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치료에 참여한 4‧3생존자 김OO(80세, 2015년 현재)은 제주 화북리 출생으로 14세 되던 해에 4‧3이 발발하였다. 오빠가 산으로 잡혀간 계기가 가족의 희생으로 이어져 총 9명이 희생되었다(작은아버지, 아버지, 언니, 올케와 태아 등 5명이 목숨을 잃었고, 오빠와 조카 2명은 행방불명, 어머니는 손가락 마디가 절단되고, 턱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가 1983년에 작고).
죽음의 날 1949년 1월 8일, 이날은 김OO의 아버지가 화북초등학교에 먼저 잡혀간 후, 나머지 가족들도 동일한 장소로 잡혀갔다. 김OO이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 멀리서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버지는 심한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이 없었고, 두 눈동자는 얼굴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울면서 소리치자, 경찰은 김OO을 다른 교실로 이동시켰다. 그곳에는 마을 여자 어른들이 땅바닥에 무릎을 끓고 고개 숙이고 있었다.
이 교실에서 김OO은 유리창 너머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운동장 모퉁이에서 마을 어른 여러 명이 눈에 검은 천을 두르고 총살을 당하고 있었다. 이후 김OO은 자신이 살려면 화북초등학교를 벗어나야 함을 직감한다. 그 찰나,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교실 안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어 학교 정문에 세워져 있는 트럭에 타라고 명령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트럭들이 죽음의 현장으로 가는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김OO은 이 트럭에 타면 죽을 수 있음을 직감한다. 처음에 김OO는 군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트럭에 탔으나, 출발하기 직전 트럭에서 뛰어내려 달아난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그녀는 울다 지쳐 잠이 든다.
잠결에 ‘으응’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깨니, 온 몸은 피로 물들고 머리를 풀어 헤친 한 여인이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머니였다. 김OO은 얼른 어머니를 눕히고는 간호한다.
이 끔찍한 비극을 겪고도 김OO은 수십 년간 침묵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3에 대한 얘기를 어디 가서 들어보고 의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말할 수도 없었다.”고.
첫댓글 보아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못 읽을 책이겠구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