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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사실 별로없다...
몇가지 기억들 이외에는...
나는 사실 어릴적 또래의 아이들에 비하여 체격이 좋았었다.
아니 체격보다는 키가 조금 더 컸었다.
지금 고향집이 나의 어린시절집이다.
모두가 그대로인데 달라진것이 있다면 집 울타리와 지금은 밭에 창고와
하우스가 들어섰다는 것과 아버지 차 3대 트랙터등 어렸을때는 보도못했던
농기구들이 가득하는 것...
우리집 위의 밭 담장(어린시절에는 담옥이라 불렀음)에는 여름마다 호박이 주렁주렁
열렸었다...여름날 마당에 돋자리를 펴고 호박속을 파먹곤 했었다.
우리들은(길종, 달종, 기원, 가끔가다 승규등) 그 돌담장아래에서 비석치기, 딱지(빠찌?,빧지)
놀이를 했었다...
아마도 귀하게 커서 그런지(웃지들마다...나의 사촌 남명진과는 생일이 얼마 차이가 나지않는 동갑내기인데, 고모가 우리집에 다니러와서 명진이가 나에게 오면 할아버지는 나를
계란처럼 키운다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단다. 그러면 고모는 섭섭한 듯 "우리 명진이도
귀하게 키우는데..."라고 하셨단다) 고집불통이었다네요...글쎄...ㅎㅎㅎ
한가지는 기억난다. 나는 그때 작은아버지를 따라서 기연이형네 집으로 밥을 먹으로 갔다.
삼촌 친구들께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삼촌은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 해 주셨다고 한다.
그때 기연이형(지금 원주에 살고있다...삼양식품인가 다닌다고 그러시는데, 시골에서 만나면 놀러오라고 그러시더니만 막상 전화하니...아직 나두 원주산지가 7년이 되도록 한 번도 못만났다...나두 소주 한잔 정도는 살 수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역시 또 모르지만 태규의 울음보가 터졌다...무시무시한 울음보가...ㅎㅎㅎ
하도 울어 작은아버지가 어깨에 나를 들쳐메고 집으로 오실때 나는 삼촌을 때리고 꼬집고...하여튼 못말리는 애기였나보다.
하마터면 중요한 이야기를 잊고 그냥 지나칠뻔 했네...휴
지금 나의 턱에있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다.
어렸을적 식수는 우리집과 길종이네 집 사이에 있는 우물이 식수였다,,,
한 여름에 물을 길어 수박도 담가먹고 등목도 하곤했었다...
여름의 갈수기에는 장난하느라 우물속에까지도 들어간적도 있었다...
이끼도 많았었는데 죽으려고 환장했지...ㅎㅎㅎ
시방 생각하면 아찔하다...
어릴적 겨울이면 우리집주위의 모든집들이 물을 길러왔다.
겨울에는 기다렸다가 물을 기어야 하는건 말할 필요도없고...우물 옆에 넓은 돌이
하나 있었는데 정민이 누나가 쉬를 하다가 길종이 어머니에게 혼이 난 사건도
있었다...본론으로 들어가면 그 넓은 돌 반대편에 어른 혼자서는 들지도 못할 정도의
바위가 하나 있었다. 어릴적에는 그렇게 커 보이더니만 지금은 나 혼자서도 들을수
있을것도 같다. 사건은 바로 그 바위에서 일어났다...
우리집에 놀러왔던 길종이가 무언지모를 나의 물건을 들고 자기네 집으로 도망을 갔다.
이에 울면서 쫒아가던나는 넘어지면서 턱을 그 바위에 찧었고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선명히 남아있다. 지금 이정도로 남아 있으니 어렸을 적에는 죽지 않았으니 다행히었을 거다.
국민학교 들어가지전의 기억은 드 담장아래에서 놀던것과 임계 시장에서
어떤 아저씨를 따라서 고단쪽으로 가고 있는데 엄마가 마구 달려오셔서 나를 데리고
오셨던 기억정도...
국민학교 시절은 나의 화려한 시절이었다...
지금보면 그 조금만 교사와 운동장이 그 시절엔 어찌나 넓고 컸던지...
약 100여명정도가 되는 학생들이 운동회를 하고 놀이도하고...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초등학교 입학후 처음 기억나는 건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하나 둘"하면 아이들은 "셋 넷"을 외쳤었다...
그시절에도 나는 그것이 너무 쑥스럽고 하기 싫었다...
우리반은 20명이 안되었던것 같다...
처음엔 금권이, 연호,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었느데...
남자 일곱에 여자애들이 열몇명이었다...
나의 짝은 얼마다니지 않고 전학을 가버렸지만 난숙이라는 소나기에 나오는
그런 예쁜 소녀였다...ㅎㅎㅎ...그냥 예뻤었던거 같다...
어쩌면 난숙이랑은 거리에서나 대학교에서 만났거나 스쳤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학교를 같이 다녔을 가능성이 엄청많았다.
한 95퍼센트 정도는...아쉽다...내가 생각하는 첫사랑이었는데...
처음으로 여자라는 감정이 들었던 아이였다...쑥스럽네...ㅎㅎㅎ
난 그시절에도 반항아였다. 아마도~~~반항아는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했을때
아니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하지 않았었다...
국민학교 1학년 어느날(이때 담임선생님 성함은 전국진~~~훗날 이 선생님의 딸을
좋아한적이 있었음. 중학교 3학년때~~이름은 원상예...ㅎㅎㅎ...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너무 웃기네...상예 이야기는 담으로 미루겠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난 선생님께 매를 맞았다. 그때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맞을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잘 기억은 나지않지만...
매를 맞고 자리로 들어가는데 선생님이 다시 부르셔서 다시 나가서 맞았다.
이유는 인사를 하지않고 그냥 자리로 들어간다는 이유로...그러기를 수 차례...
지금 기억으로는 끝까지 인사를 하지 않은걸로 기억된다...
1학년 어린이날 기념 운동회때의 일이었다.
가을운동회처럼 크진 않고 소운동회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연히 상품도 별로 없었고 구경오는 주민들도 거의 없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뛴다.
다름이 아니고 그날은 소운동회 연습날이었다...
본인이 1학년 대표로 계주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저학년은 여학생이 반바퀴를 뛰면
나머지 반바퀴를 남학생이 뛰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우리팀 여자선수는 아마도 은숙이었던것 같다.
열심히 뛰어와서 나에게 바통을 넘겨줬는데....아뿔싸, 글쎄 본인이 바통을 받고
그대로 뛰어야하는데 거꾸로 다시 여학생이 뛰어온 길을 다시 뛰었다.
선생님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어찌나 웃던지...ㅠㅠㅠ
그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리는거 같다.(어디 쥐구멍없나???ㅎㅎㅎ)
그 이야기를 은하엄마에게 했더니 죽겠다고 웃었다...지금이야 추억이니까 이렇게
웃고있지...휴...그때는 정말 창피했었다.
1학년때 아마도 난 엄마에게도 처음으로 섭섭한 소리를 한 것 같다.
난로를 피울때였으니까 겨울이었으리라...엄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난 학교에 가면서(기원이네 집앞의 화장실을 지나치면서...지금은 사람이 많이 왕래하지
않지만 그때만해도 그길이 학교다니는 지름길이요...우리의 놀이터였다) 엄마에게
"잘먹고 잘 살아라"하고 마구 도망을 갔던 기억이 난다...그날 수업시간에 어머니가
나무 한아름을 가지고 학교에 오셨으니까 아마도 나무에 관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기억은 그때만해도 반공 웅변대회를 많이 했었다.
교무실 옆의 6학년 교실(5학년이 2층을 사용했음, 2층은 하나의 반과 옥상이었음)에서
했었는데...나름대로 연습도 많이 했었다. 같이 했던 여자애는 잘 했었는데(이름이 미숙인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그 여자아이가 2학년때 나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열심히
해도 좀체로 이기지를 못했었는데...다행히도 2학년때 전학을 갔다...ㅎㅎㅎ...아마 전학을
가지 않았으면 태규는 만년 2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나는 온몸에 힘이
풀리고 열이나면서 얼굴을 들수도 없을 정도가 되어 읽는것도 겨우하고 내려왓다...
그래도 상품은 받았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씻을 수 없는 서글픈 날이었다.
그날도 날씨가 조금 추웠던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들은 추수가 끝난 들녁에서 낟가리 사이에 들어가서 놀곤했었다.
집위에있는 밭옆에 나무를 쌓아놓고 그 앞쪽으로 옥수수 낟가리를 만들어 놓았었다.
기수형과 순화 그리고 본인 이렇게 세명이서 낟가리에 들어가 불장난을 하면서
놀았다...놀이를 마치고 본인은 방에들어가 잠을자고 있는데...할머니께서 나를 마구
때리시면서 잠을 깨우는게 아닌가? 나 참 이런일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사연을 알고보니 맞을짓을 했기때문에 매를 맞은것이다.
내가 잠든사이 우리가 불장난을 했던 그 자리에서 불이 난 것이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불을끄고 난리법썩을 떨었는데도 나는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으니...참 어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말할수 있다. 그날의 화재는
분명히 나 혼자의 실수가 아님을~~~
기수형과 순화는 나에게 말을 했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불이 붙은걸 알려주지
않은것이다. 물론 자기네들도 불을 끌 생각도 하지않았을테고...
이건 추측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수형과 순화가 불을 놓았을수도 있다.
하여튼 그 생각을하면 지금도 엄청시리 밉다...
2학년때 담임선생님은 교감선생님은 마(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음)선생님이었다.
딸이 관사에 둘인가 있었던것 같은데...많이 귀여웠던것 같다.
이상하게도 2학년의 기억은 별로 나지가 않는다.
한 번은 선생님 심부름으로 4학년 교실에 간적이 있었는데 글쎄 그 칠판에는 수학에 관한
것이 가득적혀 있었다. 어린마음에 정말 질렸다...아마도 아직까지 수학을 잘 못하는
이유가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껄껄껄
국민학교 시절에는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녔었다.
중학교때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고등학교 들어가기전까지는 교회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험보러 간다고 교회에서 선물도 받았었다.
아마 수학담당이시던 김용우(?)선생님이시던가 함자가 생각이 잘 안나지만
임계감리교회에 같이 다니셨다.
어릴적 교회는 다른곳에서는 맛볼수없는 특별한곳이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과자의 유혹때문에 다니기도 하였고...
처음으로 오락을 접한곳도 바로 교회고...
한번은 낙천 미락교회에 간적이 있었는데 교회옆의 다리가 그리고 크고 넓게 느껴졌었다.
그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며 신기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중학교에 들어가니 소풍의
대부분을 거기에있는 숲으로 가는것아닌가...불과 몇년 사이지만 중학생의 눈으로 본 그 다리는
작고 보잘것없는 그런 다리였다...
성인이 될수록 어릴적 모든것이 작아보이고 볼품없이 보이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들이다.
국민학교 시절에서 절대 뺄수없는 한가지...바로 축구시합이다.
몇학년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않는다...돌아가신 임계 외삼촌께서 축구공을 사가지고 오셨다.
당시 우리동네에서 축구공을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진짜 축구공...
학교에 있는것을 제외하면 비닐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몇 있었지만
축구공은 나밖에 없었다...
꽤 많은 시간들을 행복하게 지낼수있었다...ㅋㅋㅋ
홍수가 있고난후에 용소밑의 강에는 웃기지만 천연 잔디구장이 생겨나곤 했었다.
우리들은 거기에서 축구를 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용득이형등을 따라 골지리로 축구시합을 하러 가기도했다.
돼지 저금통을 털어 걸어서 가다가 건빵을 사먹고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경운기를타고 가다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시합을한건 중학교 들어가서인것같다...
그때는 비교적 사람들이 않았었다...
용산, 설레, 낙천팀으로 구성된것으로 기억된다.
약간의 돈을 걸기도 했었는데 얼마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골지리도 시합을하러 갔었다.
골지리 형들의 편파적인 심판으로인해 지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긴 경기를 했었다.
모두 막걸리를 먹을때 히준이형은 다른 사람들 몰래 라면을 끓여주었었는데...ㅋㅋㅋ
참고로 히준이형과는 처남 매부 사이가 될수도 있었는데...
요 몇년동안 계속 느낀거지만 요즈음 시골에는 과일이 모두 그냥 떨어져서 썩는다.
물론 휴가때 집에가면 모두 내차지지만 우리 어렸을적에는 정말 없어서 못먹었다.
깨(고야라고 하던가), 자두, 살구 기타등등 하여튼 없어서 목먹었다...
더운 여름날이면 우리는 자두나 고야등을 가지고 강으로 나갔었다.
거의 강에서 살았다...
강에 도착하면 가지고간 자두를 아랫용소에 던진다...참고로 웃용소는 물이깊어 우리는
갈 수가 없었다...나이가 들어서 웃용소에 처음 건너갔을때 엄청스리 행복했었다.
옷을 벗자마자 물로 뛰어들어가서는 자두를 찾는다...그립다.
실컷놀고는 그 자두를 먹는 맛이란...
이세상 그 어떤것도 그것보다 맛있지는 않으리라...
물놀이를 하다가 나오면 모래에서 검정고무신을 꺽어 자동차를 만들어 모래놀이를
하곤했다. 댐도막고 길도만들고...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제방이 쌓여 있는것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제방과 아카시아 나무들이 제방을 대신했었다.
물론 그 아카시아 밭은 우리의 소중한 놀이터였고...
아마도 그 아카시아 밭에서 앞집 순화랑 뽀뽀 안해본 놈은 한놈도 없을것이다...
참고로 나는 길종이가 순화랑 뽀뽀하는걸 직접보았다...ㅎㅎㅎ
또, 가끔은 감자를 캐다가 감자찜을 해먹었다...
아궁이 처럼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얇은 돌을 얹고 흙을깔고 감자를 위에 얹고 아카시아
잎으로 덮고 진흙을 바르고 모래를 덮고 불을피워 감자가 익을때까지 기다린다...
정말 맛있는 감자의 맛...감자가 어떻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아참, 감자가 그때처럼
맛있었던 적이 한번더 있었다...군에 있을때 취사반에서 새끼감자를 가지고 내무반에서
주전자에 삶아먹을때 맛 또는 거기에 준했다...ㅎㅎㅎ
어렸을때는 동네 형들이 우리의 우상이었다...앞집 기수형, 무석이형, 용호형등...
특히 기수형은 우리랑 잘 놀아주었다.
아마도 그때 돈으로 200원정도 했던거같은데...꺽기총이라고 손잡이를 잡고 앞부분을
내렸다가 올리는 총이 있었는데.. 그걸 우리는 꺽기총이라고 불렀다. 분필을 넣고 쏘면
제법 아팠던 기억이난다.
근데 그총은 사실 불량품이 너무 많았다...꺽히는 부분이 금방 망가져서 어린 가슴들을
많이 아프게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기수형은 무슨 전문대를 다닌것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그 이후
십수년동안 형을 보지 못했었는데 2003년인가 농사를 짓는다고 내려오셨을때 형네 집에서
술을 한 잔 마셨다. 아무 추석이었던거 같은데... 형도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예전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속 갚은곳의 뜨거운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작년 휴가때 시골에 내려갔더니 울타리며 밭에 자두며 복숭아가 널려 있는데도 누구하나
시선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부모님은 너무 바쁘셔서 그렇지만 너무나도 아까웠다.
어릴적 우리들은 군것질거리가 없어서인지 과일이 제대로 익은후에 따먹은 기억이
별로없다. 과일나무가 많은집이 가장 부자집인것처럼 기억된다. 참고로 길종이네 뒤안에는
고야나무며 자두나무가 엄청 많았다. 종류별로...너무 부러웠다....
순화네 뒤안에는 복숭아나무(나무 아래서 정민이누나 가슴도 만졌었다...ㅋㅋㅋ)와 배나무,
승규네는 자두나무, 형용이네는 자두나무와 밤나무, 동희네 집은 사과나무, 용제형집은 사과나무,
동천이네는 밤나무등등
어릴적 용산에는 물고기가 너무나도 많았었다.
지금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던 기억이난다.
국민학교 다닐적에도 반도만 있으면 많이 잡았었으니까...
용소에는 윗용소와 아랫용소가 있다.
여름에 갈수기가되면 용소가 분리된다.
설레에서 펌프로 물을 농수로로 퍼가면서 물은 더욱 빨리 없어져서 아랫용소의 물이 순간적으로
더이상 갈러리로 흐르지 않는 현상이 가끔 발생했는데...고기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갖혀있을때
많은 고기를 순간적으로 잡곤했었다...
갈거리는 언제든지 가면 많은 고기를 잡을수있는 그런곳이었다...
형들따라 갔을때도 그렇고 어른들따라 갈때도 그랬고...지금은 모르지만 어릴적은 정말 많은
고기들이 있는 곳이었는데 사람들의 욕심때문에...ㅠㅠㅠ
예전에는 기호네 집밑으로 내려가면 강가에 차가 경운기가 다닐수 있는 길과 아카시아 나무들과
풀밭들이 있었다. 그 풀밭에서 낚시를 많이 하곤했었다.
집에서 파리를 잡아 낚시를 했었는데 특히 장마가 지나간후에 잘 잡혔다.
그 재미는 정말 잊을수가 없다.
수수깡으로 찌를 만들어서... 나는 아직도 여울낚시를 할때면 수수깡으로 찌를 만들어서 한다.
내 생각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찌는 없을것같다.
중학교때는 어항이 대세였다.
500원짜리 유리어항...너무 잘 깨지고 떠내려가는것이 흠이었지만 고기는 잘들어갔다.
건빵을 입에넣고 반죽하듯이 잘게 깨물어서 어항 주둥이에 붙여 물속에 넣어두면...
그것으로 끝이었다...건저 오기만하면 고기가 들어있으니...
그래도 우리동네 낚시 대장은 길종이와 명학이었다.
오죽하면 이들을 강태공이라고 불렀으랴?
길종이는 낚시에는 정말 타고났다고 말해야한다.
그렇게 여울낚시 잘하는 사람이 또 있으랴...오뎅을 제외하면...
참 중학교때 길종이네 집에가서 낚시대를 몰래 가져다가 낚시를 한적이있다.
지금 생각하면 길종이한테 참 미안하다.
낚시를 몰래 가져다가 낚시를 하고는 되돌려주려고 왔는데 길종이네 집에 사람이 있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외양간 건물뒤에 가져다 놨는데 그걸 또 영수란놈이 들고가서 낚시를 한것이다.
그녀석은 낚시를 한뒤에 낚시대를 제자리에 가져다 놨어야하는데...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길종이네 집은 동네애들의 놀이터 갔은 곳이었다.
참으로 많이 아이들이 모여서 놀곤했다.
근처의 모든 애들이 모여서 놀이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거기서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치기도하고...조금 커서는 텔레비젼도보고 짤짤이도 하고
조금 더 커서는 술도마시고 담배도피고...ㅋㅋㅋ
사랑방은 마음의 고향...이제는 다시 갈수없다.
길종이네가 집을 새로지어 이사를 하고 신년에 집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슬프다.
기억이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것이 이렇게 슬픈줄은 정말 몰랐다.
길종이네 사랑방, 밭옆의 커다란 대추나무, 뒤안의 자두나무, 그리고 우물, 우물옆의 전나무,
길옆의 담장들, 형용이네의 커다란 밤나무, 금재형님밭의 밤나무, 교장선생님댁의 무지큰
밤나무, 교장선생님댁(나중 숙녀네집)앞의 우물, 회관앞의 아카시아 나무들...모든것이 너무나도
그립다...꿈속에서라도 다시 돌아가 보고싶다.