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택견이란 무엇인가?
택견이란 용어는 조선 정조 때 간행된『재물보(才物譜)』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 탁견 (변 수박을 변이라 하고 각력을 무라하니 지금의 탁견이다)”
여기서 보면 손기술이 중심 의미인 수박과 발기술이 중심 의미인 각력을 그 당시에는 택견으로 통칭 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택견 기술 내용에도 손과 발기술이 함께 사용되고 있으며, 택견 겨루기도 일반 맨손무예 겨루기나 씨름과 같은 형태가 혼합되어 있는 걸 보면 『재물보(才物譜)』의 기록은 매우 의미가 있다.
택견이 손과 발기술을 함께 사용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 맨손무예의 일반 명칭이란 의미를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52년 당시 1군단 참모장이었던 최홍희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시 당수도를 시범 보이자 이승만은 국군에게 이 무술을 익히게 하라고 한 뒤 "태껸이구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들은 최홍희는 일본 가라데를 한국 전통 무예로 보이기 위한 기발한 발상을 하였다. 비록 발로 밟는다는 의미지만 태(跆)를 찾아 내었으며 손, 주먹을 의미하는 권(拳)을 붙인 것이다. 이로써 1955년 4월 11일 부터 우리 무예사에 택견의 이름만 계승한 태권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 자료와 실제 기술, 겨루기 내용을 보면 택견은 손과 발을 사용해서 상대를 주로 넘어뜨려 승부를 결정 짓는 무예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일부 사람들은 택견이 놀이이지 어떻게 무예냐? 하고 반문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예란 자고로 생사를 건 심각한 겨루기란 뜻이다. 그러면 과연 일반적으로 생사를 건 심각한 겨루기를 누가 꼭 맨손으로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맨손무예 겨루기에는 벌써 일종의 규칙이 있는 게임이나 스포츠, 놀이의 기능이 존재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택견의 정의를 내려본다면 택견은 "무예적 놀이, 혹은 놀이적 무예이다"라고 할 수 있다.
2. 택견은 누가 언제 했으며, 어떻게 전해 주었는가?
택견과 수박을 서로 연관지어 살펴본다면 수박, 수박희는 『고려사』, 『태종실록』, 『동국여지승람』등에 나타나는데 고려 때는 주로 왕의 유흥을 위해서 행해졌고, 조선 초기에는 군사 선발을 위한 시재가 되기도 했으나 중기 이후론 주로 명절 때 일반 민중들의 민속 놀이로 행해졌다.
이 때부터 전승된 민속 놀이무예로서의 택견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택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택견은 어느 개인이 창작한 무예도 아니고 도제식으로 전수받은 무예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벌어지는 택견판을 보고 흉내 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고 그리고 성장하여 마을 시합이나 그 시합을 준비하면서 기량을 향상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택견의 모습은 유숙의 『대쾌도』에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또한 애기들의 택견하는 모습이 선교사가 찍은 사진에도 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합의 자세한 설명은 펜실바니아대학 교수인 스튜어트 쿨린(Stewart Culin)이 쓴 『조선의 놀이』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택견의 경기화에 앞장 서고 있는 이용복 선생은 이 기사를 보고 품밟기와 겨루기의 대접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택견에 관한 기록도 있다. 1925년 매하 최영년이 『해동죽지』엔 「탁견희(托肩戱)」라는 시와 주석이 실렸다.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대하여 서서 차서 꺼꾸려 드린다. 이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상투를 떨어뜨린다. 이 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내기하여 빼았는다. 법으로 관청에서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장난이 없다.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이것을 보면 택견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원수를 갚을 정도의 위력과 비각술같은 뛰어난 기량을 갖춘 무예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한량들의 투기와 내기 같은 불건전한 성격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불건전성은 당연히 법으로 금해야 하지만 일부 이러한 점은 일제에 의해 택견 탄압의 빌미가 되기도 했을 것이며 일제는 1911년 '범죄즉결령'을 이용해 우리의 민속문화를 치안상, 풍속 저해, 미신, 경제적 이유 등을 들어 없애려 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건'이라는 특별 법령을 만들어 상무적 기상을 가진 석전, 동채싸움, 햇불싸움, 장치기 등을 엄격히 금지시켰는데 이로 미루어보아도 택견은 대표적 탄압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시대의 변화로 수 천년을 이어 온 택견이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되었다.
3. 오늘날 택견, 어떻게 전해졌는가?
우리는 일제 탄압 이전에는 택견이 여러 지방에 널리 성행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조선 후기 이후 지금까지 서울 이외에는 어느 지역에서도 택견을 했다는 자료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택견 경기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택견꾼 송덕기에 의해 택견의 맥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 송덕기(1893-1987)는 십여 세 부터 택견을 익혀 오다가 십대 후반에 임호라는 사람에게 기술을 전수 받았으며 마을의 일류 택견꾼과 더불어 시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순사가 단속할 뿐 아니라 집안의 만류로 택견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서 택견은 세간에 완전히 잊혀져 가고 있다가 해방되고도 한참 뒤인 1958년에 와서야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경찰 무도 대회에서 1910년 대에 택견을 익힌 송덕기와 김성한에 의해 재현되었다. 이후 송덕기 선생이 유일한 택견꾼으로 몇 차례 보도 되기는 했으나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간혹 태권도나 다른 무도를 한 사람이 선생에게 택견을 배우긴 했으나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대에 와서 신한승(1928-1987)이 송덕기 선생에게 택견을 전수 받으면서 택견은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신한승은 어릴 때 종조부 신재영으로부터 택견을 익혔으나 그후 다른 운동을 연마했는데 특히 레슬링 국가 대표 후보에 까지 오른 적이 있다. 전통 무예 복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신한승은 그의 나이 40여 세 때 신문에 난 송덕기 기사를 보고 선생을 찾아가 택견을 전수 받았다.
그러나 벌써 일본식 무술이나 중국식 무술에 깊이 길들여 진 눈으로 볼 때 춤과 같고 힘이 없어 보이는 택견이 일반인의 관심을 끌긴 만무했다. 선생은 이러한 택견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은 무형문화재 등록에 있다고 생각하고 택견의 기술과 수련 체계를 재정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1983년 6월 1일 자로 무형문화재 76호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을 받기까지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택견은 쉽게 전파되지는 못했고, 택견의 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택견을 대중적 무예로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송덕기, 신한승 두 분은 그 결실을 맺질 못하고 1987년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송덕기 선생의 택견을 이어받은 예능 기능 보유자는 배출되지 못했고 신한승 선생의 택견을 계승한 정경화가 1995년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현재 택견을 보급하는 단체로는 신한승 선생의 기법을 계승한 '한국전통택견연구회'(박만엽), 송덕기의 기법을 계승한 '결련택견계승회'(도기현), 그리고 송덕기, 신한승 두 분 기법을 이어받은 이용복의 '한국전통택견연구회'가 있다.
4. 오늘날 택견기술의 뿌리는 무엇인가?
오늘날 택견기술의 모태는 송덕기에게 남아 있던 기술이다. 1964년 5월 16일 『한국일보』 「속인간문화재」란에 실린 송덕기의 기본기술은 1. 깎음대리 2. 안짱걸이 3. 안우걸이 4. 낚시걸이 5. 명치기 6. 곁치기 7. 발따귀 8. 발등걸이 9. 무릎팍치기 10. 내복장 갈기기 11. 칼재비 등 11가지 수였다. 물론 여기서 품밟기가 없는 것을 보면 꼭 11가지 밖에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리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 수는 70년 대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더욱 늘어나 1983년 송덕기 택견을 정리한 박종관의 자료에는 품, 품밟기, 그리고 손기술 26수와 발기술 31수로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송덕기 택견을 배운 신한승이 송덕기 택견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릴적 증조부 신재영에게 배운 기술과 당시 생존해 있던 김홍식, 이경천 등의 구술 자료를 덧붙여서 택견 기술과 수련체계를 새롭게 편성했다.
신한승의 수련체계는 두가지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 첫째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던 전통적 수련 체계를 도장식 수련 체계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형문화재 등록 요건에 걸맞게 내용을 풍부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위 기술인 발차기 기술과 발걸이 기술, 손기술은 거의 유사하며 비록 품밟기가 정형적이고 활개짓을 아래 위로 크게 돌리는 것이 송덕기와는 좀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근본 원리에서 큰 차이는 없다. 신한승 선생이 덧붙인 것은 본때뵈기라고 하는 택견의 단위 기술을 연결한 태권도의 형이나 중국 무술의 투로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신한승선생도 그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합시자신의 재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첫 마당에서 열두 째 마당까지 펼친다고 했다.그러나 현재는 거의 모든 단체에서 수련시 마치 고정된 형으로 수련하고 있다. 그건 아마 도장식 수련 체계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택견의 본질은 손이나 발로서 상대를 붙잡지 않고 넘어뜨려서 승부를 결정짓는 경기, 놀이이다. 송덕기 선생은 이러한 놀이 택견의 기술을 중심으로 하고 이러한 놀이택견의 마을별 시합을 결련택견이라고 했으나, 신한승 선생은 놀이 택견을 서기 택견이라고 하고 결련택견은 송덕기 선생의 택견에서 옛법, 혹은 싸움수라고 했던 기술을 사용한 싸움 택견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렇게 송덕기, 신한승 두 분 택견의 수련체계와 개념의 차이는 오늘날 택견의 혼란의 불씨로 남이 있게 되었다.
5,택견 기술원리는 무엇인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택견의 율동적 동작을 보면 저렇게 해서 무슨 무술이 되겠냐? 하
고 의심을 하다가 힘찬 발길질과 솟구치는 도약력을 보면 그제서야 '아-'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이러한 리듬이 있는 율동적 몸짓이 택견의 가장 큰 특징이자 독특함이다.
또한 택견 수련 체계에는 흔히 중국 무술류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자세에서 힘을 기르는 것과 같은 동작도 없다. 그러면 다리나 허리, 어깨를 따로 단련하지도 않고서 어떻게 큰 힘을 낼 수 있을까? 하고 의심이 당연이 든다. 사실 처음 택견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이 점을 매우 궁금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벌써 우리가 중국 무술이나 일본 무술의 수련관의 입장에서 택견을 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택견은 전통적 전승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한 스승 밑에서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수련하는 그런 무예가 아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야 이야기를 통해서 많이 전해지지만, 택견의 수련 체계에 자리잡을 만큼 체계화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타 무술과 같이 예비 수련과정이 없더라도 "굼실 굼실"로 표현되는 무릎의 굴신 동작과 "능청 능청"으로 불리는 허리의 움직임을 동반한 택견의 모든 몸짓들을 반복 연습하다가 보면 저절로 단련된다는 것을 택견을 오래 수련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택견 몸짓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다. 택견의 율동적 몸짓을 잘 하려면 물론 힘이 바탕이 되는 것은 기본이겠지만 흥과 신명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가락이 불러 일으켜주는 흥과 신명이야 말로 택견의 모든 공·방기술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켜주는 핵심 동력이 되기도 하며 다른 무예에서는 볼 수 없는 택견 몸짓만의 고유한 미학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흥과 신명은 택견 몸짓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부드럽고 너그럽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택견의 마음씨는 택견 겨루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상대를 다치지 않게 배려하면서 힘의 우열을 가리려는 윤리의식은 택견의 마음씨를 드러낸 것이며 또한 마을 공동체의 정신적 전통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6. 택견 대중화 20년의 성과와 문제점은 무엇인가?
송덕기, 신한승 두 분으로 비롯된 택견은 현재 전국에 20여만 명이 넘는 수련인구를 가진 무예로 성장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전통무예의 위치로서 보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본격적인 전수활동을 편 시기(1983년이후)로 보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법 보호를 받고 있는 택견이 1999년 '생활체육전국택견연합회'가 창립되어 우리 국민의 생활 체육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올해 2월 1일 자로 대한체육회에 승인 종목으로 채택되어 비로소 전국민의 스포츠 경기로 자리잡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사라질 위기의 무형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취지 아래 문화재로 지정된 종목 중 택견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일 것이다. 이제 택견은 사실 문화재보호법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 스포츠 경기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택견 대중화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 단체는 이용복이 주도하고 있는 대한택견협회이다. 대한택견협회는 현재 택견 단체 중 가장 많은 전수관(150여 개)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동안 신한승, 송덕기의 수련 체계를 절충해서 사용하다 2000년부터 수련 체계를 개편해 새로운 독자적 수련 체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신한승 택견을 계승하고 무형문화재 택견을 보존 보급하고 있는 충주의 한국전통택견회가 있다. 현재 충주 총 본관의 박만엽의 주도로 산하 50여개 전수관을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대한택견협회와 임원 교환 등으로 상호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택견 예능 보유자인 정경화는 서울에 그의 개인 전수관을 설립해 폭 넓은 전수 활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송덕기 택견을 계승한 결련택견계승회도 전국적으로 20여 개 전수관을 두고 도기현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전국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크게 3개 단체는 택견을 국민생활체육과 경기화로, 문화재 택견의 원형보전과 보급을, 또한 전통적 결련택견의 계승을 지향한다는 방향과 목적에 있어서 서로 다른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한 뿌리에서 나온 택견임에도 불구하고 지향하는 방향의 차이와 전수과정과 문화재 등록과정에 나타나는 택견의 정체성과 기술, 수련 체계의 차이는 택견계 내부의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 그 원인의 첫 번째는 송덕기 택견과 신한승 택견의 차이에서 부터 비롯된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내용은 신한승 선생이 정리한 내용을 실은 것이지 송덕기 선생의 택견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기본적 차이의 예로 '결련택견'의 해석을 들 수 있다. 송덕기 택견을 계승한 입장에서는 결련택견을 마을별로 편을 갈라 하던 시합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지만, 신한승 택견의 입장에서는 활수보다는 살수(殺手), 즉 공격 위주의 택견으로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속칭 쌈택견이 결련택견을 의미한다고 본다. 송덕기 택견에서는 그냥 옛법이라고 불리는 단위 기술들을 결련택견이라고 별도의 택견이 있는 것처럼 개념을 규정한 신한승 택견의 입장은 현재 택견의 정체성 정립에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신한승 선생은 경기 위주의 택견을 서기택견이라고 한다. 사실 기술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다. 단지 이처럼 택견의 정체성 문제, 택견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보니 같은 기술이라도 쓰는 용도와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이런 점은 상호 조직간에 논쟁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내용을 택견의 원형이라고 보는 입장과, 송덕기 선생의 기술을 택견의 원형이라고 보는 입장의 차이가 빚어내는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문화재 택견에 대한 재심 청구와 송덕기 선생의 결련택견을 문화재로 등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행정과 법정 소송문제로 비약되기 했다. 말 그대로 무형인 것을 정형화해서 문화재로 등록시켜 놓고는 그 등록된 내용을 고정 불변의 원형으로 여기며 현실에 맞게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내용을 가지고 원형의 훼손이라고 하는 우리의 문화 풍토는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더구나 목적에 따라서 항상 가장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며 변화 발전하는 무예의 기술내용에 있어서야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최근의 갈등은 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 복수 지정을 둘러 싼 문제이다. 작년에 문화재 보호법이 바뀌어 복수 지정이 허용되자 충주의 한국전통택견회에서는 박만엽 전수총관장을 추가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현 예능보유자는 이를 우려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한택견협회 이용복 부회장은 서울 지방에 행해졌던 1910년 대 결련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하고 자신을 결련택견 예능보유자로 지정해야 한다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250여 개 전수관과 90여 개의 대학 동아리에서 택견을 지도하고 20여만 명이 넘는 사람이 택견을 수련하고 있는 이 때에 택견계 최고 지도자들이 모두 예능보유자기 되려고 하는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 질 수 밖에 없다.
7. 내일의 택견을 위한 제언
이제 20년 택견의 성과와 문제점을 딛고 21세기 내일의 택견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왔다. 우리 민족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의 전통 무예인 택견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지키고 가꾸어서 후대에 전하는 것은 오늘날 택견인의 사명이자 보람일 것이다.
이러한 일을 바르게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몇가지 반성이 우선 되어야 한다. 현재 택견계에서 가장 먼저 고쳐야 할 것은 나의 조직과 내가 하는 택견은 옳고 남의 택견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각 단체에서는 그러한 편협한 생각을 주입하고 이데올로기화 시키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택견의 역사를 보면 택견이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전승 되어 왔는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그러한 신념을 주입 시키는 것은 조직의 확장에 따른 권력과 상업적 이득을 확보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택견계에 무엇보다도 또 하나 시급한 일은 택견이 과연 무엇인지? 택견의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아내는 일이다. 택견의 모태가 충주인지, 서울인지, 송덕기 택견이 원형인지, 신한승 택견이 원형인지? 아니면 택견의 원형이란 개인이나 지역이 아닌 다른 그 무었에 있는 것인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솔직하고 명백한 답을 구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택견의 혼란은 계속될 것이며, 실제 기술 내용상 차이가 별로 없는데도 서로 자기 주장만 옳다고 계속 고집 한다면 택견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을 면키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지 않겠지만 그러한 객관적인 답을 구하려는 열린 자세가 택견계 지도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택견은 문화재 보호의 울타리를 넘어서도 전 국민의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모든 근대적 무예들이 현대에 와서는 모두 대중적 스포츠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원래부터 무예 놀이였던 택견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길이요, 그만큼 경쟁에서 앞서 갈 수 있는 유리한 경험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국민 대중의 체육으로 자리잡아가려면 이론과 실기의 정비와 통일이 시급하며 경기 규정의 통일 또한 빠른 시일 내에 재정비해야 할 것이다. 실제 모든 기술은 경기 규정에 다라서 유용한 것은 더욱 발전하고 무용한 기술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현재 각 단체마다 벌이고 있는 조직 확대를 위한 기존 전수관 흡수 경쟁이나 지도자 확대 양산에 대해서 모두 다시 되돌아 보아야 한다. 초기의 지도자 교육과정이 짧았던 것은 초기 확대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고 사후 보수 교육을 통해 보충했다고 보지만 이제는 그렇게 조급하게 양적확대를 해야 할 이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지도자를 배출하는 데 있어서는 세 단체가 공히 인정하는 지도자 과정을 밟도록 하여 일선에서 택견을 지도하는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도록 해야 하겠다.
이렇게 택견계 내부 정비와 발전을 위해 서로 열린 자세로 이론과 기술, 수련체계, 경기 내용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것이야 말로 택견계의 신한승 선생이 말씀하신 참정신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용복 선생이 주장한 상생공영 정신에도 맞을 것 같으며, 이로 하여 택견계가 하나로 동화된다면 도기현선생의 자연동화사상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