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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홍순칠의 독도경비사 왜곡 실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은 가짜 몇 명 밝혀내는 문제가 아닙니다.
홍순칠과 국가보훈처에 의해 왜곡된 1950년대 대한민국 독도경비사와 이에 따라 추락된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결과의 일부일 뿐입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생존대원은 1960년대부터 진실규명을 주장했습니다.
독도수호대는 2000년부터 독도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조사연구를 했고 진실을 밝히는 정부기록물을 발굴해냈습니다.
박영희, 유원식 등이 수비대로서 공적사실이 없다고 밝힌 경상북도 경찰국의 조사보고서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에는 감사원으로부터 33인에 대한 공적재조사 결정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국민과 언론의 무관심으로 진실규명활동이 반민족 행위로 매도를 당하고 진실규명을 부정하는 자들로부터 ‘매국노’ ‘친일파’ ‘일본의 내빈’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독도수호대에게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반국가단체라는 누명을 씌워 3월 1일부터 독립기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우리 땅 독도수호 특별전’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독도는 한국 땅’을 외치는 단체가 반국가단체라면 ‘독도’ ‘독도의용수비대’를 홈페이지의 금지어로 등록했던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의 행정기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진실규명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분들은 생존대원들입니다.
생존대원들은 3년 8개월이라는 공적활동기간을 부정하고 8개월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브로커를 동원하고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혜택을 받기 위해 양자로 입적하는 세태에서 생존대원의 주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병신들이 할 일이 없어서 독도에 미역 따 먹으로 갔다’는 비난을 평생 들으며 살아야 했던 생존대원의 평생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 사무소 개소식을 듣고 급히 작성하느라 출처나 근거자료를 첨부하지 못했습니다.
5항 독도수호대의 주장은 입증한 모든 자료는 준비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제공할 의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독도경비사 재정립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원 바랍니다.
1. 국가보훈처의 정의에 따른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하락
영토문제에서 주권국의 실효적 지배조치는 국제법적으로 주권국임을 인정받는 핵심요소이다.
그러나 홍순칠은 대한민국 정부의 독도수호 활동을 왜곡하여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조치가 아닌 일개 개인의 공적으로 둔갑시켰다.
국가보훈처는 공적확인도 없이 홍순칠의 주장을 근거로 33명에게 서훈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 공적논란은 독도의용수비대원의 진위문제가 아니라 1950년대 대한민국 독도경비사를 바로 잡는 일이다.
2. 진실규명 요구 단체
1)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 독도의용수비대유족회
한국전쟁에 참전 후 1954년부터 독도에 상주하며 독도경비에 임했던 생존 대원과 유족의 모임, 독도수호대와 함께 진실규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
2) 독도수호동지회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전후 울릉경찰서에 근무했던 전직 경찰관의 모임으로 홍순칠에 의해 왜곡된 울릉경찰서의 독도경비 활동을 바로 잡기 위해 결성.
독도의용수비대에게 무기와 식량을 보급 하였으며, 영토표석 및 경비초사 를 건립하였다. 1955년 1월부터 특채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과 함께 독도 경비대원으로 독도경비를 전담하였다.
3) 독도수호대
2000년 3월 1일 출범하였으며 1950년대 독도경비사를 연구 하고 있다.
1978년 경상북도경찰국 조사보고서를 발굴하였고, 2007년 감사원으로부 터 ‘국가보훈처의 서훈과정이 불법이므로 공적을 재조사야 해야 한다’는 결정을 이끌어 냈다. 2005년부터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 유족회와 함께
진실규명 활동을 하고 있다.
3. 진실규명을 거부하는 단체
1) 독도의용수비대가족협의회
독도의용수비대지원법 제정 이후인 2005년 9월에 설립된 단체로 공적논란 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회장 유모씨(현직경찰)는 독도수호대의 진실규명을 방해 하기 위해 김점구 대표를 음해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였고 명예훼손 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박영희는 출범당시 고문에 임명되었다.
2) 독도의병대
33명 모두 독도의용수비대 대원이라며 진실규명활동을 방해하고 있으며, 독도수호대를 친일단체로 비난하고 독도의용수비대동지회에 대해서는 ‘배 반자’ ‘오합지졸’이라고 적은 글을 작성하여 인터넷에 유포하고 있다.
3) 동북아역사재단
독도경비사 왜곡의 장본인인 홍순칠의 주장을 근거로 독도경비사를 알리고 있다. 홍순칠의 조카인 홍성근은 독도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중이며 경찰청 인사기록, 국방부 병적기록, 외무부 비밀문서 등 국가기록을 ‘국가기 록이라고 다 옳은게 아니다’라며 홍순칠의 역사왜곡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 가 기록을 모두 부정하기도 하였다.
4) 경찰청, 국가보훈처,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박물관 등
1966년의 불법적인 서훈 결과만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독도의 국제법 지위 하락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경찰청은 독도경비의 전담기관으로 경찰청이 작성한 조사보고서와 인사기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4. 국가보훈처의 독도의용수비대 정의
1) 기간 및 인원 :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33명이 활동”
2) 창설 : 홍순칠의 주도로 결성
3) 주요 활동 : 1953년 7월, 헤쿠라호 사건
- 1954년 8월, 독도영토 표석 및 경비초사 건립
- 1955년 11월, 해상보안청 소속 경비함 총격으로 격퇴
-1956년 12월, 33명의 대원과 무기를 국립경찰에 인수인계
4) 무기, 식량 조달 : 독도미역 채취 수익금으로 무기와 식량 구입
5) 근거 : 홍순칠의 수기와 청원서
5. 독도수호대의 주장
○ 기간 : 1954년 5월부터 12월까지 약 8개월동안 활동
○ 인원 : 독도상주근무자는 전투대원 17명 이었으며, 교육대와 후방지원대는 존재하지 않음
○ 독도의용수비대 결성
- 1954년 4월 25일, 울릉군민 궐기대회에서 독도자위대 결성 결의
- 1956년 5월 3일, 백두진 총리가 내무부에 적극적인 지원 지시
- 1954년 5월, 울릉경찰서이 무기 지급, 울릉군청이 구휼미로 식량지원
(당시 신문기사, 독도의용수비대 생존대원과 전직 독도경비대원의 증언)
○ 1954년 12월 독도의용수비대 해체
- 1954년 12월 31일자로 서기종, 하자진, 김영복, 정원도 등 9명이 독 도경비를 위해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채됨(울릉경찰서 인사기록)
- 홍순칠은 경찰관 특채를 거부하였고 1955년부터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독도미역채취 사업 총괄
○ 미역채취권
홍순칠은 미역수익금으로 무기 및 식량을 구입하였다고 수기에 적고 있 으나 허위임, 1955년부터 시작된 미역채취는 재향군인회 차원에서 진행 되었고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가 독도경비를 전담했으므로 미역수익금으 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고 의용수비대와 관련이 없음
홍순칠은 미역채취수익금을 횡령하여 재향군인회 회원들로부터 횡령죄로 고소된 바 있음
○ 1953년 독도 첫 입도는 불가능
홍순칠이 1953년 4월부터 독도에 상주했다는 이규현, 서기종, 김영복, 최부업 등은 한국전쟁에 참전중(병무청 병적기록)이었으므로 1953년 4월 입도설은 성립되지 않음
○ 1953년 7월 헤쿠라호 사건
울릉경찰서 독도순라반의 공적활동임(외교부 발행 독도문제개론)
○ 1954년 8월, 영토표석 및 경비초사 건립
영토표석 건립은 1953년 외무부의 결정이었으며 내무부→경상북도 경찰 국.내무국→울릉경찰서, 울릉군청의 행정절차에 따라 최종적으로 울릉경찰
서에서 건립하였음(영토표석 건립관련 국가기록 문서철)
○ 경상북도경찰국의 1978년도 울릉도 현지조사 보고서
- 1977년 12월 24일 홍순칠이 33명에 대한 서훈을 청원 하였고 경상북도 경찰국이 울릉도를 현지조사를 하여 작성된 보고서
- 내용
수비대로서 활약사실이 없는 자-박영희,유원식,김병렬,한상용,정재득 등
홍순칠의 청원 이유 - 자기의 처 박영희(여)가 포함되어 있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의 대원이나 주민들은 자기 처를 훈장 받게할 목적으로제출한 것이라고 한결 같이 비난...”
○ 홍순칠의 처 박영희의 주장과 반론
- 박영희 : 대원들이 독도에서 돌아오면 군복을 세탁하고 수선하였고, 군 복이 비싸 옷감을 구해 군복을 만들어 보급했다.
- 생존대원들의 반론 : ‘제대하며 지급받은 군복을 입고 근무했고, 참전용사들에게 군복수선은 당연한 일이었다. 울릉도에 도착하면 바로 집에 가서 여장을 풀었고 군복을 모아서 새색시인 박영희에게 줄 이유도 없었다
○ 교육대, 후방지원대는 가공의 조직
- 생존대원의 증언 : 한국전 참전군인으로 별도의 군사훈련은 필요 없었고 울릉군과 경찰서에서 무기와 식량을 보급했다.
교육대와 후방지원 대가 있을 이유가 없다.
- 교육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훈련장소, 훈련내용 등이 밝혀져야 하지 만 교육대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 후방지원대가 존재하기 위해서 실제로 했던 보급 활동에 대해 밝혀야 하지만 교육대와 같이 보급내역에 대해서 밝히지 못하고 있다.
- 공적논란들은 진실규명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만약 본인들의 공적에 논란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할 필요가 있다.
6. 홍순칠이 수기에서 밝힌 감옥살이 5번
홍순칠은 수기에서 감옥살이 5번이라고 밝혔다. 미역채취와 관련해서는 일부 언급되었고 나머지 4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독도수호대는 수년간의 조사결과 5건의 실체를 확인했고 관련증언자를 모두 만났다.
일부 사건은 독도의용수비대 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홍순칠이 활동기간을 3년 8개월로 연장하고 33명의 대원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현재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홍순칠에 의해 왜곡된 대한민국 독도경비사와 독도의용수비대의 진실을 밝힐 예정이다.
- 이상
첫댓글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세월이 가면 ~~ 조사하면 다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