌 수필의 오아시스를 찾아내고 싶다. 나를 위하여서이기도 하고, 또 내 후배들을 위하여서이기도 하다. 숙명이라면 숙명이 될 수필에의 길이다. 사랑이다. 그런 내 작은 애씀들로 좋은 수필에 목마른 이들에게 적게나마 해갈을 주고 싶다. 설혹 나의 이런 짓거리들이 너무 미약하여 큰 기여가 되지 못하더라도 하던 일을 멈추지는 않겠다. 어린 날,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종이배를 접어 띄우는 것이었고, 지나간 흔적이 이내 없어져도 묵묵히 길을 가던 달팽이처럼, 아니 힘든 것까지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제 길을 가며 제 몫을 해내는 쇠똥구리처럼 더 열심히 가고 더 열심히 하겠다. 그러려면 나는 울음을 웃는 새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숱한 어려움을 감내하며 속에서의 울음을 겉으로는 웃어내는 새, 어쩌면 나는 벌써부터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왜 너냐?’ 한다면 또 할말이 없다. 그러나 종이배의 슬픔, 달팽이의 소망, 쇠똥구리의 순명을 품고 살아온 나로서 앞으로도 수필의 오아시스를 찾아 울음을 웃어내는 새로 살아가는 것을 후회하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