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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베트남 하노이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희대의 간흉인가, 왕권중심체제의 설계자인가
천하경영의 뜻을 품고 백수생활을 견뎌내다 칠삭둥이 한명회, 그는 1415년 어머니 뱃속에 있은 지 일곱 달 만에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긴 했으나 하도 허약하여 집안 식솔들이 내다버리라고 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늙은 노복이 거두어 솜뭉치에 싸서 돌본 덕에 사람의 형체를 갖추었다고 한다. 한명회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글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영특했으나, 얼굴은 영락 없는 당나귀 상이었다. 역삼각형의 얼굴에 코와 입이 유난히 컸다. 하지만 눈빛만은 영롱했다고 한다. 한명회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당대의 석학 유방선의 문하에 들면서부터였다. 유방선은 세종이 사람을 보내 자문을 구할 정도로 이름 높은 선비였다. 그는 자신의 문하생들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내 문하에서 크게 될 인물은 한명회, 권남, 서거정이다.” 한명회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대석학이 총애하는 제자로서는 의외다. 실력 때문인지 별다른 의욕이 없어 건성으로 본 탓인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에게 과거운은 없던 것 같다. 과거에 실패하고, 산천을 유람하는 가운데 한명회의 중요한 성격이 형성되었다. 등과도 못했고, 음서를 기대하기에는 이미 영락한 집안이었다. 출세를 꿈꾸기는 어려워 보였다. 정치는 해야겠는데, 길은 막혀 있다. 그렇다면 판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상에서의 배척, 이것이 한명회를 정변을 통한 입신양명으로 내몬 하나의 원인이었다. 수양대군에게 전한 한명회의 메시지 한명회는 38세에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관직이라고 해봐야 어디 가서 말하기도 뭐한 한직이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저인 개경의 경덕궁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이때 한명회는 친구 권남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를 시작하였다. 한명회는 개경으로 떠나기 전, 수양대군의 귀에 들어가라고 친구 권남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데, 간사한 무리들이 권세를 함부로 부리고, 또 안평대군이 마음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대신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며 여러 소인들을 불러 모으니 상황이 매우 급박하오, 수양대군은 활달하기가 한나라의 고조와 같고, 영민하고 용맹스럽기가 당나라의 태종과 같다고 하니, 진실로 난세를 평정할 재목이오, 그대는 어찌 은밀한 말로 그 뜻을 펴 보지 아니하였소.” 수양대군은 세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강인한 무인 기질이 있었으며 열네 살에 기방을 출입할 정도로 호방한 성격이었다. 기개가 늠름하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거침없이 해내고 마는 직선적 성품의 소유자였다. 한명회에게 수양은 안성맞춤이었다. 수양 주위에는 마땅히 사람이 없으니 둥지를 틀 공간이 넉넉했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자신의 조언을 잘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친구 권남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것도 제격이었다. 원로 재상들과 사이가 매끄럽지 못한 것도 그의 뜻을 펼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한명회가 그리는 구도 속에 재상들과 수양 간에 공존은 없기 때문이었다. 한명회-수양, 하륜-이방원의 파트너십을 벤치마킹하다 수양대군을 만난 한명회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기차게 움직였다. 수시로 수양을 만나 의논했고, 거사를 대비한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준비된 액션플랜이 들어 있었다. 그의 계획은 이방원과 하륜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항상 물리력을 순식간에 동원해 정몽주, 정도전, 형제들을 죽임으로써 위기국면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이른바 ‘이방원 해법’이다. 하륜도 조선왕조 창업에 공을 세운 형편이 아니라 찬밥 신세였기에 이방원을 선택해서 자신의 경륜을 펼치고자 했다. 이방원의 장인을 통해서 소개받아 이방원의 브레인이 되었던 것이다. 출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던 한명회가 친구를 통해 수양대군을 만난 것부터 하륜의 인생 경영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하륜이야말로 한명회에겐 꿈에도 그리던 최고의 참모상이었다. 벤치마킹을 해보니, 문제는 물리력이었다.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병사가 있어야 이방원 해법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방원에게는 관례에 따라 인정되던 사병이 있었으나, 창업 60년이 지난 지금에는 관병만 있을 뿐 사병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명회는 무장력 준비에 나섰다. 홍윤성, 양정, 홍달손 등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무사들을 은밀히 모았다. 소수의 정예사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사병의 일부를 관군으로 들여보내, 관군의 요직 인사들을 포섭해나갔다. 다음으로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동시켰다. 조정의 돌아가는 사정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내시들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에게 총애를 받던 내시 엄자치와 전균을 포섭했다. 내명부 상궁들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수양대군-한명회-권남의 매치업이 안평대군-김종서-혜빈 양씨 쪽보다 약했다. 안평대군 쪽이 훨씬 강했던 것이다. 한명회로서는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세계는 오직 극단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치를 지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오른 사실을 고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은을 가야 하는데, 김종서는 나이가 많아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수양은 이 사실을 재빠르게 포착하고 고명 사은사를 자청했다. 이미 태종 이방원이 그러했듯이, 고명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것은 정치적 이득이 자못 컸다. 밖으로 명나라에 기반을 다지고, 안으로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최고의 이벤트였다. 다만, 석 달 동안 도성을 비워야 한다는 허점이 있었다. 수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안평이 섭정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명회의 번뜩이는 기지가 묘수를 찾아냈다. 수양의 수행원으로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종사관으로 김종서와 황보인의 아들인 김승규와 황보석을 추천한 것이다. 신숙주는 안평대군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외국어에 능통한 외교통이었기에 누가 봐도 적임자였다. 이는 수양대군에게 신진 엘리트의 리더인 그를 사은사로 동행하면서 끌어안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의미가 있었다. 수양이 사은사로 결정됐다. 그리고 1453년 2월 수양대군이 귀경했다. 성공적인 사행이었다. 신숙주의 마음을 얻었고, 명나라 조정에 그 이름을 남겼다. 수양은 이제 조정의 힘을 꺾을 필요를 느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떠나기 전에 해놓은 인사를 뒤집어놓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괘씸했으며, 왕실을 강하게 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마침내 10월 정변이 시작되었다. 정변 당일의 순간순간은 매우 급박했지만, 크게 보면 정란의 구도는 매우 간단했다. 수양이 직접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면대하는 사이 수하들이 그를 철퇴로 내리쳤다. 마침 그날은 수양의 사병 출신인 홍달손이 궁궐의 감순을 맡은 날이라 8대문을 봉쇄했다. 그리고는 궐 밖에 나가 있던 단종을 감금한 뒤, 황보인 등을 불러들여 척살했다. 관군이 동원될 틈을 주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했다. 그러고 나서는 왕명을 빌어 정적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말았다. 안평대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계유정난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책봉됐다. 하지만 자청하여 말과 목장의 일을 살펴보는 종4품 자리에 머물렀다. 그 자리는 품계는 둘째치더라도 말똥이나 치우는 자리였다. 왜 그랬을까. 한명회에게 계유정난은 끝이 아니었다. 계유정난은 단지 수양이 왕위에 올라야만 마무리되는 프로세스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용의주도했다. 또한 자리를 탐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수양의 신임을 높였다. 한명회가 행한 역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정국 운영이었다. 세조 치세에는 그의 참모로서 국정 운영 전반에 조언했고, 민심 안정을 통해 세조 정권의 연착륙을 꾀했다. 세조 말에는 원상으로서 국왕을 대리하여 국정을 총괄했고, 후계 구도를 관리했다. 예종이 건강이 좋지 않자 한명회가 국사를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공신이라는 기반과 혼인관계, 그리고 치밀한 두뇌로 국정을 원만하게 관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명회 (韓明澮 1415∼1487(태종 15∼성종 18))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鴨鷗亭). 본관은 청주(淸州). 유방선(柳方善)의 문인이다. 두 딸은 예종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 성종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1452년(문종 2) 음보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을 지내고, 이듬해 수양대군의 심복 참모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는 데 큰 공을 세워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좌승지·이조판서로 승진하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61년(세조 7) 부원군에 진봉(進封)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66년 영의정에 올랐다. 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처결하였고,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71년(성종 2) 성종 즉위에 협찬한 공으로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고, 같은해 영춘추관사로서 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완성하였다. 84년(성종 15) 궤장을 하사받았다. 세조가 <나의 장량(張良)>이라고 할 정도로 총애받은 1급 참모로, 4차에 걸친 1등공신에 예종·성종의 장인으로서 요직을 두루 역임하여 훈구파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죽은 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 폐사(廢死)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었다가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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