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릉은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축의 양 옆으로 수라방, 수복방 등이 대칭하여 배치되어 있다.
왕비 능침의 문석인은 왕릉과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짧은 상모(象毛)가 있다. 허리띠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무른 석재를 사용한 탓인지 다른 왕릉에 비해 풍화가 심하여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예종릉 앞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능의역사
예종은 1469년(예종 2) 11월 28일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호를 창릉이라고 하여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에는 안순왕후가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생몰년도 : 1450년 ~ 1469년
재위기간 : 1468년 ~ 1469년
생애이야기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 1월 1일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18세에 요절하였을 때, 의경세자의 아들인 원손 월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적통계승의 원칙에 맞는 것이었으나, 월산군은 불과 4세의 어린 아이였으므로 그 해 8세가 된 세조의 둘째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1457년(세조 3) 11월 15일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다. 성년이 되지 않아 모친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이 섭정하는 원상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각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세조 때 입안하였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였으나, 채 반포하지 못하고 1469년 11월 28일 20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정성왕후 서씨 홍릉
능호 : 홍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757년(영조 33)
능의구성
홍릉은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능지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두고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였다. 능 위의 석물도 훗날 자신의 능과 함께 조성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치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능은 정순왕후와 함께 동구릉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곳은 현재 빈 터로 석물만 쌍릉 양식으로 남아 있다.
홍릉은 병풍석이 없는 능침에 12칸의 난간석, 2쌍의 석양과 석호, 3면의 곡담, 4각의 장명등 옥개 등으로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숙종의 명릉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뒷면에는 문양이 촘촘히 넣어져 있는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의역사
정성왕후가 1757년(영조 33) 2월 15일 66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영조는 왕비의 시호를 정성, 능호를 홍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인 서오릉 지역에 명혈을 택하게 하였다. 우허제(右虛制)를 쓰게 하여 훗날 자신도 정성왕후의 옆을 지키려던 영조의 바람은 1776년(정조 1) 정조가 이 홍릉 자리를 버려두고 현재 영조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 내 원릉으로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생몰년도 : 1692년 ~ 1757년
생애이야기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는 1692년(숙종 18) 12월 7일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났으며, 1704년(숙종 30)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721년(경종 1) 왕위에 오른 연잉군의 형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왕후도 세제빈으로 봉해졌다.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1757년(영조 33) 2월 15일 소생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일화
영조는 정성왕후의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영조는 정성왕후 승하 2년 후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소녀였던 정순왕후를 다시 맞아들였으나, 한 평생을 함께 했던 정성왕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위의 행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인경왕후 김씨 익릉
능호 : 익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680년(숙종 6)
능의구성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르게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부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문석인은 조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무석인은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도깨비 문양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터져 있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물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능의역사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에 능호를 익릉이라 하여 조영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조영된 능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생몰년도 : 1661년 ~ 1680년
생애이야기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61년(현종 2) 9월 3일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1670년(현종 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이듬해 4월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조선 19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20세 때인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일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머지않아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후 당파 싸움과 맞물려 숙종을 둘러싼 궁중여인들의 암투가 구중궁궐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사씨남정기의 저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벼슬길에 오르다 남인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김만중이다. 관료이자 학자였던 그는 바로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에 『사씨남정기』이외에도 여러 편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일대기를 그린 『윤부인 행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는 인경왕후가 어렸던 시절, 친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그 행실을 반듯하게 가르친 덕에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이 어른 같아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추존왕 덕종 경릉
능호 : 경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457년(세조 3)
능의구성
경릉은 추존왕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영되었다.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는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능의역사
1457년(세조 3)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그 해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성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인 1472년(성종 3)에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숭하고 능호를 경릉이라 하였으며, 어머지 수빈을 왕비에 봉하고 인수왕대비라고 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 7)에는 묘호를 덕종이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에는 소혜왕후가 승하하여 경릉의 오른편 언덕에 안장하였다.
생몰년도 : 1438년 - 1457년
생애이야기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 7세 때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 1) 7월 26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1457년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일화
추존왕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하였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곤 하였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9대 숙종 명릉
능호 : 명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701년(숙종 27)
능의구성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능의역사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1701년(숙종 27) 승하하자 숙종은 능호를 명릉이라 하여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영하였다. 조영 당시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라는 우허제(右虛制)를 전교하였다. 1720년(숙종 46)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숙종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인현왕후의 오른쪽 빈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승하 후 두 번째 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생몰년도 : 1661년 ~ 1720년
재위기간 : 1674년 ~ 1720년
생애이야기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년(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일화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순회세자 순창원
능호 : 순창원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563년(명종 18)
능의구성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이다. 세자의 묘로 조영하였으므로 봉분에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물이 작고 간단하다.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가 번갈아 배치되어 있고, 봉분의 양 옆으로는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이 자리 잡고 있다.
능의역사
1563년(명종 18) 13세의 어린 나이에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순창원을 조영하였다. 그로부터 29년 후인 1592년(선조 25) 세자빈 공회빈이 세상을 떠나 순창원에 합장하였다.
생몰년도 : 1551년 ~ 1563년
생애이야기
순회세자는 13대 명종의 원자로 1551년(명종 6) 태어나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명종 14)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손자 하성군(훗날 선조)이 대통을 이었다.
영빈 이씨 수경원
능호 : 수경원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764년(영조 40)
능의구성
수경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후궁묘의 예로 조영하여 석물들이 단촐하게 꾸며졌다.
능의역사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1764년(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년 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생몰년도 : ? ~ 1764년
생애이야기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부터 궁녀생활을 하다 귀인이 되었으며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고,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4명의 옹주와 후일 사도세자가 되는 원자를 출산하고 그 밑으로 옹주 하나를 더 낳았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되는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망했을 때 영조는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 지냈으며, 이듬해 의열(義烈)의 시호를 내릴 때는 그 의식을 친히 집행하였다. 시호 의열과 함께 같은 이름의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나, 1788년(정조 12) 선희궁으로 고쳤고, 1870년(고종 7) 한때 육상궁(毓祥宮)에 합했다가 1900년에 다시 독립시켰다.
일화
화현재 서울시 서대문구의 봉원사 입구에는 본래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이 위치해 있던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보통 '버리고개' 또는 '벌고개'라 부른다. 영조는 각별히 총애했던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애통해 하며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수경원을 조영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수경원의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능선을 사람들이 넘어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 하여 통행을 금지시켰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라 했다.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가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